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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雞林歷史紀行 원문보기 글쓴이: 월성
먼 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서
이제는 국화 옆에 앉은 원로 교사!
1989년 27살에 시작한 중등학교 역사교사 생활 36년이 명퇴 신청으로 올해가 마지막이 된다.
그동안 청소년적십자, 천자문, 삼국유사, 식물탐구, 고전탐구, 문화유산탐구 등의
동아리 활동 지도교사가 되었다.
취업을 겨냥한 입시 스펙 관리 때문에
동아리 활동은 그 본래 취지를 잃고서 갈수록 저조하다.
특히, 문화유산탐구 동아리 활동은 현장 답사를 할 수가 없어서 많이 아쉽다.
1975년 국민학교 6학년 때 완행 기차타고 영천에서 경주, 포항에 수학여행 와서
불국사 다보탑을 처음으로 보았다. 대웅전의 토대 높이를 내 키로 재어보고 내 키보다 높았던 기억이 있다.
포항 송도해수욕장에 와서 모래사장에서 덤블링을 하였고, 그 때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50년이 지나서야 불국사 다보탑의 조형 근거, 양식사학적 특징, 사상적 의미를
대학에 입학하면서 만난 우현 고유섭 선생의 연구를 읽고서야 알게 됐다.
1989년 27세
동아리 청소년적십자(R.C.Y.) 지도교사(1989년)
옛 학교 현관 앞
1990년 7월 22일 여름방학 하는 날
호미곶 등대
청하중학교 박창원 교장선생님과 내연산 답사하며
비하대 정상의 소나무,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나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는 내연산의 상징 경관인 '삼동석(三動石)'을
문헌과 답사로 취흘 유숙 이래로 400년 만에 찾아내기도 하였다.
1968년 대동중학교 개교 기념으로 십자당약품 김응교가 선물한
한문 액자의 금석문 서체의 글씨를
"寅畏上帝智之本"(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寅은 공경할 인)
작년에 대동고등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역사책이 집필 될 때
처음으로 해독한 것도 즐거운 일이다.
대학원 연구가 교원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간행됐다.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안삼환 선생님과 기룡산 산돌배나무 아래의 문학인 아회(雅會)에서
나는 안삼환 선생님의 자전소설 <<도동 사람>>의 영천지역 역사, 지리, 문화적 배경을 탐구한 글을 실었다.
시인 백무산 등과 함께 집필
수행평가 과제물 <나의 역사>
학교 앞의 봄
2006년 포항교사불자회의 미얀마 순례 중
세계 3대 불적인 바간의 옛 사원에서
어릴 때 동무들과 올라서 앉아 놀았던 고향마을 논 가운데의 거대한 고인돌
고등학교 2학년 때 꿈 속에서 공자님 사당에 참배했는데
경주교사문화연구회 중원 여행에서 공자님 사당과 묘소를 참배했다.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의 중원여행 중 룽먼석굴에서 유명준선생님이 촬영해주심
1992년 여름방학하고 반 아이들과 대왕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어린 아들아이는 벌써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됐다.
법륜스님과 함께 한 고구려, 발해, 백두산, 두만강,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여행 뒤에
교내 축제에서 사진전을 했다.
20년 전이다. 이 학생들은 이제 30대 중반이다.
보경사 원진국사탑비
향토사 사진전, 미국인 원어민 영어교사 Nick과 함께
나의 첫 수필 <어머니>(<감꽃>)가 실린 교지, 1990년
나의 수필 <매화>가 실린 교지
꼭 30년 전,1994년 대동중학교 1학년 4반 담임 시절 만든 학급 모음 일기
14살의 50명 아이들이 벌써 44세의 중년이 되었다.
30년 만에 일기를 다시 읽으니 인간이 얼마나 신령스러운 존재인가를 깨닫겠다.
어린 영혼들을 아름답게 빚어내는 신과도 같은 직업이 교사인 것을 뒤늦게 알겠다. 50명 중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종환이의 사슴같은 눈망울이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아롱진다.
이 일기를 읽고서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클래식 음악 주페의 <경기병 서곡>을
유투브로 감상한다. 영특한 제자는 일기에서
어머니가 사 준 테잎으로 이 음악을 듣고 감상 소감과 함께 작곡자 주페도 소개하고 있다.
서울과 포항의 교사불자회가 기림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미국인 원어민 영어교사 케이티Katie에게
기림사, 석굴암, 불국사를 안내했다.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문화부장 맡으며 부탄 순례 중에 탁상사원을 오르며
첫 수필집
2023년은 성덕대왕신종의 탁본, 사진, 신종 명문의 서예 등을 테마로 했다.
제발은 중국 장안성에 사는 전각 및 서예가인 친구 결재 왕카이의 글씨를 받았다.
지극한 도는 모양 밖까지도 포함하고,
큰 소리는 천지 간에 진동한다.
언어를 빌려서 삼진(三眞)의 깊은 뜻을 통찰하고,
신종을 울려 일승(一乘)의 원융한 부처님 음성을 깨닫게 하네.
*삼진: 변계소집성의 無相진여, 의타기성의 무生진여, 圓成實性의 무性진여
-성덕대왕신종명銘의 첫 대목을 7언 대련으로 고쳐 써보았다.
2024년 올해는 불국사와 우현 고유섭, 문무대왕릉, 감은사지를 주제로 전시했다.
영축산 달라이 라마 성하, 법륜 스님, 귀산 스님과
라싸 조캉사원 옥상에서 포탈라궁을 배경으로
산서성 윈강석굴의 대불 앞에서
2020년 계림역사기행 자바 족자카르타 보로부두르의 일출을 바라보며
보로부두르의 부조
세계적인 스승, 틱낫한 스님이 16세에 출가하고 96세에 열반한 베트남 후에에 있는 뚜 히우 사(慈孝寺) 종각
鳴鐘 종을 울리며 읊는 게송
願此鐘聲超法界 바라건대 이 종소리 법계를 뛰어넘어,
鐵圍幽闇悉皆聞 철위산과 지옥의 모든 중생에게 들리고,
聞塵淸淨證圓通 사바세계에 들려서 청정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소서!
聞鐘 종소리를 들으며 읊는 게송
聞鐘聲煩惱輕 이 종소리 듣고 번뇌가 가벼워지고,
智慧長菩提生 지혜가 자라고 깨달음이 생기며,
離地獄出火坑 지옥을 여의고 불구덩이에서 나오고,
願成佛渡衆生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건지기를 바라나이다.
唵伽囉帝耶莎訶 옴! 가라제야 사바하!
사회봉사청년학교를 만들어 일만 명의 봉사자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돕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한 틱낫한 스님은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는 유마경의 말씀처럼, 베트남전쟁의 불구덩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었다. 틱낫한 스님이 1942년 16세에 출가하여 사미승 시절을 보낸 이 절에서 섣달그믐날 이 종을 울려 베트남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한 이야기를 여행 오기 전에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1.~1954.5.) 시기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피난길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양춘령(楊春嶺)이라는 야산 근방에 도착하고 보니 거의 보름 전에 몇 가구가 이미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피난길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절로 가는 오르막길에는 풀이 많이 자라나 길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 우리는 몇 달 동안 절을 떠나 있었다. (…) 우리는 대여섯 날을 걸어오고 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피곤에 절어 온몸이 쑤셔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이 가까워 오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야산과 언덕을 따라 퍼져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면서 공포와 침묵에서 비롯된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있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저기 절이 보인다!”
만 사제(師弟)가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외쳤다. 키가 큰 소나무 그늘 아래로 절 지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먼 옛날의 친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과도 같았다. 그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뚜 보살님이 염려되었다. 보살님은 별일 없이 살아계실까? 소개(疏開) 명령을 받았을 때, 뚜 보살님은 남아서 절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절 마당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보살님의 안위를 걱정하던 내 마음은 사라져버렸다. 저 멀리 보살님이 빛이 바랜 갈색의 긴 승복을 입은 채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 사제가 보살님을 행해 소리쳤다. 보살님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다보았다. 보살님은 우리를 보자 곧장 달려왔다. 감정이 격앙되어 보살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절 지붕은 총탄에 맞아 여러 군데가 부서져 있었다. 절의 벽도 여기저기 총탄에 뚫려 구멍이 나 있었다. (…) 우리가 절에 돌아온 날은 음력 섣달 27일이었다. (…) 우리는 음력으로 새해, 즉 쥐띠 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 밤이 되자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찾아왔다.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총탄이 우리 절 지붕 위로 날아다녔다. 우리는 문을 잠그고 방안에만 있었다. 조명탄 불빛이 벽 틈으로 보였다. 일련의 기관총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나는 조사당(祖師堂)에서 만 사제와 함께 꺼질 듯 말 듯한 호롱불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죽음의 장면을 떠올리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밤은 조용해졌지만, 그것은 답답한 적막이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돌아온 날 이래로 만 사제는 범종을 친 적이 없었다. 뚜 보살님이 못 치게 했던 것이다. 보살님이 말하기를 어느 날 밤 계단을 올라 종이 있는 층계참으로 가서 종을 대여섯 번 쳤는데 그때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달려 내려가 보니 대여섯 명의 프랑스 군인이 보였다. 총으로 보살님을 위협하며 다시는 종을 치지 말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종소리가 적을 위한 암호로 생각했거나 종소리가 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
평소 우리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침상에 앉아 범종 소리를 들으며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세는 명상)을 하거나 칭명염불(稱名念佛-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부르며 불보살의 지혜와 공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른 아침이 되어도 더 이상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섣달그믐 날 밤, 우리 모두는 요사채 한가운데 있는 화롯불 둘레에 앉아 있었다. 뚜 보살은 설날 음식으로 엿을 고았다. 그리고, 화로 위에 솥을 올려 떡을 쪘다.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해 미륵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자정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날 밤 절에는 뚜 보살님과 우리, 일곱 사람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악업의 씨앗을 심으면 어디로 가든 그 과보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니라.”
고 하셨다. (…)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도 별 탈 없이 지내는 가난한 가족들이 많은가 하면,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위험을 피할 수 없었던 부자 가족도 많았다. 뚜 보살님은
“지금 같은 때에는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믿을 것이라곤 각자가 쌓은 공덕 뿐이라우. 재산이나 머리는 믿을 것이 못 되지요.”
어쩌면 가장 믿을 수 있는 갑옷은 자비심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덕이나 복덕은 각자가 짓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생기는 법이 없다. (…)
자정과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의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향로에서 오르는 연기가 대웅전을 가득 채웠다. 나는 종각으로 가서 받침대를 딛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산과 숲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몇 개의 별들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보았지만 어둠 속의 마을에는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뜬 눈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땀 만 사제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리는데 범종과 법고를 치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방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막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맞아, 새해를 맞이하는데 반야 지혜의 종과 법고를 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매년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릴 때면, 절에서는 언제나 종과 법고를 일곱 번 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새해를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시작 되었다. 불꽃은 하늘을 밝히고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는 언덕과 산자락에 있는 여러 마을에 울려 퍼졌다. 올해는 감히 불꽃놀이를 하려고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종과 법고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바깥을 내다 보았다. 산과 언덕 그리고 여러 마을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이렇게 두려움이 가득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새해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평소대로 종과 법고를 쳐보지 않을래?”
내가 이렇게 묻자 만 사제는 움찔했다.
“프랑스 군인들이 총을 쏘아대면 어쩐다죠?”
나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해가 이렇게도 음울하게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되살아났다.
“걱정마, 그들도 오늘이 섣달 그믐밤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게 해보자 지금 분위기는 너무 무겁잖아. 이래서 새해가 오기나 하겠어? 사제, 어서 종과 북을 치자, 만일 그들이 온다면 내가 프랑스말을 아니까 설명하면 되겠지 뭐.”
땀 만 사제는 단호한 내 모습을 보고는 자신감이 생겨서 고루(鼓樓)에 올라가서 법고를 치기 시작했다.
‘댕… 댕…’ 은은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법고의 박자에 맞춰 점점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잇따라 들려오는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강렬한 북소리는 멋지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재촉했다. 일곱 번에 걸친 종과 북소리는 새해가 온 것을 축하하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종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조화로운 염불 소리와 끊임없이 목탁을 치는 소리가 대웅전에 울려 퍼졌다.
만 사제는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얹고는 어둠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형, 저기 보세요!”
마을 사람들이 새해가 시작된 것을 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등불이 어둠을 밝히며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문이 활짝 열린 듯했다. 언덕과 야산을 짓누르고 있던 황량한 느낌은 사라지고 한층 부드러운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범종에서 나는 웅장하고도 은은한 소리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물리치고 어둠을 쫓아버렸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은 전쟁 중인 나라에 따뜻한 봄이 왔음을 느꼈을 것이다.
범종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 강렬한 소리는 따뜻한 마음과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퍼져나갔다. 사제와 나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불단 앞에 꿇어앉은 채 승가와 함께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평화스럽고 기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어둠을 걷어붙인 새해의 종소리>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
2024년 1월 계림역사기행 베트남여행 중 뚜 히우 사 산문과 반달 연못
뚜 히우 사 사적비
베트남 여행기2
베트남 후에(Hue, 順化)의
뜨 히우 사(慈孝寺)
집으로 돌아와 대웅전 앞의 비문을 아내가 촬영한 흐릿한 사진으로 읽어 보았다. 비명 중에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정치 혁신에 실패하고 유배 가서 지은 명문, <누실명(陋室銘)>의 구절을 인용한 구절이 있어서 흥미를 느끼고 전문을 읽으려고 시도하였지만, 비각 속이 어두워 촬영한 사진으로는 비문의 태반이 판독하기에 어려웠다. 간신히 비제(碑題)를 알아내어 ‘구글 베트남’에서 검색하니 베트남의 지식인이 뜨 히우 사의 비문들을 채록한 글이 검색되어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구글에서 찾은 비문을 읽다가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사진의 비문과 대조하여 읽으니 오탈자가 수두룩하고, 문장 중간에 52자가 빠져 있었다. 양자를 대조하고, 또 문맥을 보고 겨우 비문의 원문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조선왕조처럼 응우옌 왕조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기에 절 이름에도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융합되어 있었다. 대학사(大學士) 완등해(阮登楷)는 유불 융합의 의미를 사찰 이름에서 이끌어 내었다. 흥미롭게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우리나라의 속담과 비슷한 속담이 비문에 나왔다. 또한 절에 지은 건물 중에 이름이 애일당(愛日堂)이 있어서 친근감을 느꼈다. 농암 이현보 선생이 94세의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도산서원 입구에 지은 건물이 애일당이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효자는 부모를 봉양하는 '날을 아낀다(愛日)'라는 말은 <<양자법언(揚子法言)>>의 <지효편(至孝篇)>이 출전이다.
이 절은 1847년 10월에 입적한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臨濟宗)의 낫 진(Nhat Dinh 一定) 선사(禪師)가 1843년에 이곳 ‘양춘령(楊春嶺)’이라는 동산에 안양암(安養庵)이라는 초막을 짓고 여든 연세의 노모를 모시고 수행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스님의 효심에 감동한 뜨득(Tu Duc 嗣德) 황제가 스님에게 '聖嗣孝嗣‘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847년에 스님이 열반에 들고, 1848년에 환관들과 청신녀(淸信女)들이 재물을 희사하고, 현재와 같은 큰 규모로 짓고 자신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이에 황제도 거금을 보시하고 ‘慈孝寺(자효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낫진 스님은 꽝찌(廣治)성 등창(登昌)현 라총중견(羅總中堅)촌 사람으로 1784년에 어린 나이로 보국사(報國寺) 보정(普淨) 화상에게 출가하여 19세에 밀홍(密弘) 화상에게 수계하고 법명을 성천(性天), 자를 낫진(一定)이라 하고, 또한 보정 화상의 사법(嗣法) 제자가 되었다. 병진년(1796)에 보정 화상이 입적하고 보국사 주지가 되었다. 밍망 11년에 도첩을 받고, 14년에 충령(充靈), 우관(祐觀) 두 절의 주지가 되었다. 또한 황제의 명령으로 각황사(覺皇寺)의 승강(僧綱)이 되었고, 티에우 찌(昭治) 2년 계묘년(1843)에 60세가 되었는데, 황제의 은혜를 입어 병을 회복하고 노년의 삶을 보살피게 되었다. 일찌기 추계(鄒溪), 병상보(秉常甫)와 미리 자신의 승탑을 세울 자리를 이곳에 잡았는데, 그 왼쪽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안양(安養)이라 하고, 병을 요양하기를 7년이 지난 정미년(1847), 64세 10월 초7일에 문득 입적하시니 안양암 오른쪽에 승탑을 세웠고, 가르침을 받은 문도가 또한 많았다. 뜨득(嗣德) 원년 내원 태감(內院 太監, 환관) 여러 명이 함께 발심하여 이 절을 다시 일으켰다.
-안양암일정화상행식비기(安養庵一定和尙行寔碑記)
인각사(麟角寺)로 하산한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선사도 진존숙(陳尊宿)처럼 노모를 모셨고, 삼국유사에도 <효선편(孝善篇)>을 넣었다. 효심이 깊었던 틱낫한 스님도 은사로부터 낫진 스님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승복을 입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시장에서 생선을 사 온 이야기, 뜨득 황제가 절에 찾아와 노승과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는 일화를 전해 듣고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틱낫한 스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A rose for your pocket)>라는 글을 지어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 어머니를 만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번역하여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하였다.
자효사 비와 비각
慈孝寺碑記
자효사비기
寺在承天香水縣楊春社 分土山連還 前襟小溪 御屛鎭其東南 香江繞其西北 亦京師一妙勝景也
절은 후에의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양춘사(楊春社)에 있는데, 갈라져 나온 흙산이 이어져 절을 두르고 절의 앞 소맷자락 위치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며, 어병산(御屛山)이 그 동남쪽을 누르며, 향강(香江)이 그 서북쪽을 감싸고 흐르니, 또한 도성의 한 아름답고 빼어난 경관이다.
寺乃一定禪僧古俗阮住持顯化處也 僧初住覺皇寺戒律精嚴 久爲檀那所信向 晩臘返于斯土 結庵修禪 善信雲集 徒弟日衆 終依然一方丈一蓬廬也
절은 곧 속성이 응우옌(阮)씨인 낫진(一定) 선사가 주지하고 교화를 드러내었던 곳이다. 스님이 처음에 각황사(覺皇寺)에 머무실 때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청정승이었기에 오래 신도들의 믿음을 받았다. 만년에 여기에 돌아와 암자를 짓고 참선 수행을 하시니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 운집하고 제자들이 날로 늘어났지만, 끝내 한 방장(方丈)과 한 초가에 사셨다.
丁未年 十月 七日 僧示寂其山門 因于故庵築塔藏舍利焉
정미년(1847) 10월 7일 스님이 암자에서 입적하시니 옛 암자에 탑을 세우고 스님의 사리를 갈무리하였다.
(중략)
曰 妙哉寺乎 美哉其名乎 古寺 曰招提 曰伽藍 曰道場者 以其名也 曰遺愛 曰憫忠 曰報恩 曰崇慶 因其義也 寺且無量無邊計也 而以慈孝命名 此其一也 夫慈者佛之大德也 非慈無已接衆生濟萬類 孝者佛之首行也 非孝無冠天地達幽冥
오묘하도다, 절이여! 아름답도다, 그 이름이여! 옛적에 절을 초제(招提; 산스크리트어 catur-diśa의 음사), 가람, 도량(道場)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이름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줌, 진심임, 은혜를 갚음, 경사를 받듦은 그 뜻을 말한 것이다. 절은 또한 한량없고 가 없는 일을 도모하는 곳이다. 그리고 황제께서 ‘慈孝(자효)’로 명명하신 것도 절이 가지는 의미의 하나이다.
무릇 자비, 사랑과 연민은 부처님의 큰 덕이다.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중생을 교화하고 뭇 생명을 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으뜸가는 실천 행동이다. 효도가 없으면 인간 존재가 천지에 으뜸일 수가 없고, 돌아가신 조상님께 닿을 수도 없는 것이다.
大學曰 君子不出家而成敎 於國則以止慈敎天下之爲人父 以止孝敎天下之爲人子 慈孝者也 夫非儒釋之達行歟 非獨此寺爲可名天下之有寺者皆可名 非獨語釋者以爲法言 天下之語儒者 皆可奉爲法言也 大哉遠乎 旨哉淵乎 聖人爲人心世道計者 亦至矣 矧是寺也
<<대학>>에서 말했다. 군자는 출가하지 않고 교화를 이룬다. 국가로 말하면 지극한 자애로써 천하의 남의 아버지 된 자를 가르치며, 지극한 효도로써 천하의 남의 자식 된 자를 가르친다. 자애와 효도라는 것은 무릇 유교와 불교의 통달한 행동이 아닌가? 이 절뿐만 아니라 천하의 절이 모두 이름할 수가 있으니, 불교를 말하는 것만 법언(法言)으로 삼지 않는다. 천하의 유교를 말하는 것도 모두 받들어 법언으로 삼을 수가 있다. 위대하도다, 그 원대함이여! 그 뜻이여, 깊도다! 성인이 인심과 세상의 도덕을 위해 헤아리는 것이 또한 지극한 것이다. 하물며 이 절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一定禪僧能奉慈接衆生 而檀樾許多人 或可以登花藏之玄門 悟毘盧之性海者 非慈之屬耶 宮監人等能以孝道奉師長 而莊嚴此功德 又可以寓先人之香火 作身後之津梁 非孝之屬也 誰六年成道一定也 未敢望之大雄師 十頃布金善信也 未敢擬之給孤獨 而其顯一門之慈孝 振萬古之尊風 此寺豈虛名乎 未論從因受果 瓜豆之理必然 但即道敎之明 名義之正 斯人也 斯寺也 而斯名也 其善蓋不可泯焉 是爲記
낫진 선사는 자비로 중생을 잘 교화하여 많은 후원 신자들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올라가서 비로자나불의 법성(法性)의 바다를 깨닫게 한 것은 자비심이 아니겠는가? 궁감(宮監; 궁중의 태감; 환관) 등의 사람이 효도로 스승님(師長; 낫진 스님; '스승님'의 줄임말이 '스님'이다.)을 받들었으니 이 공덕이 장엄한 것이다. 또 조상에게 천도재를 올려서 돌아가신 뒤에 피안으로 가는 나루를 만들어 드리는 것은 효도가 아니겠는가? 비록 낫진 스님이 6년 만에 성도하였지만, 감히 '위대하고 영웅적인 스승(大雄師)'이신 부처님을 바라볼 것이며, (환관과 청신녀들이 보시로) 10경(頃)의 땅에 금을 깔았다고 하지만 감히 급고독(給孤獨) 장자에 비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한 산문이 자비와 효도를 드러내었고, 만고에 자비와 효도의 풍조를 떨쳤으니, 이 절이 어찌 헛된 이름이겠는가?
물론, 원인에 따라 과보를 받고 '오이 심은 데 오이 열리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다만 도교의 지혜, 유교의 명분과 의리의 바름은, 바로 이 사람들이고, 이 절이고, 이 절의 이름이다. 그 선함은 대개 인멸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으로 삼는다.
銘曰
명사(銘詞)를 지어 말한다.
慈悲孝順
자비와 효도는,
佛敎精玄
불교의 참된 진리이네.
慈孝名寺
자효(慈孝)라고 절을 이름하니,
皇訓寓焉
황제 폐하의 훈화가 깃들었네.
山不在高
산의 명성은 높은데 있지 않고,
名在有仙
명성은 신선이 있음에 있네.
緬維一定
아득히 생각하니 낫진(一定) 스님은,
苦行修禪
고행과 참선을 하셨네.
楊春故址
양춘(楊春) 마을 옛터에,
庵院蕭然
암자와 사원이 쓸쓸하였네.
善哉宮監
아름다워라! 궁감(宮監; 환관)들이여,
信悟有緣
믿음과 깨달음의 인연이 있었네.
追懷德水
낫진 스님의 감화를 그리워하여,
爰廣福田
이에 복의 밭을 넓혔네.
梵宇煌煌
전각은 빛나고,
金匾箋箋
금색 편액의 글씨가 걸렸네.
上奉佛祖
위로 불조(佛祖)를 받들고,
內承家先
안으로 조상께 효도하네.
一門慈孝
한 산문(山門)의 자비와 효도는
耀後光前
앞뒤의 세월에 빛이 나네.
善不爲小
선행을 함이 작지 않으니,
福等無邊
복은 한량이 없을 것이네.
勒之貞石
깨끗한 비석을 세워서,
以壽其傳
그 전함을 길이 하노라.
嗣德萬萬之二己酉孟夏穀日
사덕 만만년의 두 번째 기유년(1849) 음력 4월 곡우일(穀雨日)
署協辨大學士 領刑部尙書 受在家菩薩戒法名大方 阮登楷恭誌
서협변대학사 영형부상서 재가보살계를 받은 법명 대방(大方) 완등해(阮登楷) 공손히 기록함.
대웅전 주변에는 응우옌 왕조의 비빈(妃嬪), 환관의 능묘들과 낫진 스님 등의 고승의 탑과 비가 많았다. 낫진 선사의 사법(嗣法) 제자로 89세에 입적한 하이 띠우(Hai Thieu, 海紹; 당호가 쿠옹 키Cuong Ky, 綱紀) 스님은 81세에 15개의 서원을 하였다. 겸손하고 철저하며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는 선불교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주어 정말 놀랍다. 중용의 '평범함의 철학'도 느끼게 한다. 스님의 탑비에 15항목의 서원(誓願)이 새겨져 있다.
1. 몸은 모양이 세속과 다르니 흰옷(속인?)을 닮지 않기를 서원한다
(一願身形異俗不似白衣).
2. 입은 늘 청정하여 시비를 말하지 않기를 서원한다
(二願口常淸淨莫說是非).
3. 뜻과 행동은 평등하고 바르게 하여 높거나 낮은 사람에게 차별이 없기를 서원한다
(三願意行平正無間尊卑).
4. 마음은 늘 욕됨을 참아서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탐욕과 성냄을 버리기를 서원한다
(四願心常忍辱捨貪嗔癡).
5. 오전에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뒤로 미루지 않기를 서원한다
(五願午中一食不過後期).
6. 작은 것에도 긍지를 가지고 몸가짐(威儀)을 흩트리지 않기를 서원한다
(六願矜持細行不失威儀).
7. 절은 견고하고 불전은 빛나게 하기를 서원한다
(七願梵宇牢固佛殿光輝).
8. 삶을 늘 안온하게 하고 일상생활을 이지러지지 않게 하기를 서원한다
(八願居恒安穩日用無虧).
9. 제자들이 재난을 길이 떠나도록 서원한다
(九願弟子衆等災難永離).
10. 시주하는 신도들의 복과 수명과 평안함과 번창을 서원한다
(十願檀那施主福壽康熙).
11. 원한이 있거나 친하거나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극락에 태어나도록 서원한다
(十一願寃親平等同赴蓮池).
12. 적멸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면 미리 알 수 있기를 서원한다
(十二願寂滅辰至獲豫先知).
13.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하고 달마대사처럼 짚신 한 짝 들고 서방정토로 가기를 서원한다
(十三願端然坐化隻履西歸).
14. '불생불멸'의 경지에 드는 반야지혜를 깨닫기를 서원한다
(十四願不生不滅了證無爲).
15. 일찍 부처를 이루어 중생을 널리 구원하기를 서원한다
(十五願早成佛道廣度群迷).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시주를 하며, ' 자효조정(慈孝祖庭)'을 거닐며 눈 밝은 역대 조사들의 훈향을 맡지도 못하였다. 그리운 틱낫한 스님께 절을 올리지도 못하였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옷깃을 여미며 새벽 예불에도 참석하고, 마음챙김을 하며 오솔길을 걷고, 해가 질 무렵 파도쳐 오는 범종 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산문 안, 반달 연못 가에 서서 비를 맞으며 사진 한 장 찍고 흙길을 걸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도로 가로 돌아 나왔다.
돌아나오는 길 좌우에 있는 숙소와 식당, 명상 홀에는 고동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많이 보였다. 버스에 올라 가이드 윤실장님은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사찰의 그윽한 분위기를 느꼈다며 좋아했다. 가이드 일에 쫒겨서 그날도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호흡이 가팔라질 때는 안스럽기도 하였다.
뒤에 베트남인 청년 가이드 흥은 내가 틱낫한 스님을 존경하는 동기를 물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흥이 카톡으로 틱낫한 스님이 소설 형식으로 쓴 부처님의 전기, "<<옛 길 흰 구름(Old Path White Clouds)>>(한국어판 <<붓다처럼>>)을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의 베트남어판 표지 사진과 함께 보내왔다. 나는 답을 하였다. "이미 이 책을 한국어판으로 읽었지만, 다시 읽겠다."
오래전에 학교 친목회에서 삼척 두타산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삼화사(三和寺)는 조선왕조 개창 뒤에 몰살시킨 고려 왕실의 원혼을 위하여 국가에서 수륙재를 봉행한 절이다. 삼화사에서 만난 미국인 영어교사 리와 산을 내려오며 어떻게 불자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틱낫한 스님이 쓴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며 나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이 책의 영문판을 아마존에서 사서 교무실에서 영어 공부 삼아 첫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새로 출판된 이 책을 읽고 인물 문인화를 즐겨 그리는 심관(心觀) 화백께도 선물했다.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떠오르게 하는 문체의 이 책은 읽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수행이 되었다. 영국의 설법 모임에서 부처님은 어떤 분인지를 묻는 어린이의 질문에, 틱낫한 스님은 이 책을 소개하며 답을 대신했다. 이 책은 본래 베트남어로 출판되었고, 베트남 예술가가 새긴 아름다운 목판화들이 삽화처럼 들어 있다.
뜨 히우 사(慈孝寺) 절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후에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티엔 무 사(天姥寺)를 찾아갔으나 날이 저물어 사위가 어두워 오고, 저녁 일정이 빠듯하여 다음 날 아침에 오기로 하고 저녁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코로나 감염병이 창궐한 여파로 우리가 찾는 서울식당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없었다. 다시 찾아간 식당에서 창가 자리에 계림과 서연 내외분과 우리 부부가 마주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아직도 바깥에는 밤비가 뿌리고, 우리는 고도 후에에서 천하일품의 따끈한 김치찌게를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마사지를 하러 갔다. 감기 기운이 여전하고 공기가 썰렁하였다. 아픈 발목 부위는 문지르지 말도록 하였지만,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들이 아팠다. 옆자리의 교장 선생님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마사지를 하는 여인은 그 교장 선생님의 배를 가리키며 쌍둥이를 임신하였다며 농담을 건넸다. 꿉꿉한 침대나 담요가 찝찝하였지만, 야무진 손길로 해주는 마사지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어 좋았다. 빛고을에서 돈을 벌어온 그 사장님이 살금살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서비스가 만족스러운지를 모든 손님들께 다가와 묻고 갔다.
2시간의 마사지를 하고, 4달러의 팁을 건네고, 9시가 넘어서, 응우옌 왕조의 임금이 살았던 자미원(紫微垣) 앞을 은하수처럼 굽이쳐 흐르는 흐엉강(香江)의 남안(南岸)에 자리잡고 있는 파크 뷰 호텔(Park View Hotel)에 체크 인 하였다.
틱낫한 스님 탈상재
페이스북에 접속하니 플럼빌리지에서 공지 사항을 올려 놓았다. 2022년 1월 22일 자정에 96세의 연세, 법랍 80세에, 16세에 출가한 본사, 뜨 히우 사에서 입적하신 틱낫한 스님의 2주기 탈상재(脫喪齋)를 29일에 봉행한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본래 망자의 영가(靈駕)를 위하여 7일마다 7번 올리는 49재, 100일만에 백일재, 1년만에 소상재(小祥齋), 만 2년만에 대상재(大祥齋), 모두 10번의 천도재를 봉행한다. 국제 플럼빌리지 14개 수행 공동체의 400여 제자들, 후에의 스님들, 세계 30개 나라의 재가불자들, 베트남 신자들이 ‘자효조정(慈孝祖庭)’, 뜨 히우 사에 집결하였다고 한다.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의 42대 법손으로서 국제 플럼빌리지 수행 공동체의 개창조인 틱낫한 스님은 탈상재가 봉행되고 나면, 애도는 공식적으로 마감되고, 스님은 이 절의 5대 조사로 추존된다고 한다.
그제서야, 낮에 이상하리만치 절이 폐쇄되었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세계에서 오신 스님들이 플럼빌리지의 뿌리가 되는 뜨 히우 사(Chua Tu Hieu, 慈孝寺)의 반달 연못에 둘러서서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드론 카메라가 촬영하고, 한 비구니 스님이 반주 없이 낮은 목소리로 틱낫한 스님의 시를 노래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본래 베트남 말로 쓴 이 시는 반야(중관 中觀) 지혜를 표현하였다.
잔잔하여 마음을 한없이 고요하게 하는 그 노래가 좋아서, 나는 후에의 호텔에서 여행을 함께하는 길동무들에게, 영국의 노신사에게, 알래스카의 아이 엄마에게, 히말라야의 행복왕국 부탄의 딸에게, 괴테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연구하고 번역하였으며 여든의 연세에 장편소설을 창작하여 작가의 꿈을 이루신 서울의 노학자께, 경주의 릴리 누님께 그 노래를 보냈다.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감미롭고도 영혼을 평안하게 하는 노래이었다.
나는 여전히 오고 감에 자유로우니,
존재와 비존재에 걸림이 없네.
아이야!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오렴!
오직 하나의 달이니,
이지러지지도, 차지도 않네.
바람은 여전히 여기에 있는 줄을 아느냐?
먼 데 비가 구름 곁으로 다가오고
햇살이 높은 곳에서 쏟아질 때,
대지는 늘 청정한 하늘을 볼 수가 있지.
I still come and go in freedom,
being and non-being are not a question.
Arrive home, my child, with relaxed steps.
Only one moon,
not waning nor waxing.
Do you know the wind is still here?
When distant rain reaches nearby clouds
drops of sunshine fall from on high
so the earth can see the always-clear sky.
-Thich Nhat Hanh’s poem, Coming and going in freedom(Đến đi thong dong)
-틱낫한 시, 오고 감에 자유롭기
https://youtu.be/qbulEzfSuZY?si=OcF-q4yjEvvH0syX
https://youtu.be/5NzP9CaHy7U?si=H1Xr4VzU06zBZ0V8
***
누구에게나 결코 물리거나 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 있는 법이다. 나는 닳아 해지고 빛이 바랜 고동색 승복 한 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승복보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도반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것을 “서른일곱 번이나 윤회하며 고행의 삶을 거친 승복”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 옷이 낡았다거나 추하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바오 크억 사원에서 지내며 불교 대학 공부를 하던 시절 그 옷을 입고 지내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 옷은 스승님(*‘스승님’의 줄임말이 ‘스님’이다. 베트남어 ‘타이thầy’는 ‘스승님’이란 뜻으로 정확히, 우리말의 ‘스님’에 해당된다.)께서 깨달음의 삶, 즉 승려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내게 주신 것이었다. 이제는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실제로는 더 이상 입을 수 없지만, 여전히 사미승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중략)
나의 수계식은 이튿날 오전 네 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날 밤 (중략) 나는 당신의 방에서 깜박거리는 촛불을 곁에 둔 채 방석에 앉아 계신 스승님을 찾아뵈었다.
스승님 곁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오래된 경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물려줄 당신의 낡은 고동색 승복의 해진 곳을 꼼꼼하게 깁고 계셨다. 연세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신 데다가 눈까지 밝으셨다. 만 사제(師弟)와 나는 입구에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바느질을 하고 계신 스승님의 모습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보살을 보는 듯했다.
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스승님께서 쳐다보셨다. 우리를 보시자 스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나서 다시 숙이시고는 계속해서 바느질을 하셨다. 만 사제가 말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쉬십시오. 벌써 꽤 늦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쳐다보시지 않고 그대로 바느질을 하면서 말씀하셨다.
“내일 아침 꾸언(Quan)이 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바느질을 마저 마치련다.”
(중략)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스승님, 뚜 보살님에게 부탁해서 바느질을 마치도록 하시지요.”
“아니다. 내 손으로 직접 기워서 네게 주고 싶다.”
스승님께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우리는 감히 더 이상 한마디도 못 드리고 다소곳이 합장을 한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스승님께서는 바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 채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적에 단지 승복을 기운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었던 제자의 이야기를 경전 속에서 본 적이 있느냐?” 스승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 제자는 찢어진 승복을 고치는 일에서 기쁨과 평온을 얻는 적이 많았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도반의 것도 고쳐주곤 했었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그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리라는 착한 마음을 내었단다. 어느 날 바느질을 하다가 그는 심오하고도 훌륭한 가르침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여섯 땀을 뜨고 나서 육신통(六神通)을 얻게 되었단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공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는 육신통을 얻지는 못하셨다 해도 우리가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심오한 경지에 이르셨던 것이 분명하다.
이윽고 바느질이 끝났다. 스승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내게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는 한번 입어보라고 하셨다. 그 옷은 내게 조금 컸지만, 그 때문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는 감동했다.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가장 신성한 사랑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잔잔하면서도 한량없는 그 순수한 사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나의 수행자로서의 삶에 힘과 기쁨을 주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옷을 건네주셨다. 나는 옷을 받아들면서 그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의 커다란 격려와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해주신 스승님의 목소리는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말 중에서 아마도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일 네가 이 옷을 입게 하려고 내 손으로 고쳤단다. 내 아들아!”
꾸밈이라고는 전혀 없는 수수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무척 감동했다. 그때 내 몸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입은 일체 중생을 구하겠다는 큰 서원을 읊조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진정한 보살행의 삶을 살아가겠노라는 심대한 서원을 세우고 있었다. 땀 만 사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우주가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그날 이래로 지금까지 나는 새 승복을 여러 벌 얻었다. 새 고동색 승복은 한동안 눈길을 끌곤 했지만 나중엔 잊혀져버렸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주신 낡고 닳아해진 그 고동색 옷은 언제까지고 내 마음속에 신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날에 나는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스승님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제 그 옷은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입을 수가 없지만, 때때로 아름다웠던 옛날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여전히 그 옷을 간직하고 있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스승님이 물려주신 가사>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