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정치 및 사회적 안정은 반드시 아름다운 예술품을 후세에 남긴다. 정치가 안정된 사회에서 탄생한 작품은 조화와 균형, 해학의 여유가 묻어나지만 혼란한 사회에서 탄생한 작품은 예술성보단 획일성과 크기만이 강조된다.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가장 한국적인 미소를 간직한 석가모니 불상이 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희열과 감동을 함축한 미소, 그 표현의 완벽함에 긴장감마저 느끼게 하는 석가모니 미소는 한 시대의 반영물이다.
세종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조선은 후기 영조와 정조 때에 이르러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릴 만큼 영조와 정조 때는 사상과 학문, 문화가 다시 왕성하게 꽃이 피던 시대이다.
대흥사 대웅보전 석가모니불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 때 탄생한 작품이다. 시대의 안정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조화와 균형, 그리고 시대의 자신감이 미소로 나타난다.
중세시대를 지배했던 신 보다는 인간의 시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 때의 작품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미적 차이와 종교적 차이 때문에 느낌은 달라도 대흥사 석가모니불의 미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는 조화와 안정적인 면에서 닮아 있다.
예술이 가장 풍부하게 발전했던 시대, 조화와 균형, 예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났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의 미소도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음을 이들 작품들은 보여준다.
대흥사에 남아있는 정조대왕의 표충사 현판글씨도 시대와 한 인간의 사상이 함축돼 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청나라 건륭문화에 마음을 기울이며 학문 연마에 힘쓰고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양반과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켜 조선후기 문예 부흥기를 이끈 임금답게 표충사 현판글씨는 젊은 임금의 웅지와 개혁으로 꿈틀거렸던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가장 해학적인 작품도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주춧돌 동물문양이다.
웃음이 배시시 나오게 하는 주춧돌의 게와 거북이 문양은 그 시대의 여유와 재치가 반영된 작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는 대웅보전이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건립됐다고 기록돼 있다. 대웅보전 건물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지만 주춧돌은 미황사 창건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황사 창건 시기인 신라 경덕왕 때는 삼국통일 후 사회가 안정된 때이다.
이러한 사회적 안정과 그 속에서 싹튼 자신감은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등 이상적인 불교세계를 표현한 걸작들을 탄생시킨다. 시대의 안정은 장인에게 여유와 해학의 정신을 심어준다. 엄숙한 사찰에 해학이 넘치는 조형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점도 한 시대의 자신감의 반영이다.
옥동 이서의 녹우당 현판글씨와 원교 이광사의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글씨도 시대를 반영한 작품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에선 18세기 들어 자주적인 운동이 일어난다. 성리학과 중화사상에 빠진 조선의 사상과 학문, 예술 등에 대한 반성이 선진 지식인들 사이에게 활발히 전개된다. 이러한 자주적인 운동에서 탄생된 글씨가 동국진체이며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다.
조선색이 강한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년)로부터 시작된다.
자주적 운동의 일환으로 동국진체를 창조한 이서는 성호 이익의 형이자 공재 윤두서의 친구였다. 이서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고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된다.
해남 길가에서 만나는 조잡한 불상들은 고달픈 시대의 상징물이다. 계곡 선진미륵과 읍 신안리 미륵, 황산 연당마을 미륵 대부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조성된 것이다. 이들 불상들은 왜구의 침략이 심했던 때에 조성된 것이라 예술성보단 미륵불이 빨리 하생해 고달픈 삶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70년 이후 초등학교에 조성된 동상들도 시대의 산물이다. 이승복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성웅 이순신을 통해 문보다는 무의 우월성,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초월성을 나타내려 했다. 획일성만이 요구된 군사독재시절이라 모든 학교의 동상이 다 같고 당연히 작품성은 떨어진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 교정에 똑같은 조각상들이 있다는 것, 군사독재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울돌목에 서 있는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 동상은 지금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 이순신은 성웅이자 인간이 아닌 신적 인물로 이미지화 됐다. 획일성만을 강조했던 군사독재 시절 이후 우린 다양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반영한 것이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이다.
현재 해남에 남아있는 모든 작품에는 시대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