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순례의 길
바울의 여정을 찾는 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드니 자괴감이 듭니다. 지식의 부족함 만이 아니라 지혜의 얕음을 느끼게 되는군요. 인간이 어려움을 견디면서 괴로운 고행의 길에 나서고 자신의 신념을, 그것이 스스로 사명감이든 하느님의 부름이든, 설파하려는 사도 바울의 굳은 의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만 글을 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부터 합니다. 터키라면 양고기와 케밥이죠. 몽골이나 중동 등 다른 유목지역도 양고기가 주식일 겁니다. 이들에게 양은 man’s best food일 뿐만 아니라 man’s best friend이기도 할 겁니다. 물론 개만큼 인간과의 교감이 깊지는 않겠지요. 소는 너무 크고 또 돼지고기는 종교적인 이유로 먹지 못하니 양고기가 제격이지요. 나는 유학 시절 런던 길가에서 종이에 싸서 파는 케밥의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길에서 양고기를 한 번도 먹지 못했습니다. 양고기는 냄새가 난다는 편견으로 가이드 목사님이 메뉴판에서 아예 빼버렸다고 하더군요. 몹시 아쉬웠습니다.
냄새가 나는 양고기는 늙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젖을 오랫동안 짜고 늙다리가 된 뒤에 잡으면 맛도 없고 냄새가 나지요. 쇠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소로 오래 부려 먹은 늙은 소를 잡으면 고기가 질깁니다. 요즘 식용으로 잡는 양은 적당히 키운 뒤 싱싱한 젊은 놈이기 때문에 맛도 좋고 냄새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노인분들이 양고기에 대한 편견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게 아쉽습니다. 지난번 이태원 참사가 있은 해밀턴 호텔 뒤 파키스탄 식당 양고기를 30여년 동안 애용했는데…. 이번 순례 여행이 끝난 뒤 손녀와 아테네에서 이틀을 지낼 때 호텔 옥상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보며 양고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서울에 와서도 마포 양고기 집을 두 번 찾았지요.
가이드 목사님은 양고기 이야기를 종종 하네요. 양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양 떼 가운데 검은 염소가 있군요. 서양에서는 염소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염소같은(goatish)’이란 ‘음란한 호색한’이란 말이죠. Shakespeare의 Othello에는 ‘흰양을 덮치는 검은 염소같은 놈’이란 표현이 나오지요. 금발의 백인 여성 데스데모나와 결혼한 무어인(흑인) 오셀로를 욕한 말이지요. 그러나 염소 고기는 맛있습니다. 요즘은 보신탕 대신 염소탕이 인기라고 하네요. 염소가 양 떼 가운데 있으면 양들을 흩어놓고 양들에서 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고 합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양고기 스테이크가 맛이 있답니다. 인생사 살아가는데 적정수준의 긴장이 필요한 것도 같은 이치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터키도 시골 청년들이 도시로 나가 양을 키우는 애들이 줄어들어 양고기 값이 비싸졌다고 합니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입니다만, 나는 족제비 고기도 먹어보았습니다. 어릴 때 닭을 키웠는데 마당에 만들어 둔 닭장을 밖에서 그물을 치는 등 온갖 대비를 해도 닭이 죽는 겁니다. 족제비 놈은 닭 한 마리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재미 삼아(?) 모두 죽인 겁니다. 할아버지는 쥐덫을 놓아 족제비 한 놈이 잡았지요. 할아버지는 이놈 모피를 벗겨 벽에 트로피인 양 걸어두고 고기는 국을 끓여 먹었습니다. 시골에서 마당에 놓아 키워 다리에 힘이 오른 닭고기 맛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납니다.
이틀간 우리의 순례를 간단히 말하면, 14일 아나톨리아 평원을 서남쪽으로 내려가 성경의 루스드라릴를 지나 콘야 (Konya, 성경의 이고니온)의 Bayir Diamond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15일 토요일엔 알바취(성경엔 비시디아안디옥)로 이동하여 유대교 회당 터와 아고라 등을 보고, 알탈리야(성경엔 앗딸리야)에서 구시가지 하드리아누스의 문, 구항구 등을 본 뒤 안탈리야의 Ramada Plaza Antalya 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콘야로 가는 길에 목사님은 집은 낡아도 창은 깨끗한 것을 가리킵니다. 창을 통해 알라의 은총이 들어오기 때문이라 하네요.
(사진 1, 호텔 Bayir Diamond에서 내려다 본 전경, 휴양지답다.)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두건은 히잡, 차도르, 아바야, 부르카 등 가리는 부위에 따라 다르게 부른답니다. 해안가 도시들은 유럽 휴양객들이 들어와 개방화되면서 히잡을 쓰는 여성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군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해안지역은 야당 후보에게 몰표를 주었더군요. 하드리아누스 문을 지나 넓은 돌로 포장한 길에는 당시 마차들이 다녀 파인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군요.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의 현장을 보는 듯 동시대인과의 교감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주변의 황량한 분위기는 영국 중북부 욕셔(Yorkshire) 무어 같은 쓸쓸함을 더해줍니다. 그런데 가이드 목사님은 포럼과 아고라를 계속 구분하여 이야기하더군요. 아고라는 그리스말이고 이게 로마로 가서 포럼으로 불렸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목사님은 포럼이란 시장통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그 중심 부분을 아고라라고 하더군요. 몇 번 물어보았으나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진 2, 마차가 다닌 자국이 남은 길)
(사진 3, 황량한 폐허는 쓸쓸함을 더해준다.)
오래전 다큐에서 예수는 로마시민이 아니어서 십자가형을 처형되고 바울은 로마시민이어서 참수형을 받았다는 걸 본 적이 있어 목사님에게 확인해보려 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반란에 참여한 노예들을 로마의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해 전시되었지요. 십자가형은 고통을 수반한 형벌이지요. 가이드 목사님 설명은 아마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제정(帝政)을 열면서 인기를 얻기 위해 시민권을 남발할 때 바울로 로마시민이 된 것이 아닌가 하네요. 그는 시리아 서북부이며 사이프러스 섬 동쪽 뾰족 튀어나온 곳과 닿은 길리기아(Cilicia)의 다소(Tarsus)에서 유대인 가문 출신이라 합니다. 본래 이름이 사울인데 이것이 바울로 바뀐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사진 4, 사도 바울의 교회라는 팻말)
(사진 5, 벽만 보존된 교회안에서)
다소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처음으로 만난 곳으로도 잘 알려졌지요.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죽은 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맺은 2차 삼두정치(43BCE)에서 가장 부유한 동방을 차지했기 때문에 자기의 영지를 순례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요? 머리가 좋고 정치적 계산이 빠를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암살 후 자신과 이집트를 지켜줄 실력자로서 이탈리아반도보다 그리스, 터키 등 동방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그를 꾀었던 것 같네요. 이들에 앞서 이곳은 폼페이우스가 산적을 소탕하여 명성을 날렸다는 곳입니다. 행인이나 상인들이 이곳에 모여 카파도키아로 갔다고 합니다. 행인이 많으니 산적도 많았겠지요. 우리가 원래 가기로 한 곳인데 이번 지진으로 가지 못해 몇 자 남깁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기독교는 박해를 통해 성장한 것을 느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했지요. 믿지 말라는 신을 왜 죽음을 무릅쓰고 믿으려 했을까요?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들의 믿음, 신앙과 일체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곧 자신이 믿는 종교와 더불어 영생한다고 믿어야 가능할 겁니다. 독립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이란 개인은 조국과 함께 조국의 품 안에서 영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순국이 두려워하지 않은 겁니다. 조국을 위해서 죽은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이 자의든 타의든,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속에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들의 죽음을 폄하라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해체하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경쟁하던 세력보다 열세인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았으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 즉 기독교 신앙을 허용합니다. 첫 순례자는 자신의 어머니 헬레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밀라노 칙령 이전에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상류층, 황실에까지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조선 말기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양반사회 특히 대원군의 부인 혹은 측근에까지 전파되었다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반세기가 지나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병에서 회복하면서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합니다. 이로써 300년이 넘는 긴긴 세월 동안 박해의 대상이었던 기독교는 이제 로마제국의 제일, 유일 종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황제를 신으로 숭배한 로마가 유일신 하느님만을 인정한 기독교와 어떻게 타협하는지 궁금합니다. ‘권력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와 같이 그리스-로마의 다신교적 전통에서 황제에게 신격을 부여하지만, 신정(神政)관계가 수평관계로 용인된 것인가요?
순례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지요. 이슬람에서는 순례라면 메카로의 여정을 말하지요. 기독교 순례는 정확히 말하면 예수 당시 유적지에 세워진 기념교회들이라 합니다. 골고다 언덕의 성묘교회, 예수가 눈물을 흘렸다는 눈물교회, 그리고 승천교회 등등. 순례길에 수도원을 발견하면 하룻밤 자고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수난의 길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인도하는 여정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원래 하층계급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은 후일 ‘동로마’로 불리는 ‘노바 로마(Nova Roma, 새로운 로마)의 수도가 되지요. 325년 80세가 된 헬레나는 일반 순례자와 같은 여행이 아니라 초호화 여행을 즐겼다고 하겠지요.
헬레나는 예수님의 유물과 유품을 찾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느님에게 속죄하고 신앙을 더욱 굳건히 만드는 순례 여행이 아니라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과 같이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발굴과 발견이라는 점에서 목표가 비슷했다고 하겠네요.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마사다의 항전 후 로마가 철저히 파괴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헬레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갈보리 언덕에 있는 비너스 여신의 신전을 헐고 이곳에서 3개의 십자가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발견한 장소에는 바실리카 성 십자가 교회가 세워집니다. 또한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던 못을 찾아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전투 헬멧에 넣었다고 하는데, 물론 모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이 성배를 찾는 전설의 원조이겠죠?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순례의 길에 나선 주인공이 찾은 곳은 예루살렘아 이니라 로마입니다. 아마도 19세기 후반 바그너 시대 예루살렘은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탄호이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엘리자베스는 귀환한 순례자 중에 그가 없음을 발견하고 죽지요. 그런데 두 번째 순례자는 교황의 지팡이에서 새순이 피어났다면서 탄호이저가 구원받았다고 알립니다. 시간 되시면 <탄호이저>의 마지막 부분 ‘저녁별‘과 ‘순례자의 합창’을 들어보세요.(2023.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