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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의 문화재- 국가 지정 문화재)
1.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율·논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종 목 국보 제5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종 목 국보 제206호
지 정 일 1982.05.22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4.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종 목 보물 제12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73-4 (치인리 산1-19)
시 대 고려시대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5.합천 치인리 마애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2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5 (치인리 산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해인사를 뒤로 돌아 가야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옆의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7.5m의 불상을 표현하였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고 높직하다. 미소가 없는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눈꼬리, 두꺼운 입술, 턱주름 등이 표현되었으며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여 얼굴과 함께 자신만만한 자세의 불상을 나타내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왼쪽 어깨에서 매듭을 지어 고리를 만들었으며, U자형으로 연 가슴에는 내의가 보이고 띠매듭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어 손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손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생동감이 느껴진다.
머리 뒤에는 단순한 원형의 머리광배가 있을 뿐인데, 이를 지탱하는 자연광배가 몸광배 구실을 겸하는 것 같다. 얼굴과 두 손은 정교하게 조각한 반면 신체는 마치 돌기둥에 새긴 듯 옷주름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 불상은 각 부분의 표현이 힘있고 당당하면서도 세부수법에서 세련된 면이 보여 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마애불상으로 추정된다.
6.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26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4-21 (치인리 산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해인사에 모셔져 있는 이 석불입상은 광배와 대좌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목이 절단되고 어깨와 두 팔이 모두 깨졌으며 발도 없어졌다.
민머리에는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많이 닳고 손상되었다. 머리에 비하여 왜소해진 몸은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돌기둥 같은 느낌이 든다. 좁아지고 각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쪽에서 비스듬히 흐른 선이 중심에서 만나 날카로운 V자형을 이루다가, 허리 부근에서 U자형으로 바뀌어 두 다리 사이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팔꿈치를 꺾어 가슴 앞으로 들었고, 왼손은 내렸는데 두 팔은 몸에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 불상은 신체 비례의 불균형, 평면적이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7.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종 목 보물 제518호
지 정 일 1970.06.2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30)
시 대 통일신라시대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 석탑이다. 탑신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머리장식받침)이 낮게 있고, 그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높직하게 남아 있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하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
8.합천 해인사 동제 소종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0호
지 정 일 2003.09.18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고려시대
청동의 재료로 주조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총 높이는 30.2㎝, 구경은 21.8㎝이다.
용뉴와 입상화문대, 상대, 유곽, 당좌, 하대를 갖추고 있다. 용뉴의 용은 종속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모습이며 음통은 죽절형으로 끝부분은 화문이 표현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화문이 있고 상대 아래에 4개의 유곽이 있는데 유곽대는 운문이며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있다. 당좌는 유곽 사이에 모두 4개가 표현되어 있다. 종신의 일부가 깨져나갔고 그 옆으로 균열이 있다.
하대의 당좌 사이에는 점각으로 ‘해인사 상소이암’이라는 명문이 있다. 현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에 있다.
9.합천 해인사 희랑대 목조지장보살좌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5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53 (치인리 4)
시 대 조선시대
불상 좌대는 15개의 못으로 돌아가며 고정해 당시 좌대의 고정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좌대 밑면에는 주서로 제작연대 및 원래의 봉안사찰, 시주자, 제작자 등을 기록해 두었는데 시주자나 화원의 이름 중 일부가 박락되어 있다.
높이 30cm의 소형 목조상이며, 방형의 얼굴에 민머리를 한 지장보살상이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를 보이지만 어깨가 다소 빈약하고 무릎이 높은 편이며, 상의 규모에 비해 두 손이 크게 조성되었다. 얼굴은 이마가 넓은 방형이며, 콧대로부터 얼굴의 옆선까지 길게 그은 눈, 삼각형의 오똑한 콧날, 앞으로 돌출된 입이 특징이며, 미소가 없는 인상은 다소 침울해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인으로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어 같은 손가락을 결하였다. 오른쪽 어깨에는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양어깨 특히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쳐 내리는 변형통식의 대의를 입었으며, 편삼 옷자락은 배 밑에서 대의 밖으로 내어 전체적으로 ‘W’자처럼 보이는 조선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따르고 있다.
뒷면은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대의 자락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편평하고 밋밋한 가슴 밑으로 수평의 승각기와 발목아래의 군의자락은 대칭을 이루며 양측으로 정리되었다. 좌대 아래에 적힌 명문을 통해 1677년(강희16년)에 불영산 쌍계사의 법당에 있는 삼존불상을 중수하면서 더불어 지장보살상 일구를 새로 조성하여 인동의 가섭암에 이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조성한 화원은 글씨의 일부가 지워져 정확하지 않으나 ‘自珪’라는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자규는 1655년부터 1677년까지의 활동이 확인되었으며, 경남과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알려져 있다. 민머리의 지장보살상은 신체의 비례, 방형의 얼굴, 변형통견식의 착의법등 17세기에 유행했던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정리된 옷주름이 특징적이며 옆으로 유난히 긴 눈과 앞으로 살짝 튀어 나온 입은 독특하다.
조성화원으로 추정되는 자규는 경상남·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로 보조화승의 활동과 중수화원으로 전할 뿐 수화원으로 불상을 조성한 사례가 밝혀진 바 없었기에, 해인사 희랑대 불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의 작풍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써 중요한 불상이다.
10.합천 해인사 삼화상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6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 삼화상 진영의 전체적인 구도는 가로로 긴 화면에 중앙에 좌안칠분면의 조사와 그 좌우에 각각 좌안칠분면과 우안칠분면으로 묘사된 세 분의 조사를 한 화면에 그려놓고 있다. 중앙의 조사상은 왼쪽 무릎을 세운 후 그 위에 왼손을 얹혀두고 오른손은 측면으로 내려 갈고리 모양의 지물을 쥐고 앉아 있다.
이 조사상은 좌우의 조사상과는 달리 약간 더 붉은 안면색에 흰 수염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가슴 부위에 구멍이 뚫린 모습을 표현하고 있어 해인사 수장되어 있는 보물 999호인 목조희랑조사상을 모델로 하여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각상에서의 홀쭉하게 긴 얼굴과 작은 눈매가 이 진영에서도 나름대로 표현되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화면 좌우측에 석장을 쥐고 앉아 있는 조사상들은 눈매 및 지물과 의습처리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초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향우측 조사상은 향좌측 조사상보다 약간 처진 눈매에 얼굴 주름이 더 많고 오른손에 염주를 쥐고 있어 좌측에 순응조사를, 우측에 이정조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나 명확하지는 않다.
각 조사상의 사이와 화면 아래쪽 좌우에는 공양물을 들고 있는 천동과 천녀 네 명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천동과 천녀 역시 대칭적으로 표현되어 화면에 변화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배경으로 처리된 암반이나 산언덕 및 폭포와 소나무의 표현에서도 드러나고 있어 전체적으로 화격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얼굴에는 음영을 약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육신의 윤곽선은 갈색으로, 의문선 등은 담묵선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들 필선들은 곧고 바른 철선을 사용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채색되어 있는 이 삼화상진영에서 화면 가운데에 묘사된 희랑조사는 연보라색의 장삼에 적색 가사의 전답 끝부분인 쇠끝에 백색바탕에 화문을 그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나머지 두 조사상은 녹색 장삼에 적색 가사는 끝단을 흑색으로 처리하고 옷의 안감을 삼청색으로 칠한 후 양청으로 바림을 하고 있다.
암반과 산언덕 등은 옅은 바탕색으로 칠해져 화면이 밝으며 소나무는 담채의 줄기 표현과는 달리 녹색 바탕에 백색선으로 묘사된 솔잎 표현이 너무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있어 이 시기에 제작된 탱화들과 양식적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처럼 세 분의 조사를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은 나한도에서 간혹 간취되는 형식이며, 각 조사상의 표현에서는 진영도 형식을 따르고 있고, 천동과 천녀 및 소나무와 계곡 등의 심산유곡의 묘사에서는 산신탱의 형식 또한 보여주고 있다.
향우측 조사상의 아래면 가장자리와 연결된 곳에 마련된 적색바탕 화기란에는 광서 18년(1892) 해인사에서 조성하여 해행당에 봉안하였고, 금어로는 우송상수이며 출초는 두명비구가 하였다는 화기를 묵서로 적어두고 있다. 채색이나 구도적인 면에서 19세기 말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해인사 창건과 중흥에 관련된 3인물을 한 화면속에 담은 금어 상수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 있는 조사도이다.
11.합천 해인사 국일암 벽암선사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7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국일암 소장의 벽암존자진영은 전형적인 18세기 후반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는 있으며 화면 중앙에 오른쪽을 향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벽암존자상을 단독 배치한 진영으로 대각선 구도를 보여 정적인 화면에 운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근엄한 듯 자상한 얼굴에 오른 손은 무릎 위로 내려 검지손가락을 들어 변화를 주고 있으며, 왼손은 의자 팔걸이에 기댄 채 왼 어깨에 걸친불자를 잡고 있다. 내의 깃과 소맷자락 및 흰색 동정과 대조를 이루어 깔끔한 느낌을 주는 다갈색 섞인 녹색장삼은 전반에 걸쳐 녹색 돋을 선을 사용하여 옷주름과 문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왼 어깨에 매듭을 지어 걸친 선홍색의 가사에는 금색 문양이 화려하다.
의자 등받이의 홍색 바탕에는 구름무늬와 함께 고리형태의 둥근 무늬와 마름모 무늬를 장식하였으며, 테두리로는 화려한 꽃무늬를 둘러 경직되고 무거워진 분위기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의자는 우향하여 사선을 이루며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와 달리 앞․뒤 다리 길이의 차이를 두지 않고 원근법에 다소 어긋나게 모두 똑같은 수평선상에 둠으로써 표현의 미숙함이 엿보인다.
그림의 배경은 의좌상 진영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화문석 바닥과 벽을 두어 공간을 구성하였으며, 우측(향좌) 상단에는'사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지진상'이라는 제명이 쓰여져 있다.
12.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지 정 일 2009.12.03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4-19 (치인리 18)
시 대 일제강점기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의 입구 쪽에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승탑과 탑비가 나란히 있으며, 먼지로 인해 표면이 약간 변색되어 있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용성선사(1864∼1940)는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으며, 이후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불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활동을 했다.
용성선사 승탑은 외형이 탑에 가깝다. 이중 기단 위에 탑신을 3개 얹은 방형 평면의 3층탑 형태로, 상하 기단에는 우주와 각 면에 각각 1주씩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 위에는 위층 기단 받침이 몰딩되어 있고, 위층 기단 위에는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는 낙수면이 두껍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며 층급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머리장식 받침)과 복발(탑의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부분)을 두었다.
탑비는 이중으로 마련된 지대석 위에 귀부, 비신, 이수를 올려놓았다. 귀부는 웅크린 채 네 다리에 힘을 주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윗면에는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 당초문대를 돌렸다. 귀부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방형비좌는 가장자리가 중엽 연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수는 반룡 2마리가 마주 보고 있으며 비신에는 용성선사의 생몰년과 업적 등이 적혀 있는데, 비신의 우측면에는 “용운근 찬 오세창 전”이라 되어 있어 한용운이 비문을 짓고, 비신의 두전을 오세창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용성선사 승탑은 고려시대의 강원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1388년) 2기 외에는 없는 희소한 형식의 불탑형 승탑이다. 비슷한 높이의 이중기단이나 3층의 탑신 형식 등은 해인사에 경내의 길상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조각 형태와 수법을 갖추고 있다. 용성선사와 함께 삼일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대표자들 중에 포함되었던 한용운 선생이 비문을 짓고, 오세창 선생이 탑비의 두전을 하였다는 점은 용성선사가 근대 역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기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독립투사 3인이 이루어낸 역사적인 산물로써의 의미가 크다.
13.합천 해인사 국일암 구품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3호
지 정 일 2011.07.2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합천 해앤사 국일암 구품도는 1885년(광서 11년)에 수화사 수룡당 기전이 제작한 불화이다.
구품도는 염불하여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조선후기 신앙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품도는 관경십육관변상도의 모티프를 이어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구품 연못이 확대되는 독특한 도상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구품도라는 주제로 불화의 한 분야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자 한다.
14.합천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4호
지 정 일 2012.07.19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신중도는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한다. 첫째는 예적금강을 중심으로 좌측에 제석천, 우측에 대범천, 그 아래에 동진보살(위태천)을 그리는 경우이다. 둘째는 제석천,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의 3위를 중심으로 한 신중도이다. 셋째는 제석천과 대범천만을 중심으로 그린 신중도이다. 넷째는 동진보살(위태천)을 위주로 한 신중도이다.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을 중심으로 그린 탱화이다. 대체로 이러한 구도의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상단에 배치하고 동진보살(위태천)을 하단 중앙에 배치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이 모두 상단에 배치되어 있어 다른 신중도와는 구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
대체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중도는 동진보살(위태천)의 비중이 제석천과 범천에 비해 높아지면서 동진보살(위태천)을 화면의 중심에 배치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에 비해 도상의 크기도 작고 약간 뒤쪽으로 물러서 있는 구도를 보이고 있어 동진보살(위태천)의 비중이 오히려 작다는 느낌을 준다.
제석천과 대범천은 두광과 신광을 모두 표현하였는데, 모두 녹색으로 채색하였지만 제석천의 신광은 자색으로 채색하여 구별하였다. 대부분의 신중도에서는 제석천과 대범천의 자세가 같은데 비해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은 서 있지만 대범천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상의 자세에 차이가 있다.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19세기 말의 일반적인 신중도의 구도와 달리 화면 구도가 비교적 단순하고 도상의 자세도 차이가 있으며, 18세기 신중도처럼 동진보살(위태천)보다 제석천과 대범천의 비중이 더 큰 구도를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 신중도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되고있다.
15.합천 해인사 원당암 고승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2호
지 정 일 2014.03.2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30)
시 대 조선시대
합천 해인사 원당암 소장 고승진영은 해인사에 주석했던 선사 11분을 영정으로 조성하여 주법당인 보광전에 봉안한 작품들이다.
진영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제작된 작품으로 파악되며, 그중 취운당 진영의 경우 1853년이라는 기년명과 함께 우희라는 화승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후기 및 해인사에서 제작된 경상도 고승진영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 552-1호 : 영허당 진영, 1폭
제 552-2호 : 화월당 진영, 1폭
제 552-3호 : 취운당 진영, 1폭
제 552-4호 : 용봉당 진영, 1폭
제 552-5호 : 침월당 진영, 1폭
제 552-6호 : 능운당 진영, 1폭
제 552-7호 : 성파당 진영, 1폭
제 552-8호 : 서파당 진영, 1폭
제 552-9호 : 예봉당 진영, 1폭
제 552-10호 : 연월당 위패형 진영, 1폭
제 552-11호 : 연곡당 위패형 진영, 1폭
16.합천 해인사 감로왕도
종 목 보물 제1697호
지 정 일 2010.12.2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1723년 심감, 신오, 득총이 조성한 해인사 감로왕도는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화임에도 구성이나 존상 표현 등에서 조선 전기의 감로도 형식이 많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화면 구성은 제단을 중심으로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지는데, 망자를 천도하기 위해 강림하는 불보살이 그려진 상단부분이 강조된 반면, 의식이 거행되는 장면과 천도의 대상이 되는 망자의 모습이 매우 조밀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감로도가 상단에 불보살, 중단의 의식장면, 하단의 망자 등으로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상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철위산을 표현한 산수를 배경으로 도량에 강림한 칠여래가 크게 강조되어 그려졌으며, 그 왼편 아래로 아미타삼존이 제단을 향해 내영하는 모습을 그려 의식장면과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관계가 이어지도록 구성하였다. 아미타삼존불 아래에는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있으며, 제단 아래에는 금빛 발우를 든 아귀와 합장을 한 아귀를 배치하였다. 제단 오른쪽에는 번을 든 인로왕보살과 석장을 든 지장보살을 그려 지옥의 문을 깨 망자를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일련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천인, 왕후제상을 비롯하여, 전쟁으로 죽은 이, 우차에 깔려 죽은 이, 홍수로 죽은 이 등 다양한 죽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해인사 감로도는 화면 구성이 유기성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불보살을 비롯한 각 존상의 세부 묘사와 녹색, 홍색을 중심으로 분홍, 노랑, 청색 등이 조화가 뛰어나다. 또한 배경을 이루는 청록산수는 안견화풍으로 그려져 중앙화단과 불화간의 영향관계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7.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종 목 보물 제1777호
지 정 일 2012.10.3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통일신라 말~고려 초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제작된 목조불상으로 1m가 넘는 크기에, 조형성은 물론 조각적인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이다.
동글동글한 나발, 이상화된 얼굴과 당당한 신체 표현, 신체에 감기듯 팽팽하게 걸쳐 입은 편단우견의 착의형식과 더불어 치켜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의 형태, 긴장감 넘치게 조각된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
복장유물로는 다라니, 발원문 그리고 후령통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1167년경과 1490년의 중수 때 납입된 것이다. 특히 1490년에 납입된 후령통은 안립 절차에 입각하여 정확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조상경』이 간행되기 이전에 이미 복장의식이 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사씨 일가에 의해 납입된 반야심경의 발원문은 1167년(고려 의종 21)에 불상에 대한 중수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여서 이 불상의 하한연대 결정에 결정적인 자료이다.
이 밖에 1150년, 1156년, 1166년에 각기 판각한 『대비로자나성불경등일대성교중무상일승제경소설일체다라니』가 발견되었다.
복장물 가운데 3점의 조각보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조각보의 역사가 500년 이상 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홑저고리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령통 내부의 오보병은 그 구성이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독특한 방식을 갖추고 있어 직물사와 복장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8.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종 목 보물 제1778호
지 정 일 2012.10.3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1. 반야바라밀다심경
이 경전은 당 현장법사가 번역한『반야바라밀다심경』이 전체 4면의 절첩장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상하간 19.7cm, 무계, 1면은 6행 16자, 2~4면은 5행 16자이며, 표지 제첨은 10.5×3.3cm의 크기에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먹으로 쓰여 있다.
권말제 다음에 “복위선백부상서공부시랑사위왕생서방견불문법지원인성시정해구월일봉삼보제자국자진사사겸광지”(삼가 돌아가신 백부이신 상서공부시랑 사위가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불법을 듣게 되기를 기원하여 <이 경을> 인출한다. 때는 정해년 9월 모일이다. 삼보를 받드는 제자이며 국자감 진사인 사겸광은 쓴다.) 라는 주필로 쓴 지문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경력을 지낸 인물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지문에 보이는 사위는 문공유(? ∼ 1159)의 묘지명을 쓴 사위(검교태 자대보 승무낭 항시상서공부시랑을 역임)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이 맞다면 이 지문은 1159년과 가까운 정해년인 1167년(고려 의종 21)으로 추정되고, 이『반야심경』은 12세기에 판각 인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복장 유물의 시대를 추정할 때에도 이 지문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16∼20
이 경전은 동진의 불타발다라가 번역한『대방광불화엄경』진본 60권 중 권16~20의 잔본 1책이며 호접장본이다. 상하단변, 좌우쌍변에 반곽 24.5×15.8cm, 무계이며, 반엽이 17행 34자로 된 소자본 화엄경이다. 판심에는 ‘진십육’, 권차, 장차 순으로 되어 있으며, 표지가 없고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거란본 계통의 번각본으로서 함차의 표기가 없는 점에서 사찰본으로 추정되는 귀중본이다.
19.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종 목 보물 제1779호
지 정 일 2012.10.3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크기나 착의법 그리고 표현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시대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겨진다. 다만 세부적인 표현과 제작(속파기) 기법 상의 미세한 차이, 과학적 분석 결과 등을 참고할 때, 법보전의 상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다만 1167년을 하한으로 볼 수 있는 발원문이 복장에서 발견되어 이 불상이 늦어도 고려 1167년 이전에 제작된 상임을 알 수 있다.
1167년 이 지역 유력 세력이었던 사씨와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중수, 고려 14세기 후반에 화살 명장 송부개의 중수 참여, 그리고 1490년 조선 왕실 주도로 이루어진 개금중수 사실만으로도 한국조각사에서 중요한 불상이다.
또한 이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현재까지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중 최대·최고 수준이다. 법보전과 동일한 내용의 발원문 2매 외에도 17종의 다라니가 확인되었다.
이 밖에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섬유류 유물이 함께 복장되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요선철릭(허리에 선장식이 있는 철릭), 답호, 저고리, 사경낭, 주머니, 직물 편 등 12점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은 1490년에 납입된 것으로 저고리를 비롯하여 보자기, 오색후혈장엄 등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현전하는 고려시대 복식 유물이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요선철릭이나 답호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더불어 1490년에 납입된 홑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저고리 유형을 알 수 있어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20.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종 목 보물 제1780호
지 정 일 2012.10.3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되어 1167년(고려 의종 21)과 14세기, 1490년(조선 성종 21)에 중수된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79호)’에서 수습한 복장전적 중 일부(8건 37점)이다.
①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51∼57: 12세기 목판본. 가로 18.5cm, 세로 30.2cm.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총 60권의 진본 《대방광불화엄경》 중 제51~57권이다. 1행에 34자가 배치된 소자 판본으로 거란본(거란에서 편찬된 대장경)을 바탕본으로 하여 판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②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10: 12세기 목판본. 가로 18.7cm, 세로 30.2cm. 당나라의 반야가 번역한 총 40권의 정원본 《대방광불화엄경》 중 제1~10권이다. 1행에 34자가 배치된 소자 판본으로 거란본을 바탕본으로 하여 판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③ 금광명경 권3: 12세기 목판본. 가로 57.2cm, 세로 29cm. 축 형식(두루마리, 17장 연결). 호국신앙의 중요 경전으로 여겨지는 책으로, 북량의 담무참이 번역한 전4권 19품 중 제3권이다. ④ 반야바라밀다심경: 12세기 목판본. 가로 11.6cm, 세로 26cm. 절첩(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책) 형식.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이다. 말미에 ‘정해년 9월 국자감 학생 사유직이 부친의 무병장생을 기원하여 경전을 인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해년은 1167년(고려 의종 21)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불상을 중수하며 이 경전을 비롯한 복장물들을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⑤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12세기 목판본. 가로 49.5cm, 세로 26.6cm. 축 형식(15장 연결).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약사경》으로, 변상도(경전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그림)가 있다. 사찰에서 펴낸 사간판이다. ⑥ 초조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12~13세기 목판본. 가로 46.8cm, 세로 26.9cm. 축 형식. 고려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에서 찍어낸 《약사경》이다. 총 52축이 발견되었는데, 훼손 없는 판본은 30축이다.
⑦ 백지묵서사경: 12~13세기 필사본. 제2~9장 가로 281.5cm, 세로 14cm. 축 형식(9장 연결). 중반과 후반부에 당나라 규기의 《아미타경소》 일부가 초서로 필사되어 있다. ⑧ 감지금니문수최상승무생계법: 1326년(고려 충숙왕 13) 필사본. 가로 6.4cm, 세로 8.3cm. 절첩 형식. 인도 출신 승려로 고려에 온 지공이 자신이 번역한 《문수최상승무생계경》에서 계율 관련 내용을 간추려 감지(짙은 남색 종이)에 금니(금물)로 써 제자 각경에게 준 책이다. 변상도가 있는 작은 절첩으로, 제작연대가 적혀 있다.
8건 모두 전래본이 거의 없는 희귀본이거나 귀중본·유일본으로,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1.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
종 목 보물 제1799호
지 정 일 2013.04.29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합천 해인사 지장시왕도’는 1739년에 대시주 처옥의 발원에 의해 수화원 혜식을 비롯한 6명의 화승이 관음전 불화로 조성하였다. 구도에서는 지장삼존과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녀, 옥졸 등 31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밀도 높게 표현하되, 중앙의 본존에 비하여 권속들을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함으로써 많은 권속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하였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형태에 안정감이 있고 신체 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안정된 색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인물묘사에서 수염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낸 것에서 화승들의 필력이 숙달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명부전 지장보살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불화로, 18세기 전반 경상남북도 지역 불화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22.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
종 목 보물 제1806호
지 정 일 2013.07.1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합천 해인사 내전수함음소 권490 목판’은 1245년(고려 고종 32)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여 완성한 경판이다.
내전은 부처의 설법을 담은 불경이고 음소는 음에 대한 해석을 뜻하는 것으로, 내용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여섯 가지 실천덕목인 육바라밀다를 설명한 것에 대한 주석이다. 본문은 반야가 한역한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의 10권에 대한 음의가 수록되었고, 권말에는 ’을사세 고려국 대장도감 봉칙조조‘의 간기가 있다.
지금까지 대장경 목록에도 없이 인쇄본만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경판은 대장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3.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
종 목 보물 제1865호
지 정 일 2015.03.0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고려시대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는 당의 실차난타(652~710)가 신역한 주본 80 화엄경 가운데 제72권으로 현재 해인사 사간판의 모본으로 추정될 뿐 아니라 고려대장경을 간행할 때에 저본으로 사용되었던 수창 4(1098)년 판본의 국내 전래본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희귀본이며, 불경과 불교학 및 서지학의 연구에는 물론 고려시대 목판인쇄문화의 연구에도 크게 활용될 수 있을 귀중한 자료이다.
24.합천 해인사
종 목 사적 제504호
지 정 일 2009.12.2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등
시 대 신라시대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이곳의 돌과 물, 붉은 소나무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치인리 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이 있다.
뛰어난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해인사 지역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25.가야산 해인사 일원
종 목 명승 제62호
면 적 20,952,454㎡
지 정 일 2009.12.09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85 (치인리 산1-1) 등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이곳의 돌과 물, 붉은 소나무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이 있다.
뛰어난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해인사 지역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26.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65.10.12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광해군 비(妃) 유씨, 그리고 궁중의 정5품 상궁이 입었던 의복 4점이다. 1965년 해인사 장경판고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 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이 의복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의류는 담청색 직령 1점, 백삼 1점, 홍삼 1점, 자주저고리 1점 등 4점이다.
이 의복들은 재봉질 못지 않은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세련되었던 바느질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복 습관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