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이야기는 앞 글에서 했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자기가 풍뎅이 꿈 꾼 것을 융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칼 융은 풍뎅이(비틀즈 이름도 여기에서 땄다)가 고대 이집트에서는 환생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의 무의식이 그녀가 바야흐로 심리적 재탄생을 겪을 때가 왔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병원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을 본 것이다.
융은 동시성의 놀라운 특성 때문에 그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개인의 깊은 내면의 의식작용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혹시 이런 동시성을 체험한 분이 있으면 사례를 하나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다. 각설하고 융은 이전까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지껏 과학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모종의 비인과적 연관성이라는 원리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처음에는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글에서 이야기한 비국소적 연겨성의 존재가 확실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융의 생각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한다.
존 브리그스와 함께 혼돈의 과학을 공저한 데이비드 피트라는 유명한 물리학자는 융이 제시한 동시성은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중대한 증거라고 한다. 또 봄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과 물질이 외형상 서로 분리ㅇ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며 그것은 의식과 물질이 현상게 속으로 드러날 때에만 전개되는 가공의 산물이다.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 사이의 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 또한 이 깊은 연결성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피트는 봄의 이러한 견해를 떠올리면서 동시성이 실재라는 직물에 생긴 구멍, 즉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피트는 동시성 현상이란 건 물리적 세계와 내면의 심리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동시성을 체험하는 일이 비교적 드물다는 것은 그만크 우리가 의식의 전체 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마음과 실재의 무한한 잠재력으로부터 우리자신을 얼마나 차단시켜 놓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피트에 의하면 우리가 동시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실재의 진정한 차원에서 작용함으로써 마음과 물질의 근원을 통과하여 창조성 그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는 상제님을 떠올리고 싶다. 도전에 보면 우리가 지금껏 간과하고 넘어갔던 상제님의 이적이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차문경이 가물치를 낚아 회를 쳐서 상제님께 올려드려서 상제님께서 그 회를 잡수셨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하늘을 보시며 웃으시는 것이다. 종도들이 웬일인가 하늘을 쳐다보니 가물치같은 모양의 구름이 동쪽으로 떠가더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어디로 출행하시기 위해 발을 드셨더니 하늘에서도 상제님이 발을 드시는 것과 똑같은 모습의 구름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상제님께서 항상 일심자리, 만상이 나온 근원자리에서 우주를 잡아돌리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상제님께서는 뭘하시든 간에 그것을 일심의 자리에서 행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물질화 또는 현상화되어 나타는 것이다. 일심의 자리에서는 행하지 못할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일꾼이 상제님의 심법을 본받아 일심자리에서 한 번 일해보는 것이다. 일심은 평생에 몇 번 체험하기 힘들다. 예를 들면 이럴 경우겠지. 집구석에 불이 낫다. 그러면 자다가도 초속 50미터로 도망쳐나올 것이다. 죽기 싫으니까. 이런 경우에 기껏 일심을 체험하지나 않을까. 우리 모두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일심을 갖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