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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1-17.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2024. 12. 22. 성탄주일
좌우 앞뒤에 계신 분들에게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2024년 성탄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주목했던 것같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답과 소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감사의 내용은 예수님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생명과 능력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복음을 통하여 전달이 됩니다. 그 복음인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고 자라나서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순서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준으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천사의 문안인사는 은혜를 받을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두려워하던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또 다시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로부터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에 충격이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습니까? 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천사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네 친족 엘리사벳도 아이를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잉태함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아이를 가질만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경우는 다릅니다. 하지만 천사는 동일한 기적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내용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평안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기다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생명입니다. 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평안을 소유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절망의 현실이었고 고통과 절망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사야서 5장에서 9장까지 흑암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됩니다. 반복은 어두움과 흑암을 강조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흑암이었습니다. 흑암이라는 것이 강조될 만큼 세상 사람들과 이웃 나라로 부터 이야기 거리와 우스게 거리로 조롱을 받았습니다. 사5:30에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다. 사8:22절, 땅을 굽어보아도 환란과 흑암과 고통의 암흑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사9: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 들입니다. 여러분, 소망할 수 있는 삶이 없습니다. 전체가 암흑과 고난과 흑암입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서글픕니까? 사 6:13절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 운 바 될 것 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서글프고 괴로운데 그 중에 90퍼센트가 없어지고 10퍼센트만 남아도 마지막 남은 인원까지 다 절망이고 흑암이라고 합니다. 점점 더 나중이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고통과 어둠과 절망에 빠진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과 위로의 증표로 한 아기를 말씀하고 이 아이를 통해서 장차 선민 이스라엘은 모든 흑암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이 아이를 통해서 장차 그들의 대적을 남김없이 심판하고, 몰아낼 것이며, 이 아이를 통해서 평화의 왕국을 영원토록 세우실 것을 약속 합니다. 특히 9:1절에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기원전 732년에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여 앗수르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인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게 되었기 때문에 선민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역사를 통해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소외된 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뻐할 이유가 없고, 감사할 일이 없으며, 평강이 아니고 고통과 두려움의 삶이었습니다. 조금도 소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고 한 줄기의 빛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땅과 환경 속에서 소망이 회복되며 기쁨과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전의 회복이 가능합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때의 상황은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했습니다. 정치와 경제적 상황을 보면 다시 세워지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경이롭고 기적적인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흑암 같은 오늘의 현실일지라도 하나님이 기쁨과 평안을 주시고 다시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의 모습과 다름없지요.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절망과 칠흑 같은 시간을 지날 때에 나의 삶 속에 한줄기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처럼 어둡고 고통스럽던 삶과 신앙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나무와 별과 달과 꽃이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을 때와 삶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 때에 고통의 멍에는 하나씩 벗겨집니다. 채찍질 하듯 내리치던 삶의 문제도 하나씩 사라집니다. 왜요?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실까요?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1. 그러면 절망의 현실을 반전시키시는 소망의 미래를 만들어 가실 분이 누구십니까?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이미 예언을 했습니다. 임마누엘인데 그 분을 가리켜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 합니다. 그 예수님의 탄생은 복음서를 기준으로 하면 출생과 출생이후의 경배의 과정은 어떻게 됩니까?
1-1. 출생의 과정입니다.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0,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혼례는 정혼을 하고 나중에 신부 값을 치루고 얼마를 기다리다가 결혼을 허락 받고 결혼식을 올리고 합방을 하는데 예수님의 출생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 이후 1;37, 38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를 하고 한 아기를 낳습니다. 예언의 성취입니다
1-2. 출생과 함께 경배를 받은 경배의 순서입니다. 복음서의 부분적인 것을 종합하면 선명하게 순서가 드러납니다. 먼저 눅2;1-17의 내용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호적을 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집의 한 마굿간에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습니다. 두 번째는 눅2;8-20의 내용으로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마2;1-12의 내용으로 동방의 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았습니다. 네 번째로는 눅2;22-35의 내용으로 예루살렘의 제사장 시므온의 경배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이 경배를 하게 되는 경위는 레위기12;1-5의 정결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마리아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레12;6-8의 첫 태에서 처음으로 출생한 사람에 대한 예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2;13-23, 눅2;39의 내용으로 동방박사가 알려 준 내용과 밤에 꿈에 나타난 성령의 지시하심으로 헤롯 대왕의 살해 위협을 피하여 이집트로 잠시 피난을 하게 되었고 헤롯이 죽은 이후에 다시 갈릴리 나사렛으로 예수님과 요셉과 마리아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출생의 근본은 상고와 영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창3;15절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으로 말씀하신 이름의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다는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는데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병원의 신생아실에 가면 갓난아기들이 누워있는데 저마다 명패에 쓴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나 집안 식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의 이름이 장차 태어날 생명의 인격이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여러 번이지만 저의 성은 이 씨요 이름은 서로 상에 메울 열입니다. 제가 서로 서로 중간자의 입장에서 메울 것이 무엇입니까?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 역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복음 앞에 여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시는 저의 부모를 통해서 이미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셨고 제 이름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누가 하셨을까요?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어떤 모습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그 내용의 의미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어떤 모습과 어떤 관계의 자상한 부분의 역할을 가리켜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이렇게 많습니까? 상황마다 적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구원과 인생의 문제와 관계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
2-1. 기묘자와 모사입니다. 기묘자와 모사라는 것은 전쟁과 경영과 삶에 있어서 탁월한 지략가를 의미합니다. 전쟁과 경영에 있어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계획을 세우는 지혜 자입니다. 그러면 왜 기묘자와 모사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사실 인생의 전쟁터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승리가 내게 있지 않습니다. 모사이고 기묘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신기하면서도 신비스런 지략가 모사인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가진 능력을 뛰어 넘어 기묘하게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 보여주시는 기묘자이시고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모사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2024년이 어떻습니까? 지금 년말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절망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고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어렵습니다. 미래가 불안합니다. 상대적인 가난이 고통스럽고, 절대적인 가난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이 주실 지략과 지혜를 구합니다. 주어진 영역에서 소망으로 열심히 수고합니다. 기도하면서 전진합니다. 여러분, 신앙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오고, 흑암을 물리치는 태양은 반드시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했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12지파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셨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늘 열강에 짓밟히는 나라와 민족이었습니다. 꿈에도 소원은 자주국방과 부국강병이고 한 번 잘 살아보자는 마음과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이나 로마를 물리칠 왕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한 아기를 약속하셨는데, 바로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한 아기, 예수님입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흔히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특별한 뜻입니다. 기묘자는 신기한 이름이라는 뜻이고. 모사는 신기한 지혜입니다. 아이의 이름이 신기하며 특별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이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기 때문에 기묘자입니다. 신기한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지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고, 불가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신기하고 오묘한 신비스런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정신적인 위기와 마음과 육체의 병이 들었습니다. 낙심과 절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때를 가리켜서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에 물질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삶이 곤핍하고 어려워지면 마음도, 믿음도 무너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드러난 현상 때문에 신앙까지 흔들리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신앙은 어려울수록 기묘자요 모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하시고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나의 힘으로는 강대국 앗수르를 물리칠 수 없고 흑암에 내려앉은 가난과 고통의 땅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기대와 소망과 죽음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8절,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회복하고 해결하십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기묘자와 모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순한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지만, 근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아이는 사람인데 이 아이의 이름이 하나님의 신적인 성품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인격적인 주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전능은 불가능이 없고 전능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합니다.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아이가 행할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가 증명합니다. 이 아이에게 신적인 성품과 전능이 있기 때문에 어깨에 정사를 메였고 우주적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우주적 통치는 영원입니다. 처음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예수님은 세계를 영원히 통치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세계와 우주를 영원히 통치하고 나에게 적용이 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전능하신 이런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아버지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자녀들을 돌보고 부양하는 보호자입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존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아이의 신성으로 영원한 존재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핵심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장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계급이 아닙니다. 부양하는 보호자, 후원자입니다. 히브리 사고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무게와 거리를 무너뜨립니다. 스스로 무게와 거리라는 담을 헐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곁으로 와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있는 무거운 담과 죄의 담을 제거했습니다. 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버리는 현장을 700년 전에 보았습니다. 결코 상상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장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아이 예수님을 전할 때에 기대감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후손들은 이 아이가 그 담을 허는 것을 실제적으로 목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700년 후에 이스라엘 땅에 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빛으로 오셨고, 실제적으로 막힌 담을 헐었지만 후손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느낌마저도 없고, 거부까지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도다.
2-4. 평강의 왕입니다. 왕은 통치적 개념입니다. 책임자로서 왕입니다. 왕의 일반적인 통치 개념은 왕궁에 앉아서 왕의 상징인 왕복을 입고 백성들을 통치하지만 평강의 왕은 일반적인 통치 개념이 아닙니다. 평강의 왕은 왕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변화 산 사건이 일어 날 때에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집을 짓고 변화 산에서 안주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주님은 거절하고 세상으로 내려 왔습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자기 백성들과 함께했습니다. 평화의 왕은 피 흘림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림입니다. 여러분, 피 흘림이 없이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세계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아이 예수님은 스스로 피를 흘리는 방법으로 세계를 통치합니다. 피 흘림을 통한 통치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과 예수님의 피 흘리는 방법과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이웃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하여 죽이고 정복해야 세계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쳐서 피를 흘려 세계를 통치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이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포로 된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통치입니다. 세상의 군왕과 예수님의 차이는 영원한 통치와 평화의 통치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은 기묘자와 모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주신 바 되었습니다. 이분이 오실 만왕의 왕이고,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매듭과 시작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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