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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朴正熙의 淸貧과 김일성·김정일의 부패, 권력자는 깨끗하고 富者는 베풀어야 공동체가 유지 된다 |
趙甲濟 |
國民敎材 제4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 李承晩·朴正熙의 淸貧과 김일성·김정일의 부패 권력자는 깨끗하고 富者는 베풀어야 공동체가 유지 된다
머리글/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다 싱가포르, 군대 안 갔다 오면 공무원 될 수 없다! 1등석에 같이 타고, 승객이 먹고 남은 케이크를 먹는 李光耀 李光耀의 싱가포르 부패 척결 이야기 타이타닉號와 운명을 같이 한 8명의 樂士 영국 엘리트 1000명이 3억 인도를 다스린 비결 학도병 戰死者가 많은 중학교 랭킹 6·25의 恩人 릿지웨이 장군의 軍人정신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美 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한국戰線에서 죽은 하버드 졸업생 17명 병사 일곱 명이 죽어도 훈련을 계속한 사단장 김정일의 초호화판 食卓 북한주민의 食卓: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한국인을 난쟁이로 만든 김정일의 민족사적 犯罪
朴正熙의 초라한 食卓 朴正熙가 남긴 벽돌 한 장, 해어진 혁대, 파리채 李承晩-프란체스카의 勤儉節約 관용차를 탔다고 부인을 잡아넣은 장군 머리글/富者는 베풀고 권력자는 淸貧해야 공동체가 유지된다 公職者는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줄 수 있다. 東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한 데는, “反共 蔣介石 군대는 썩었고, 毛澤東의 공산군은 깨끗하다”는 神話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월남戰에서 공산越盟이 이긴 것도 胡志明의 淸貧한 삶과 월남 지도층의 부패가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반도에서 북한공산정권이 망조로 들어간 것도 김일성-김정일의 부패와 李承晩-朴正熙의 깨끗함이 主요인일 것이다. 李光耀가 싱가포르에서 독재를 하면서도 국민들의 지지가 높은 이유도 지도층의 청렴함 덕분이다. 그는 "싱가포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는 청년층이 공산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야 했고 그러려면 公職者가 청렴해야 한다는 원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南美의 만성적인 정치 불안, 그 원인도 지도층의 부패이다. 지도층의 부패는 부패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도층이 부패하면 좌경선동 세력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민주주의가 작동을 멈추며, 계층-지역간 갈등의 증폭으로 국민들의 애국심이 해체된다. 한국에서 지도층 부패의 저수지는 대통령과 대통령 선거의 부패였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선전戰 중심으로 전개되어 선거 자금이 많이 들지 않았고, 대기업의 선거 자금 제공 사례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만큼 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된 셈이다. 돈 문제보다 더 심각한 지도층의 부패는 戰時의 兵役 기피이다. 한국은 휴전중인 나라이므로 兵役기피는 일종의 '戰時도망죄' '戰場이탈죄'에 해당한다. 한국은 두 개의 전장을 갖고 있다. 하나는 휴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념戰場이다. 이념戰場에서는 전투원들이 주로 말과 글, 法과 진실, 이념과 신념으로써 싸운다. 언론, 종교, 대학이 主전장이다. 국가 지도층이 이 전투현장을 기피하는 것도 일종의 '戰時도망죄' '戰場이탈죄'에 해당한다. 한국에선 군대 복무를 마치는 것만으로 애국의 의무가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淸貧한 삶을 강조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하지만 지도층에겐 '淸貧한 정신'이 필요하다. 公職者는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富者는 淸貧할 수 없다. 그들은 베풀어야 한다. 부자들이 公益을 위하여 돈을 쓰면 淸富가 된다. 論語에 孔子의 유명한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는 富者가 겸손해지기가 더 쉽다"는 요지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무례와 떼쓰기를 욕하기 전에 기업인들과 富者들과 권력자들은 자신이 충분하게 겸손한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富者는 베풀어야 하고 권력자는 淸貧해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비결이고, 法治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 싱가포르, 군대 안 갔다 오면 공무원 될 수 없다! 18세에 입대, 2년 근무 후 예비군 편입, 매년 40일간 소집근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 가야. 최근에 한 외교관 출신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싱가포르의 兵役(병역) 실태를 소개해주었다. 인구가 약 350만 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이스라엘을 닮은 국방제도를 유지한다. 국민총생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로서 한국의 두 배이고, 이스라엘의 반이다. 현역은, 직업군인이 3만2700명, 징병된 병력이 3만9800명, 합쳐서 7만이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한국은 100만(지금은 70만) 兵力을 유지해야 싱가포르와 같아진다는 계산이다. 싱가포르는 국민皆兵制(개병제)이다. 18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는데, 연기가 되지 않는다. 重病者(중병자)가 아니면 모두 입대한다. 兵役특혜는 없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에 가야 한다.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체육선수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훈련기간의 단축이다. 뚱보들에겐 훈련기간을 길게 한다. 제대한 이후에도 예비군에 편입되어 나이 50세(장교)나 40세(사병)가 되기까지 매년 40일간 소집된다. 30만 명이 넘는 예비군이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군대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싱가포르 군대는 1960년대 후반 이스라엘 장교들이 지도하여 만들었다. 이스라엘 고문단은 멕시코 사람으로 위장하여 建軍(건군)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가상 敵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이다. 싱가포르의 국민 구성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으로 복잡하다. 국민개병제는 다양한 출신성분을 초월하여 싱가포르 시민들을 하나의 국민집단으로 용해시키는 용광로 역할을 한다. 싱가포르는 한국보다도 더 평화스러운 안보환경에 있다. 그럼에도 自主국방정신은 한국보다 더 강하다. 싱가포르는 물론 운동선수에게 兵役면제의 특혜를 주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석사장교 제도가 생겨 특혜 논란을 불렀다. 석사 소지자 중 우수한 자를 시험으로 선발하여 6개월간 군사훈련과 전방 체험을 거친 후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轉役시켜주는 제도였다. 당시 군 복무기간이 3년에 육박한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혜택이다. 그 뒤 兵役면제 특혜가 남발되었다. 스포츠, 예술, 과학계의 人材를 2, 3년간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주장이 일견 설득력이 있는 듯하나 이는 短見이다. 군대 복무중에도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 수 있다. 특혜는 한번 주어지면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군 복무를 충직하게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미국에서도 징집제 시절 병역특혜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테드 윌리엄즈와 같은 대타자도 2차대전과 한국전쟁 두 차례 징집, 戰線에 배치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 1등석에 같이 타고, 승객이 먹고 남은 케이크를 먹는 李光耀 1990년대 초 한국의 한 장관이 대만의 臺北에서 싱가포르行 싱가포르 항공 소속 여객기 1등석을 탔다. 곧 눈에 익은 사람이 올랐다. 李光耀(이광요) 당시 싱가포르 총리였다. 그는 1등석 맨 앞자리에 앉았다. 1등석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로 친다. 그는 다른 승객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李총리 비서관이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았을 뿐이다. 총리는 비행 도중 일어나 몸을 푸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식사 시간에 승무원들은 李光耀 총리를 맨 나중에 대접했다. 後食(후식)으로 케이크가 나왔다. 李光耀 총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남은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먹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한국 장관이 승무원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의 총리를 그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승무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총리께서 그렇게 해주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李 총리가 주인인데, 주인이 맨 나중에 대접을 받아야지요』 1988년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李光耀 총리 부부는 싱가포르가 청결한 비결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李 총리 부인은 그것은 시민 덕분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치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고, 학생들에게도 철저히 교육을 했지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싱가포르 화폐로 500달러(미화 200달러 상당)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광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내는 사람은 없고, 단지 명목적인 액수만 납부하게 되지만 단속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환경청 장관이 청소부들에게 거리 청소를 중단시켜 보았더니 온 거리가 하루 만에 지저분해졌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싱가포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고 청소부들이 매일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기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졌지요』 ................................................................... 李光耀의 부패 척결 이야기 공산주의자들은 깨끗하다는 환상이 아시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퍼진 가장 큰 이유는 공산당은 깨끗하다는 환상이었다.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청렴함을 상징한 인물이 중국의 毛澤東과 월남의 胡志明이었다. 반면 蔣介石 군대는 부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李光耀가 싱가포르를 청렴한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서 나왔다.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부패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젊은이들이 蔣介石(장개석) 정부의 부패에 분노하고 毛澤東(모택동) 군대의 청렴함에 끌려 親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1959년에 이광요 일파가 싱가포르 市의회에 진출했을 때 그들은 反부패의 상징으로 하얀 셔츠를 입었다. 공산당 세력은 이광요의 영국 유학 경험, 골프를 치고 부르주아 생활을 하는 것을 비판했으나 그를 부패로 공격할 순 없었다. 싱가포르엔 영국 식민지 행정기구에서 만든 부패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CPIB)이 있었다. 李光耀는 이 기구에 反부패 척결의 全權을 맡겼다. 부패혐의자 및 그 가족의 은행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부패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범위를 넓혔다. 1960년에 법원은 자신의 월급에 비해서 지나친 호화생활을 하는 것 자체를 부패의 증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李光耀는 자신의 친구나 장관들에 대한 수사를 막기는커녕 장려했다. 1986년에 국가개발장관 테칭완이 수뢰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테칭완은 무고하다면서 이광요 수상을 독대하고 싶어했다. 이광요는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 며칠 후 테 장관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유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명예를 존중하는 동양의 신사로서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가장 비싼 代價를 지불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은 문상온 李 수상에게 故人의 명예를 위해서 부검만은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李 수상은 剖劍을 하지 않으려면 자연사를 했다는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테 장관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견서를 냈다. 李光耀 수상은 고위 공직자들이 기업체 임원들보다도 월급을 적게 받으면 뇌물의 유혹에 노출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민간 수준까지 올리는 데 힘썼다. 그는 高位공직자들이 명예와 사명감에만 의존한 채 쪼달리는 월급장이 생활을 견디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人材가 공무원 사회로 들어오지 않는다. 1995년에 李光耀 전 수상의 부인과 아들이 부동산을 5~6% 할인받고 산 것이 문제가 되었다. 부동산 개발업자가 판촉용으로 다른 知人들에게도 그런 할인율을 적용했음이 정부 조사로 밝혀졌다. 이 개발회사엔 李光耀의 동생이 비상임 이사로 등재되어 있어 소문이 나쁘게 돌았다. 李光耀 부인은 결백이 증명된 뒤 할인받은 100만 싱가포르 달러를 정부에 기증했다. 정부는 이런 돈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돌려주었다. 부인은 이 돈을 자선단체에 기증했다. 지도자의 결심, 엄벌주의, 공무원 대우 개선, 수사기관의 독립성, 깨끗한 선거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싱가포르로 하여금 아시아의 부패고리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 타이타닉號와 운명을 같이 한 8명의 樂士 紳士道 실천으로 남자의 20%만 살아남았다. 1912년 4월14일 밤 세계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178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Women and children first)' 원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알려진 것은 1852년 영국 군함 빌켄헤드호가 침몰할 때 水兵들이 모범을 보인 이후이다. 타이타닉호 사고 때 이 원칙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한 선원들이 救命보트에 빈 자리가 있음에도 남자를 태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타이타닉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1178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706명만이 구조된 것은, 다 태우지 않고 출발한 보트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승객들은 큰 배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1등석에 있던 일곱 어린이들중 여섯 명, 2등석의 어린이들 전부가 구조되었으나 3등석의 어린이들중 34%만이 구조되었다. 영국 남자 승객들의 사망률이 미국남자들보다 훨신 높은 것은 '紳士道'를 실천한다고 救命보트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비겁자'라는 욕을 먹을까 봐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뉴욕항을 목표로 처녀항해를 시작한 이 배에는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生死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紳士道는 두 나라의 엘리트가 가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의 한 예일 것이다. 타이타닉호에 救命보트가 적었던 이유는 승객수가 아니라 톤수에 따라 구명보트의 의무적 보유척수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영하 2도의 바닷물에 노출된 후유증으로 죽었다. ................................................................................................. 영국의 엘리트 연구: 1000명이 3억 인도를 다스린 비결 청렴, 공평, 滋善이 행동기준 영국이 꽃을 피운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귀족들과 자본가들이 王權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거의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비겁한 富者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邊境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로써 多數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천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주요 언어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최근에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 달러)가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제국의 知的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선반 하나 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 길모어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된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慣行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죽여서 殉葬(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민중의 定評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慈善, 公平, 淸廉은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서도 필요한 국가엘리트의 행동규범이다.
영국의 인도통치의 예에서 보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자선, 공평, 청렴의 행동규범을 뒷받침한 것은 애국심과 자부심이었다. 국가, 전통,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국가엘리트가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은 언제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엘리트 집단을 양성할 국가적 교육기관은 또 어떻게 만들 것인가.
李承晩 대통령은 독립투사 엘리트의 대표였고,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는 군 장교단의 대표였다. 이들은 국가를 찾겠다고 싸우고, 국가를 지키려고 고민하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國益을 중심에 놓고 思考하는 습관을 길렀다. 그 뒤에 등장한 소위 민주투사 출신들은 당파, 지역, 계급의 이익을 국민과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시키면서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민주투사 출신들은 역대 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권과 국가를 혼동하였다. 그들은 정권에 대한 유감이 국가에 대한 유감으로 변질됨으로써 애국심의 근저를 이루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역사와 전통에 대한 존중심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정권을 잡고도 대한민국의 주인이란 의식보다는 손님의식, 또는 백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역사, 철학, 문학 등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국가 엘리트층의 再建이 바로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 再建사업이다. ......................................................................................................... 학도병 戰死者가 많은 중학교 랭킹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이다.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출신 1976명이 戰死한 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다.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씨는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를 당시 학적부와 대조해 확인한 결과 전쟁기념관 동판의 전사자 수보다는 적은 63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확인했다.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 "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씨는 "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경북中 32회 졸업생 중 學徒兵으로 나간 사람은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귀순 교장의 아들 조성환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풀려났다.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군도 참전하여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이 글은 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심층취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상흔 기자)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 6·25의 恩人 릿지웨이 장군의 軍人정신 인간애와 교양, 그리고 애국심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참전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사망하였다.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릿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하여 고마워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릿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文明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일단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릿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릿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만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自主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릿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潰走(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릿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士氣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他國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릿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그때 미국 정부 일각에선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主力인 8군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士氣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50代의 이 猛將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전선을 누비면서 장병들의 軍心을 파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얼어붙은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미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全文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筆力을 잘 보여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知性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數週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 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軍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合憲的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布陣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不動産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지조와 용기가 전쟁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은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며 이 大義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他人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自衛행동이었다. 결론적 분석: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무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머지 않는 장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軍 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挑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사령관은 실종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수색을 중단시켰다.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海外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射手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戰線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美 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선 이름 딴 賞 제정 알렌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兄인 알렌 덜레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工作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國務장관으로 일하였다. 알렌 덜레스는 獨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戰線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 .............................................................. 한국戰線에서 죽은 하버드 졸업생 17명 대학교 안에 추모교회가 있다.
설립한 지 374년째인 미국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 두 곳은 졸업생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하버드 대학교엔 90개가 넘는 도서관이 있고 총 藏書量은 1560만 권이다. 중앙도서관은 '와이드너 라이브러리'로 불린다. 300만 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書架(서가)의 길이가 약90km나 된다. 1912년 북대서양에서 氷山과 부딪쳐 침몰한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던 하버드 1907년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는 책 수집가였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350만 달러를 기부하여 1915년에 준공한 것이 와이드너 도서관 건물이다. 와이드너 도서관 맞은 편엔 추모교회(The Memorial Church)가 있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교회 겸 戰死者 추모시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한국전, 월남전에 참전하여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다. 동판에 새겨진, 한국에서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은 17명이고,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TO THE ENDURING MEMORY OF THE HARVARD MEN WHO GAVE THEIR LIVES IN THE KOREAN WAR College Peter Emilio Arioli, Jr. - 1938(졸업연도) Franklin Jaynes Tyler - 1941 Edwin Gustaf Eklund, Jr. - 1942 Dirck DeRyee Westervelt - 1942 Robert Martin Moore, Jr. - 1943 Bigelow Watts, Jr. - 1945 Chester Harrison Crampton, Jr. - 1946 John Goodrow Sheehan - 1948 Douglas Hamilton Thomas Bradlee - 1950 Kenneth Joseph Murphy - 195 Franklin Perkins Dunbaugh - 1951 Thomas Amory Hubbard - 1951 George Cabot Lee, Jr. - 1951 Donald Adams Little - 1951 Sherrod Emerson Skinner, Jr. - 1951 Wilbur Lee Van Bremen - 1951 David Hodgman Flight - 1953 병사 일곱 명이 죽어도 훈련을 계속한 사단장 그러나 强風의 위험도를 알기 위하여 혼자만 낙하산 타고 뛰어내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였다. 국군은 앞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뒷받침해야 한다. 국군 장교단이야말로 지난 60년간 가장 많은 피, 땀, 눈물을 흘린 직업群이다. 군인은 국가가 부를 때 死地로 달려간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 미국 군인의 예를 든다.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몇 년 전 사망했다. 그는 '한 군인의 보고서'(A Soldier Reports)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와 언론이 월남전을 망쳤다고 분개하는 한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미군이 戰場에선 지지 않았는데 언론의 反戰보도와 여론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 국가 지도부가 전쟁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졌다고 말한다. 1968년 베트콩의 舊正공세는 그들의 大敗로 끝났지만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미국의 안방 여론을 反戰으로 움직였다. 존슨 미국 대통령부터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산당측과 협상을 제의했던 것이다. 자유월남이 망한 것은 그 7년 뒤였다. 웨스트모어랜드(별명이 웨스티) 장군은 이 책에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가장 공정한 보도를 했다고 평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군사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긴다.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958년 웨스티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101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켄터키주 포트 캠벨에 본부가 있었다. 부임한 직후 낙하훈련이 있었다. 낙하지점에 나간 장교가 풍향과 풍속을 잰 다음 녹색 연기를 뿜어 올렸다. 낙하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502 연대 장병들이 낙하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着地(착지)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강풍이 낙하산을 몰고 갔다. 그는 수백 미터를 끌려가다가 다른 장병들이 낙하산을 주저앉혀 다치지 않았다. 이 强風에 걸려 일곱 병사들이 사망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그러나 기상조건을 이유로 하여 훈련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전쟁은 원래가 악조건하에서 치러지는 것이므로. 다음날 그는 훈련 강행을 명령했다. 다만 낙하 훈련의 경우엔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바람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다른 사병들은 대기하도록 한 뒤 사단장이 혼자서 뛰어내렸다. 전날처럼 강풍이 불어 웨스트모어랜드는 착지한 뒤에도 한참 바람에 끌려가다가 설 수 있었다. 그는 낙하훈련을 중단시키고 육상훈련만 하도록 했다. 이 사고를 분석한 미군은 着地한 뒤 낙하산을 빨리 분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일곱 명이 낙하훈련중 죽는 사고가 한국군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단장은 조사받기에 바빴을 것이고, 훈련은 물론 중단되었을 것이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이 사고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판정된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피크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수년 전 이라크에서 미국의 여자 장교가 戰死했다. 미 육사 출신이었다. 그녀는 보병부대를 지휘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 장교가 戰車 교육부대에서 교관으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軍人정신은 국가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핵심으로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死生觀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戰力이다. 북한군은 몇 번의 간첩선과 잠수정 침투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잡히기 직전에 自爆, 自殺하는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작전을 연상시킨다. 물론 병사들이 굶주리는 북한군의 일반적 士氣는 높지 않다. 한국군 장교단은 좌파정권이 韓美동맹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韓美연합사 해체 공작을 강행해도 이에 순응했다. 연합사 해체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했던 국군이, 좌파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에 그 전의 소신을 간단하게 접어버렸다. 자리를 걸고 참말을 하는 장교가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감옥에 갈 일도 아니었다. 국가와 국군을 위한 충정의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고 싶다. 일본의 武士道를 定義할 때 "죽는 것에 대한 自覺"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직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自問自答해볼 일이다. .......................................................................... 김정일의 초호화판 食卓 뱀장어 캐비어는 200만원 북한 전문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 엔케이는 4년 전 김정일의 食卓을 집중 해부했다. 김정일의 食卓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삶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DailyNK는 김정일이 평소 즐기는 음식 30 가지를 뽑았다. 김정일의 日食 전문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을 수행하였던 러시아인 풀리코프스키가 쓴 '동방특급 열차', 그리고 김정일 주변에서 생활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선정한 것이다. 음식의 특징과 가격 산출은 신라호텔 조리부의 협조를 얻어서 하였다. 2001년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가 북한을 탈출, 일본에서 <김정일의 요리인>(일본어판)을 출간하면서 김 위원장의 식탁에 어떤 음식이 즐겨 오르는지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후지모토는 김 위원장이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이 음식은 차림표에서 야자상어날개탕, 죽생상어 날개탕, 상어날개 소라탕 등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적혀 있다. 그가 공개한 2001년 3월 21-26일까지 김정일 식탁 차림표에서 상어 날개탕은 네 차례나 메인 요리로 등장하였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해산물을 즐긴다고 한다. 그렇다고 육고기 종류를 꺼리지는 않는다. 해산물을 주로 찾지만 '코야'(새끼돼지구이)나 '쌀로'(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돼지 비계) 같은 돼지고기 종류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1990년대 후반까지 파티를 자주 열고 술을 자주 마셨다. 가장 즐긴 술은 ‘조니워커 스윙’과 ‘헤네시 XO’로 알려졌다. 후지모토의 증언 중에 매우 충격적인 사실은 북한 인민들이 기아로 수 십만 명이 떼죽음을 하던 1996년에도 김정일의 요리사들은 음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全세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증언이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이란에서는 캐비어, 일본에서는 주로 생선류, 동남 아시아에서는 두리안, 파파야 등 과일을 사오는 식이었다. 김정일이 2001년 열차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림자 수행’을 했던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全權 대사는 김정일과 함께 했던 여행을 ‘동방특급열차’라는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김정일과 24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식사와 음식을 주제로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빠지지 않는다. 그는 김정일이 먹는 음식의 재료는 북한에서 직접 비행기로 조달하고 여기서 나온 쓰레기도 밀봉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풀리코프스키는 이 책에서 김 위원장이 자신에게 쌀로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향이 진한 커피를 자주 마셨다고 말했다. 같은 해 프랑스 출신 요리사는 자신이 직접 북한에 들어가 김정일이 연 船上 파티에서 경험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스무 가지가 넘는 프랑스産 치즈와 포도주를 비롯해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주문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즉시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신라호텔 조리부 최인수 과장은 <데일리엔케이>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정일이 먹는 음식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가격 산정이 어렵다"면서 "전체 음식 중에 '뱀장어 캐비어'가 200만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여 가장 비싼 음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유엔은 2002년 북한 어린이 수 천명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결과 40%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1998년에는 그 수치가 60%에 달했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 김정일이 즐기는 곰발바닥 요리 2000년 6월13-15일 평양회담 때 북한측이 한국측에 제공한 진수성찬 가운데서 특기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상어지느러미: 중국 음식점에 가서 상어지느러미 찜이나 수프를 식히면 최저 1인당 30000원 이상이 나간다. 그래서 상어지느러미 요리는 중국 음식 중 高級이냐의 여부를 가리는 한 잣대가 되고 있다. 이번에 북한측이 내어놓은 상어지느러미는 특별한 것이었다. 야자수 열매(코코넛)를 자르고 속을 파낸 다음 그 속에다가 상어지느러미 수프를 담았다는 것. 곰발바닥 요리: 김정일이 이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과연 이 요리가 나오니까 한 訪北者는 김정일에 대한 남한측 정보가 정확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한다. 물김치: 배를 잘라내고 속을 파낸 다음 그 속에다가 김치를 담았다. 돌불고기: 불에 달군 돌 위에 고기점을 올려 놓으면 자동적으로 굽히게 한 것. 이상의 요리는 북한 고위층의 것이 아니고 김정일의 전용 메뉴 같았다고 한다. 배고픈 북한에 가서 남한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온 訪北者들 중에는 "굶주리는 동포들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생기더라"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손님대접은 융숭할수록 좋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손님들에게도 국수를 내놓곤 하여 청와대에 들어갈 때는 미리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김정일은 同席한 이들에게 곰발바닥 요리가 정력에 좋다면서 농담을 늘어놓았고, 남측 인사들은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인민들을 飽食(포식)한 악마로 그려질 김정일을 斷罪할 때 첫 문장은 <인민들을 굶겨죽이면서 곰발바닥요리를 즐긴 人民의 敵 김정일은...> 로 시작될 것이다.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人民들이 사람고기를 먹을 때 곰발바닥을 김정일과 같이 먹었다고 자랑하고 돌아다닌 남측 인사들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 북한주민의 食卓: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우리 가족 滅亡史(月刊朝鮮 1999년7월호에 실린 한 북한주민의 手記)에서 발췌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福(복)은 쌍으로 안오고 禍(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백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 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 한국인을 난쟁이로 만든 김정일 평균키로 본 김정일의 민족사적 범죄 1. 1913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1-163cm였다. 2. 1940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6.12cm로 컸다. 3. 1956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6.46cm로 약간 컸을 뿐이다. 4. 1975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9.2cm로 훌쩍 컸다. 근대화의 성공으로 영양섭최가 좋아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5. 1985년 한국인의 평균 키는 171cm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