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勸進), 권진 하시는지요?
위제희 부인은 기꺼이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다고 발원했습니다. 그 간절한 발원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호응하십니다. 그 정도로 간절한 사람에게 어찌 아미타불의 국토인들 멀리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고하셨다. 그대는 아는가? 아미타불(의 국토는) 여기서 멀지 않다. 그대는 마땅히 생각을 모아서 그 나라를 관찰하여 정토에 태어날 업을 이루어야 한다.” 아미타불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에 대해서, 관경은 멀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제희 부인처럼, 간절한 염원을 갖고 희구한다면 멀지 않은 것은 사실일 터입니다.
이 인용문 속에서 저로서는 그보다 더욱 주목하고 싶은 것이 ‘정업(淨業)’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청정한 행위가 됩니다. 하지만 정토신앙의 맥락에서는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번역하기 보다는 그냥 ‘정업’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뜻은, 아미타불이 멀지 않은 곳에 계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아서 그 나라를 관찰하여 정업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아서 그 나라를 관찰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 내지 ‘관무량수불’의 의미입니다. 아미타불과 그 국토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정토왕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16가지 관법이 말해집니다. 마음 속 관찰, 요즘말로 하면 이미지(image)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그대를 위하여 널리 비유들을 설할 것이며, 또한 미래의 모든 범부들이 정업을 닦아서 서방의 극락국토에 태어나게 할 것이다.” 극락국토에 태어날 수 있는 정업을 무엇이라 하셨지요? 바로 관찰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모든 범부들에게는 그 말고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범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범부에게는 관찰이라는 정업이 행하기 어렵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정업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삼복(三福)이고, 뒤에 가면 14관에서 16관까지를 말합니다. 이를 합하여 산선(散善)이라 하고, 관찰의 정업, 즉 1관에서 13관까지를 정선(定善)이라 말합니다.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세 가지 복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부모님을 효도로서 봉양하고 스승을 받들어 모시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열 가지 선업을 다 닦는 것이다. 둘째는 삼귀의를 받아 지니고 많은 계율을 다 갖추어 지니고 (팔만가지나 되는) 행동거지의 규범(威儀)을 범해서는 아니 된다. 셋째는 보리심을 발하고서 인과를 깊이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염불하도록) 수행자를 권진(勸進)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일을 정업이라 한다.” 삼복을 각기 세복(世福), 계복(戒福), 행복(行福)이라 합니다. 세복은 세간에서의 도리이고, 계복은 출세간의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을 말하며, 행복은 대승불교의 수행을 말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대개 다른 경전을 통해서도 많이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세 번째 행복에 나오는 말 중에 ‘권진’이라는 말은 한국불교에서는 안 씁니다. 일본불교에서는 대단히 많이 쓰는 말인데,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관경에서 유래하는 말입니다. 권진은 ‘정진을 권유하다’라는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일본불교에서는 다양한 의미로 씁니다. 첫째, 민중들 사이에 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권유하고 다니는 스님을 권진이라 합니다. 저자거리에 내려오신 성인이라는 뜻의 ‘성(聖)’을 붙여서 ‘권진성(간진히지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둘째는 어떤 불사의 책임자를 권진이라 부릅니다. 특히 불사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주를 권유하고 거두러 다니는 것을 권진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도감(都監) + 화주(化主)’를 권진이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절의 휴게소 이름을 ‘권진소’라고도 그러고, 어떤 행사의 주최나 후원을 ‘권진’이라고도 그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불교사독서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저를 ‘회장’이라 하지 않고 ‘권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최초의 권진은 누구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권진입니다. 누구에게 권진하고 있지요? 바로 위제희 부인에게 아미타불을 권진하고 있으며, 정업을 권진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역시 권진입니다. 48원이 다 권진의 내용이지만, 특히 제18원은 우리 중생들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권진하는 메시지가 아닙니까.
우리 불교는 너무나 권진을 하지 않습니다. 포교나 전도, 전법 - 이런 말들이 다 권진과 동의어입니다. 이웃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아침에 믿기 시작하면 아침에 권진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 불교야말로 ‘권진의 종교’입니다. 관경소에서 배우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무서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히로세 다카시라는 분의 저술입니다만, 신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공적 신심이 있고, 사적 신심이 있다. 권진을 못 하는 것은, 우리의 신심이 사적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량수경도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48원은 누구의 원입니까? 법장보살의 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원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원일 수 있을 때, 신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심 있는 사람은 권진하는 사람이며, 권진하는 사람이 신심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 같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찌 권진하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부처님의 은혜를 느낀다면, 어찌 권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토불교는 무엇보다도 모든 범부에게 염불을 권진하는 불교입니다. 정토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범부에게 권진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하셨다. 그대는 이제 알겠는가? 이러한 세 가지 행위는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닦으신) 정업 바로 그것(正因)이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