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봄은 격동의 시기였다. 2.12 총선에서 폭발적인 민중의 지지를 얻은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여 전두환철권통치체제의 한쪽에 균열을 내고 있었고 학생운동에서는 80년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 연대조직인 전학련, 삼민투가 조직되었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 친미적인 민간보수정권의 수립을 통한 안정적 체제로의 이전을 검토하는 가운데 <타임>, <뉴스위크> 등을 이용해 은근히 '한국의 민주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에 전정권은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민중들의 투쟁을 잠재우고 다시금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 그것은 바로 역대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던 반공이데올로기 공세였다.
1985년 9월 9일 각 언론에서는 안기부가 제공한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 수사발표문'을 사건 그림표와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김성만은 지난 1982년 8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 유학 중, 재미반정부지로 위장한 <해외한민보>의 발행인이며 북괴공작책으로 평양을 수차례 다녀온 서정균에게 포섭되었다. 김은 1983년 7월 헝가리 주재 북괴공관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미국 등 우익세력을 제국주의적 민족반역집단으로, 반공을 민족분열을 책동하는 냉전논리로 매도하는 내용의 반미 팜플렛 <예속과 함성> 300권을 제작하고..." 양동화의 입북, 김성만의 헝가리 동독 방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당국은 이를 학생운동탄압을 위한 절호의 소재로 생각하여 수사에 착수한 후, 이들과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묶어 간첩단사건으로 발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학생운동이 간첩에 의해 조종된다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학생운동 전반을 불신케하려는 의도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김성만씨는 '공산주의 서적 탐독', '<예속과 함성>이라는 소책자 배포'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1978년 5월경부터 청계천 고서점 일대에서 구입한 <변증법적 유물론>, <공산주의 운동사> 등 공산주의 관련서적을 탐독하여..." 라고 범죄행위를 구성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어떤 서적을 읽고 그 서적에 담긴 내용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행위 자체가 범죄가 되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말 그대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하는 제도 아래에서 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국민의 어떠한 사상이나 신념체계를 가지는 것은 자유이어야 하고 이 자유에 기초하여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처럼 단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탄압하고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 상황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작 김성만씨 자신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봉건적 유제를 일소하고 독재를 청산하여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상고이유서에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검찰의 주장에서 이들이 탐지 수집했다는 기밀 역시 <예속과 함성>, <인식과 전략>, <야학비판> 등 단순한 운동권 문서에 불과했으며 그들이 벌였다는 활동 역시 당시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반미의식 정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결국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탄압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연행된 김성만, 양동화, 황대권씨 등은 안기부 지하실에서 60여일간 감금, 고문조사를 받는 동안 일체의 진실이 무시된 채 안기부가 필요로 하는 인물로 둔갑되어 버리고 북한을 추종하고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무력폭동을 계획한 관제간첩단 사건의 주요관련자가 되었다. 조작을 위해 자행된 고문으로 그들은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김성만씨는 '항소이유서'에서 "...모진 고문을 참아내느라고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술이 모두 해진 상태에서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고 심지어 혹독한 고문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불의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하여 본인이 부모님께 보내는 유서마저 써놓고 조사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질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가 모두 무시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켜지지 않았던 상황. 그 때 인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