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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월 크리야요가 원문보기 글쓴이: 청랑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준비없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쑥 끌려 들어가는 그런 만남이다.
그러나 일단 들어가 보면 익숙한 곳이거나,
금방 익숙한 관계가 되거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만남에 필연적 이유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인정한다.
내게는 브라마 쿠마리스가 그런 느낌이 든다.
올해 7월에 나는 우연히 부산에서 개최된 브라마 쿠마리스 강연회에 참석했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올해 12월에 인도 라자스탄 아부산에 있는 브라마 쿠마리스 본부를 방문하게 되었다.
강연이 끝나고 참석자를 대상으로 무작위로 뽑은 쪽지에 위의 글이 내게 뽑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가 과연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냥 참석자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격려를 과하게 한 것이리라 스스로 절하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 몇 개월 뒤에, 평생 처음으로 인도를 가게 되었고, 내가 가게된 지역에 브라마쿠마리스 본부가 있었다.
SRF와 연관된 지역이나, YSS 본부, 또는 리쉬캐시, 바라나시, 바바지의 동굴 등등 인도에 가면 당연히 그곳부터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처음 가게 된 인도에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단 한곳도 가지 못했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의 계획과 神이 가진 계획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브라마쿠마리스는 인도의 많은 사원, 종교단체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그들의 형식은 사원이나 다름 없지만 사원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대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그러니까 누구를 숭배하고 모시는 차원이 아니라 신을 가르치고 배우고 스스로 신과 하나가 되자는 목적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오늘의 브라마쿠마리스를 있게 만든 결정적 힘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1900년대 이후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신흥종교단체들은 대개가 사이비가 많은데, 기초의 부실, 짜집기가 가진 허술함 등등 그럴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이 단체도 그렇게 빠져들 공산이 없지 않았는데 창시자 등 개인의 숭배가 아닌 교육과 공부에 치중함으로써 위험을 차단했다.
또 이 단체가 다른 점은, 신도나 사제나 봉사자들이 여성이 위주이고 여성이 많고 여성 중심이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는 인도에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다. 이런 점 때문에 1930년대 창립 초기에 인도의 많은 남성들로부터 시위와 소송을 당했다고 한다.
이 멋지고 부유하게 잘 생기신 분이 바로 창시자인 다다 레크라이 크리팔라니라는 분이다.
"브라흐마 쿠마리스는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마의 딸들이라는 말로 여성이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몸과 구별되는 영혼에 초점을 두고 모든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신(神)은 모든 선(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또한 육체와 관련된 모든 낙인(인종, 국적, 성별, 종교 등)을 초월하는 것을 가르친다. 원래는 '옴 만달리(Om Mandali)'라 불렸던 브라흐마 쿠마리스는 북서 인도의 하이데라바드에서 시작되었다. 설교 전에 회원들이 함께 "옴"이라는 말을 불렀던 데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자, 1950년 5월에 그 본거지를 라자스탄 주 아부 산(Mount Abu)으로 옮겼으며, 그 때부터 신앙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이름 또한 지금의 '브라흐마 쿠마리스 세계정신대학'으로 바꾸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보석상이었던 이 분은 늘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며 구루에게 가르침을 받던 도중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쏟아지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책없이 찾아온 변화에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수년동안 파악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 과정에 그의 신성한 변화를 보고 주로 여성들이 모여들어 그 영성에 함께 반응했고 자연스레 단체명도 여성의 이름과 여성위주의 단체가 되었다.
아부산에 있는 브라마쿠마리스 건물은 세 개인데 일반적으로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 위에 있는 유니버셜 피스 홀이다. 왼쪽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나오는 이 건물 역시 안에서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밖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마, 인도에서 종교시설 중에 가장 깨끗한 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건물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도 자원봉사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건물의 안과 밖을 청소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건물의 입구에 한국어로 번역된 간단한 팜플렛을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도 무척 반가웠다. 85개국에 브라마쿠마리스가 지부를 갖고 있다고 하니 단기간에 실로 엄청난 확장이다.
이 건물의 도로 건너편에 또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그곳이 아마 최초의 브라마쿠마리스가 지어졌던 건물로 여겨진다. 그 건물 역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리고 특별히 예약된 사람들만 방문할 수 있어 매우 조용하고 군데군데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 우리가 명상한 곳은 창시자인 다다 레크라이 크리팔라니가 잠들어 있는 곳, 즉 무덤이다.
무덤의 주위에는 몇 사람이 앉아 조용히 명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또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말없이 무덤을 주시하며 명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었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름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 무덤 주위에 앉았다.
자... 나는 그분들이 명상하는 자세에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수행자세처럼 척추를 곧게 세우는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편안히 앉아 눈을 뜨고 지긋이 한 곳을 응시하고 내관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과연 효과가 많을 것인가... 이 방법이 과연 문제가 없을 것인가... 나는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창시자 무덤 옆에서의 명상은 잔잔한 진동은 좋았지만,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다. 그래도 나름의 시간은 채우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5분쯤 지나 곧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서 밖에서 기다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섰다. 왜 그랬을까? 조금 실망하고 있는데 자기는 필리핀에서 왔다며 또다른 사람이 우리를 안내하러 왔다. 그 사람을 따라 우리는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이삼십명 앉을 수 있는 약간 좁은 명상방인데 맨 뒤쪽에 역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고 앞 자리는 버어 있어 우리는 앞에 앉았다. 아마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양보인 것으로 보였다.
이 방에 들어올 때 부터 신성하고 좋은 진동이 밀려왔다. 창시자인 다다 레크라이 크리팔라니가 이곳에서 마지막 명상을 하고 돌아가신 자리라고 했다. 더 앉아 있고 싶었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할 수 없이 우리는 일어섰다.
우리는 조금 더 긴시간의 명상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브라마쿠마리스의 세번째 건물이다. 비교적 가장 최근에 지어진듯 시설이 화려하고 컸다.
여기가 오리지널 대학건물인 모양이었다. 한국의 왠만한 대학만큼 공간도 넓었고 건물도 컸다. 넓고 큰 데 비해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큰 호수도 있고 예쁜 꽃들도 있어 우리는 천천히 건물을 감상하며 입구에 방문자들이 등록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대표로 한사람이 방명록에 신고를 하는 동안 왠만한 사원처럼 느낌과 진동이 좋아 이상하다 어떻게 이런 곳이 이렇게 좋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돌아봤을 때 벽에 큰 사진들이 아래와 같이 걸려 있었고, 여러 사진 중에 특별히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인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묻자 그녀는 흔쾌히 오케이다. 아까부터 내 행동을 쭉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세 분이 어떤 분들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일행 중에 브라마쿠마리스를 오랫동안 공부해 온 분도 이 분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런 현상은 브라마쿠마리스가 교육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창시자나 그 밖의 대를 이어온 지도자에 대한 숭배는 크게 할애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인터넷 이곳저곳을 뒤져 한참만에 겨우 중간에 있는 분이 다디 굴자라는 분이고, 창시자 이후 최초로 창시자와 비슷한 에너지의 경험을 했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 이 단체에 들어와 10년이 된 시점에 샤틀리젼에서 브라마를 경험했다고 한다. 창시자 외에 창시자를 따른 사람 중에 처음으로 창시자와 같은 현상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조직의 바바와 다디는 이 어린 소녀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게 되고 1943년에 한 달간의 침묵을 통하여 드디어 "저 위에 있는 인물은 완전한 브라마이며, 그 밑에 있는 이 브라마는 그의 노력하는 형태다. 또한 이 밑에 있는 이가 저 위에 있는 이처럼 될 것이다." 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 브라마쿠마리스는 처음 창시자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그 깨달음을 정리하고 수정하는 절차를 통하여 현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체적인 뿌리는 흰두교에 바탕을 둔다. 처음 창시자가 에너지를 경험하게 된 것도 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
1943년부터 1950년 초까지 단체는 여러가지 과정과 공부를 통하여 이론을 정립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 지식이 아함 브람아스미-나는 신의 형태다. 또는 아함 차트라부즈-나는 신의 형태인 비슈다. 라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1950년 초에 시브 바바는 타원형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당시의 포스트에 무한하고 신성한 빛 그리고 신 브마라라고 했던 것을 무체의 신 시바로 모두 바꾸게 된다. 예를 들어 마음, 지각, 산스카라에 대한 이해도 생겼으며, 지고의 영혼은 의식을 가진 뚜렷한 별개의 영혼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시브 바바는 신이며 어머니 아버지였다.
브라마 바바는 다시 한번 과거의 모든 지식의 기록을 파기하게 했다. 한 점의 빛으로서의 영혼에 대한 이해도 명확해졌다. 두 존재가 활동하는 것이 명확했다. 그리고 그 중에 지고인 분은 시바였다. 그래서 잘못된 이해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했다. 몇 년 뒤에 가서 이 두분(위의 사진)이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브라마쿠마리스와 자아실현협회(SRF)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두 단체의 태동시기는 비슷하다. 두 단체 모두 흰두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 확산된 점도 비슷하다. 그런데 두 단체 모두 라자요가를 표방하지만 수련하는 방법은 큰 차이가 있다. 즉, SRF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크리야 요가를 수련방법으로 선택하지만 브라마쿠마리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수련방식을 택했다. 물론, 그것은 크게 보면 바가바드 기타를 비롯한 기존 흰두교의 체계와 지식들에 기반을 둔 것이리라.
이상이 간단하게 간추린 이 단체가 흘러온 과정인데, 그러한 과정 끝에 내려진 결론이 바로 밑의 그림이다.
우리가, 세번째로 찾아간 이 건물의 대강당은 정말 좋은 진동을 갖고 있었는데, 위의 그림은 그 건물을 견학하는 과정에 찍은 사진이다. 비교적 우리 외에는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는 여유 있게 건물 이곳저곳을 안내 받으며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분은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진지하고 열심히 우리를 이끌고 많은 영상과 사진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결국 브라마쿠마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이자 그림은 바로 저 위의 사진이다. 저 하나의 지점. 저 하나의 큰 영혼에 모든 정신과 감각과 주의를 집중해 그 품에 안기는 것이다.
모든 시설을 둘러본 뒤 우리는 방문객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명상실에 들어가 명상을 했다. 중간에 저 위의 그림이 있고 실내는 약간 어둑했는데 서 너 명의 흰 옷 입은 분들이 멀찍이 의자에 앉아 저 그림을 주시하며 명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비어 있는 맨 앞줄에 가서 명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10분 정도 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10분만에 일어설 수는 없었다. 한 30분쯤 흘렀을까, 다음 일정을 위해 할 수 없이 마음을 재촉하며 일어섰더니 어느틈에 방 안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꽉 차 있다.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분들을 비롯하여 대체적으로 나이를 많이 먹은 분들이 많았는데 역시나 그분들은 의자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앉아 저 위의 그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브라마쿠마리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수년간 고민하던 결정적인 문제의 해결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아마 나는 저 사진 위의 다다 굴자라는 분이 나를 이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수학자가 어떤 문제에 부딪쳐 수년간 고민하는 것처럼, 영혼의 공부라는 것도 수년간 뛰어넘지 못할 벽에 가로막혀 아까운 시간만 죽일 때가 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저 열심히 노력하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우리는 신의 계획을 모른다.
우리가 신과 완전하게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끝)
첫댓글 감사한 글입니다.
신의 선택을 느끼게하는 축복어린 여정입니다.
한국에 오셔서 오프라인에서 같이 느낄수 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옴 구루
반갑습니다. ^^ 잘 다녀왔습니다. 저도 오프라인에서 뵙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