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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생활=원망생활 |
극락생활=행복생활=감사생활=복 중에 제일 큰 복 |
감사생활 하십니까?
어릴 땐 엄마 아빠가 용돈줄 때 감사합니다. 명절에 새배돈 받을 때, 옷 사주실 때, 맛있는 거 사주실 때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발견이 두 가지
內(안) |
마음을 발견하는 것 |
慧(지혜) |
=견성 |
外(밖) |
은혜를 발견하는 것 (=보은 불공) |
福(복) |
마음을 발견해서 지혜로운 삶이 되고, 은혜를 발견해서 은혜를 갚으면 가장 복된 삶이 됩니다.
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견성했다. “마음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알았다. 이것도 견성했다와 같습니다. 사실 마음을 알면 은혜를 알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은 무형한 것이지만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 바로 ‘마음’입니다. 냄새도 색도 향기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 마음은 우주를 감싸고도 남습니다. 그 마음이 들어서 모든 것이 생성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여러분이 만드셨어요. 마음이 라는 것이 들어서서 다 여러분을 만든 것입니다 .현재의 성격, 생김새, 지혜, 인연, 여건들도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다 은혜로 똘똘 뭉친 은혜덩어리들입니다. 참나가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면 육신이 나인 줄 알고 육신에만 공들이고 또는 내 업력, 습관 된 마음이 나인 줄 알고 가짜 자존심에 속아서 그것에만 공을 바쳐 산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철이 든다는 것은 이 나를 안다는 것이고 동시에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당연한 은혜야 말로 진짜 은혜입니다. 은혜와 마음의 공통점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大恩(대은)은 無恩(무은)입니다.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은혜 |
小恩(작은 은혜), 남과 다른 것, 일시적인 것 |
원불교에서 말하는 은혜 |
작은 은헤를 포함한 더 큰 은혜, 누구나 똑같이 받은 것,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 예)천지의 은혜:응용무념의 도를 따라 나타남. |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제일 쉬운 예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없으면 숨 쉴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없으면 서로 간에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 있다면 그 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천지의 은혜는 응용무념의 도를 따라서 나타납니다. 그냥 여여자연으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한테는 시주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大施主恩 (대시주은)입니다. 應用無念(응용무념)으로 내가 다 시주받았다고 합니다. 공기, 물, 바람, 땅, 햇빛,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준바 없이 줬는데 여러분은 받은바가 없이 다 받고 삽니다. 사람들은 남들과 다르게 받은 것만 고마워합니다. 공기, 햇빛, 바람도 똑같이 받으니까 고맙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차별적 고마움. 상대적 고마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고마움은 절대적 고마움입니다. 없어서는 살수 없는 고마움. 절대적인 것입니다. “천치요 하우자라도 공기, 햇빛, 물, 바람, 땅이 이런 것들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인정할 것이 아니냐. 그것이야말로 정말 절대적으로 고마운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대종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천지에 보은하는 것은 응용무념의 도를 체 받는 것입니다. 천지가 준바가 없이 베풀었으니 우리도 준바가 없이 베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영기 아심정 만사여의 아심통 천지여아 동일체”입니다. 천지여아 동일체는 천지와 같이 끊임없이 은혜와 덕을 베풀고도 준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천지는 예쁘다, 밉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천지가 되는 것, 그것이 천지 같은 위력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으니까, 자기 형편에 맞게, 힘에 맞게, 본인의 정신세력이 확장된 만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들은 어떠셨습니까? 부처님들은 바로 천지 같은 심법을 쓰신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실체가 이미 삼계를 초월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을 그대로 쓴 것뿐입니다. 육도사생을 다 내 가족으로 알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삼계의 대도사입니다.
우리 범부중생의 마음은 삼계를 초월해 있지 않죠. 마음을 비우지 못합니다. 어디에 걸려있고, 끌려있고, 막혀있고, 갖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마음은 일원상의 마음이어서 툭 터져서 걸리고 막힘이 없습니다. 그것이 본래 내 마음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툭 터진 마음으로 하면 위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신기한 것 중에 하나가 여러분 몸 아닙니까? 폐에 폐포가 있죠. 그 폐포를 꽈리라고 하는데 그 꽈리를 쫙 펼치면 테니스장 한 면이 된다고 합니다. 그 꽈리에서 혈관에 산소를 공급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기위해서는 꽈리에 좋은 산소를 공급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망할 때 혈관이 막혀서 죽거나 심장으로 죽는 거 빼고는 거의 폐가 원인이 되어 사망합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음식과 물외에는 전부 폐를 통해서 에너지가 들어옵니다. 호흡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할 때마다 배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잖아요? 이것이 왜 그러냐 하면 횡경막이 배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횡경막을 움직 이다 가는 것입니다. 계속 수십년 간을 움직여 주면서 장기도 움직이고 또 기운이 가게하고, 공기를 들이마셔서 산소가 공급되게 해주거든요. 그 하나만 해도 얼마나 은혜입니까.
육신을 낳아주신 부모 또 온전하게 건강하게 잘 길러주신 부모,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쳐준 수많은 스승님들의 은혜, 감사 생활 할 때, 스승님들의 은혜를 생각하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면 어지간히 감사 생활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엄마가 뭘 알아? 요새 청소년들이 그런답니다. 엄마는 우리를 모른다 이겁니다. 엄마는 집에 있는 사람이고, 엄마는 시대도 모르고 우리들 마음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들이 엄마를 무시하는데, 원불교 다니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효심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원불교 공부의 첫째입니다. 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이 육신을 주시고 온전히 키워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기 앉아 있는 연이는 엄마 다리 잡고 어디 가지 말라고 난리죠. 그런데 조금 크면 친구밖에 안 보입니다. 더 지나면 어떻게 되죠? 이성밖에 안 보입니다. 또 지나면 자기 자식 밖에 안 보입니다. 남자들은 자기의 돈과 명예, 직장이 최고입니다. 부모는 볼 겨를이 없습니다. 부모는 우리한테 그냥 해 주는 사람, 스승도 우리한테 당연히 해주는 사람. 부모는 부모대로, 스승은 스승대로 알아서 잘 살아라 난 내 코가 석자다 합니다. 새끼 낳고 키워보면 엄마가 이런 마음이구나. 그렇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류현진 예비교무가 한 닷새간 교당에 머물며 밥을 한다고 네이버에 물어가지고 했습니다. 32년 동안 밥을 처음 해 봤대요. 라면 정도는 끓여서 먹어봤겠지만 거기도 서울대 나와서 석사까지 했으니까 그냥 다 공부만해라 하고 봐줬겠죠.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먹고 입고 싸고 한 것들은 누가 따로 챙겨주고 치워 줍니까? 공부를 잘했던 못했던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본인이 일생 먹고 쓰는 것들을 누가 챙겨 줍니까. 류현진예비교무가 느낀 것이 참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접받으면 참 좋아요. 이 세상에 중생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대접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편하고 좋으려면 누군가는 그것을 제공해준 사람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20살, 30살 될 때까지 예외도 있겠지만 부모가 진짜 헌신적으로, 무아봉공으로 다 해줬는데 그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니. 참 어리석은 거 같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면 뭐합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 부모한테 고맙다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마움도 모르고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는 그 어리석음이 과연 똑똑한 것입니까.
원불교 공부를 하면서 스승님이 더 고마워집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얼마나 스승님들이 고마운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도 아주 열심히 원불교에서 일하셨던 분을 만났어요. 지금 88세인데 분당에 시니어스 타워에 사시는데 제가 물어 봤습니다. 다음 생에 전무출신 안 하실래요? 그랬더니 나 다음 생에 주무 할래요. 그래서 왜 주무를 해요 그랬더니. 교무님들이 하도 고생하니까 자기는 교무님들 후원하는 일을 하겠대요. 그분이 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봉공회, 삼삼회, 날마다 교당에 출근하듯이 하셨습니다. 그때 교무님들이 하도 고생하는 것을 봐서 자기는 교무 안하겠답니다. 제가 삼삼회 가서도 느꼈습니다. 삼삼회에 신심 있던 사람들이 다음 생에 교무 하실 분하면 몇 손 안 듭니다. 그 분들은 고생 한 것만 보신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고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제 퇴임교무님이 동산선원에 계실 때 각산 신도형 선생이 이렇게 강연을 하셨대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짝이 있다. 음과 양이 있고 강과 약이 있고 남녀가 있고 다 짝이 있어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학생 때 여자 교무님이 찾아가 물었답니다. 그럼 우린 뭐대요? 우리는 무엇으로 산대요?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각산님이 너희들은 유무를 초월한 사람이다. 유와 무의 짝을 초월한 사람들이다. 인간락이 아니라 유무를 초월한 천상락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맛에 사는 사람들이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렸냐. 우리가 생각하는 감사와 행복이라는 것은 현상에 나타난 감사와 행복도 있지만 절대적 감사, 유무를 초월한 감사가 있습니다. 즉 그 교도님은 미안하지만 고생한 것만 보신 것입니다. 그 교무님들이 고생 속에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그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그 속에서 참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깨치고 한 소식을 얻으면 그 기쁨, 대종사님은 오죽 기뻤으면 바로 나막신 신고 영산 한 바퀴를 도셨을까. 그것을 모르고 고생한 것만 보니까 안한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감사생활이 힘들 때 그냥 꾹 참고 마음 돌리면 감사생활인가요? 사실은 절로 되는 감사생활입니다. 사은, 인과의 은혜 속에서 사니까 이 공부하면 어떤 것도 유무를 초월해서 다 감사로 돌릴 수 있습니다. 삼세인과를 생각하니까 아하! 내가 기억 못해서 그렇지 몰라서 그렇지 다 내가 지어서 받는 것이구나 하는 이치를 알면 감사하죠. 원불교의 감사생활은 그런 감사생활입니다. 진리적, 인과적 감사, 절대적 감사입니다. 돌아가신 황수관 박사가 슬퍼도 웃고 웃다보면 기뻐진데요.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감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만 얽히고 꼬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경계가 왔을 때도 감사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때 황수관 박사가 말한 것처럼 웃어 질까요? 감사한 마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공부심으로, 신심으로, 원력으로, 정성으로 감사 생활을 한 번 해보십시오. 제가 원불교학과 다닐 때 심계가 무엇이었냐면 이 세상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 한사람도 미워하지 않기였습니다. 그런데 교무합니다보니 어떤 사교형 교무가 아주 거짓이 많고 저를 살살 건드립니다. 대중 앞에서 창피하게 만들기도 하고 괜히 지출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하도 괴로워서 출가단 단을 바꿔 버렸습니다. 후배면 모르겠는데 선배여서 피정을 선택했습니다. 뒤로는 내 뒷담화를 하면서 전화해서는 사랑하는 후배님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날 오후 과일 집에 전화해서 그 교당에 과일 두 박스를 보내줬습니다. 하도 감사해서.
여러분 그렇게 해보셨어요? 만약 제가 원불교 안 만났으면 진짜 가만 안 뒀을 겁니다. 그런데 원불교를 만나다 보니까 과일이 가는 겁니다.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당신 대종사님 덕인 줄 아시오.
감사생활을 하면 대개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듣죠. 긍정적 사고를 해라. 이 말을 진리적으로 표현하면 인과의 이치를 생각하고 참 나를 생각하면 감사 생활해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저도 황수관 박사가 웃자고 웃자고 하니까 제가 반항심이 들었잖아요? 똑같아요. 긍정적으로 살자고 하면 항상 이 말이 걸렸습니다. ‘억지로 하면 그것이 된다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성에 합일 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대로 그 긍정적으로 살자는 말을 이해한다면 사실은 상생의 도, 인과의 이치를 생각하면 그 것이 긍정적 삶입니다.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를 볼 때 두 가지 면을 다 보셔야 합니다. 어떻게 보셔야 하느냐. 합리와 불합리, 은혜와 차별 이렇게 모든 면을 다 보셔야 합니다. 한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은혜만 보면 그것도 은혜가 아닙니다. 차별을 알아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차별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또는 그 차별을 내가 은혜로, 평등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고.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정치인도 어떤 사람은 매번 차별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매번 은혜만 본다. 둘 다 아닙니다. 그래서 진보가 보수가 되고 보수가 진보가 되잖아요. 진리의 세계에, 마음의 세계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감사생활을 말합니다. 은혜의 소종래를 알아서 때로는 불합리한 것도 감사하게 구조적으로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감사생활입니다. 감사심이면 다 되는 건가? 고마워요. 이 한마디면 끝입니까? 여러분이 가게에서 물건을 집어서 “고마워요” 이러고 그냥 나와 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뭐 해야 되죠? 계산을 해야죠. 계산하면 안 고마운가? 계산 안하면 고맙고? 원불교는 먼저 은혜를 입은 내역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아는 것이 지은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은을 보은으로 가야하는데 이 보은은 무엇으로 가야 하느냐. 바로 감사입니다. 은혜를 알면 감사가 됩니다. 감사를 알면 보은의 마음이 나게 되는데 그러면 불공을 하게 됩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알아야 하고 아니까 고맙다. 그러니 갚아야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갚느냐? 불공으로 갚는다. 즉 신구의 삼업 (身口意三業)으로 갚는 것입니다. 마음공부 잘 합시다. 그게 뭡니까? 신구의 삼업으로 불공 잘합시다. 그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정성스럽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덕이 되게 하고, 그것이 다시 은혜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은혜 입은 것을 다시 은혜가 되게 만드는 것이 감사 생활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유념을 해야 합니다. 유념을 하려면 배워서 반복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도를 통해 배워서 훈련을 통해 유념하고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끝인 것입니다. 여러분 원불교 참 냉정하죠. 공부와 사업 정신 육신 물질로 이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단장을 몇 년 했는가. 단장을 했어도 갑을병정으로 주인이 돼서 했는가. 대강 했는가 다 나옵니다. 통계로 작성하기 때문에 다 볼 수 있습니다. 일 년에 한번 저도 며칠씩 걸려서 그걸 작업합니다. 저는 한 달은 잘 모르지만 일 년치는 보입니다. 딱 나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은혜를 알았는지 감사 생활했는지 보은했는지가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묘하게 기도 문화를 이끌어 나가잖아요. 대만은 불교가 실천으로 해결해서 지금 대만불교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대만에서 불교신자는 무조건 하나씩 봉사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기도만 내리 합니다. 불교에서는 첫째가 육바라밀로 보시거든요. 네가 반야를 얻고자,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보시를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불교에서 ‘보은해라. 불공해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저도 원불교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수양을 잘하면 연구가 잘 되고 연구가 잘 되어야 취사를 잘하지.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수양연구를 기본으로 해놓고 취사에 가서 다시 수양연구로 돌아옵니다. 즉 시간의 80프로를 취사에 쓴 사람이 성공합니다. 연구하고 기획, 준비하는데다가 60~70프로 쓴 사람은 거의 다 실패하더라는 겁니다. 실행을 하면서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행을 하면 어떤 배움이 있냐 하면요. 몸으로 느끼는 배움이 있습니다. 아까 실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안 될 때 실천을 해 봐라 하는 것도 있지만 몸으로 실행해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기도 하는 것 제게 백날 배워봤자 여러분이 한번 체험해서 느껴보고 하면 알아서 기도하게 됩니다. 좌선을 제가 설명해도 여러분이 좌선을 해서 맛을 느끼면 재미가 알아서 느껴집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봉공작업 할 때 옷장에 들어가서 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너는 내 법을 말아먹을 놈입니다’라고 혼내셨다고 해요. 공부해서 뭐 잘하자는 거죠? 공부해서 일 잘하자는 것입니다. 삼학을 편수하면 안 된다고 혼내신 거지요. 원불교 올 정도 되면 상당히 배우길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또 그 중에 두 부류로 나뉩니다. 몸으로 하면서 배우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배우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만큼, 은혜 입은 만큼, 느낀 만큼만 하겠다. 이런 사람은 안 큽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 보면 잘 가져다주는 아이가 있죠? 어떤 아이는 자기 것만 챙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요. 전생에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원불교 공부를 하면 다음 생에 몸 받아서 자기 것만 챙기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보은행을 체질화 시키고 습관화를 시켜 놓으면 내생에도 가져갑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잘 줘야합니다. 주는 놈이 받는 놈이지. 참 영리한 바보가 많아요, 제일 영리한 바보가 이기적인사람입니다. 본인은 영리한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버스 탈 때 감사합니다. 인사하세요? 지하철 탈 때 감사합니다. 하세요? 기사한테 문 열고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는 없고, 마음으로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러면 긍정적인 삶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만족도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이타적이 됩니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대안이 있는 비판이어야 합니다. 감사생활에 바탕 한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젊은 사람이 다 감사생활만 해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도 감사생활입니다. 평등세상을 만들겠다. 자력을 양성하고 지자를 본위해서 타자녀를 교육하고 공도자를 숭배하고 나도 공도자가 되도록. 이 세상을 인권세상, 교육평등세상, 지식평등세상, 복지평등세상이 되도록 해나가는 것 그것도 감사생활입니다. 감사생활이 마음으로 감사심을 갖자, 긍정적으로~! 이런 것은 초등학생들이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생활이 되는 것이지 감사심에 그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원망심이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원망심이 나는 것과 원망 생활하는 것은 다릅니다. 생활은 의식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의식주 생활에 있어서 나는 원망심이 나더라도 그것을 감사생활로 돌리느냐 아니면 그냥 사느냐는 다릅니다.
감사생활은 동시에 참회생활입니다. 마음이 맑아지잖아요. 마음이 맑아지면 은혜가 보이고 감사함이 보인다. 그러면 참회생활로 이어집니다. 참회가 잘 안 되는 사람은 마음이 차분하지가 않고 온전한 생각이 아닙니다. 감사생활도 그렇습니다. 원망생활 한 사람은 욕심에 가려 있거나 불평불만에 가려있거나 은혜를 느끼지 못하거나 이기적이거나 하면 가려져가지고 온전한 생각으로 감사심이 안 느껴집니다.
헌배할 때 많이 느낀바가 있었습니다. 1000배를 하고 감상담을 하면 참회의 마음이 든다고 하고 미운사람이 안 미워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혼자 용서하지 못 했다가 용서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 따라서 고마워지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강연한 것 짚으면서 봅시다. 3페이지에
정산종사 법문에 보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데 3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째는 지혜로 돌린다. 지혜로 돌린다는 것은 마음공부로 돌린다는 것이죠. 둘 째 진리로 돌린다 라는 것은 인과와 영생을 하나로 플러스해서 해결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실천으로 돌린다는 것은 보은한다는 이야기도 되고 동시에 몸으로 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잘 안 해줬어요, 저는 항상 마음속에 나는 큰일하고 바쁜 사람이니까 집안일은 정토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했습니다. 광주수련관에 근무할 때 언제 한 번 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쉬는 날 정토가 출근을 해서 내가 어린 애기들을 아침에 두 놈을 깨워서 씻겨서, 먹여가지고, 유치원 차 태워서 보내고 나니까 그 뒷정리 해야지 청소해야지, 빨래해야지, 하고 났더니 벌써 점심 때 더라구요. 하루 금방 갑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집에서 노는 것이 아니구나. 한가한 것이 결코 아니구나. 실천을 해보니까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언제 우리가 제일 원망생활 해요? 내 마음 몰라줄 때? 내 마음 몰라 줄 때 참 서운하죠. 그런데 내 마음 100프로 알아줄 사람 이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본인밖에 모르고, 때로는 본인도 모르는데 누가 해결하겠습니까? 본인이 해결하세요.
언제가 또 제일 원망생활 할 때 입니까? 진심이 났을 때, 언제가 제일 성질이 나십니까? 무시 받을 때가 아니라 무시받는다 라는 생각이 들 때. 혼자 무시 받는다 생각하면 성질이 납니다. 무시도 안했는데 혼자 무시받았다고 생각해서 화가 납니다. 또 무시받으면 더 화나죠. 욕심이 많으면 더 화납니다. 자기입장에서 갑자기 누가 공부도 잘하고 잘 풀리고 그러면 배가 아프고 그러죠? 상대적 가난이라고 하죠. 내 뜻대로 안됐을 때가 제일 괴로운데 사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건 목표 자체가 잘 못 된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인도에서 고통을 고라는 말로 풀어 낼 때 내 뜻대로 안될 때가 고통입니다 라고 풀어냈다고 해요.
이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냐. 만약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다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내 뜻대로 되게끔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겠죠. 그러나 내 욕심껏 되는 것은 없죠.
억울할 때도 너무 원망스럽죠. 전생에 내가 했던 것이 기억이 안 나면 더 억울합니다, 어떤 청년이 와서 갑자기 나를 째려봐요. 왜 째려보겠어요? 뭔가 나한테 서운한 것이 있었겠죠. 그런데 내가 원인을 알면 째려봐도 속으로 미안해하거나 미안합니다 라고 말해서 원망이 안 들텐데, 그런데 내가 겁나게 잘해줬는데 째려봐. 또는 연락이 없지 사라지거나 험담하면 괴롭습니다. 대개 가까운 사이에 선연 악연이 생기잖아요. 특히 남자들은 어디서 악연이 많이 생기냐면 사업합니다가 악연이 많이 생깁니다. 옛날에 한 교도가 자기가 죽어도 용서를 못하겠는 사람이 한명 있다고 하더라. 자기는 그 사람한테 너무 잘해줬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변심해 버린거에요. 그러니까 도저히 그 사람을 용서를 못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인천교의회 의장이었던 분인데, 원래 목재 수입상이었는데 그 분이 한 번은 누구를 조용히 죽이려고 했어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뒤로 험담하고 음해를 하고 해서 안 되겠다. 내가 어떻게 은혜를 줬는데 네가 나에게 배은을 할 수 있느냐 하고 죽일 계획을 세웠대요.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로 목재 좋은 것을 보러 가자. 그렇게 해서 가다가 조용히 바다에 빠뜨리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고 이 사람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교전을 읽었는데 “이정원이 여쭙기를~증애에 끌리지 않는 법” 그 법문을 읽고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우리가요 가까운 인연 속에 특히 내가 정말 잘해줬는데 그 사람이 은혜를 딱 놓아버리고 나에게 음해를 하거나 피해를 줄 때는 참 괴롭거든요. 성격 따라 다 다릅니다. 지시형은 폭력. 관계형은 소송. 사교형은 뒷담화. 사색형은 뒤에서 저주기도합니다. 소송이라는 것이 아주 치열합니다. 칼만 안든 전쟁입니다.
내가 진짜 억울할 때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내가 수용이 안되는 것이죠. 그때 여러분이 어떻게 감사생활 하실 겁니까?
원불교 법은 생활 불교입니다. 너무 전생만 따져도 안 됩니다. 이생이 더 중요합니다. 기억이 없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예를 들어서 자식이 죽었다거나 갑자기 병이 걸리면 인과로 돌릴 수 있으나 현실적 사업관계는 때로는 소송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유무로 수용할 수 있는 건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되면 소송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냐는 다릅니다. 너는 사람도 아니다. 당해봐라 이것은 처처불상이 아닙니다. 너는 욕심으로 문제를 일으키니 나는 그것에만 집중해 해결하겠다.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파리 잡을 때도 다르다고 했죠. 미안합니다 하는 것과 죽어버려라 하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로 돌린다 할 때 제가 아까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인과와 불생불멸 삼세를 통하면서 인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가 기억이 안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생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기도도 해보고 또는 삼세를 보는 스승한테 물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상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상이 있으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더 원망하게 됩니다. 조금 더 생각하면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은혜를 안 갚으면 내생에 우리 집에 소로 와서 꼬리까지 다 주고 갑니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세요. 나한테 빚지고 도망간 사람 내생에 우리 집 소로 와서 꼬리까지 다 주고 가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여기 굳이 왜 감사 생활해야 하나요? 발견해야 하나요?
우리가 은혜를 알고 느끼고 발견하는 것이 잘 안 되잖아요. 당연한 것이 은혜로 보여요? 아까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대은이 무은이라고. 작은 은혜들은 잘 보이는데 큰 은혜는 잘 안 보입니다. 평등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근원적인 것, 지속적인 것, 무형의 것은 은혜로 안 보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보는 눈을 갖추는 것을 유무념으로 잡아서 해보세요. 일기 쓰는 것도 감사 일기를 한 번 써보세요. 그리고 그 감사의 근원까지도 추구하면서 일기를 써보세요. 현상적 감사와 그 감사의 뿌리까지 한 번 찾아보세요. 여러분 내가 물 한잔 마시는 것도 밥 알 한 톨도 쭉쭉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은 전체인 것입니다. 밥 한 톨도 간단히 말했지만 그 쌀 한 톨이 나오려면 누군가는 포장해서 우리 집에 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수확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모를 심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농약을 했을 것입니다. 천지는 햇빛을 계속 주었을 것이며 비도 내려주었을 것이며 이래서 쌀 한 톨이 나오는 거잖아요.
실천으로 돌린다. 젊은 시절에 임원을 한 번도 제대로 안하고 일반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습관이 되어서 잘 안합니다. 청년 때는 공부삼아서라도 임원을 자기 역량보다 조금 힘에 버겁게 한번 맡아 봐야 합니다. 청년회 때 공부는 이런 공부도 공부지만 내가 일속에서 열심히 합니다가 사심이 안나 피곤해서 톡 쓰러져 자는 것 이것도 공부인 것입니다. 이것이 큰 공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역량이 터집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실지 공부입니다. 한가하게 일 없이 내 힘에 맞게 적당히 찾아서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살다보면 일이 몰릴 때가 있고요 일이 없을 때가 있고 하거든요. 내가 평상시 단련해 두지 않으면 그 때 아파버리던가 도망가 버리던가 큰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평상시에 해놓아야 합니다. 원불교학과 3학년 마치고 원불교학과 회장하고 나서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와도 할 수 있겠다. 힘에 딸리면 타력을 활용하고, 일의 원리는 알겠다하는 자신이 붙더라는 겁니다. 결국은 내가 실행을 하고 나니까 그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회장을 하면서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공부삼아서 젊었을 때 해보셔야 합니다.
훈련 나면 감사 생활 됩니다. 우리 공부하면 감사심이 납니다. 그리고 아까 디테일 이야기 하셨는데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현상을 보면 현상 이면을 보고, 현상의 뿌리는 찾아 들어 가야합니다. 어떤 하나의 단순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쌀 이야기처럼 쌀이 쌀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쭉 그 안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현상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여자분들이 디테일하게 잘 하기는 합니다. 감사생활을 여자분들이 훨씬 더 잘 챙기고 합니다.
가장 잘 사는 사람은 이 마음을 발견해서 은혜를 알고 느끼면서 살고, 몸과 다른 것은 불공하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취사입니다. 원불교 취사는 보은불공이 취사입니다. 그것이 마음공부고 내 삶의 주인이요. 그것이 가장 복을 짓는 일이고 가장 재밌는 일,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이 체가 똑 떨어져야 합니다. 공부삼아라도 누군가 집안에서라도 뭐라도 하니까 돌아가잖아요. 어디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 문화원도 그냥 된 것이 아니거든요. 제가 조명 설치할 때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이렇게 조명과 스위치 많은 곳을 보았습니까? 제가 일일이 다 체크하고 설명하며 해주었습니다. 밝아야 할 때는 밝게, 조금만 켤 때는 조금만 켤 수 있게 다 해놓았습니다. 이런것도 감사히 여겨야합니다.
세상에 은혜 아님이 없습니다. 여러분 걸치고 입고 들고 다니는 것 다 은혜 덩어리입니다. 진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감사심이 아니라 생활로 된다면 그것이 훨씬 더 깊은 생활이 될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삐딱한 생각은 좋습니다. 그런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삐딱함, 대안이 없는 삐딱함은 원망생활입니다.
첫댓글 정리작업 이자인교우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타나 수정사항 있으시면 이야기 해주세요
정리해주시느라 무척 수고가 많았을 자인교우님 사랑합니다 ♡
와...두분 고생하셨네요~ 도자부와 객원여러분들...묵묵히 애써주시는 공덕 빛이 납니다^^
자인교우님 감사드려요 ㅎㅎ 저도 부원님들 본받아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ㅡㅡ*
오~~~ 새로운 도자부 법륜이구나! 앞으로 활약 기대할게!
자인이가 여기저기 보이지 않게 하는일이 참말 많군 감사해용~ 은서교우도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대단하세요 진짜! 저도 사랑합니다
정리해 주셔서 공부 편하게 하네요ㅠㅠ 두 분과 굠님 감사드립니다 !!
내가 여기에 댓글을 안달았었구나 ㅋㅋㅋ 자인교우 감사해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은서, 자인교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