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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주님변모주일)
내면과 현실을 잇다
왕하2:9~12; 고후4:3~6; 막9:2~9
칼 융이 말년에 쓴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라는 자서전 서문 첫머리에서 융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하지요.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형성 과정들을 묘사함에 있어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과학의 문제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말의 뜻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든 삶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무의식의 세계)를 아는 세계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에 긍정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떨 때는 예술가의 작품처럼 예술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융처럼 거대한 탐험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도 모두 다 알지 못하는 무의식들이 의식으로 드러나면서 점점 자기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지게 됩니다. 즉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의식화해서 우리가 아는 현실과 연결 짓는 일, 다시 말해 무의식과 의식의 통합은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숱한 혼란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무의식을 만날 때 엄청난 혼란이 오고, 그것을 현실로 가져올 때 깊은 고통이 있습니다. 가령,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고, 자기 깐에는 의롭게 산다고 살아왔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계기로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이 무너지고 찌질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남들에게 드러날 때(실은 자신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당분간 크고 작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그 새롭게 발견한 것을 보이는 현실(즉 일상)과 연결 지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나의 조각들이 이리저리 드러내는 세계를 나는 혼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꿈작업이나 집단상담에서 남들이 그것을 드러내 보여줄 때,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내 것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경고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꿈 작업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상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정직”과 “용기”는 최대의 미덕이 됩니다.
저는 그림자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은 사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융은 자신이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려고 하는, 생기의 원천이기도 하고 성장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알지 못하는 세계”는 우리의 삶을 단일하고 피상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좀더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눈으로 보게 하는 원천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에서 좀더 깊고 넓은 의식을 가지고, 작은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작은 영광에 취하지 않는, 건강하고 유연한 사람이 됩니다.
이 무의식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과정과 경험들이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디 종교라는 말,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 religio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지요. 라틴어 religio는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다시(re) 연결한다(잇는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현실, 또는 우리가 아는 “나”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즉 영적인 힘과 원천과 접촉하고 연결하는 일이 바로 종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도로서의 종교를 넘어서는 심층적인 종교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깨어나는 것이요, 조명, 즉 빛을 받는 것이지요.
상담에서, 의식화 된 것, 즉 새롭게 발견한 것들은 일상의 삶과 연결 짓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난 아하 체험이나 통찰들이 개념에, 생각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연결 짓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얘기들이 오가고, 오묘한 통찰들이 오가더라도, 그것이 현실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을 얘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야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저 머리속에 머물고, 개념으로 끝나면, 그것은 그저 딱딱한 도그마(교리)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관건은 하나님의 힘과 우리의 현실과의 연결입니다.
오늘은 산상변모주일, 혹은 주님변모주일입니다. 우리는 매년 사순절로 들어가기 직전 주일을 산상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인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산상변모 사건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끝내시고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시점에 산상변모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전조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변모사건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고 옷마저도 새하얗게 빛이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변화산은 복음서에 특정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다볼산이라고 알려진 산입니다. 예수님의 산 위에서의 변모는 시내산에 올랐던 모세가 하얗게 빛이 났다는 전승을 이어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그 변모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세 제자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그들도 그 광경을 보고는 겁에 질렸습니다. 아마도 이 장면은 인간이 평소 경험할 수 없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언뜻 본 장면일 것입니다. 알지 못한 세계와 접촉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단지 혼란과 알지모를 감정의 형태만 지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상태를 통해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을 구름이 뒤덮었다고 했는데, 이는 가장 심오한 어떤 경험을 일컫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와중에 세 명의 제자들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겁에 질려있는 제자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껴안으시는, 아주 깊은 내적 포옹을 경험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쉼을 누렸을 것입니다. 기독교 영적 전통에서는 이것을 ‘관상’에 대한 묘사라고 말합니다. 이 체험으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시공을 넘어선 세계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 중에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작동을 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을 모시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은 무의식 중에 나온 베드로의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현존”으로 우리를 직접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엄청난 신성의 힘을 감당도 못하고,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의 기본 유형은 보통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과 걸어가신 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은 언제나 우리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아직 그 목소리를 직접 듣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알맞게 준비될 때 내면의 말씀은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와 맞물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조심스런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성경이라는 외적인 말씀과 예배라는 의식적인 전례에 잘 조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말씀묵상, 그리고 말씀공부를 통해, 성서의 말씀이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내적 말씀(내적 불꽃)과 잘 공명될 때, 우리의 내적 체험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내적 말씀의 바탕은, 바로 우리 안에 조성되는 내적 침묵입니다. 내적 침묵이란, 외적 침묵과 민감한 주의성 안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우리의 “존재의 근저”가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의 외적 소유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존재의 근저”가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내적 침묵의 결과이며, 이 깨달음 자체가 바로 내적 침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이 내적 침묵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 우리는 성경의 외적 표현들을 제대로 수신할 수 있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적 침묵이 우리 안에서 점점 커져갈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청의 능력도 커져갈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 복음서가 말해주는 예수님 변모의 빛은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비추어집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의 얼굴에서 빛났던 그 빛,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비추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빛으로 우리는 내적 침묵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의 존재의 근저를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참된 힘과 권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지난 주일에 우리의 엑수시아, 즉 우리의 진정한 힘과 권위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 우리가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본질, 내적 존재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라는 말씀이 울려나오는 그 곳에서 우리의 진정한 힘과 권위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이후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 그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삶,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의 세계를 매일 파괴하면서 더 큰 세계를 향해가는 혼란과 고통스런 삶 속에서 우리가 정말 힘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근저”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임재 안에 고요히 머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르지 못하고 산 아래 마을에 머물렀던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가 14절 이하에 나옵니다. 산 아래 마을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한 병자의 부모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지만 고쳐주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디서나 거품을 흘리고 몸이 뻣뻣해지면서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병에 걸린 아이였습니다. 성경에는 귀신 들린 아이로 묘사되지만, 요즘으로 하면 아마도 간질병에 걸린 아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산 위에서는 주님변모의 놀라운 경험이 있었지만, 산 아래서는 이런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산 아래에서 고통을 받던 아이의 고통이 바로 우리의 고통일지 모릅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간질병으로 인해 불 속에도 빠지고 물속에도 빠졌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에서부터 그 누구도 그 아이의 병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요.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그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어리석음을, 우리의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는지요? 불 속에도 빠지고 물속에도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이 있지요. 남아있던 제자들은 그 아이의 병의 근원을 치료할 수 없었는데, 우리도 매일의 현실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능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대처할 힘이 없어 소위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믿음이 없는 세대”를 아파하신 후에 그 아이의 병의 근원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따로 묻지요.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서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29절) 여러분,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실감하십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신학교 때에는, 아니 3~40대까지도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귀신 쫓는 은사를 받았다고 목청껏 소리 높여 안수 기도하던 사람들만 너무 많이 봐온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왜,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으면,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셨는지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로써 우리의 내적 침묵을 조성하지 않으면, 그래서 우리 존재의 근저를 새롭게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의 엑수시아(권위), 우리의 참된 힘의 근원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서 경험한 하나님 체험은 산 아래에서의 현실과 통합되어야 합니다. 산 위에서 받은 은혜는 산 아래에서의 고된 현실에서 검증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홀로 깨달은 깨달음은 공동체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정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과 통합되고, 고된 현실에서 검증받고, 공동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정련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안에 깊은 기도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정화의 과정이 있어야 하고, 자기 수련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 안에 참된 “존재의 근저”, 우리의 힘의 근원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처럼, 산 아래에서 힘을 쓰고 있는 귀신들의 장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산 위에서의 경험은 반드시 산 아래에서의 현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고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는 수요일부터 올해의 사순절로 들어갑니다.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우리 교회의 아주 중요한 절기이자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서 자신을 정화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숙고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산상에의 알지 못하는 세계, 그 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의 현실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초자아가 발동하여 자아비판을 하거나 반성문을 쓰면서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리는 사랑의 음성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먼저,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잠시라도 침묵하며 가만히 있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 다음 교회 단톡방에 매일 올라오는 말씀을 가만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매일 다른 말씀이 올라오지만, 여러분이 머물고 싶은 말씀에 한 주간 내내 머물러도 좋습니다. 세 번째로, 이번 사순절 묵상에 귀 기울여 봅시다. 이번 묵상집에 실린 아빌라의 데레사는 기도의 스승으로 알려졌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하루에 짧은 한 구절이라도 가슴에 품어 보십시오.
이것이 한 두 번의 수련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자신을 고요하게 열어놓으면, 하나님의 빛보다, 사랑의 음성보다 우리 안의 오만가지 생각들과 수많은 면박꾼의 목소리가 먼저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은 더욱 깊고 강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꾸준하게 하나님 앞에 생각을 비우고 자신을 여는 연습을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과 우리의 메마른 현실이 연결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마음을 열어 가슴을 열어 그 빛을 먼저 받게 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속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