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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1982년] 프로야구 출범
← MBC 청룡의 이종도선수(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종도선수가 만루홈런을 치고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6번타자 이종도의 상대는 한국 제일의 좌완투수 이선희였다. 7-7, 10회말 2사만루, 2만여 관중은 숨을 죽였다. 볼 두개를 골라낸 이종도는 가운데로 쏠린 3구째를 강타했다.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결승 만루홈런.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서 MBC 청룡이 삼성 라이온스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영웅이 된 이종도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홈 플레이트를 밟았고, 이선희는 더그아웃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경기는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듯 홈런 4개를 포함, 26안타가 터지는 화끈한 타격전이었다. 청룡은 4-7로 끌려가던 7회말 유승안의 3점 홈런포로 동점을 만든 뒤 10회말 경기를 뒤집어 마지막에 웃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는 정열을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선량한 여가선용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다.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트(부산),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 삼미수퍼스타즈(인천), OB 베어즈(대전) 등 6개구단으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그해 관중 143만8768명(평균5995명)을 동원, 화려하게 돛을 올렸다. 원년 챔피언은 OB 베어스가 차지했다./조선
[1968년]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사망
인류 최초로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1968년 3월 27일 사망했다.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한 가가린은 콜호즈 구성원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라토프의 공업중등기술학교 재학중에 항공 클럽에서 비행 기술을 익혔고, 오렌부르크의 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공군에 입대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48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 감상을,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우주비행에 성공한 뒤 중위에서 소령으로 특진하여 우주비행사대 대장 등을 지내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1968년 3월 27일 비행 훈련 중 타고 있던 제트 훈련기가 모스크바 근교 블라디미르주의 한 마을에 추락하여 사망했다./조선
[1845년] 뢴트겐 Wilhelm Conrad Röntgen 출생
1845년 3월 27일 태어남 / 1923년 2월 10일 죽음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있던 뢴트겐은 1895년초 음극선을 연구하다 우연히 X-선을 발견해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 이후 X-선의 발견에 자극받은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음극선의 입자성이 발견되었고, 이것은 상대성이론의 출현과 파동이며 입자인 빛의 이중성 인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X-선을 통해 사람의 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의사들이 그 효용성에 주목했다. 그밖에 그는 탄성, 유체의 모세관현상, 기체의 비열, 결정 안에서의 열전도 등을 연구했다.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공로로 1901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862] 익산민란 발발
← 임술농민항쟁을 기록한 <임술록>
철종 13년인 1862년 3월 27일 농민들이 전라도 익산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임술년 삼남지방에서 잇달아 일어난 임술농민항쟁 가운데 하나로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익산은 도결·환곡 등의 부세와 군역세를 불법으로 징수했으며, 내수사에 대한 진상과 공물이 많아 폐단이 심했다. 농민들의 저항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진사 홍정이 군수에게 수세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옥에 갇히자, 농민들이 몰려가 군수를 고을 밖으로 내쫓았다. 조정은 익산에 안핵사를 파견해 봉기에 적극 가담한 농민들을 효시(梟示)하거나 처벌했으며 군수 또한 유배시켰다. 이후 조정이 실시한 삼정이정책(三政釐整策)은 농민들이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인 성과물 중의 하나였다./브리태니커
[1351년] 보마누아르와 브램버러 간 30인전투 발발
1351년 3월 27일 보마누아르와 브램버러 간에 조슬랭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30인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는 당시 브르타뉴 공작령 계승권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는 블루아의 샤를파(派)와 잉글랜드 왕의 지원을 받는 몽포르의 장파(派) 간에 벌어진 전쟁 중 하나였다. 플로에르멜의 잉글랜드군 대장 존 브램버러가 계속 조슬랭 지구를 약탈하자 조슬랭의 대장이며 브르타뉴의 원수였던 장 드 보마누아르는 브램버러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이리하여 1351년 3월 27일 양측에서 선발된 30명의 전사, 기사, 종자(從者)들이 플로에르멜 근처에서 싸움을 벌였다. 보마누아르측의 30명은 브르타뉴 출신이었으며 브램버러측의 전사들은 잉글랜드인 20명과 독일 용병 6명 및 브라방송인 4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칼·단검·갈고리철퇴를 동원한 이 싸움은 특히 부상을 입고 물을 달라고 하는 자기 대장에게 조프루아 뒤 부아가 "네 피를 마셔라, 보마누아르여. 그러면 갈증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 나오는 부르군트족의 마지막 전투를 연상시킨다. 기욤 드 몽토방이 말을 타고 7명의 잉글랜드군 전사를 무찌르자 승부는 판가름났으며 나머지는 모두 항복했다. 전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며 브램버러도 죽었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약간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브리태니커
[1958년]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에 선임
니키타 흐루시초프(Khrushchyov, Nikita, 1894~1971)가 1958년 3월 27일 수상으로 선임됐다. 니콜라이 불가닌 전 수상의 뒤를 이어 수상자리에 올랐으나 흐루시초프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막대한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스탈린 사망 후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부터 경쟁자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온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 총리의 농업정책을 비판해 1956년 그를 사직하게 했고, 몰로토프와는 유고슬라비아 문제로 대립했다.
제20회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비밀보고로 ‘스탈린 비판’을 제기했다. 이 보고에서 당규범의 파괴와 충실한 간부들의 숙청, 독소 전쟁 초기의 외교적, 군사적 과오,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를 스탈린의 잘못으로 지적했지만 내용이 무원칙적이고, 사실 확증이 결여돼 있어 몰로토프, 말렌코프, 불가닌, 주코프, 셰피로프 등 유력 간부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흐루시초프는 반대자들을 ‘반당 그룹’으로 지목, 그들을 요직으로부터 추방하고 친척이나 자파의 신인들로 대체했다. 이렇게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한 그는 1961년 제22회 당대회를 주재하여 ‘신노선’을 채택했다. 1964년 실각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한글 간소화’ 특별담화
1954년 3월 27일,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3개월 이내에 현행 한글 맞춤법을 버리고 한말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읽기에 힘이 들고 쓰기에 복잡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 대통령 개인의 불편함이 더 크게 작용했다.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수십년간 변화해 온 한글을 제대로 접하지 않다가 광복 후 본격 사용하기 시작한 한글표기가 불편했던 것.
일반 국민들의 불편함을 내세워 이 대통령의 취지에 찬동하는 학자도 일부 있었지만 반대 여론이 더 많았다. 현재의 맞춤법이 복잡하다해도 한말 성경에 사용된 맞춤법도 문제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또 3개월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글 간소화 주장은 1949년 10월 이 대통령의 담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6·25가 논쟁을 가로막았다.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1953년 4월,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와 교과서 만이라도 옛 맞춤법을 사용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의하면서였다.
문교부까지 나서 반대해도 이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편수국장 최현배와 문교장관 김법린이 사임하며 반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담화가 발표됐고, 7월 3일에는 ‘앉았다’를 ‘안잣다’로, ‘좋지않다’를 ‘조치안다’로 표기하는 한글간소화 시안까지 발표됐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국회까지 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결국 이 대통령이 1955년 9월 19일 한글간소화 추진 입장을 철회함으로써 7년에 걸친 한글간소화 파동이 일단락됐다./조선
[1899년] 무선 전신의 아버지 마르코니, 영국과 프랑스 간의 무선통신 시작
← 굴리엘모 마르코니 초상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1874~1937)는 리보르노 공과대학을 다녔다. 1894년 H.R.헤르츠가 사망하자 헤르츠파(波)의 응용에 착안하여 아버지 집에서 무선전신(無線電信) 실험을 시작하였으며, 1896년 무선전신에 관한 영국 특허를 취득하여 런던 체신청에서 최초의 공개실험에 성공하였다.
1897년 런던 마르코니 무선전신사(社)를 창립하고, 도버해협에서 영국~프랑스 간의 통신을 실현시켰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송수신은 1901년 12월 12일 콘월주(州) 폴듀와 캐나다 뉴펀들랜드주 세인트 존스 사이에서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무선전신은 해저(海底) 전신사업계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선박(對船舶)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 외에도 1901년 단일 안테나에 의한 동조식(同調式) 및 다중전신동조(多重電信同調) 방식, 1902년 자기검파기(磁氣檢波器), 1905년 수평지향성 안테나 등을 발명하였다. 그 후 그의 회사에 J.A.플레밍을 비롯하여 많은 과학자들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통신거리의 연장, 동조(同調)의 개선 및 공전(空電)·혼신(混信)의 제거에 주력하였다. 1909년 K.F.브라운과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의의 이탈리아 전권대표(全權代表)가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Crimean War] 발발
1854년 3월 27일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 사이에서 크림전쟁(Crimean War)이 발발했다.
크림전쟁은 크림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시작됐으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그리스정교도들의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러시아가 몰다비아·왈라키아 등에 침입하여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오스만투르크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의 연합군은 크림반도에 약 6만여 대군을 배치시키고, 세바스토폴을 포위했다. 그 후 러시아함대는 그들의 열세를 인정하고 세바스토폴만에서 그들의 함정을 침몰시키고 항구를 폐쇄시켰다. 러시아의 육군은 11개월간이나 연합군에 맞섰으나 결국 세바스토폴의 남쪽을 점거당해 북방으로 물러나야했다.
전쟁 중 니콜라이1세는 사망하였고 1856년 3월 파리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사후 수습에 들어갔다. 전쟁결과, 러시아는 몰다비아의 나뉴브하구와 베사라비아의 일부를 넘겨주어야했고, 흑해에서 자유항해는 인정되었지만 군함항해는 금지되었다. 또, 러시아 국내에서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운동과 여러 가지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 /조선
[1592년] 거북선 진수
1591년(선조 24)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순천부(順天府)의 영지에 부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특수전함인 거북선을 만들 것을 착안하였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여수(麗水)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진수한 것은 1592년 3월 27일이고, 이에 장치한 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를 시험사격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그 뒤 거북선은 당포해전(唐浦海戰)에 처음 출동한 것을 시작으로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891년]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朴重彬) 출생
← 박중빈
1891. 3. 27 전남 영광~1943. 6. 1.
호는 소태산(少太山). 농부인 아버지 성삼(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鎭燮), 청년시절에는 처화(處化)라 불렀다.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라 불렀다. 7세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20년 가까운 구도생활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산신(山神)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했고 다시 도사(道士)를 만나려 고행을 계속했다. 산신이나 도사를 모두 만날 수 없게 되자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빠지기도 했다. 26세 되던 해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소태산은 스승의 지도 없이 스스로 깨친 진리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으며, 또한 진리를 깨친 기쁨을 "맑은 바람 솔솔 불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저절로 밝게 드러나도다"(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라고 표현했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큰 깨달음을 얻은 1916년을 원불교의 창립 원년으로 하고 4월 28일을 대각 개교절이라 해 크게 기리고 있다. 진리를 깨친 지 몇 달 후 40여 명의 신자를 얻은 소태산은 이들 중에서 9명의 표준제자를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저축조합운동·방언공사·혈인기도 등을 통해 교단 창립의 터전을 닦았다. 1918년에는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에 들어가 약 5년간에 걸쳐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구상하고 제정했다. 1924년 전라북도 이리에 총부를 건설해 '불법연구회'란 임시교명을 선포하고 교회사업을 시작했다. 이후로 소태산은 약 20년간에 걸쳐 이곳 총부에 주재하면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와 "동정일여 영육쌍전"(動靜一如 靈肉雙全),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佛法是生活 生活是佛法) 등의 교리 표어를 내걸고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지향하는 새 종교운동을 전개했다. 소태산은 1926년 신정의례(新定儀禮)를 발표해 당시 민중들의 예법혁신을 단행했고, 1935년에는 〈조선불교혁신론〉을 발간해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했다. 소태산의 불교혁신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원상(一圓相)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사은(四恩)의 신앙과 삼학(三學)의 수행으로써 모든 종교의 진리를 융통·활용한다. ② 모든 경전과 교서(敎書)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쉬운 말과 글로 평이·간명하게 편찬한다. ③ 교당은 교도가 많은 곳에 설치하고 남녀 교역자를 두루 양성해 원활한 교화를 도모한다. ④ 모든 신자는 정당한 직업을 가져 자력생활을 하고 사회발전에 공헌하며, 영혼구제에만 치우치지 않고 정신생활과 육신생활을 조화있게 한다. ⑤ 모든 의식과 예법은 진리와 사실에 근거해 간편을 위주로 하고, 시대에 맞고 대중이 다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 ⑥ 법의 계통을 재가·출가의 차별이 없게 하고 법위의 높고 낮음에만 따르게 한다. ⑦ 출가 교역자에 대해 결혼을 법으로 제한하지 않고 각자의 뜻으로 결정하게 한다. ⑧ 교단의 운영에 재가와 출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참여한다.
소태산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사회개혁가·농촌운동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예법개혁을 통해 당시의 번잡한 유교예법을 과감하게 혁신했으며, 허례폐지·미신타파·근검저축·공동출역 등을 통해 농민계몽과 생활개선에 앞장섰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재능으로는 남다른 손재주 하나 없고 아는 것으로는 보통 학식도 충분하지 못하거늘, 나같이 재능 없고 학식 없는 사람을 그대들은 무엇을 보아 믿고 따르는가"라고 했다. 1941년에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전법게송(傳法偈頌)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제자들은 소태산을 후천개벽의 주세불(主世佛)로 존숭하고 있으며, 흔히 그를 '평범한 성자'라 부른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열반한 6월 1일을 육일대재라 하여 기념한다. 1971년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 노루목에 그의 대각을 기리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기념비가 세워졌다.
[1871년] 독일의 소설가, 수필가 만(Mann, Heinrich) 출생
1871. 3. 27 ~ 1950. 3. 12
사회참여작가로서 빌헬름 2세 치하 독일의 전제적인 사회구조를 맹렬히 비난한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형이다. 처음에는 출판업을 시작했으나 부유한 곡물상이었던 아버지가 죽은(1891) 뒤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베를린에 살며 오랜 기간을 해외, 특히 프랑스에서 보냈다. 〈환락의 땅에서 Im Schlaraffenland〉(1900) 등 초기 소설에서는 상류사회의 퇴폐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후기 소설은 빌헬름 치하 독일에 퍼져 있는 부·지위·권력에 대한 탐욕을 다루고 있다. 폭군 같은 한 시골학교 교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소설 〈운라트 교수 Professor Unrat〉(1905)는 〈푸른 옷의 천사 Der blaue Engel〉(1928)로 영화화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Die Armen〉(1917)·〈충복 Der Untertan〉(1918)·〈우두머리 Der Kopf〉(1925)로 이루어진 3부작 〈제국 Das Kaiserreich〉은 전제국가가 만들어낸 사회 유형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한층 높인 것이다. 이러한 소설에 덧붙여 권력층의 오만과 피통치자들의 비굴함을 공격하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작은 도시 Die kleine Stadt〉(1909)는 이 시기에 씌어진 비교적 가벼운 작품이다. 1918년부터 만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탁월한 대변자가 되어 〈권력과 인간 Macht und Mensch〉(1919)·〈정신과 행위 Geist und Tat〉(1931) 같은 정치논문집을 펴냈다. 나치가 집권하자 1933년 망명을 떠나야 했으며, 여생을 프랑스와 미국에서 보냈다. 소설 〈앙리 4세 Henri Quatre〉(2부작, 1935, 1938)는 권력을 인간답게 쓰고자 하는 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밖에
2002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A등급 회복
1999년 서울대 황우석 교수, 한우송아지 복제에 성공(이름 진이)
1998년 증권관리위원회 해체
1998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남성발기부전증 치료제 `비아그라` 승인
1997년 미국 사교집단 `천국의 문` 신도 39명 집단자살
1990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2심에서 사형선고
1987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씨에게 피습
1980년 팔레스타인 자치협상 재개
1979년 토지개발공사 발족
1977년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로스로데오스 공항서 여객기 충돌로 582명 사망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23년 10개월 만에 철수
1969년 베트남, 제10회 파리회담에서 평화5원칙 제시
1964년 알래스카에 대지진과 해일, 185명 사망
1963년 내각, 시국수습협의회 개최
1951년 6-3-3-4학제실시
1950년 남로당 무장 총책임자 이주하 검거
1933년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2년 수영스타 뮬러, 6대 타잔으로 출연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발기회 개최
1912년 조선공립소학교관제 공포
1898년 러시아, 여순항과 대련만 조차
1893년 독일 사회학자 칼 만하임 출생
1871년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 출생
1812년 홍경래난 진압
1802년 영-프랑스 아미앵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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