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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교양 강의] 자유자재의 뜻
제5강 자유자재의 뜻
포정(庖丁)은 푸줏간의 장인이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소를 죽이는 도살이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도살 장면을 어떻게 즐겁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되도록 피하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맹자는'소는 보았지만 양은 보지 못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도살당하려고 끌려가는 소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자 소를 살려주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한다. 맹자는 양도 두려워 떨 것이니 군자는 차마 그것을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더 나아가 저렇게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느냐고 제나라 선왕을 일깨운다. 맹자는 이 때문에 '군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말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저렇게 도살당하는 일을 적게 보는 것이라고지적한다.
장자의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주관적인 호오를 드러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해야 하며, 이해한 후에야 감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감상은 심미적 경지에 머물지 않고 양생의 도리까지 그려낸다.
포정해우(庖丁解牛)
『장자』 「양생주」 편에는 다소 길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그의 손이 닿고, 어깨를 기대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데 휙휙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고 칼을 넣어 움직일 때 싹싹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았다. 「상림(桑林)」이라는 춤곡에도 어울리고, 「경수(經首)」라는 악장에도 딱 맞았다. 문혜군이 감탄하며 말했다. "아! 매우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다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포정이 소를 잡는 동작은 마치 한바탕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그가 소를 잡으며 내는 소리는 하나의 악장을 연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지요. 이것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문혜군은 그의 기술에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포정은 자신의 깨달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훈련 과정과 작업 기교를 설명하고 일을 마친 후의 만족스런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우선 훈련 과정을 설명합니다. 문혜군의 칭찬을 받자 표정은 칼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도입니다. 기술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 소를 잡았을 때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덩치 큰 한 마리 소였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는 소 한 마리 전체가 보이지 않더군요. 지금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감각 작용을 멈추면 정신이 활발하게 작동합니다. 소의 자연스러운 생리적 구조를 따라서 고기 덩어리의 틈새를 가르고 뼈마디 사이의 간격을 벌려서 오직 한 마리 소의 본래적 구조에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경락이 연결되고 뼈와 고기가 붙어 있는 곳까지 모두 괜찮은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포정은 3년의 훈련 기간을 거쳐 소를 관찰할 때 감각 대신 정신을 사용합니다. 마치 엑스레이로 투시하는 것처럼 직접 소의 뼈구조를 보고 칼을 휘두르니 여유가 있는 것이지요. 크건 작건 상관없이 소라면 모두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가장 관건이 되는 말은 바로 제가 자연스러운 생리적 구조'로 번역한 '천리(天理)’라는 말과 본래적 구조'로 번역한 '고연(固然)’이라는 말입니다. '천리'는 자연적인 구조이고 '고연'은 개체의 본래적인 형태입니다. '천리'는 보편적인 것으로 소라면 모두 동일한 것이고,'고연'은 눈앞에 있는 소의 특수성을 가리킵니다. 포정은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힘든 일을 간단하게 처리했으니 기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언급하는 것은 작업 기교입니다. 포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주방장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고기를 써는 데 쓰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주방장은 1개월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는 데 쓰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 소를 잡는 데 썼는데도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 사이에는 틈이 있고 저의 칼날은 두께가 없을 정도로 날렵합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이 있는 뼈마디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을 움직이는 데에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 동안 사용하였는데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칼을 움직이는 데에 여유가 있다' (遊刀有餘)는 말인데, '솜씨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처럼 들리고 심미감이 있는 듯이 보이지요. 한 사람이 충분하게 준비하고 만족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는데 잘못될 리가 있겠습니까. 포정은 일에 임했을 때는 조금도 경솔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육과 뼈마디의 교차점을 대했을 때는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저는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집중하고 행동을 천천히 한 후 칼을 조심스럽게 휘둘러서 소의 몸체는 분해된 후 마치 흙덩어리처럼 땅에 떨어집니다."
표정은 자신의 기예(技藝)에 대해 매우 만족해하는 것 같습니다.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칼을 든 채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마음이 침착해지면서 만족스러우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장자』에서 한 사람의 만족스런 정신 상태를 묘사한 표현 가운데 '사방을 둘러보고 마음이 침착해지면서 만족스럽다'(爲之四顧, 爲之踐踐滿志)는 구절보다 더 훌륭한 경우는 없습니다. 「전자방(田子方)」편에 등장하는 손숙오도 초나라 재상을 맡고 있을 때 세 번 재상이되고 세 번 물러났지만 어느 때나 태연자약하여 걱정하는 안색이 없었습니다. 그때 장자는 유사한 방식으로 '침착한 듯이 사방을 둘러본다' (方將蹄踏, 方將四顧)라고 손숙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대조해보면 표정을 묘사하는 말에는 재상인 손숙오를 표현할 때보다 '만족스럽다'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습니다. 장자는 명예와 이익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집착 없이 오직 한 사람이 지금 여기서 편안할 수 있는가 혹은 생명의 다채로운 활기를느끼는가를 논하는 것입니다.
문혜군이 감탄하면서 말합니다.
"좋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이치를 깨달았다."
어떤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이겠지요. 자신의 생명을 잘 기르려 할 때 애써 억지로 수양해서는 안 됩니다. '천리를 따라서' 그리고 '고연으로 인하여'를 기억하셔야지요. 자연의 구조와 본래의 모습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서 수양한다면 양생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물론 양생에서만 만족을 얻고 말 수는없지요.
솜씨 좋게 일하기
세상의 수많은 일들에는 모두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을 이해한다면 말할 수 없는 번뇌를 줄일 수가 있고 침착한 모습으로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는 성인만이 아니라 총명하고 능동적인 두뇌를 가진 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설신어(世設新語)』는 위魏·진晋시대 명사(名士)들의 일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융(王戎)이 일곱 살 때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자두가 무척 많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찌나 많이 열렸는지 나뭇가지가 휠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달려가서 자두를 땄습니다. 그런데 왕융만 꼼짝 않고 있었지요. 옆에 있던 사람이 왜 달려가서 자두를 따지 않느냐고물었습니다. 왕융은 이렇게 대답했지요.
"나무가 길가에서 자라서 열매가 모두 쓸 것입니다."
자두를 따서 맛을 보니 과연 그 맛이 썼습니다.
이것이 '길거리의 쓴 자두(道旁多苦李)’라는 말의 전거입니다. 왕융은 자두가 정말 달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다 따가고 없을 텐데 그대로 남아 있으니 분명히 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이나 그 마음이 돌아가는 이치는 모두 똑같습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은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석류나무를 심었습니다. 추수기가 되자 석류 한 바구니를 따서 집 밖에 놓고 "공짜입니다. 아무나 가져가셔도 좋습니다”라고 푯말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길을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다음 해 가을에 그는 푯말을 바꿨습니다. 그 푯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최고급 석류, 비싼 값에 팝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인근 사람들이 앞다투어 석류를 사갔다고합니다. 사람의 보편적인 심리에 근거하여 상황을 바꾼 것이지요.
왕융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해봅시다. 그가 일곱 살 때의 일입니다. 관청에서 늙은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호랑이 이빨과 발톱을 빼고 난 후 선무장(宣武場)에 가두고 사람들이 구경하게 했지요. 오늘날로 치면 동물원 같은 곳이겠지요. 왕융도 어른과 함께 구경을 했습니다. 늙은 호랑이가 기회를 엿보며 울타리에 기대어큰 소리로 으르렁거리자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왕융은 조용히 서서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이치를 살피는 습관을 길러왔기 때문에 늙은 호랑이가 울타리에서 도망가지 못할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호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울타리를 훌쩍 넘어 가버렸겠지요.
솜씨가 좋다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예로는 아마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의 사안(謝安)만 한 경우가 없을 겁니다. 비수(淝水)에서 치른 전쟁 중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10만 대군을 소집하여 동진(東晋)을 공격했는데 그 세력이 얼마나 큰지 말채찍만 다 던져도 강물의 흐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동진의 재상인 사안이 직접 총지휘를 하면서 동생인 사석(謝石)과 조카인 사현(謝玄)에게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느날 사안이 손님과 집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사현이 전장에서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사안은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말 없이 계속 바둑을 두었습니다. 손님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그에게 전쟁의 승패에 대해 물었습니다. 사안은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이 적군을 대패시켰다는군요.”
그런데 안색이나 행동거지가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안이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속에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묘사한 포정처럼 적군과 자신의 형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 리 밖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안도 그때 마음속으로는 무척 기뻤을 겁니다. 그러나 손님 앞이라서 억지로 기쁨을 감추고 꾸며댔던 것이겠지요. 손님이 간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때 나막신 굽이 문 난간에 부딪혀 부러졌는데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진서(晉書)』 「사안전」에는 그가 "감정을 억제하며 사물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전쟁의 승부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감정이 없겠습니까. 장자가 묘사하고 있는 포정도 소를 도살한 후에 침착하게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표정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일을 완수한 후에 기쁜 감정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안은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에 무척 민감해서 타인 앞에서는 마음속 기쁨의 표현을 억제했지만 나막신의 굽이 부러졌을 때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사안은 비수의 전쟁으로 천하에 명성을 날렸고 지략으로 강한 적군을 물리쳤지만 양생을 이룰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포정은 다릅니다. 그는 소를 해체할 때마다 만족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즐거움은 오래 지속될 수 있고 그 근원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일을 하면서 함께 생겨나는 겁니다. 노자는 "타인을 아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만 스스로를 아는 것은 더욱 현명한 일이다" (知人者智 自知者明)라고 했습니다. 왕융이나 사안이 ‘지혜롭다'면 '더욱 현명한 것’은 표정이겠지요. 포정은 스스로를 아는 현명함을 가졌고, 또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양생(養生)’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깨달음을 통해 매순간 생명의 편안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자연에 순응하다
우리는 '천리(天理)’라는 말을 원체 많이 들어서 이제 익숙합니다. 송·명시대 성리학자들의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제거하라(存天理, 去人欲)’는 유명한 말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리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양지(良知)로서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인욕은 모든 잘못과 죄악의 원인입니다. 이 때문에 수양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이 말을 잠언처럼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 방식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누가 인욕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제거할 수 있다면 그를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유가의 시조입니다. 그는 군자가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이와 혈기에 근거한 순서대로 말하면 ‘색(色), 투(鬪), 득(得)’이라는 병입니다. 여색, 싸움, 욕심'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여색을, 장년이 되어서는 싸움을, 노년이 되어서는 뭔가를 얻으려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말이지요.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과 제거하여 없애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혈기는 신체에 따라서 생겨나기 때문에 경계하고 조심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해야 합니까. 척도를 의미하는 ‘구(矩)’입니다. 이 '구'라는 말에는 법률과 예의 등 사회적인 규범이 포함됩니다. 공자가 자기 수양의 깨달음을 묘사할 때 가장 마지막 단계인 일흔 살에는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따라도 척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했지요.
다시 말하면 공자는 인욕을 제거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의 규범으로 인욕을 조절했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으로 천리와 인욕을 조화시키고 더 나아가 인욕을 천리로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읽은 『장자』의 '포정해우'라는 우화를 보면 송·명유학자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천리'라는 말이 원래 이 장자의 글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천리의 의미는 도덕과 무관하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말한 것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의미로서 자연의 조리(條理)를 가리킵니다. 소를 해체하는 장면에서 '소의 자연적인 생리구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경험과 관찰로부터 귀납하여 얻은 인식의 깨달음입니다. 단지 한 마리의 소지만 이 '천리'를 갖추지 않은 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소를 해체할 때 '천리에 따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문혜군은 이로부터 양생의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자연적 생리구조를 따르고 사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산천지리의 특수한 조건에 맞추고 나이에 따라 생활을 안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했다고 하여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에 속한다면 자연적인 수명, 즉 천수를 누려야 하는바 몸 밖에 있는 사물의 복잡한 상황에 말려들 필요도 없고 장생불사나 신선이 되려는 환상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천리에 따르는 것 이외에 고연으로 인하여'라는 점이 있습니다. 이 점도 양생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고연'이라는 것은 개체 사물의 본래적 형태입니다. 소를 해체하는 장면에서 '오직 한 마리' 소의 본래적 구조 형태, 그 개별적 독특성입니다. 세상에는 이 구조 형태가 동일하게 똑같은 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포정이 소를 해체하려고 할 때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집중하고 천천히 행동했던 것입니다. 만약 소가 보편적 성질만 가지고 있다면 포정이 이렇게까지 집중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소마다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번의 도전은 유일무이하며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정이 소를 해체하고 나서 그렇게 매번 그렇게까지 만족할 수는 없었겠지요.
장인으로 비유해서 말해보지요. 그는 공예품을 만들면서 매일 일정 수량의 상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국보급 예술품은 복제할 수가 없고 장시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포정은 '고연으로 인하여' 칼을 놀렸기 때문에 매번 예술적 창작의 경지와 같은 희열을 느낀 것입니다.
양생을 가지고 말한다면 여러 사람이 효과를 보는 방법에는 운동, 체조, 때에 맞는 휴식, 영양제 복용, 태극권, 기공 연마 등이 있겠지만, 여러분이나 저에게 이런 방법이 반드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가장 좋은 선생이 될 수 있고 자신의 가장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병이 오래되면 스스로 좋은 의사가 된다'는 말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속담이 아닙니까.
도가의 양생관에 대해 노자는 '오래 살고 오래 보는'(長生久視)’ 도리를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달아 그 도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고요한 안정에 도달하여 자연적인 수명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장자는 '천년(天年)을 누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천년'은 '천수(天壽)’라는 말로 자연적인 수명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자연적인 수명대로 살려면 세속의 이해다툼에 빠져 몸과 마음을 상한 나머지 수명을 재촉하여 단축할 필요도 없고, 애를 써가면서 양생하여 오래 살려고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해 다툼에 빠지건 애를 쓰건 간에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득실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설령 오랫동안 산다 한들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고연', 즉 그 자신 본래 모습으로서의 개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건강 측면에서만 양생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건강상의 이유만으로 그렇게 아등바등해야 할 이유가 없지요.
'건강'은 오늘날 의학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행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란 게 무엇입니까. 의학이 가져다준 건강 속에 더 큰 위험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의학의 공과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다 다를 겁니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양생이란 단순하게 자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엑스레이처럼 꿰뚫어볼 줄 아는 지혜를 갖추고 '천리'와 '고연'을 분명하게 파악한 후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솜씨 좋게 살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