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 했을 때쯤 노나라 임금 정공과 나눈 정담을 온고지신(溫故之新)의 차원에서 음미해봅니다. 논어 제13편 자로(子路) 제15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공.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는 일이 과연 가능하오?
공자. 말한마디로 그렇게 할 수 없으나 그에 가깝게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군주 노릇도 어렵지만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군주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것의 이치를 안다면 그것이 바로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키는 것과 가까운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정공. 그렇다면 한마디말로 나라를 잃게 하는 것도 가능하오?
공자. 한마디 말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나 그에 가깝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군주 노릇을 하는 것 자체는 즐겁지 않지만 다만 내 말을 어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즐겁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그 말이 옳아서 아무도 거스르는 자가 없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 말 이 옳지 않는 데도 거스르는 자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하는 것과 가까운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위번역문은 신동준의 ‘교양인의 논어’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은 지면관계로 생략합니다.
지도자 될 사람이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고 있으면 아무리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지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순리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투철한 지도자다운 인식이 없으면 후유증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극단적 조치에 의존해서라도 쉽게 바로잡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지도자의 올바른 태도는 위공무사(爲公無私)입니다. 좌절하더라도 이상을 가지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하는 말이 옳지 않은데 그 말을 거스르는 자가 없다면 나라를 잃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말도 와닿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도자의 독단은 위험천만이므로 금물입니다. 만의 하나 지도자가 독단의 망령을 부릴 경우, 훌륭한 2인자의 역할이 부각되기도 합니다.
어제 오후 EBS 명화 극장에서 상영한 “A Few Good Man”의 영화에 담긴 교훈도 비록 엄격한 군율 즉 Unit, Corp, God, Country라는 신조가 지배하는 엄격한 병영생활에서도 각 개체의 인권을 중시하고, 부당한 상관의 명령은 따를 의무가 없다는 점을 군사법정에서 평결을 통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code red라는 폭력적 군기 잡는 명령을 내린 해병부대장에게 유죄평결을 내리는 영화를 보며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여건속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신성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유린한 부대장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감동적인 군사법정 장면으로 영화는 대미를 장식합니다. 비록 유약하여 부대 지휘에 지장을 초래하는 부대원일지라도 그의 인권을 존중하고 조직원으로서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협조를 얻어 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고 책무이라고 영화는 깨우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리더의 선한 영향력이 그 조직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리더의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비록 소그룹의 좌장자리라도 부담스러워 하며 맡지 않고 사양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예를 들면 ‘질문빈곤사회’의 저자 김남순 교수님은 리더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리더는 학력의 고하 또는 권력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모든 관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중적보기방식(double mode of seeing)을 지니고 있다. 권력의 중심부 만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이들까지 동시에 본다. 리더란 다양한 권력이 작동하는 곳에서 중심과 주변을 늘 함께 보면서 주변부까지 포용하는 사람이다.
둘째, 리더 란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될 때, 사실과 진실을 토대로 그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셋째, 리더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정의(감)에의 예민성이다.
넷째, 리더는 현재 만이 아니라 늘 미래를 기억하는 이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의미는 무엇 인가. 지금보다 나은 관계, 지금보다 나은 공동체,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생각하면서 그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다섯째, 진정한 리더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 목표를 추구하고자 에너지를 가지도록 ‘설득의 예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리더로 이미 정해진 사람은 없다. 리더란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 자기 학습 그리고 타자들과 열린 대화를 하면서 리더로서 만들어지는 (becoming)존재다.
윤석열 대통령의 헌법 재판소 탄핵 소추 결심이 가까워지니 자천타천의 오직 권력의지에 불타는 후보들이 출판기념회 등을 열고 몸을 슬슬 풀면서 대통령 후보가 될 기회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하나같이 권력의지에만 도취 되여 허장성세(虛張聲勢)와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하지만 지도자로서 자격은 미지수입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최초의 민주주의 공화국 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준비 없이 집권한 민주주의 권력은 비틀거렸습니다.
군국주의 국가였던 독일 제국의 법관들은 겉으로는 민주주의헌법을 받아들였지만 실상은 국가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헌법적 정의, 자유, 민주주의 원칙을 정치의 문제라며 법의 영역에서 몰아 내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권력행사가 헌법에 부합하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사법부가 헌법 판단을 하지 않으니 민주주의와 시민들은 헌법의 보호를 잃게 되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고 히틀러 독재가 시작되었을 때 헌법을 거부했던 법관 중 상당수는 나치의 충실한 심부름 꾼이 되었습니다. 권력행사가 헌법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하지 않고 실정법만을 최고의 원칙으로 따르겠다는 ‘순수한’ 법사상은 나치 통치동안 수많은 악법과 학살의 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에 사용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사법기관이 헌법의 테두리를 초과하는 대통령의 권력행사를 눈감아 준다면 민주주의, 법치주의 그리고 시민의 자유 등 모든 헌법적 가치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권력과 권력이 선동하는 군중들의 위협에 기죽지 않고 헌법적 정의를 선포하는 당당한 헌법 재판관들이 시민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이상적인 헌법재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유닛(EIU)가 최근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4’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지수는 2023년 8.09점에서 지난해 7.75점(10점만점)으로 급락했습니다. 순위도 10 단계 급락해 167국가 중 32위를 기록했습니다. 아시아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일본, 대만, 호주, 뉴질랜드 등과 ‘완전한 민주주의’등급에 속했는데, 지난해 유일하게 ‘결함 있는 민주주의’국가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윤대통령의 12.3 비상 계엄 선언이 지수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EIU보고서에서 ‘윤대통령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정치적 대립은 정부 기능과 정치문화점수의 하락을 초래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민주정치는 모든 시민들이 법률에 따라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민주주의는 중도가 많아야 사회가 안정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도를 신봉하는 허리가 굵어야 건강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건과 관련하여 온나라가 양극단으로 나뉘어 내전상태에 버금가는 분열과 갈등으로 치 닿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 그리고 보수신문과 진보 신문 매체 할 것 없이 이성을 잃고 반쪽 진리로 자기편 응원에 열을 올리며 분열적대결에 불쏘시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위공무사(爲公無私)”즉 오로지 국가의 안위를 생각 하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제발 이성을 되찾고 조용히 헌법재판소의 최종 평결을 기다립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조치가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부정선거를 알아보기 위한 연성 비상계엄 조치였는지, 아니면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초 법적인 중대한 월권 행위였는지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립시다.
헌법재판소의 평결을 기다리는 동안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의 주장 ‘중도가 많아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논리를 음미 해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진실은 극단을 피하고 중간지대로 이르는 중도에 있다. 또한 중도적 진실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중도는 수학적인 중간, 즉 한가운데를 의미하지 않는다. 중도는 왼쪽과 오른쪽이 만나고 위아래가 만나며, 앞과 뒤가 만나는 삶의 교집합이다. 중도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 만나는 중립지역이다. 생명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 상하, 그리고 전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면서 균형을 잡는다.
중도세력이 많은 사회는 안정적이다. 종도 세력은 배의 평형수와 같은 존재다. 사회가 지나치게 왼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에 힘을 주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왼쪽에 힘을 보태 전체적인 균형을 잡는 세력이다.
개인의 인생 행로에도 중도적 균형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향된 사고 방식은 자신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혼재한 현대 사회에서 중도적 균형은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필요한 덕목이다.
-위의 글은 서동석 지음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중심사상을 설명하는 저서 “삶의 만족은 어디서 오는가”에서 인용했습니다.
헌법 재판은 여론 재판이 아닙니다. 제발 좀 담담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립시다. 헌법재판소와 헌법재판관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법치주의를 무너트리는 행위를 선동하거나 방관하는 행위는 우리가 모두 마시는 상수원을 독극물로 오염시키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국가의 사법 시스템을 무너트리는 범죄행위는 당국에서 엄단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공기 인 언론기관들도 정론직필(正論直筆)로 헌법재판소와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부당한 공격과 험담에 대해서 여야를 막론하고 철퇴를 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헌법재판은 여론 재판이 아닙니다. 책임 있는 정당과 언론은 이성을 회복하여 여론의 선동을 멈추고 ‘위공무사(爲公無私)의 자세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