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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녹매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해질무렵
성막 제 3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제가 지금 서너 번 계속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겠습니다. 피가 있다는 것은 그 맞은편에 죽음의 사자, 심판의 사자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었지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맏아들은 안 죽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의미가 뭡니까? 죽어 마땅한데 안 죽었다는 거지요.
죽어도 되는데 안 죽었다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이 살았지요? 피 때문에 살았지요. 그렇다면 그 피를 알고 난 뒤에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데 피 때문에 살았다.’ 그 말이겠지요. 이제 알아야 될 것은 뭐가 남아 있겠습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가, 그 내용이겠지요.
논리가 그렇게 전개되는 겁니다. 피라는 것을 빼버리면 그 때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게 돼요. 교회 오고 나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더 이상 바람도 안 피우고 교회 오고 나서 나는 이렇게 새사람 되었다, 그런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피가 들어가 버리면 곧 심판 주 앞에서 살지요. 바로 코앞에 심판주가 버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주가 나를 심판할 때 무엇의 있음, 없음의 여부로 보겠습니까? 피가 있는지 없는지 보겠지요? 그 피를 가지고 약속의 피라고 합니다. 제가 강의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온 이야기입니다. ‘약속’입니다. P1에서 P2로 내려가면서 하나님만이 아는 그 약속이 어떻게 확대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를 가지고 그것을 보여줄까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착해서 입니까, 아니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착해서가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하게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겁니다. 방금 제 이야기는 신명기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교만한 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요새말로 천국이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죄가 많지만 혹시 나중에 천국에 가시거든, ‘혹시’입니다, 저는 다 가기를 원합니다만, 혹시 천국에 가시거든 면류관조차 예수님에게 반납하시고 ‘내가 여기 온 것은 예수님의 은혜덕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동안 교회 봉사한 것 많이 있지요.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일을 시킨 겁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와서 일을 하면서 비로소 아는 죄, 일을 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게 된 죄, 그 일을 안했으면 몰랐을 뻔 했던 죄, 그 죄마저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해 준 겁니다. 산자와 죽은 자마저 심판하시는 그 심판 주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약속의 피가 있는 자만 가려내고 있습니다.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장차 할 영원한 심판을 앞당긴다는 의미에서 ‘선취(先取)’, 미리 취한다고 합니다. 모세가 예수님의 부활과 고난을 미리 봤지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장차 생명나무와 행위 책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그 심판의 광경을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장차 오는 심판을 우리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행함을 자랑하지만 나는 예수의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도다.’ 고린도전서 1장 끝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학벌 좋은 사람도 없고 문벌 좋은 사람도 없고 부자도 없지만 우리는 각자 예수만 자랑하기로 모인 곳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 구절 기억나시지요? P1에서 P2로 넘어가면서 참 신과 우상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신은 이방민족이고 우리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섬긴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서서히 이스라엘 내부에서 우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피어납니다. 마치 교회 안에서 기도라는 형식으로 원망하듯이, 교회 사역자들이라 여러분은 다 아시잖아요. 어떤 사람은 성경 들고 교회 오면서 흑흑, 울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쁘게 오는 이도 있지요.
울면서 오는 사람은 따지러 오는 겁니다. 내 인생 내놓으라는 거예요. 원상복구 해놓으라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손해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일 따로 있고 하나님 일 따로 있는 거예요. 반면에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이 바쁜 와중에 오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오는 거예요.
과연 어느 것이 우상이 아닐까요? 단지 부처만이 우상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바로 내가 여전히 우상을 품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지요.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고 ‘그렇게 고민하는 너도 예수님 자기의 것’이라는 겁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집안 살림걱정 하겠습니까?
강아지가 혼자 가계부 쓰고 있습니까? 주는 대로 먹지요. 그래서 ‘오뉴월에 개 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집안에 난리가 나도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이 이사 가면 따라가면 되니까. 그걸 성경에서 동행이라 합니다. 지금 웃지 않는 것을 보니 심각한 모양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우상이 만들어지니 그 때부터 이웃나라 우상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우상이 만들어질 수 있는 우상의 요소를 성막 안에 만들어 놓았어요. 이제 P2(성막)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막의 중심에 보면 법궤가 있습니다. 영어로 box, 상자입니다. 상자는 뭘 담아야 되겠지요.
그 안에 뭐가 담겨 있을까요? 우상 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깨진 돌판. 이 돌 판을 누가 깼을까요? 모세가 깬 것이 아닙니다. 원인제공을 누가 했을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상상한 여호와 때문에 깨어졌던 겁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돌 판으로 만들었을까요? 언제든지 깨질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인간의 죄로 쉽게 깨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태권도 5단입니까? 예수님의 보디가드가 천 명입니까? 예수님의 몸은 강철입니까? 한국에 ‘로봇 태권 V’라는 것이 있어요. 혹은 ‘독수리 5형제’, 예수님의 몸은 연약했어요. 뺨을 때려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떠밀면 쉽게 넘어져서 죽을 몸이에요. 인간의 어떤 잘못된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 흔적으로 남는 겁니다.
그런 몸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죄로 쉽게 부스러지는 형태로 주어진 거예요. 두 번째 들어 있는 것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싹이 납니까? 지팡이는 싹이 나야 정상입니까, 안 나야 정상입니까? 안 나야 정상이죠. 그런데 싹이 났으니 이것은 자랑거리예요, 아니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잘못된 거지요.
사람의 눈이 뒤쪽에 달려 있으면 편할 것도 같지만 이것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그것을 도깨비(귀신)이라 합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그만큼 고라 자손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했다는 겁니다. 세 번째 들어 있는 것은 만나가 들어 있는 항아리죠. 이 세 가지가 이스라엘백성들 안에 들어 있는 다른 하나님 때문에 발생된 반항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버지하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티격태격하면서 다투지요. 원망했습니다. 모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본인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르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쉽게 하겠습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오고 난 뒤부터 가정이 잘 풀리지 않았어요.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원망하면서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릅니까,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지도자로서 어떻게 조언해주십니까? 흔히 하는 조언들은 이런 거예요. 참으세요, 어려울 때 피할 창문을 열어주십니다,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 말이 맞습니까?
제가 분석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 왔습니다. 우리 첫 번째 강의할 때 했습니다. 나의 기도하는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되고자 한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이런 것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교회 나와서 세상 것을 비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도자입니다.
상담하기를, ‘조금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주십니다.’라고 이야기한 셈이 되어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당신은 세상 것을 원하십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세상 것을 주께서 주십니다.’라는 말을 한 셈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당신의 성질 자체를 바꿔야지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고생했는지를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까지 낮아졌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낮추시면 십자가를 알게 될 것이고, 마음을 낮춘다고 단지 그것으로 십자가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시는 것도 감사해야 할 텐데, 주시는 것도 은혜인데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아버렸어요. 예수님 붙들고 동업하자는 식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려 했다는 말이지요. ‘나를 봐라. 잘났잖아.’ 사실은 그런 사람이 교회에 참 많이 들어옵니다.
세상에 남에게 뒤처진 것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으로 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동안 교회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우상을 바른 지도자를 만남으로 비로소 내가 우상숭배자임을 알게 된 거예요.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인줄 알았어요. 십자가의 낮아지심을 빼버린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는 말을 빼버린 거예요.
분명히 설교시간에 여러분이 이야기를 해 줬어요. 그런데 세상 것을 원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다 빼고 듣습니다. 그렇지요? 안 그런가요? 그것은 여러분이 설교하면서 교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안 듣고 있다가 ‘바치면 복 받습니다.’ 할 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거지요.
장로님 기도할 때 다 자다가 축도할 때 잠 다 깨지요. 복 받아 가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쌍안경으로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상자 안에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이 상자가 바로 모든 것이 거짓된 나, 참 쉽지요? 성막 안에, 그 중앙에 내가 들어 있는 거예요. 무엇의 이름으로? 죄인의 자격으로.
죄인역할 함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지요. ‘여기 죄인 할 사람!’ 하고 찾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손들고 ‘죄인 여기 있습니다.’ 나서시면 주께서 피를 발라서 ‘이런 강도 같은 인간도 천국 간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거예요. 참 쉽지요?
현실적으로 참 어렵지요. 성막 구조를 장치로 그리지 않고 사람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틀을 마련하세요. 단위는 성경에 있는 대로 큐빗(cubit)을 쓰는데 약자로 C를 쓰겠습니다. 성막의 긴 변(남북)이 100C, 짧은 변(동서)이 50C, 동쪽을 터서 그 간격이 20C, 이 앞에 흙을 약간 돋우고 여기에 고기 굽는 장치를 합니다. 이것을 번제 단이라 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여기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했지요. 우상숭배자이지요.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이 다 우상숭배자예요. 그것은 생명나무를 못 봐서 그래요. 우리가 왜 생명나무를 못 봤을까요? 처음부터 못 보도록 천사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속담에 ‘서울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 이긴다.’ 하는 말이 있어요.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압니까?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압니까?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아는 체 하지요. 그러면 하늘에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앞에서 누가 누구를 가르칩니까? 하늘나라 안 가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앞에 두고 천국에 대해 서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두고 ‘참 터무니없다.’는 뜻으로 ‘가관(可觀)’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 알아요? 우리는 태어나서 여기 살다가 그냥 여기서 끝이에요. 산에 올라가봐야 한 2 천 미터 올라가면 내려와야 돼요. 우리는 변화 산에도 못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우상숭배에요.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 언약, 십자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전부 다 우상 되는 겁니다.
뭐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지요? 여기 십자가 피가 온 머리부터 온 몸이 적신다고 해 봅시다. 그 때부터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안다.’고 주장하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건짐 받았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 같은 무지한 인간도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보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 모세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이사야도 있지만 그 분들이 와서 우리 죄를 해결하지는 못해요.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제가 목회를 30년 이상 했는데 집에서 가만 생각해 봤어요. ‘내가 이야기한 것이 과연 사실일까? 혹시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성경을 꿰뚫는다고 했는데 과연 제대로 꿰뚫었는가?’ 다른 것은 다 부인할 수 있어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삼일 만에 살려서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그 복음은 거짓일수가 없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이 있어요. 왜 사도바울은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는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베드로는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돼요? 어느 선교사, 어느 성직자,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오직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믿어야 돼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믿는 자는 그의 영이 들어오게 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로마서 8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세상적인 복을 가지고 복을 받았니, 안 받았니 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같이 하면 부자 됩니다, 하는 이야기를 해요. 돈 많은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진짜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내막을 아는 거예요. 그것을 두 자로 비밀이라고 합니다. 앞에 붙는 말이 있어요. ‘창세전부터 비밀’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밀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십자가비밀을 알게 되고 구원의 능력은 샘솟듯이 십자가에서 지금도 나온다는 거예요. 마치 사마리아여인이 먹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나오듯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있는 사람은, 비록 돈이 없더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이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제 말이 아니고 주의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이 우상숭배의 위에 뚜껑이 있습니다. 이 뚜껑의 이름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이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그 앞에 있는 번제 단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갑자기 제가 사람을 하나 그렸잖아요. 이 사람을 우상숭배자라고 했지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깨진 돌판, 만나 항아리, 이것이 다 누구 짓입니까?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지요. 제 말이 맞지요? 착한 사람이 그 짓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잘못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짓거리 때문에 생긴 일들이지요. 그런데 이 상자의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라고 합니다. 속죄소라는 것은 죄를 용서해주는 장소, 다른 말로는 ‘시은 좌(施恩座)’라고 하는데 은혜가 공짜로 내려앉는 자리, 그러면 은혜라는 것은 어디에 안착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지요. 은혜가 팔랑팔랑 날아와서 여러분 속에 앉는다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 죄가 무지 많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와, 시커먼 죄.’ 나는 그걸 감추고 있었지만 주께서는 쌍안경으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동원시켰다는데 의미가 있어요. 이 세상에 많은 죄인이 있지만 은혜는 다 임하는 것이 아니고 나풀나풀 나비가 꽃을 찾아가듯이 술래잡기 하듯이 ‘잡았다!’ 하면 그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겁니다. 제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데 은혜가 나비처럼 날아와서 임하게 되면 ‘제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겁니다. 무슨 장치가 될까요? 성막안의 장치가 됩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모든 해석은 성막을 예수님으로 해석했지요. 예수님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기능(일)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그 차이가 뭘까요? 그 예수님의 기능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겁니다. 무슨 자격으로 구원받았을까요? 은혜가 필요한 죄인의 입장에서 역할을 맡은 겁니다.
혹시 이 근처에 영화 촬영소가 있습니까? 거기에서 일하는 분들이 있어요. 원래 친구인데 둘 다 엑스트라로 들어가게 되면 한쪽은 적군의 군사가 되고 다른 한쪽은 아군의 군사가 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화촬영소입니다. 모세가 누구 영을 받았지요? 예수의 영을 받았지요. 성막 전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했지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을 아까 읽었잖아요. 선지자에게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보여줬지요. 성막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이에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장래에 하실 일,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감히 우리가 부름 받고 그 당시 사람들인 이스라엘이 부름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막은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축소되면 성막 되는 거예요. 그 장막 앞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이 2.25미터인데 이것이 5C(cubit), 이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이 높이가 10C, 성소의 가로 세로가 각각 20C, 10C, 지성소의 가로 세로가 각각 10C, 10C ……,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 제가 꼭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인데 하여튼 같이 만들어봅시다.
만드는데 누가 누굴 만드느냐, 우리가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만드는 거예요. 만약에 그림에 여러분 자신을 그려보세요. 아주 예쁘게 그릴 거예요. 남자는 미남으로 여자는 숙녀로. 그런데 예수님의 그 기능과 만나게 되면 남자나 여자나 다 죄인으로 그림을 그려야 돼요. 그 그림과 건축이 성막이 된 겁니다. 참 쉽죠.
제가 여러분의 인상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막이라면 예수님과 관련지었지요. 저는 지금 우리의 감추어진 죄와 성막을 연관시키려고 합니다. 성막은 깨어집니다. 곧 누가 깨지는 거예요? 성막 지은 우리가 깨지는 거예요. P3가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 깨지고 불타버립니다.
누가 깨지고 누가 불타는 겁니까?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곧 우리의 멸망이지요. 이제 성막의 존재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안의 숨겨진 우리 죄를 다 담아서 심판의 라이터 불로 불 질러 버립니다. 이 말씀에서 불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점심 먹고 하겠습니다.
첫댓글 딱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복음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