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본당에 부임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요.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지난 2월, 지인으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신부님, 이제 운동도 열심히 하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으려다, 메시지와 함께 보낸 동영상 링크가 있어 들어가 봤습니다. 영상 속에서는 검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내가 악당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을 멋지게 때려눕히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열혈사제’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다혈질 싸움꾼 사제가 한 살인사건을 두고 강력계 형사와 공조 수사를 펼친다는 내용이 큰 줄거리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그리 친숙하지 않았던 ‘보다 현실적인’ 천주교회와 사제의 이미지를 코믹-액션이라는 장르로 풀어낸 소소한 설정들로 더 화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 공중파 드라마에서 사제가 등장해 공공연히 무력을 행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우리 신자분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죠. 아무튼 저는 그 지인의 메시지를 그저 웃어넘겼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 키 크고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아야 한다더니, 이제는 싸움까지 잘해야 되는 시대가 오고야 만 것인가.’ 저는 이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설정들이나 일부 장면들을 보고 빠른 시일 내에 이 작품을 다루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언급을 일체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바로 그 ‘설정’과 ‘이미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혈사제’라는 설정과 이미지 자체가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가 ‘사제’ 혹은 ‘수도자’라는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비교적 과거인 2000년대 초반부터는 ‘독신을 지켜야만 하는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는 사제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드라마 ‘러브레터’(2003)를 시작으로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신부수업’(2004), ‘S다이어리’(2004) 등에서 독신을 살아야 하지만 이성과의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운의 사랑,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모순적 상황에서 오는 성적 유희와 긴장감,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죠. 한편 그런 흐름에 대한 반향인지 2005년 성탄에는 실제 신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KBS 다큐멘터리 ‘영원과 하루’가 공개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신학생’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후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를 통해 이 주제에 대해 보다 깊어진 고민을 제시하는가 싶더니, 박찬욱 감독의 문제작 ‘박쥐’(2009)를 통해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영화 ‘박쥐’의 시도는 새로웠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그 이전부터 수많은 ‘엑소시스트’(퇴마사) 소재의 외화를 통해 사제의 이미지가 결코 ‘독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학습해갔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영화 ‘검은 사제들’(2015)이 바로 그 이미지를 매우 영리하게 차용해왔고, 그 시도는 큰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사제는 ‘악과 맞서 싸우는 퇴마사’라는 흥미로운 이미지로 새롭게 활용되기 시작했고, 이는 이어지는 영화 ‘곡성’(2016), 드라마 ‘손 더 게스트’(2018)와 ‘프리스트’(2018)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추후에 개봉하게 될 많은 영화와 드라마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연재부터 누차 말씀드리지만 매체의 영향력은 강력하고 또 무섭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그려지는 특정 직종들에 대한 묘사가 실제 당사자들에 의해 문제시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영화 ‘검은사제들’이 한창 흥행을 하던 당시 주인공 ‘최 부제’역을 맡았던 배우 강동원 씨 덕분에, 그 해 부제였던 저와 동기들은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강동원 씨를 통해 사제는 키 크고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아야 한다는 편견에 가까운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한편 같은 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 ‘곡성’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외모의 배우 김도윤 씨가 ‘양 부제’ 역을 맡아주셔서 그런 편견이 일부 해소되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언급하게 되어 김도윤 씨께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후 드라마 ‘손 더 게스트’의 김재욱 씨, ‘프리스트’의 연우진 씨와 박용우 씨가 차례로 사제복을 착용하며 그 기준치는 다시 상향되었습니다. 드라마 ‘열혈사제’의 주인공이 김남길 씨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겠죠. 실제로 부푼 기대를 품고 예비신자 교리반을 찾아 온 여성분들이 현실의 초라함 앞에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종종 들려오기도 합니다. 물론 제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사제와 가톨릭교회 이미지는 이러한 매체와 콘텐츠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비’되어 왔고, 소비된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제를 악마를 맞서는 구마사제의 이미지로만 떠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선택되는 이미지의 첫 번째 조건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흥미여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흥미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당대의 시대상과 주된 문제들, 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어떻게든 담겨있기 마련입니다. 한때 사제의 독신이란 이미지가 ‘나와는 다른 어떤 특별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위해 소비되었다면, 구마사제의 이미지는 한편으로 ‘악과 악마의 존재, 죄와 고통’ 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이미지들과 관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제는 ‘현실의 사회악과 불의에 직접 맞서 싸우는 열혈사제’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