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2012. 11. 23 - 11. 24 금계
1987년이던가. 들불처럼 번지던 교육민주화 바람을 타고 목포제일중학교에서도 교사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나는 회장을 맡았다가 교장한테 미운털이 박혀 88년 봄에 목포여중으로 강제로 쫓겨났다. 89년에는 교사협의회가 전교조로 바뀌고 나는 목포여중에서 해직 당했다.
제일중학교 뒷산 이름이 코끼리산이다. 87년 당시의 제일중학교 교사협의회 회원들이 주축을 이루어 만든 친목모임이 ‘코끼리떼’였다. 11월 23일 오후 다섯 시, 목포에서 15인승 렌터카를 타고 광주로 간 일행이 식사를 하려고 들어간 곳이 광주 시청 부근의 ‘오리떼’였다. ‘코끼리떼’ 모임이나 ‘오리떼’ 식당이나 항렬이 같은 ‘떼’자 돌림이라고 깔깔거리며 오리탕을 먹는 밥상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니까 제일중학교에서 교사협의회를 창립한 지 벌써 25년이 지났단 말인가. 감개가 무량했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회원 대부분 머리가 희끗거리고 벌써 몇몇은 퇴직을 했고 몇몇은 퇴직이 가까워졌다. 가장 젊은 박현송 선생이 어느덧 50대 중반이다.
그러고 보니 교사협의회 창립총회 사진에서 다들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 가운데 오로지 홀로 무사태평으로 웃고 있는 사람이 맨 왼쪽 박현송 선생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깨닫지 못했거나, 아니면 잘 알지만 당연한 역사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든든한 배포 때문일 터였다.
김대중 선생과 김영삼 선생이 표를 나눠 먹고 군사반란의 공동정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교육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놓으면 여러 가지로 탄압과 불이익을 받을 게 빤하므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표정이 굳어져야 마땅한 시절이었다.
추울 때 맺은 인연이 소중했다. ‘코끼리떼’는 추울 때 만난 사람들이었다. 소나무는 겨울이 되어야 그 푸르름이 소중히 여겨지는 법이었다. 지독히 추울 때 만났던 사람들이 쌀쌀한 초겨울에 푸른 솔 우거진 청송(靑松)을 향하여 1박2일 여행을 떠났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15인승 렌터카는 1종 면허 소지자만 운전할 수 있다. ‘코끼리떼’에서 1종 면허 소지자는 송태회 선생과 주영호 선생뿐이었다. 목포에서 광주까지는 송 선생이 운전하고, 광주에서 청송까지는 주 선생이 운전했다. 목포 광주는 한 시간 걸렸지만 광주 청송은 네 시간이나 걸렸다.
광주에서 대구까지는 88고속도로를 타고 갔다. 전두환 때 경상도 전라도 해묵은 감정을 해소한다고 싸구려로 급조한 88고속도로는 말만 고속도로이지 비좁은 편도1차선인 데다가 오르내리고 꼬부라지고 노면 상태도 울퉁불퉁 속도도 못 내고 승차감이 형편없어서 도로가 걸레쪼가리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인지 새로 굴을 뚫고 4차선 확장공사에 들어간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 헐레벌떡 우리가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 자연휴양림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 무렵이었다. 숲속의 집 너른 거실에 술상을 차리고 박광수 총무님이 목포에서 마련해온 민어회에 송 선생이 가져온 산삼주를 마실 무렵 텔레비전에서는 급작스러운 안철수의 대통령 후보 사퇴 소식을 접하고 정치평론가들이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우연히 시장에서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들은 후 사업을 걷어치우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후세 교육을 위하여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선생, 자기 병원 환자가 치료비를 못 내자 몰래 담 넘어 도망가라고 귀띔해준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자기가 번 돈을 자식들한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의 창시자 유일한 선생, 국적을 불문하고 난리통 아사리바탕에 뛰어들어 생명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한비야 선생, - 이 거룩한 계보의 마지막에 자리한 현대판 위인이 떼돈을 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을 위하여 컴퓨터 백신을 무료로 제공해온 안철수 씨다. 그 안철수 씨가 시대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후보에 나섰으나 정치판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정치판은 시궁창이나 다름없었다. 한번 발이 빠졌다하면 아무리 비누칠을 해도 악취가 천리에 진동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목포 김대중 선생이나 대통령 칭호에 걸맞은 구실을 했을까,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입맛이 씁쓸할 뿐이다. 이제 또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철, 술자리를 파하고 고스톱 판에 앉고 나서도 나는 들이당창 조직의 쓴맛을 보고 좌절한 안철수 씨 때문에 가슴이 저리고, 홍성담 씨의 그림처럼 출산할 때부터 색안경을 쓴 옥동자가 탄생하는 총통 주니어가 출현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새벽까지 고스톱을 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바깥 공기는 차지만 전기온돌로 방바닥이 뜨끈뜨끈해서 피로가 금세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일어나니 숲속의 집 바깥은 쌀쌀하면서도 공기가 그지없이 맑아서 기분이 상쾌했다.
매점에 미리 부탁해서 아침을 먹었다. 청국장은 옛날같이 야리끼리하고 오묘한 냄새가 없어서 덤덤했지만 밑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해서 먹을 만했다. 특히나 데쳤는지 볶았는지 취나물 맛이 일품이었다.
식당 밖 길 건너편 안내표지판에는 청송휴양림에 서식하는 곤충들 사진이 예쁘게 소개되어 있었다. 비단벌레, 애기뿔소똥구리, 꼬마잠자리, 왕은점표범나비, 왕꼬리부전나비 - 이름들도 어찌 그리 고울까.
스무 해가 넘을 동안 ‘코끼리떼’는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한 번씩 저녁에 만나 밥 먹고 당구 치고 놀다가 헤어졌다. 함께 차 타고 놀러가서 신선한 곳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밥 함께 먹고 커피 함께 마시고 웃고 수다를 떠는 일도 처음인 것 같다. 평생 동안 왜 일하는 날은 많고 노는 날은 적은 것일까. 일은 적게 하고 아까운 인생 실컷 즐기며 놀 수는 없는 일일까.
드디어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 앞의 절은 대전사, 뒤의 기기묘묘한 바위는 기암봉, 7천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긴 응회암 바위라는데 터키의 응회암과는 족보가 좀 다른 모양이다. 터키 카파도키아 응회암은 숟가락으로 파도 잘 파진다는데 여기 응회암은 숟가락이 들어가지 않아 보인다.
당나라 때 주왕이 권력다툼에 패해서 피신하여 온 곳이 주왕산이라는 전설이라던가. 토요일이라선지 등산객이 꽤 많았다. 너무 귀빠진 곳이어서 한국에서 태어나도 주왕산 구경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을 법한데 차량이 많은 요즘에야 아무리 궁벽한 곳이라도 좋다면 사람이 몰리게 되어 있다. 넓은 산책로도 마음에 들고 시냇물 조용히 흘러내리는 계곡도 아름답고 굽이굽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는 능선과 우뚝한 바위들과 헐벗은 나무들이 참 보기 좋았다.
뒤쪽 날카로운 바위가 물을 길어 올렸다는 급수대, 오른쪽 맨 위 바위가 시루봉, 주왕산 제1폭포의 물은 수량이 적지만 선녀들이 금방 비키니 입고 목욕하다 올라간 듯 맑고 고혹적인 빛깔이다.
주왕산처럼 물빛이 곱고 바위가 다양하고 산세가 아늑하면서 그윽하고 오묘한 곳도 국내에서는 많지 않을 듯하다. 굽이굽이 모롱이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절경에 탄성이 절로 터졌다. 여기를 못 와보고 죽은 사람은 조금 억울할 듯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간디. 내려오는 길에 엊저녁 고스톱 장원한 내가 한 턱 쏘았다. 어묵국물, 파전에 동동주.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이 주산지 (注山池). 인공 호수라는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찍은 곳으로 유명하단다. 난해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가운데 그래도 가장 알아먹기 쉽고 볼 만한 영화가 바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다. 영화 촬영 때 물 위에 지은 떠다니는 암자는 이제 철거하고 없단다. 차라리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더 볼 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수량이 풍부한 여름 가을에 오면 왼쪽 사진처럼 경치가 아름답다는데 이번에는 물이 쏙 빠져 볼품없게 되었다고 주영호 선생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달기약수! 톡 쏘는 탄산수에 철분이 많이 든 물, 생전 처음 먹어본 물맛. 안 마셔본 사람은 말을 말더라고. 약수터 부근 식당에서 떡닭갈비와 닭백숙. 모두 약수로 조리를 해서 고기의 비린 맛을 잡아준단다. 먹는 사람으로서야 그게 그것이었지만. 약수터 언저리의 식당이 스물 서른도 넘을 성싶었다. 관광객들이 많기는 많은가 보다.
송소고택. 99칸이라나. 지금 같으면 재벌들 저택이지 하루 세 끼 해결하기도 어려운 민초들로서는 어찌 꿈이나 꾸어볼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옛날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과 체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지 뒤란에 시래기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예전에는 쌀이 부족하면 시래기를 섞어 죽을 쑤어서 식구대로 훌훌 배를 채웠는데 이제는 버젓이 건강식품의 반열에 올랐으니 격세지감을 금하기 어렵다.
막걸리 막걸리 우리나라 술, 고무신 고무신 우리나라 신, 이제는 아무도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예전에는 흰 고무신도 비싸서 검정고무신 신고 다니다가 그마저 갈라지면 실로 꿰매서 신었는데 지금은 누구도 고무신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설리 설리 고무신 신고 다니던 때가 오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청송의 서쪽은 안동이요, 청송의 동쪽은 영덕이요, 청송의 동남쪽은 포항이다. 우리는 포항 쪽으로 차를 몰았다.
15인승 렌터카에서 편한 자리는 운전석 옆자리뿐이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편한 자리를 내가 독차지하고 타고 다녀서 회원들한테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영천에선가 거창에선가 휴게소 우동으로 저녁을 때웠다. 어느덧 밤이었다. 오랜만에 ‘코끼리떼’의 거창한 여행이 막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목포를 향하여 달리는 차 안에서 음담패설이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朝鮮人入 日本人出(조선사람 들어오고 일본사람 나가라). [끝]
첫댓글 고무신 고무신 우리나라 신신신..!!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부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 세상 자유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저어 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마라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마라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이 민중의 가요를 들을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목메이며,
두손이 불끈 지어 지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