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가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의 내면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사랑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 동시에 존재한다.
에로스가 삶의 역동이요 창조적 에너지라고 한다면
타나토스는 죽음에 대한 본능이요 파괴적에너지라 말할 수 있다.
이 둘 사이 적당한 조화가 있으면 에너지를 극대화 할 수 있지만
만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화근을 불러올수도 있다.
자아가 완성되기 전의 청소년이 에로스적 본능만 추구한다면
이성과의 관계를 성적 욕구를 충족할 도구로만 생각할 수있다.
그리고 만약 타나토스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다면 폭력과 파괴를 일삼고
심한 경우 강도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두가지 욕망이 조화롭게 반응하여 길항적으로 작용할때 삶의 에너지는 창조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수용하며
한시도 쉬지 않고 죽음을 욕망한다.
죽음이란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무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죽음과 맞닥뜨린다.
가까이는 부모 형제의 죽음으로부터 내게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은 생면부지의 죽음까지.
자꾸 나이가 들어가는지 최근들어 문상을 가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대부분 친구 혹은 지인들의 부모 또는 빙부 빙모상등이라 생전의 고인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인지 조문을 하면서 영정 사진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영정 속의 모습은 대부분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파티에 참석해준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듯 온화한 표정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려해도 미소뒤의 쓸쓸한 표정까지는 숨킬 수가 없는지
사진을 보면 볼수록 애잔한 슬픔이 묻어난다.
정작 본인은 자류롭고 평온한데 내 인식이 자꾸만 슬픈 표정으로 안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충실한 뇌의 인식 때문일까. 영안실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경건하다.
일면식도 없는 망자와의 짧은 만남으로도 서로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그들의 표정은 근엄하고 결의에 가득찬 느낌이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비슷하다.
술잔을 앞에 놓고 죽은 머리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상주를 위로할 최소한의 단어를 찾아내느라 고민하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고뇌로 되돌아간다.
얼마전 생전의 고인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상가를 문상하던 중 갑자기 영혼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실재로 미국의 한 외과의사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영혼의 무게를 측정한 바 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에게 임종 직정과 직전의 몸무게를 비교한 것이다.
그리고 임종 직전과 직후의 몸무게가 정확히 21g 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발표하였다.
과학적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대체로 영혼의 무게로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표본 숫자가 제한적인데다가 영혼이 존재하는 뇌 속의 해부학적 공간을 입증하지 못했으니
이것도 상상의 세계에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영혼이 존재하던지 존재하지 않던지 영혼의 무게가 얼마인지 상관 없이
인간은 죽고 나서도 그에 대한 기억이 오래토록 남아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고 그 기억이 존재하는 한 함께 살고 있다고 믿는 풍습도 있다.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관심도 윌빙보다는 웰다잉으로 변한것 같다.
이제 종교 철학 예술등의 화두도 얼마나 잘 사느냐 보다는 어떻게 잘 죽느냐로 옮겨 온듯 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결국 잘 사는것이 잘 죽는다는 말이니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다분히 역설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비교적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대한다.
정말 힘들고도 고달픈 삶을 살았던 사람일수록 의외로 죽음을 받아 들이는 태도는 담담하다.
한 평생 후회 없이 살았으니 이제 긴 휴식이 필요하다고 믿는것일까,
아니면 고통의 끈을 팽개치고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일까.
아마 이승의 생은 이쯤에 놓아 두고 저승에 대한 계획을 착실히 준비 하는것 같기도 하다.
우리 시대 명사들의 가상 유언장을 묶은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이란 책의 제목만 봐도
역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삶에 치여 발버둥치느라 스스로가 초라하고 느껴졌을 때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까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자기 삶에 활력을 더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첫댓글 행복전도사 최윤희의 죽음을 두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이다.
나쁜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던걸요.
일상의 무게감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가볍게 이세상 떠나고 싶네요. 마치 이사가듯이...^^
칸나, 영정사진 벌써 찍어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