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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은 김교신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1931년 '산상수훈의 해'를 보낸 김교신은 1932년 공덕리에서 세 번째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1932년 1월 1일의 일기는 이 무렵 김교신의 사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날 김교신은 새해를 맞은 감상을 꽤 길게 적고 있다.
경성 시외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활인동 130번지에서 제3년째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집터는 아직 야마모토 하루오 씨의 땅을 빌리고 있어 매년 25엔 20전씩 세를 내고 있다. 건물은 기와집 8칸, 흙벽과 초가인 헛간 3칸인 것을 소유하였으니 우선 부족함이 없다.
모친은 임오생이시니 만 50세가 되는 해요, 아내가 정유생으로 만 35세, 나는 31세, 진술이 16세, 시혜가 6세, 정혜가 3세요, 그 외 태중에서 만삭된 것과, 심부름하는 김순선으로써 한 가족을 이룸. 대문에는 우편에 ‘성서조선사’의 명찰이 붙고, 좌편에는 나의 이름이 붙었다.
<김교신 일보>, 홍성사, 2016, 12쪽.
이어서 <동아일보> 1932년 1월 1일자 신문에 실린 고시조 몇 편, 기사 몇 개를 인용 또는 요약한 후 다시 생생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1년 첫날 아침에 등교하여 나는 모든 의식에 불참하는 자라는 별명이 있다 함을 서봉훈 씨에게서 듣다. 금년부터 잘 참석하라고 하기에 신년식의 말석에 섰다.
연하장 쓰기와, 다치이와, 후쿠다, 우메다 등 여러분에게 새해 인사 다니다가 해가 저물다.
저녁에 경성제면소로 류영모 선생을 찾아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밤 11시를 지나서 물러나니 문 밖에는 오리온자리가 찬란하였다.
<김교신 일보>, 13쪽.
양정학교 교사였던 김교신은 ‘모든 의식에 불참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프로불참러’쯤 되겠다. 이 말을 전해준 서봉훈이라는 이는 양정의숙 졸업생으로 후에 양정학교 교장을 역임했다고 하니 1932년 당시에도 양정학교에서 유력한 교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김교신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의식에 잘 참여하라는 경고성 발언이었을 것이다. 김교신이 ‘프로불참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 무렵 그의 일기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32년의 김교신은 대단히 바빴다. 양정학교 교사로, <성서조선> 편집자로, 1인 2역을 해야 했다. 성서연구회는 활인동 모임을 이끌고 있었고, 오류동 모임은 이즈음 책임을 면하기로 했지만 여러 문제로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2월 5일, 2월 7일 일기 참고). 1월에는 동네 장로교회의 설교 요청, 소사 감리교회의 부흥회 인도 등으로 쉴 틈이 없었던 탓에 2월 초에는 일주일 동안 감기로 앓아누웠다.
그즈음에는 손님들의 내방이 잦아 <성서조선> 원고 작성과 편집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1월에는 20일에야 편집을 마무리했고 원고를 두 벌 써서 총독부와 인쇄소에 동시에 맡겨서야 겨우 발행 일자를 맞출 수 있었다. 2월에는 15일에 편집을 마무리하기 위해 밤새 작업을 해야 했다. 3월에도 15일에 밤새 원고를 집필하고 두 시간 자고 출근해서 오전에 ‘성서통신’까지 써서 원고를 마무리했다. 4월에는 18일 되어도 원고 집필에 진전이 없어 ‘초조한 마음 가눌 길 없다’고 쓰고 있다. 24일 밤새 집필하고 25일이 되어서야 겨우 편집을 마쳤다.
김교신은 가장으로서 집안을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모친을 모시고 있었으며, 1932년 1월에 넷째 정옥이 태어났고, 둘째 시혜를 보통학교에 보냈으며, 수색에 새로 주택지를 마련하기 위해 교섭하기도 했다. 양정학교 교사로서도 소홀함이 없었다. 활인동 자택에는 늘 학생들이 기숙하였다. 손기정 등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양정학교 학생들을 격려하는 일에도 늘 맨 앞이었고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성서조선> 원고 집필과 편집으로 밤샘을 하고도 출근하여 강의했다. 이 바쁜 중에도 박물학회 강연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베어 씨의 영어회화반에 출석하였다.
이토록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교사 위로회, 친목회 등 연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절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가 참석해야 하는 의식 중에는 일본 전승기념일, 출정식 등 식민지인으로서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그에게 붙은 ‘프로불참러’라는 별명은 불성실이나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나님과 세계 앞에 단독자로 서 있었던 그에게 있어 겉치레 의식에 참여하는 것보다 내적 충실함이 요구되는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의식에 불참하는 자라는 비난은 도리어 내적 충실함의 증거일 수 있었다.
김교신은 이런 바쁜 생활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가 이렇게 바쁜 중에도 15년 동안이나 <성서조선> 편집을 이어가고, 교사이자 기독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성서조선> 1932년 1월 ‘성서통신’은 분주하여 내면의 침착함을 잃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31년 11월 15일(일요)
오전은 오류동에 오후는 본댁에서 집회하고 밤에는 동네 장로교회에서 설교하다. 심히 분주하여 침착함이 없음을 느끼는 때에 평양으로부터 성탄제의 출강을 유인誘引하는 모 형제의 서장書狀이 내도來到하야 여차히 하다가는 필경 여배余輩도 「화 있을 자」로 마칠 것을 깊이 놀랐다.
<성서조선> 36호. 1932년 1월.
지나치게 바쁘게 살다가 ‘화 있을 자’로 끝나게 될 것이라며 스스로 살피고 있거니와, 이렇게 분주한 중에도 그가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일에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성서 연구였다. 김교신은 2월 14일 일기에서 성서 공부의 유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전 집필. 오후 2시에 연구회. 사무엘상을 말씀하다. 남에게도 유익하려니와 첫째로 나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다. 성서 공부는 할수록 유익.
<김교신 일보>, 31쪽.
<산상수훈 연구> 연재를 마친 김교신은 신구약 성서 대지를 정리하는 일에 착수하여, 1932년 3월 <성서조선> 38호에 수록한 <창세기 대지大旨>를 시작으로 성서 대지를 연재하였는데 이 작업은 1942년 3월 <성서조선>이 폐간되기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성서조선>은 <데살로니가전서 강의>를 채 마치지 못하고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32년 1월 10일 김교신은 성서연구회 모임을 재개하면서 <성서 연구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이 글을 <성서조선> 37호에 수록하였다. 이 글에서 성서연구회 모임의 목적이 성서 연구에 있음을 밝히면서 '날마다 살기 위하여 살 힘을 얻기 위하여' 성서를 공부한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성서 연구는 이론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도를 깨닫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의 성서 연구는 삶을 위한 것이었기에 고난마저도 유익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성서의 진리는 그것을 믿고 한걸음 내디딜 때 진리를 행하는 힘이 되고, 다시 그 힘으로 더 높은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평온무사한 때에는 암매에 폐쇄되었던 성구도 일단 사변에 부딪혀 읽을 때에는 보고의 문은 열리고 진리의 광휘는 백배로 나타나고 진리에 의거하여 일보를 행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행하는 능력이 용연히 가하여진다. 일보를 나아감으로 힘은 가하여지고 힘이 있음으로 다시 더 높은 진리의 영정으로 향하게 되니 이른바 '가진 자에게는 다시 더 주시고 없는 자에게는 가졌던 것까지 빼앗는다'는 것이다.
그라므로 신앙생활에 가정 안으로써 혹은 외로써 환난 핍박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반가워할 일이다. 이를 인하여 성서연구의 목적을 달할 수 있는 고이다.
<성서조선> 37호, 1932. 2. 6쪽.
1932년 3월 <성서조선> 38호에는 <창세기 대지>를 시작함에 앞서 <성서의 대지大旨>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 글은 이후 10년 동안 이어질 성서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다. 이 글에서 김교신은 성서 연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금강金剛을 보는 이가 비로봉을 택하야 산내山內의 만이천봉과 산외의 영맥수계를 일별一瞥에 통괄統括하듯이 일권一卷으로써 백천百千의 대저작을 통솔할만한 세계대世界大의 책이 있으니 그것이 곧 책 중의 책이란 바이블 즉 구신약 성서 한 책이다. (중략)
이 세계대의 서책 중에서 그 무진장으로 포용한 부원富源을 인식하고 그 보고寶庫를 개척함으로써 극도로 수척한 반도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영양에 넘치도록 하고저 하는 기망企望으로부터 본지本誌의 존재가 발원된 것이다. 고故로 성서에 대한 오인吾人의 인식은 단순한 궤상机上의 이론이 아니다. 전全신앙과 전全생명이 그 동정動靜을 성서와 함께 한다.
<성서조선> 38호, 1932. 3. 6-7쪽.
이 글에서 김교신은 성서야말로 세계의 수많은 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이며, 이 책을 연구함으로써 조선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성서조선>의 목적임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다. 김교신에게 있어 성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신앙과 생명 전체를 건 일이었다. 성서 연구에 신앙과 생명 전체를 걸었다는 이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는 이후 10년 동안의 성서 연구가 증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