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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유용주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
하루를 열면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걷는 자만이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빗줄기 앞에서 다만, 걷는 자는 도달할 수 있으며, 되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땀이 말해준다. 독을 풀어준다.
저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을, 저렇게 얕을 수가 있을까. 풀이라고 믿었던, 울창한 숲이라고 믿었던, 질긴 뿌리가 억세게 거머쥐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산이, 저렇게 쉽게 사태가 나다니, 사람의 한 일생이 저렇게 쉽게 떠내려가다니, 휩쓸려가다니, 묻혀 버리다니, 꽥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숨 한번 쉬지 못하고, 흙더미 속에 깔려 죽다니.
떠오르는 해가 나를 물로 인도했다면 지는 저녁 해는 흙으로 나를 이끌어 가리라. 저 해가 나를 비추는 동안은 무서울 게 없으리라. 다시 가을이다. 강아지풀이 더욱 겸손해지는 시간이다. 물의 아랫도리가 더욱 맑아지는 소리를 듣는다.
길에는 땀이 묻어 있다
베개에 침이 묻어 있고
벽에는 흙탕이 묻어 있다
말에 뼈가 묻어 있다
바람에 비가 묻어 있고
풀잎에 이슬이 묻어 있고
나무에는 불이 숨어 있다
땅에는 사람이 묻어 있다
산에는 구름이 묻어 있고
하늘에는 별이 묻어 있고
감옥에는 피가 묻어 있다
사람들 가슴속에는 칼이 묻어 있다
정말 모기와 파리가 입이 삐뚤어질까? 가을은,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을 타고 하늘에서는 구름의 등을 타고 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람의 등을 타고 오는 것은? 저 넓은 들판에 누렇게 익어 가는 벼들의 그윽함 일게다. 완벽한 평등이다. 바람파도가 아무리 드세어도 웃자란 놈을 시기하지 않는다. 가을 들판은 온통 가마솥 누룽지 냄새로 그득하다.
병은 사람의 몸 안에 들어온 다음에야 깨닫는 법, 그러니 인간이란 축생들은 후회와 반성의 자식들이 아니던가? 병은 사람을 가르친다고 했다. 늘 그렇게 한 발자국씩 늦게야 알아듣느니, 병은 스승이다. 병은 우선 낫고자 하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저 길에게 약속한다. 소나무에게 전봇대에게 약속한다, 모시고 살 것이라고, 극진히 대접할 것이라고, 저 썩을 대로 썩은 강물에게 맹세한다. 저 콩꽃에게, 참깨에게, 고추에게, 생강에게, 개망초에게, 쑥부쟁이에게, 아카시아에게, 저 잠자리에게, 까치에게, 멧비둘기에게 약속한다. 저 미꾸라지에게, 나를 물어뜯는 모기에게, 사마귀에게, 배를 벌렁 뒤집고 죽은 개구리에게 약속한다. 너희들을 저버리지 않겠다. 직각에 가까이 허리가 굽어도 일손을 놓지 않는 파파 할머니에게, 농약 주느라 정신이 없는 중늙은이 농사꾼에게, 나만큼이나 척추가 휜 그 옆의 아줌마에게 약속한다. 나는 나을 수 있다. 길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 한 이 스승을 끝까지 모시고 살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언제 어렵지 않은 세월이 있었던가. 가능한 한 시인보다 이름 없는 농사꾼으로 살고 싶었다. 내 힘이 버틸 정도로만 농사를 지어 우리 식구가 먹고 나머지는 주위 사람들과 전부 나누면서 살고 싶었다. 농사를 지은 지 채 일년이 안되어 몸부터 결단이 났다. 나무는 그림자를 지우면서 자신을 완성한다. 나는 무엇을 지우면서 완성할까.
걸으면서 단순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운동은 오로지 몸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단순하고 깨끗하다. 몸 안에 나쁜 피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운동은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 산소 공급원이다. 찬물에 밥 말아 김치 한 보시기만 먹어도 근육은 박달나무처럼 탱탱해진다. 소처럼 우직해진다. 자주 퍼낸 우물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숲 언저리, 새벽이 다가오면 벌레는 온통 들끓는다. 아침해가 불끈 낮의 뚜껑을 열어 젖히기 전까지는 맹렬하게 끓어오른다. 벌레는 압력솥이다.
새벽에는 기도할 뿐, 새벽에는 오직 몸을 정갈히 씻고 무릎꿇는 일 밖에는, 새벽에는 너그러워지는 것. 새벽에는 오직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감싸안고 사랑하는 것. 새벽에는, 그리고, 새벽에는 에잇, 좆 꼴리는 것, 그리하여 새벽에는 오직 안개가 주인일 뿐.
오래 전에 그 사내는 길 위에서 쓰러졌다. 바람이 길게 그를 눕혔다. 나무 나이테 속 물관이 10Kg의 물을 30m높이의 나뭇잎까지 끌어올리듯 그도 혼신의 힘을 다해 뼈만 남은 몸에 술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살았다. 슬픔이 그의 처방약이었고 애간장 녹일 듯한 노래가 그의 음식이었으며 걷는 일이 그의 옷이었다. 휘청거리는 일이 곧바로 서는 일이었다. 행려자의 죽음은 재빨리 화장되어 강가에 뿌려졌다. 술사리 몇 잔이 강물에 흘러가며 반짝거렸다.
가을에는 쭉정이도 고개 숙인다. 하늘에 차마 고개 들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땅은 다 용서해주는데도 말이다. 이슬하나까지 모두 받아들이는데도 말이다.
빨래집게가 힘이 없다면 그거 한마디로 잘라야 되지 않을까! 빨래집게가 가장 빨래집게다울 때는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태풍과 폭풍과 악천후에도 끈질기게 빨래를 물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빨래집게가 아무런 이유 없이, 별 볼일 없는 충격에도, 빨래를 놓아 버린다면, 빨래 줄에 아무 흠이 없는데도 빨래를 자주 떨어뜨린다면 주인이 볼 때 황당하지 않을까. 참새가 아닌 빨래집게가 빨래 줄에 줄지어 선 이유가 무슨 인테리어 감각 때문이랄지, 햇빛과 바람을 마음껏 즐기며 일광욕을 하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선문답하는 산중의 스님처럼 허공과 바람을 물어뜯으라고 걸려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빨래집게는 오로지 빨래만을 위해 존재한다. 빨래가 날아가지 않게 감독하고 햇빛과 바람을 골고루 쐬면서 잘 마르기 위해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어명이라고 빨래를 놓는단 말인가. 한시도 헛눈 팔면 안 된다. 즈이가 무슨 눈이 달려 있어 지나가는 아가씨 젖가슴이라도 훔쳐본다는 말인가. 호떡을 먹는가, 오뎅을 먹는가, 순대를 먹는가, 오리만큼이나 작은 입으로 막걸리라도 마신 적이 있던가. 아무런 이유 없이 빨래집게가 빨래를 놓아버린다면, 폐기처분해 마땅하다. 의원면직은 너무 사치스럽고 정리해고도 아까운 말이다. 그런 빨래집게는 파면이 적당하다. 왜냐하면 본때를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모든 빨래집게가 합당한 이유 없이 빨래를 싱겁게 떨어뜨린다면 도대체 빨래 줄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기 때문이다. 허공에 빨래 줄이 걸려 있는 까닭은 줄광대의 묘기를 위해서도 아니고 참새를 위해서도 아니요 잠자리들 낮잠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빨래를 지상의 이물질을 묻히지 않고도 바람과 태양광선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해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빨래집게가 없는 빨래 줄도 그렇지만 빨래 줄 없는 시골집 안마당도 아름다운 풍경은 못된다. 빨래 줄이 없다면 사람들은 잠시나마 자기의 혼백을 허공에 풀어놓을 수 없다. 돌 위나 풀밭이나 나뭇가지에 걸어놓는 것은 유목민이나 하는 짓이지, 하긴 모든 인간들은 천성이 유목민이긴 하지만. 어쨌든 빨래집게가 거꾸로 매달려 온몸의 피가 눈알로 몰려 결국은 혈관이 터져 죽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빨래를 물로 있는 이빨을 풀지 않는 이유는 저 지독한 삶에 대한 애증이리라. 독한 짐승 사람을 보아라. 죽은 지 몇 백년, 혹은 몇 천년이 지나 뼈만 남아 있어도 이빨만큼은 흙을 끝까지 물어뜯고 놓아주질 않고 있더란 말이다. 하긴 죽어서도 무엇인가 꼭 물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의 쓸쓸함이란―. 장동마을 시골집 안마당에는 고추와 참깨와 함께 빨래 마르는 소리, 뼈처럼 희고 눈부시다.
억새처럼 가벼운 손을 본 적이 있는가? 나뭇가지는 아무 것도 쥐려 하지 않는다. 오직 공기와 하늘을 호흡하고 있을 뿐. 사람의 손은 너무 무겁다. 검거나 하얀 손은 늘 축 쳐져있다. 검은 손은 아귀와 같이 무엇이든 쥐면 놓으려 하지 않고 하얀 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저 얻으려 한다. 관상용으로 쓰려고 하느님은 손을 창조한 것은 아닐 게다. 생산에 쓰이지 않는 손은 손이 아니다. 생산을 하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식물들의 손이 가을 햇볕에 흔들린다. 하느님의 왼손이시다. 억새처럼 가벼운 영혼을 본 적이 있는가?
똥을 정면으로 볼 줄 알아야 밥이 정면으로 보인다. 나무를 정면으로 볼 줄 알아야 땅이 정면으로 보이고 땅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아야 벌레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 풀을 정면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고, 길을 두려워 않고 걸어봐야 사람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너무 가까운 건 극명해서 제대로 못보고 중간은 어슴프레해서 자세히 못보고 멀리 떨어진 것은 짙어서 눈이 흐려진다.
눈이 내리는 이유는 지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눈은 사람의 발자국 따윈 기억하지 않는다. 도보고행승이라면 자신의 발자국이 눈 쌓인 들판을 돌아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 온 다음 겨울숲에 들어서자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비누냄새가 싸아 하니 깔리고 갑자기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까치의 날갯짓이 나무의 피부를 말리는가 싶더니 금방 잦아든다. 숲은 다시 깊은 정적에 빠져든다. 나무를 덮은 낙엽이불에도 비누냄새는 폴폴 새어나왔다. 코피를 흘리고 싶은 날, 우우우 짐승처럼 울부짖고 싶은 날.
올 겨울은 눈이 흔하다. 내 어릴 적 다리골에서 만났던 눈만큼이나 크고 소리 없는 눈이, 그때처럼 쌓이고 쌓였다. 눈이 오는 날 밤은 조용하다. 눈은 공기의 예민함을 누그러뜨리고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내리기 때문에 조용하다. 먼 마을에 잠든 사람들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과 들판과 산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한 오백년 눈이 내렸으면, 이대로 얼어붙어 모든 생명이 죽고 난 뒤 한 천년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깨어났으면 좋겠다.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잊지 말자. 이 곱은 손을, 언 길을. 언 길 위를 미끄러지면서 멍들어 걸었던 그 밤을 잊지 말자. 새벽에 도착했던 눈에 덮인 빈집을, 기침 콜록이며 불때고 있던 어머니를, 어머니의 환영을, 꿈속에서도 잠 못 이루고 기도하고 치성드리고 있는 어머니를 잊지 말자. 언 몸을 녹이기도 전에 김칫국에 밥을 말아 훌훌 넘기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는데, 야야, 어찌됐던 몸조심하거라, 신작로까지 따라 나와서 손사래치던 어머니를 잊지 말자. 새끼줄로 동여맨 감발 위로 떨어지던 함박눈을 잊지 말자. 그 새벽을 잊지 말자. 초심을 잊지 말자.
걸으면서 분노를 삭히는 거다. 식히는 거다. 성큼성큼 걸어온 발자국마다 벌겋게 닳은 쇠가 담금질 물에 들어가 쉬익 소리를 내듯, 발자국마다 벌겋게 김이 피어오른다.
언 길을 얼어붙은 눈을 밟으며 언 몸으로 얼어 걷는다. 언 바람과 맞선다. 언 가족과 맞선다. 언 세상과 맞선다. 얼어붙은 삶과 맞선다. 언 하늘을 배경으로 멧비둘기가 난다. 언 땅위에 억새가 흔들린다. 언 쑥대가 손짓한다. 언 개울가 얼음장 밑으로 울컥 뜨거운 물이 흐른다. 언 물고기가 얼음장 밑에서 몸을 녹인다.
숲길로 들어서자 드문드문 눈이 쌓여 있다. 고주망태 아버지가 지려놓은 오줌지도처럼, 한 시절 산사내들이 흘린 핏방울처럼 눈은 스며들면서 천천히 녹는다. 그늘이 진만큼, 그늘이 익은 만큼, 바람이 휘돌았다 나간만큼, 눈은 천천히 녹는다.
지독한 폭설이다. 눈(雪)에 눈(眼)을 비추어보면 눈이 얼마나 흐려졌는지 금방 표시가 난다. 눈길에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생애가 고스란히 찍혀 나온다. 눈보라 속 허허벌판을 건너기 위해서는 몸을 구부리거나 가볍게 해야 한다. 날아가는 저 새를 보아라. 무거운 몸으로는 이 겨울을 날 수 없다.
개울가 눈 녹은 물 흐른다. 산이 뱉어놓은 고운 피, 나무가 싸질러놓은 푸른 똥물이 한여름 장마 때만큼이나 울울 탕탕 쏟아 내려온다. 낙엽송 둘러싸인 데쯤 아주 낮은 집 지어놓고, 땔나무 추녀 가득 쌓아 올리고, 고구마 구워 먹고, 신 김치 집어먹으며 한세월 살았으면. 일찍 내려오는 산그늘에 군불 밀어 넣고 넘어가는 해그림자와 떠오르는 달이마 사이로 수직으로 올라갔다 점차 낮은 데로 퍼지는 저녁 연기에서부터 별이 소름 돋아 으스스한 새벽까지 메주 익어 가는 냄새 벗삼아 책을 읽었으면, 아조 아조 이름 없는 산골 농사꾼 되었으면, 얼음장 밑으로 돌돌돌 봄이 돌아 내려온다.
산이 운다. 바람은 자지 않고 밤새 창문을 두드린다. 비명에 가깝다. 어머니는 아직도 밖에서 주무시나보다.
논둑과 숲길을 지나 하수종말처리장까지 걸었다. 가없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새는 아무 죄가 없다. 새는 힘이 세지 않다. 새는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는다. 하수종말처리장 근처에는 몇 대의 짚차가 보이고 외제 승용차도 서 있다. 갑자기 폭죽 터지듯 총소리가 갈대를 뒤흔든다. 여기저기서 함부로 쏘아댄다. 저것들은 머지않아 새들보다 더 힘없이 쓰러질 말종들이다. 쓰레기들이다. 자기 자식이나 아내, 부모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댈 놈들이다. 새들은 수직으로 떨어진다. 피묻은 손들이 온 산하를 더럽힌다. 죄는 깊고 인간은 터무니없이 얕다.
더러운 손, 피 묻은 손, 슬쩍슬쩍 훔친 손, 마구 휘둘렀던 손, 훼훼 거절했던 손, 정액 처바른 손, 살살 비볐던 손, 무릎꿇고 빌었던 손, 엎드려 절하면서 눈물 훔치던 손, 지가 지 무덤을 파고 있는 손.
개는 못 먹는 것이 없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면 무엇이든 따라 먹고 사람이 먹지 못하는 가래침도 먹고 똥도 먹고 풀도 먹고 흙도 먹는다. 상하고 썩은 음식도 먹고 심지어 약 먹고 죽은 까치나 꿩도 먹는다. 먹고 난 다음에는 아무데서나 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만 몰려오는 잠은 물리칠 수 없었나 보다. 방울이(시골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었다. 잠자듯이 죽었다. 이젠 사람들이 몰려들어 개를 먹어치울 차례다.
겨울이 거뭇거뭇 불타 봄이 솟아오르는 농수로에 새가 한 마리 떠있다. 곧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날 새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퉁퉁 불은 발가락으로 물을 움켜쥐고 있다. 보름날이었나, 가야산 꼭대기에서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진 능선에서 달이 떠올랐지만 누구하나 달집을 태우거나 달에게 소원을 빌지 않았다. 쥐불놀이 대신 폭죽이 솟아올랐다. 폭죽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날아올랐는데 왼쪽 가슴 아래가 뜨끔했다. 무싯날 간경화로 저 달만큼 차 오른 배를 싸안고 숨이 넘어간 애비나 식도협착으로 눈 번히 뜨고 죽은 어미 생각하면 총알 관통하듯 가슴 아래가 따끔거렸는데 오늘은 직통으로 맞았나보다. 생각보다 물이 차갑군, 하긴 물 속을 날아보는 게 소원이었지, 중심을 잃고 농수로에 처박혔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수로 뚝가에 줄지어 백골이 된 갈대와 뭐라 뭐라 손 흔드는 강아지풀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몇 번 더 싸락눈이 내리고 농수로의 얼음 또한 동치미 항아리처럼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했다. 맨 먼저 털이 빠지고 몸이 불어 흰곰팡이가 생겨 뼈가 드러나자 온갖 벌레와 물고기들이 알을 슬고 새끼를 품어 새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새의 영혼은 긴 잠 속에서 하늘을 날고 땅을 쪼아 물결을 헤엄쳐 다니겠지. 반쯤 잠긴 머리와 날갯죽지에는 푸르스름하게 물이끼가 달라붙었다. 죽음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바치는 공양 아닌가. 그 공양 드시고 봄바람이 푸르게 들판을 일으켜 날아오른다.
못 쓸 것이 되어간다. 이제 비행장 전투기 뜨고 내리는 소리도 희미해져간다. 고막이 터졌나, 정말 흐리멍텅해진다. 정화조에서 새어나오는 똥냄새도 아무렇지도 않다. 저것들이 내 삶이었구나. 소음과 악취가 나였구나. 똥통에서, 악다구니 속에서 살았구나. 눈물샘이 마르면서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수 지나자 시골 사람들 바깥출입이 눈에 띄게 빈번해졌다. 벌써부터 논밭에 나가 꼼지락거리는 사람이 많다. 농로에서나 밭가에서 그들을 만나면 모자부터 눌러 쓴다. 그들을 보면 그냥 고백하고 싶어진다. 죄 많은 인생 무릎꿇고 빌고싶어진다. 봄이 몰려온다. 마중 나가자. 붙잡자. 봄마중 가자. 봄 꾸러 가자. 봄 갚으러 가자. 봄 뒤엎으러 가자. 봄 심으러 가자. 봄 뒷다리 걸자.
살얼음 살짝 얼었다. 살짝 얼었다고 살얼음, 살얼음은 살이 살짝 얼었다고 살얼음이다. 살 바깥은 공기이고 살 안쪽은 물이다. 물의 혈관이 보이고 물의 마알간 뼈와 내장이 보인다. 꽃은 그 안쪽에서 꽃대를 밀고 올라온다.
봄이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코피 터지지 않은 삼월하늘은 능욕이다. 어디 어떤 하늘에 대고 만세삼창 부르짖었던 적이 있었던가. 탕진하라, 다 탕진하라.
탕진하고 말았구나. 밑천 없이 뛰어든 세상 노름판, 밤 꼬박 새우고 새벽 쪽으로 판돈을 걸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몸을 함부로 굴린 탓이다. 소쩍새는 울면서 봄을 키우고 호박은 꽃잎을 닫으면서 가을을 끌어내리고 겨울은 눈이 내릴수록 깊어지고 사람은 우는 만큼 맑고 가벼워진다.
봄바람 숱하게 얻어맞았다. 분명, 봄바람주먹이었다. 그 주먹 잘못 맞으면 멍들지 않고 속병 든다. 그 주먹 잘못 얻어맞으면 샛서방도 몰라본다. 어떤 바람도 모래언덕도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오로지 내 안에 내 적이 있을 뿐.
숲 속 나무에 움텄다. 가지마다 새잎 달았다. 그로데스크한 메니큐어색처럼 작은 입술을 뾰족거린다. 숲 속에 들어가면 나무마다 파도 한 가마니씩은 담고 있나보다. 잘린 나무를 들여다보면 더 그렇다. 맨 가운데는 화상 입은 듯 가슴이 까맣게, 붉게, 엷게 데어 있다. 저것은 나무의 흉통이다. 파도의 심장부다. 나머지는 모두 물주름이니, 넓게 넓게 퍼져나가는 맨 처음 물주름이니, 온 바다는 나무의 물주름이 퍼져 생긴 것이다. 바다에 가면 나무냄새가 난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저 나무 타는 냄새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저 나물 삶아 무치는 냄새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억겁 흘러 바위가 모래가 된다 해도 저 잉그락 위에 끓고 있는 토장국 냄새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무한량 흘러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다해도 가마솥에 불어있는 숭늉 냄새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봄가뭄 끝에 후두둑 단비가 내릴 때, 훅 하니 폐 속으로 빨려 들어온 흙 비린내, 세월이 아무리 흘러 은하수 건너서 저 별들이 다 타서 없어진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심었던 고춧대를 뽑는다.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버티는 고추, 고산지대에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 닮았다. 희디흰 백발의 고추뼈를 뽑고 비닐을 걷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허리가 끊어질듯 아팠다. 심지 않은 곳에 거둘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 한 뙈기라도 땅이 있으면 뿌리고 심고 가꾸고 거름 주어 거두는 일이 사람살이의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그러니 뻣뻣하게 서 있는 놈들은 땅하고는 아예 상관없는 족속들이 틀림없을 게다. 땅 닮은 생명들은 모두 구부정하다. 산이 그렇고 물이 그렇고 농사꾼들이 그렇다. 땅에 가까울수록 구부러져 있다. 그만큼 낮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한다. 무릇 모든 생명들은 하늘을 지향하되 땅의 마음, 어머니 마음이시다.
푸르름에는 높낮이가 없다. 휘어지고 꺾어지고 키 작은 나무에게도 푸르름은 퍼져 나간다. 가지의 굵고 가늘기, 잎의 넓이와 좁이가 푸르름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늘이 짙고 엷은 것도 푸르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햇볕이 더디게 닿아도 푸르름에는 빠르고 늦음만 있을 뿐, 푸르름이 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숲은 가늘고 어린 나무들부터 티눈이 부어 올라 생살을 앓느니, 숲은 나무들이 몸살 앓아 이루어진 마을이다. 푸르름의 공평한 살림살이이다.
잠이 안 온다. 새벽 지나 아침인데 아침 지나 햇살 퍼지는데 햇살 퍼져 바람불어 터지는데 바람불어 구름면발 굵어지는데 구름면발 굵어져 하늘 솥 그들먹해지는데 하늘솥 그들먹해져 땅 위의 생명들 입 벌리고 노래하는데 싹이 돋는데(돋아 오를 것 다 돋아 오르는데) 초록세상 초록융단 펼쳐지는데 잠이 안 온다.
나무의 그림자는 땅을 그리워하며 땅을 닮아가지만 나무의 마음은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닮아간다. 연기가 나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연기는 나무에서 빠져나가는 혼이다. 나무의 연기는 나무의 혼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그림자를 끌고 다니려고 한다. 연기도 그림자가 있고 구름도 그림자가 있다. 연기가 제 몸을 송두리째 바람 살 속으로 집어넣었을 때 나무는 드디어 완벽한 해탈을 맛보게 된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보아라, 저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바람의 살을 보아라, 바람의 결을 보아라. 바람은 나무가 자신의 그림자를 미련 없이 떼어버릴 때 비로소 혈관에 핏줄이 돌아 생명력을 얻는다. 바람의 선명한 핏줄이 햇살을 받아 나무를 감싸고돌면 나무는 자신의 몸이 향기이며 노래이며 파도소리로 이루어진 악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땅 속의 물소리를 끌어올리는, 천상의 물소리를 끌어내리는 거대한 구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대한 물관이다. 물의 관, 관물!
봄비 오신다. 단비 오신다. 단비 털 고르듯 오신다. 청소하러 오신다. 정갈한 빗자루질이다. 가리마 타듯 길이 뿌옇게 드러난다. 참빗질 하신다. 서캐 떨어지듯 꽃잎 떨어진다. 비듬 떨어지듯 꽃눈 떨어진다. 투닥투닥 벌레들이 다툰다. 바람형제들은 오랜만에 숲 속에서 숨어 엿본다, 한 숨 푹 자도 되겠군. 나무들은 입을 한껏 벌리고 혀를 내민다. 풀은 선잠을 깨고 땅은 열에 들떠 뒤척인다. 강은 소름이 돋았다. 바다는 묵묵부답이다.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머언 옛날 우리 어머니 새벽에 일어나 군불 지피는 소리, 무쇠솥뚜껑 거꾸로 엎어놓고 부추·호박·깻잎전 부치는 소리, 봄 햇살 구구구 암탉 품에서 몰려나오는 병아리 소리, 버들가지 아래로 개구리 가재 버들치 살살 기어 다니는 소리, 갓 시집 온 새각시 가만가만 부엌에서 토방 오르는 소리, 막 젖뗀 아이 요강에다 오줌 누는 소리, 석 잠 잔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닮았다. 저 소리의 젖을 빨아먹고 세상 만물은 귀가 커진다. 부처가 된다.
갈아엎고 써래질하여 물 넘실넘실 받아놓은 논을 지나간다. 잠방잠방 모내기를 앞둔 논배미에는 비추지 못한 것이 없다. 하찮은 소금쟁이에서 산그림자나 구름 하늘까지 다 담고 있다. 논배미 하나의 우주, 논배미 하나의 평등세상이다. 쌀은 평등을 지향한다. 바람이 불면 아기 처음 낳아놓았을 때 이마주름살처럼 파도가 일어 논둑가로 간다. 미세한 겹주름을 만들면서 가장자리로 밀리는 물결을 논둑에 개망초며 명아주며 쑥대들이 바톤을 이어받는다. 논일을 하던 아저씨가 신호를 보낸 거다. 듬성듬성 散村을 지나 마을회관을 뒤로 돌아서 바톤을 넘겨주니 이내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뛰기 시작한다. 나무는 눈도 많이 달려있지만 다리가 워낙 길어서인지 마치 세렌게티 평원에서 기린이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4,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산수리 저수지까지는 단숨에 달려간다. 거기에는 제법 굵은 이랑을 만들어 버드나무 발목까지 찰랑대는 물이 보인다. 대학교 뒷산에서 가야산 중턱까지는 온통 시커멓다. 산불처럼 아까운 게 어디 있을까. 석문봉에서 원효봉까지 날짐승 혀만큼 나온 나뭇잎을 흔들며 가볍게 날아오른다. 앓을 만큼 충분히 앓아야 봄이 온다. 치를 것은 충분히 치러야 비로소 봄은 온 천지에 내려앉는다.
하늘을 나는 저 새는 아무 소리가 없다. 표시가 없다. 흔적이 없다. 똑같이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전투적이다. 거드름을 피운다. 왜일까? 무겁기 때문이다. 제 몸이 무거우니 날기 어렵다고, 날아오르기가 버겁다고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비행기는 돼지다. 다시 한 번, 비행기는 돼지다. 비행기는 목을 따서 금방 숨이 넘어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살찐 돼지다. 자기 몸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자기 몸에 덮여 익사하는 돼지, 비행기. 비행기 똥주바리가 밀가루 반죽처럼 빈 하늘에 퍼진다. 오월은 푸르구나, 속절없이 늙어간다.
오월, 타버린 나무들의 죽음
타버린 나무들의 영혼
타버린 나무들의 꿈
오월의 그늘은 서늘하다
푸르러서 무서운 오월,
개구리가 운다. 오월 못자리가 탄다. 빨갛게 목젖이 부어 올랐다. 계속되는 가뭄에도 개구리는 눈치 없이 운다, 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정말 소나기라도 사납게 내린다면 때 이른 봄장마라도 진다면 무덤 없는 어머니, 당감동 산기슭에 뿌린 어머니, 산사태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 눈치 없는 개구리, 밤새워 목젖에 피가 터지도록 운다.
새벽 빗속을 걷는 일은, 한낮 땡볕 속을 걷는 일은, 저녁 눈보라 속을 걷는 일은 뼈대를 세우는 일이다. 척추를 똑바로 세우는 일이다. 걷는 길을 다시 반성하는 일이다. 발자국 소리에 티끌이 묻어있나 확인하는 일이다. 발자국 소리에 티끌이라, 그렇다. 발자국에도 때가 묻으면 신발이 무거워지고 신발이 무거우면 몸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면 영혼 또한 무거워지는 것이니, 걷는 일도 반성하라. 걸으면서 반성하라, 네 발자국 소리를 잘 들어라.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자세에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이곳으로 이사오고 난 뒤부터 줄기차게 걷는 코스는 대략 세 가지 방향이 있는데 새로 지은 하수종말처리장이 보이는, <포장 끝>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는 도로까지 걸어서, 첫 번째는 공군 비행장 철조망이 코앞에 보이는 해미천 다리까지 가서 되돌아오기, 두 번째는 서산 시민의 오, 폐수가 몽땅 섞여 내려오는 양대천 다리까지 가서 되돌아오기, 세 번째는 시립 공동묘지 밑에 있는 외딴집 대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인데 공통점은 <포장 끝>이라는 표지판에서 이 모든 코스를 거치게 되어 있다는 말씀. 그 도로 가에 이른봄부터 야생 고양이가 한 마리 죽어있다. 뻗어 있었다. 약을 먹었나? 차에 치었나? 겉은 멀쩡하다. 처음에는 누군가 밭둑쯤 멀찍이 던져버렸는데 어느 날엔가 도로 가에 다시 굴러 내려왔다. 털빛에는 변화가 없어 처음 한두 달은 누워 잠자는 모습이었다. 차츰 시간이 흘러 비가 몇 번 내리고 가뭄 끝에 황사바람이 지나가자 털이 추레해지고 몸이 홀쭉하니 볼품이 없어졌다. 정말 죽은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으니 누워있는 자세다. 모로 누운 자세인데 앞다리 중에 한쪽은 구부리고 나머지 한쪽 다리는 볼을 괸 듯하고 뒷다리는 약간 꺾어 뻗어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이 자는 모습이다. 깊은 잠이다. 업어가도 모르겠다. 송곳으로 찔러도 꿈쩍 않겠다. 바람이 불면 털은 얼마나 섬세하게 흔들리는지 세상에 있는 모든 평화가 저 고양이 몸에 깃 들어 있지 않을까 할 정도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죽었다. 자세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엎치락, 뒤치락이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들은 모두 꿈틀거린다. 똑같은 자세가 없다. 저 자세로 굳어있는 한 차츰 털이 빠지고 내장이 썩어 문드러지고 끝내는 살과 뼈까지 벌레들이 분해 청소하여 한 점 먼지로 사라질 것이다. 흔적도 없을 것이다. 몇 달 째 나는 고양이를 멀찍이 두고 돌아다녔다. 정면으로 보기가 겁이 났다. 혹 고양이 깊은 잠을 깨울까 봐 조심하기도 했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홀쭉해진(눈알이 빠졌는지도 모른다) 고양이 몸피를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면 삶도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울고 있는, 배가 고파 울고 있는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어린 시절은 매 맞는, 매 맞아 혼자 울고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는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쌀 비 내린다. 마늘 비, 보리 비, 감자 비, 땅콩 비, 생강나무 비, 조팝나무 비, 유채 비, 고추 비, 수수꽃다리 비 내린다. 해 저문 들판에 매어 있는 염소처럼 함부로 울었다. 갈곳 없어 울었다. 찾아올 어미 없어 울었다. 돌아갈 집이 없어 울었다. 쑥물 토해내듯 내장을 토해내고 울었다.
물이 따라온다. 웅덩이에 비친 어떤 한 사람의 생애가 따라온다. 오래된 방죽 같다. 방천난 논둑 같다. 멈칫 뒤돌아본다. 사라진다. 물이 따라온다.
참 오래 걸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걸었습니다. 걷지 않으면 숨쉬지 않은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제 삶은 오직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새벽에도 걸었고 아침에도 걸었고 점심에도 저녁에도 어떤 때에는 한밤중에도 걸었지요. 들길이 가장 많았고 산길, 해변길, 공동묘지, 아스팔트 포장길, 포장 안된 자갈길, 험한 바위산길, 논두렁길, 계단 가리지 않고 걸었어요. 틈만 나면 걸었어요. 명절날은 차례 모시고 걸었고 제삿날에는 제사 지내고 걸었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어 좋았고 여름에 비를 노박이로 맞고 걸었고 가을에는 안개와 걸었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친구 되어 줍니다. 언제 꽃이 피고 씨를 뿌리며 모를 내고 잡풀을 뽑고 농약을 치고 언제 거두어들이는지 과정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보았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이보다 잘 관찰할 수는 없을 거예요. 늘 혼자였어요. 길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려는 기미가 보이면 더 몸을 혹독하게 단련하여 눌렀지요. 외롭거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직 걸어서 척추가 바로 선다면, 오래 걸을 수만 있다면, 몸으로 느껴 길을 체득한다면 생각이 없어도, 글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채찍질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사물을 만났습니다. 벌레에서 나무까지 시체에서 먼지까지 얼마나 많은 길동무들을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저보다 훨씬 먼저 걸었거나 서있던 생명들이었지요. 말을 걸거나 말거나 어루만지거나 쓰다듬거나 무덤덤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도보고행에는 적들도 친구가 되니까요. 가장 무서운 동물은 인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해 깜깜해져 더 이상 무엇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로지 흙에 파묻혀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서웠습니다. 멀찍이 돌아갔지요. 마주치기가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나를 피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두려웠습니다. 걷는 일도 농사꾼들에겐 사치였던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걷지 않아도 내가 만난 사물들과 오래 전부터 친구였고 이웃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들이 흘린 땀이 저를 떨게 했습니다. 그들은 버리지 않습니다. 오직 생산에만 몰두합니다. 끊임없이 가꾸고 어루만지며 키우고 생산합니다. 먹지 못할 것은 아예 가꾸지도 않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남을 위해 언제 먹을거리 한 번 생산한 적 있는지요.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어떤 강력한 적보다 땅에 엎드려 땅과 하나될 때까지 우리를 살리는 저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절하고 실었습니다. 무수히 절하며 지나쳤지요. 먼길로 우회하면서도 경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길을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걸었지요. 몸이 회복되면 이마에 불이 번쩍 나도록 살아갈 겁니다.
개가 크게 짖어봐야 철망 안에 묶여 있으니, 철망 안에 묶여 있는 개새끼가 크게 짖어봐야 무슨 대수이겠느냐. 뱀딸기가 먼저 익는다. 개시금치가 싱싱하게 빨리 자란다. 돼지감자가 더 많이 달린다.
사람이란 얼마나 독한 짐승이냐. 사람이 다닌 길에는 잡초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러니 풀 한 포기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독하면서도 슬픈 짐승,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동물이 되자.
바람바다에 밤꽃 냄새가 정액처럼 퍼지자 숲은 이내 어두워졌다. 물고기알 닮은 밤톨들의 꿈도 한여름동안 잘 익어가겠지. 바람은 수컷 지느러미가 되어 알이 부화될 때까지 혼신을 다해 부채질을 할 것이다. 온도 조절을 위해, 천적으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부채질을 할 것이다. 알껍질을 깨고 새끼들이 밤나무를 떠날 즈음 수컷바람은 죽는다. 죽어 땅속으로 스민다. 곧 장마가 몰려올 것이다.
일요일이어서 아이와 함께 걸었다. 아이가 묻는다.
"아빠, 아빠는 자연의 소리 중에 어떤 소리가 좋아?"
"응, 그거야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눈오는 소리, 엄청 많지. 한결이는 무슨 소리가 좋아?"
"응, 나는 사람이 숲을 지나갈 때 나뭇잎에 부딪히는 소리가 좋아. 그리고 이슬 떨어지는 소리도."
허허, 그거 참. 딸아이가 나보다 낫다.
지금도 공부할 때면 으레 귓가에 연필을 끼우고 한다. 메모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난다. 그때 계속 목수 일을 했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런 삶과 글쓰기는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후회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금방 마음을 돌린다. 계속 현장에 남아 일을 했더라면 중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밑도 끝도 없는 현장 술, 지금까지 마셨다면 속이 다 헐어 구멍이 뚫렸을 거다. 두 번째 이유는 눈치껏 안하고 성질껏 일하기 때문에 몸 어딘가에 고장이 왔을 거다. 그놈의 성질, 대충 대충을 못한다. 무슨 일이든 미쳐서, 온 힘을 다해서, 화풀이하듯 해치우니 주위 사람들이 무서워서 옆에 오지를 않는다. 오죽하면 "어이 유씨, 노가다에서 땀흘리면 백보지 먹은 시절처럼 삼 년 재수 없디야. 슬슬 허드라고." 하면서 놀려대기도 했다. 그러니 제 명에 살아 남겠는가. 허나, 변명치고는 졸렬한 변명이다. 나는 비겁한 한 마리 거머리에 불과하다. 제발, 부탁인데 문학만큼은 일할 때처럼 그렇게 몰아붙였으면 좋겠다.
소나기 잠시 휴식, 전 들판에 안개, 산딸기 위에 빗방울 젖어 있음, 소나무 숲, 대나무 숲에서 후욱 끼쳐오는 이끼냄새, 젖은 여자의 머리칼 냄새. 호박꽃이 피었다. 자귀꽃이 피었다. 유월이 다 갔다.
나무는 가슴속에 얼마나 들끓는 말을 숨기고 있는지, 열에 들떠 입술이 터지고 까맣게 탔다. 비바람 불어올 때 나무의 입은 격렬하게 움직인다. 할 말을 다 못하고 안으로 숨길 때는 옹이가 생긴다. 상처를 씻어내는 방법은 옹이밖에 없다. 퍼내고 퍼내어도 고여있는 상처, 급기야 나무는 자신의 몸을 분지른다. 옹이는 상처를 퍼 올려 응고된 것이다. 단단해서 오래 버틸 것 같지만 의외로 쉽게 부러진다. 바람이 불면 옹이 근처가 먼저 꺾어진다. 외마디 비명이 최후의 유언이었다. 나무는 궁극에 가서는 침묵을 지향한다. 불 속에서 뼈 터지는 소리, 화장장 굴뚝을 넘어 멀리 퍼져 나간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상처이지만 그 인연을 쉽게 끊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길은 상처투성이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떤 더위도 땡볕도 이 발걸음을 이기지 못한다. 산책길 주위 논에 다시 나락이 팼다. 아직은 꼿꼿하다. 참깨 꽃이 피었다. 달맞이꽃이 피었다. 고구마덩굴이 무성하다. 백중날이 다가오나 보다. 길가에 잡풀을 깨끗하게 베었구나. 마른 풀 냄새가 다리골에서 맡은 어릴 적 꼴 냄새와 똑같다. 첫물 고추를 따서 널어놓은 집도 있다. 벌써 고추잠자리 드높게 날고 여름이 깊어간다. 시간은 느리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다. 봄과 여름의 경계가 모호하고 가을과 겨울은 짧다. 여름이 길고 겨울에도 추운 줄을 모르겠다. 우리는 집을 떠나 얼마나 멀리 헤매었던가. 심판의 날이 다가오리라.
매미 소리 가야산을 온통 들어올린다. 전투기 소리 온 서산 땅을 갈갈이 찢어발긴다. 멀리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자. 우리 모두 가까이 가자. 해발 653m 정상에 흰 수건을 던진다. 항복이다. 행복했다. 지면 이렇게 편한 것을. 더 가까이 내려가자. 멀리 보면 작게 보이는 법, 사람 속으로 더 가까이 가자. 가까이 가면 크게 보인다. 산이 가르쳐준 말씀이다.
못을 박지 못하면서 삶이 시들해졌다. 특히 詩가 시들해졌다. 못을 박지 못하면 아내도 시들해지고 문학도 시들해지나보다. 못 박지 못하면 쓰러진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보아라. 이 땅에 못 박히지 못하면 죽는다. 못 박지 못하면서 散文이 많아졌다. 집중이 흐트러진 자리에 구부러진 못 시체들이 즐비하다. 망치 대가리가 벌겋게 녹슬어있다. 녹은 제 살을 파먹고 끝내 제 뼈까지 갉아먹는다. 詩도 누우면 끝장난다. 꼿꼿하게 독이 오른 詩, 살아있는 詩, 서 있는 詩, 삶에 육박하는 詩.
땀을 흘리면서 나쁜 피가, 내 몸에 들어있는 독이 모두 빠져나가기를 바랬다. 엎드려 울면서 내 몸에 남아있는 한이 전부 빠지기를 기다렸다. 부드러워지기를 바랬다. 따뜻해지기를 바랬다. 독이 몽땅 빠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살고 싶었다. 살모사는 독이 다 빠져나가면 죽는다. 나무도 뿌리가 뽑혀 수액이 다 빠져나가면 말라죽는다. 독 하나로 버텨왔는데, 독기 하나로 견뎌왔는데, 독을 더 쟁여야 하나 탈진할 때까지 빼내야 하나. 밤을 새워 우는 저 벌레도 울음이 그치면 사라지리라. 저 푸른 나무에 독을 얼마나 빨아 마셨는가. 몸의 독이 빠지면서, 푸른 아카시아 가시 같은 독이 불쑥 솟아오른다. 새벽바다는 뭍에 상륙하자마자 푸른 피를 쏟으며 속절없이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쌓아올린 사리들의 푸른 무덤.
돌담이 남아있는 게 신기하다. 같은 담이라도 시멘트 옹벽은 틈이 없다. 꼭 고집불통 사내 같다. 시멘트는 굳는 데 50년, 썩는 데 50년, 겨우 백 년 남짓 버틸 뿐이다. 그러나 우리네 작은 마을을 감싸는 돌담이나 남한산성, 고창의 모양성, 암사동에 있는 몽촌토성을 보라. 천 년을 가도 만 년을 가도 끄덕 없다. 틈이 있기 때문이다. 돌 틈에는 바람을 따라 이사온 흙알갱이들이 모여있어 수많은 벌레와, 벌레를 잡아먹는 설치류를 비롯해 달개비와 강아지풀과 같은 온갖 식물들이 함께 산다. 텃새들은 둥지를 틀고 새끼까지 기르고 있지 않은가. 시멘트 옹벽은 죽음이다. 생명이 깃들어 살 수가 없다. 금이 가야 생명이 온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돌틈의 문학, 돌담의 문학, 흙벽의 문학을 하자. 들고 넘나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통 큰 문학을 하자. 돌담은 바람과 햇살과 눈과 비를 다 통과시킨다. 통과시키면서도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는 것! 돌담은 道다.
칡잎은 소 발자국 닮았다. 느리게 걸어간다. 뚜벅뚜벅 걸어간다. 발자국에서 들큰한 호박죽 냄새가 난다. 쇠죽 끓이는 냄새가 난다. 무덤 쪽으로 난 길가에 칡넝쿨이 안간힘을 쓰고 행길로 나오려 애쓰고 있다. 사람이 그리운 모양이다. 칡꽃에서 아버지 담배쌈지 냄새가 난다. 닳고 헤진 소매 자락에서 풍기던 막걸리 냄새가 난다. 이제 그늘까지도 환하게 밝아오는 벌초 가는 길.
태풍 <프라피룬>이 휩쓸고 간 숲은 전쟁터가 따로 없다. 폐허다. 20m가 넘는 소나무가 수없이 쓰러졌다. 일부는 중동이 꺾여 처참했고, 대부분은 뿌리째 뽑혀 넘어졌다. 뿌리가 저렇게 힘이 없다니, 가만 들여다보니 소나무 뿌리는 단순 무식하다. 굵기만 했지 깊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잔뿌리가 별로 없다. 키가 작고 둥치가 가늘게 휘어진 잡목들은 뽑히지 않았다. 꼿꼿하게 서 있으려는 고집이 저 소나무를 넘어지게 했으리라. 바람에 저항하고 싶은 힘이 저 소나무를 뽑히게 했으리라. 시큰하게, 허리 근처에서 실치떼들이 맹렬하게 헤엄쳐 다닌다.
논과 밭을 지나 숲길을 걸었다. 숲이 끝나는 자리에는 갈대 무성한 개천이 있고 강뚝을 벗어나면 드넓은 간척지가 나타난다. 담수호의 주인들은 철새들이다. 철조망이 필요 없는 구역을 그들은 넘나든다. 새는 수직을 수평으로, 직선을 곡선으로 만드는 유일한 짐승이다. 방조제 너머는 바다이다. 바다는 수평이 지칠 대로 지친 곳에서 시작된다. 시간은 한 귀퉁이 휘어진 수평을 물고 넘실거린다. 거기 가면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모든 직선은 곡선을 지향하고 궁극에는 원으로 돌아간다. 원은 궁극이다. 핵이다, 구멍이다, 열반이다, 해탈이다, 명멸이다.
저물녘, 이 작은 도시에도 어둠이 내려앉고 상점마다 불빛이 들어온다. 녹십자 간판처럼 마음이 환하게(몇 번 깜빡거리다가), 파랗게 들어왔으면. 버즘나무잎이 촘촘하게 가로등을 감싸고돌자 나무는 깊은 바다의 해초처럼 흔들린다. 바람은 물결 속 물결이다.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가. 귀가 멍멍하다. 그래, 젖었다. 젖은 김에 조금 더 걷자. 젖자. 조금 더 걷는 일이, 조금 젖는 일이 내 문학이다.
오랫동안 이 숲길을 걸었다.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걷고 꽃이 피거나 바람 불거나 봄 여름 갈 겨울 할 것 없이 줄기차게 걸었다. 걸을수록 길은 낯익었으나 걷고 나서 뒤돌아보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뻗어있었다.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서도 식은땀이 났다.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또다시 가을이다. 나도 저 나무 그림자처럼 단호하게 살고 싶었다. 저 산그늘처럼 명확하게 살고 싶었다. 고양이 시체 하나 썩는 데도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길은 모든 것을 감싸는 듯 했으나 모든 것을 배척하기도 했다. 길은 시시각각 썩고 스며들고 새로 돋아나고 베어 넘어지고 젖어있거나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곧잘 넘어지곤 했다. 휘청거리며 겨우 걸을 때도 있었다. 땡볕은 사나웠고 그늘은 서늘했다. 숨기는 싫었다. 걸으면서 당당해지는 법을 배웠다. 피하고 싶은 것도 피하지 않았다. 외로움도 이 길의 운명이고 잊혀진다는 것도 이 길의 순명이리라. 길은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끊기는 듯 했으나 이어져 곧바랐다. 끊기지 않았다. 정당하게 통과했다. 멀리 뻗어 늘 막막하고 아득한 길,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땀범벅으로 걸어가리라.
숲은 바람이 흔드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흔든다. 숲은 왼종일 새들이 수런거리는 말의 집이다. 수런거리는 말(言)의 잔칫날, 그래서 숲은 한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숲은 가두는 게 아니라 죄 풀어놓는다. 열려있다. 그 안에는 참깨, 들깨 쏟아지는 말소리가 온종일 눈부시다. 숲은 말(言語)의 사원이다.
거미는 허공에다 집을 짓는다. 내장을 꺼내 집을 짓는다. 거꾸로 매달려 집을 짓는다. 짐이 무거우면 벗어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벗어 던지면 삶이 없다. 누가 당신에게 짐을 짊어 줬는가. 스스로 짊어진 짐이다. 자기가 감당할 만큼 지면 된다. 자기 몸에 알맞은 지게를 선택해서 알맞은 짐을 져야 한다. 오래 걸으려면 튼튼한 멜빵을, 굳건한 어깨와 강인한 장딴지가 필요하다. 당신이 짊어진 짐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거미는 까마득한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집을 짓는다.
새벽별 바라보며 걷다보니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땀 냄새와 발꼬랑 냄새와 담배냄새가 범벅이 되어서 누룩 익어 가는 냄새와 메주 뜨는 냄새가 가득한 조세완네 사랑에는 이가 끓었다. 벼룩이 튀었다. 빈대가 굼실거렸다. 이야기가 끓어 넘쳤다. 가마니 치기나 멍석을 말거나 망태기나 삼태기를 삼느라 짚풀이 먼지를 가득 피워 올렸다. 석유호롱 심지 끝에는 천장이 시커멓게 지도를 넓히고 방바닥은 군불에 종이 장판이 바짝 말라 타는 냄새가 오줌지도를 그리듯 퍼져 나갔다. 밖은 유리알처럼 밝았다. 유리가루를 빻아 뿌려놓은 듯 수분리에서 북치재까지, 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달이 너무 밝아 나무그림자가 나무보다 더 선명할 때는 잔별들이 흐릿해졌다. 장산 개호주가 울면 뒷산 부엉이가 화답을 했다. 방앗간 안은 먹빛이었다. 갑자기 탱탱해진 불알이 진저리를 치며 오줌이 마려웠다. 오늘은 감천 김세완네 제사가 있는 날이다. 댕댕이 소쿠리를 옆에 끼고 완수와 나는 막 단자를 다녀오는 길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젯밥에 무와 두부가 숭덩숭덩 들어간 국, 팥고물이 잔뜩 들어있는 시루떡, 온갖 나물과 무침에 그 시절 귀한 삶은 돼지고기 편육도 들어있고 막걸리는 걸을 때마다 출렁거린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돌아가신 분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한 상 걸게 차린 날이다. 이 날만은 과식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 어른들도 흔쾌하게 아이들에게 탁주잔을 돌렸다. 잔돌들의 그림자가 선명한 겨울밤이었다. 새벽 하늘에는 개호주의 눈빛처럼 새파란 별빛이 무더기로 쏟아지던 겨울밤이었다.
이 숲길을 오래 걷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달팽이 백여 마리를 풀구덩이에 던져준 기억밖에 없다. 달팽이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한 생애를 다 걸고, 티벳에 있는 라마사원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중국 감숙성의 촌사람처럼, 온몸을 바닥에 대고 폭이 채 2m도 안 되는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길을 가는 달구지들은 달팽이의 오체투지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달리는 바람에, 반나절도 못 건너 그대로 땅바닥에 피떡이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었다. 달팽이의 비명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쟁쟁하다. 달팽이는 왜 기를 쓰고 길을 건너는가. 이쪽이 삶이라면 저쪽은 죽음인데, 달팽이 쪽에서 보자면 이쪽이 지옥이고 저쪽이 천국이란 말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여튼 생명은 장중했고 달팽이의 서두르지 않는 보폭은 엄숙했다. 삶에 대해 저 정도 경건하고 치열하게 부딪친다면 내 스승 정도는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한사코 그들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모르겠다, 내가 한 이 작은 행위가 누구를 이롭게 하고 누구를 해꼬지했는지. 내 마흔 두 해 짧은 생을 되돌아보니 제 몸에다 제 집을 짊어지고 온몸으로 바닥으로만 기어온 달팽이의 삶이 바로 내 삶이었구나. 누구나 바닥으로 긴 삶은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워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겠다. 길짐승이나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든, 풀구덩이에 처박혀 오롯하게 말라비틀어져 해탈을 하였든,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명은 똑같다 하더라도 예정에 없던 교통사고는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찬이슬이 맺히고 한낮 가을 숲은 습기 빠져나간 보송보송한 공기로 가득한 지금, 달팽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많은 달팽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숲 속에는 더덕이 숨어있다. 조금만 세밀하게 훑어보면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더덕은 특유의 향기 때문에 멀리서도 얼마만큼 크고 몇 뿌리가 무리 지어 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숲길을 2년이 넘게 걸어다녔으므로 더덕 넝쿨 하나 찾아내는 일은 맹감 열매 따먹는 만큼 쉬운 일이었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마음먹었다. 야생 더덕뿌리를 캐 집으로 가져온다면 가족들은 잠깐 탄성을 지를 것이고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면 소주 반 홉 정도는 달게 비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더덕, 그 애잔한 꽃(도라지꽃과 비슷하다)과 동글동글한 잎과 쥐눈 닮은 씨앗과 손가락만 갖다 대어도 부러지는 줄기를 생각하고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이곳은 산새가 낮고 부드러워 더덕이 살기에는 적당한 땅이 아니다. 야생 더덕은 산새가 높아 춥고, 그늘지고 서늘하여 적당히 습기가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어디에서 어떻게 날아온 가족인지 모르지만 씨앗이 자꾸 자꾸 퍼져 내 산책길에 더덕 향기가 솔솔 풍겨왔으면 좋겠다.
안개가 천지를 뒤덮을 것 같지만 그리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햇살이 돋아나면 저절로 물러난다. 걷는 동안 오른쪽 허리 근처에서 허벅지와 장딴지를 거쳐 엄지발가락까지 산란하여 몰려다니던 실치떼들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땀방울 통해 강으로 흘러 먼바다로 헤엄쳐 갔을까? 그리하여 근 2년이 넘게 싸운 병은 거의 다 나았다. 척추가 똑바로 선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숲길을 바라보아도 숲길은 늘 처음처럼 새롭다. 저 길이 나를 낳고 기룬 길이다. 저 길이 병을 주었고 약도 주었다. 어찌 섬기고 모시지 않을 수 있으랴. 간밤에 가을비가 또 내렸나 보다. 곧 추운 겨울이 내 삶을 엄습하리라. 병은 스승이고 길은 부모님이다. 다시 길 위에 선 지금, 내 문학은 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