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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스님과 함께하는 십우도(十牛圖) -(반본환원 & 입전수수)–불기2567년06월 교육법회 봉행
삼보에 귀의 하옵고_()_
■.법회주제:남전스님과 함께하는 십우도(十牛圖) -(반본환원 & 입전수수)
-.일 시:불기2567년06월09일(금)저녁7시~9시
-.장 소:조계사 극락전
-.법 사:조계사 부주지 겸 선림원장 남전스님
-.사 회:교육부장 성월 정승길님
-.참석자:총동문회 회장 보명화 도영숙님 외55명 참석
-.집 전:신행부장 법담 손영길님
■.법회식순:노래로 떠나는 구법여행(우리도 부처님같이) -개회사-삼귀의 – 우리말반야심경- 인사말씀(회장 보명화 도영숙님) -청
법가 – 입정 - 법문(남전스님) -발원문(포교부장 운정 나현숙님)- 공지사항-사홍서원-산회가–폐회사-기념사진 촬영
■.6월 교육법회 이모저모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힘들게 이룩한 자유와 평화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는 지난 6월09일 극
락전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부주지이신 남전스님을 모시고 십우도 마지막 시간에 <인우구망. 반본환원, 입전수수
>을 함께 공부했는데요. 이 자리에서 <세상은 여러분 위험해요. 왜냐하면 탐진치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모습을 지킬 때 진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하시며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에고로 살지 마시고 세이프하세요. 본래 자
기를 회복하는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아는 것과 똑같아요. 내 안에 세상이치가 다 들어있어요.> 반본환원의 근본으로 돌
아가는 근본이 어딥니까? 그러합니다. 여여합니다. 가볍게 미소지어 주면 100점입니다. 하시면 60분간 미소로 귀한 말씀 주신 것
을 마음에 가득 담는 시간여행이었습니다.
이날 법석에는 제10대회장 보명화 도영숙 회장님을 비롯한 상임고문 혜월 권순석님,신도회 부회장 겸 교육본부 부회장 성해 장경
태님, 고문 대덕심 김경숙님, 자문위원장 경담 이원굉님, 삼조 정진경자문, 정진행 양순덕자문, 현진화 김정미자문, 평전 하용수자
문, 법연 이동엽자문,도안심 이순화자문, 환희지 권종순자문, 월광지 임연선자문, 보현행 안영주 감사, 정명화 허복미자문님께서
참석한 가운데 여법하게 회향했습니다.
법회 진행에 힘써 주신 진각화 전연숙 부회장님. 옥천 김용안 부회장님. 명심등 주숙자 부회장님. 법선심 우양숙 부회장님, 일향지
김영임재무부장님. 운정 나현숙 포교부장님. 법담 손영길 신행부장님. 법연심 안영란 봉사부장님. 자련 임경애 문화부장님. 성월
정승길 교육부장님.도운 민영환 총무부장님. 진공 이호진 홍보부장님들께서 수고해 주셔서 더욱 여법했습니다.
◈,남전스님의 십우도 교육법회 회향
◐,2월(1강) :제1편 심우(尋牛,소를 찾아서= 시작 발심 목표가 어디에?) -회향
◐,3월(2강) 제2편 견적(見跡,발자국을 보다. 스스로를 알아야) -회향3월(2강) :
제3편 견우(見牛,소를 발견하다. 목표가 분명해져야) -회향
◐,4월(3강):휴 법
◐,5월(4강) :제4편 득우(得牛,소를 얻다. 이제 알았다. 방향설정)-회향
제5편 목우(牧牛,소를 키우다. 끊임 없는 정진)-회향
제6편 기우귀가(騎牛歸家,소 타고 집에 오다. 신행) -회향
◐,6월(5강) 제7편 망우재인(忘牛在人,소를 잊고 사람만 있구나. 보살행과 보살도)- 회향
제8편 인우구망(人牛俱忘,사람도 소도 다 잊었다. 불의 마음의 도장) -회향
제9편 반본환원(返本還源, 그러하다. 근본을 돌이켜 뿌리로 돌아감) - 회향
제10편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교화 ) -회향
【공지사항】
◘.천수다라니기도법회 안내
1.일 시:매월 첫째 주 금요일 저녁7시
2.장 소:조계사 극락전
◘.2023년도 임원모집
-.자격:불교대학 졸업예정자 및 졸업자
-.신청서;소정의 양식 작성 후 동문회제출(신청서는 동문회 사무실 비치)
◘.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스물여섯 번째–6월 법회
-. 일시 : 2023년 6월23일 (금) 저녁7시
-.법사 : 동명스님 (서울 전등사 회주)
-.주제 : 이것이 불법이다.
◘.총동문회 합창단 모집 및 연습
조계사 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53선지수 합창단 가입하여 음성공양 할 수 있습니다.
-.일 시:매월1,2,3째 주(토) 12시30분~2시
4째 주(금)오후5~6시30분
-.장 소:안심당 지하 합창단실
-.문 의:포교부장 운정 나현숙,010-9491-9466
◘.동문회비 및53선지식 구법여행 법회 보시구좌 안내
-.동문회비:연회비-5만원,평생회비-50만원
-.하나은행111-054579-03005.예금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문의 재무부장 일향지 김영인010-3209-7400
◘.장학기금 후원(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장학회)
-.조계사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 월1천 원 이상의 장학기금 후원가능
-.장학회 정회원 조건:출자금10만원 월1천 원 이상 후원하시는 분
-.후원계좌:신한은행100-030-532200 (조계종조계사 불대총동문회)
-.문의:장학회 총무 보현행 안영주,010-6272-2895
◘..불교신문 구독신청
-. 53선지식 구법여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불교신문》구독 신청바랍니다.
-.문 의:자문위원 법연 이동엽010-6324-3200
◘.교육법회 법사비 보시
-.2023년 6월 교육법회법사비:정진행 윤점애 감사님
-.떡보시: 여여 이양우 봉사수석차장
◘.총동문회 행복 나눔터
-.참기름(12,000원)들기름(13,000원)볶음참께(5,000원)
강황가루500g/1vh(30,000원) 홍삼엑기스 100g(150,000원)를 판매합니다.
-.국민은행: 837601-04-310207(예금주 도영숙)
-.문의:재무부장 일향지 김영인010-3209-7400
■.인사말
반갑습니다. 봄인가 했는데 벌써 여름이 되어 있는 요즘 잘 지내고 계시죠?
오늘 교육법회의 법사로 부주지 이자 지도법사 이신 남전 스님께서 1월 신년 법회부터 오늘 십우도 마지막까지 6개월간 함께해
주시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고 했는데 스님 일단 안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난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에 비가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조계사를 찾아주셨고요. 저희 총동문회는 대웅전
입장 관련 질서 유지를 아침 6시 반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11시간을 여여하게 봉사하였습니다.
봉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만발, 공양간 배식 등 봉사를 하고 있는 불교대학과 대학원생을 위하여 저희가 레몬즙을 직접 만들어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게 하였고요.
비가 오지 않았으면 더욱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던 아쉬움이 있기는 하였지만 시원하게 그리고 또 따뜻하게 마실 수 있었으면 고
마워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많은 양의 레몬을 세척하는 등 직접 청을 만들어준 일향지 재무부장님과 봉사하며 챙겨주신 모든 임원 여러분께
감사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5월 21일 입재한 자비도량참법 기도가 내일 회향 법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20일 간의 개별 기도로 참회하며 새롭게 발심하는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내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포함하여 많은 분들
이 회향법회에 동참하며 더욱 신심 가득한 시간이 되시기를 발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비도량참법 기도와 십우도의 가르침으로 참회하며 행복한 불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남전스님께서 오셨는데요.
다시 한 번 1월 신년 법회부터 오늘 십우도 마지막까지 6개월간 함께해 주신 남전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감사드립
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67년 6월9일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 회장 보명화 도영숙 합장 ]
■.법문 – 남전스님 ( 십우도=인우구망, 반본환원, 입전수수)
십우도 7번째 그림 좀 띄어주세요. 박수도 좋지만 입정할 때 안 떠들었으면 좋겠는데요. 우리 여기 이 ppt 화면이 이렇게 썩 성능
이 좋지 않아서 강의도 그렇고 공부하는데도 좀 그렇긴 하지만 조금 주의 기울여서 좀 봐주세요.
네 오늘 십우도 네 개의 그림 나왔는데 얼른 하고 좀 마쳤으면 좋겠다 싶네요.
일곱 번째 심우도의 일곱 번째 그림의 제목이 망우재인이라 그 있죠
어떤 원문에는 이 있을 재 자 말고 존재하다고 할 때 존자를 쓰기도 합니다.
망우존인이라고도 하고 망우재인이라고도 하죠.
망우는 말 그대로 소는 잊어버리고 이런 뜻이죠.
사람은 있고 사람이 심우도에는 이제 동자승이니까.
소은 없어지고 동자승만 남아 있는 경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기우귀가 그래서 이제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소를 찾고 그 소와 하나가 돼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이
게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수행의 과정을 거치고 다시 이제 돌아온 상태인
데 여기 공부를 하다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또 하고자 하는바 성취를 하면 완벽하게 정각을 이루거나 깨달음을 얻은 상태는 아
니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목적한 바가 있어서 그 목적한 바를 이루었단 말이에요.
100%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라고 본다면 이제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될까? 성과의 목표를 삼아가지고 일을
하다가 초기에 목표를 달성했다고 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나가야 합니까?
당연히 일보를 디뎠으면 그다음에 또 2보를 나가야 되잖아요.
그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되겠죠. 근데 그 새로운 목표라는 게 바깥에서는 모르겠어요.
이 성과나 성취라고 하는 것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정도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절집에 수행자나 또 수행하는 불자님들이나 그렇
게 우리가 수행자라고 하는 공통분모적 측면에서 이걸 본다면 나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죠.
법이 깊어지거나 아니면 부처님에게 더 가까이 가거나 이런 목표들의 설정들이 있어야 이제 절 다닐때 가끔 듣지 말아야 할 말이
그런 말이에요.
아니 절을 10년씩이나 다녀놓고 이런 말을 가끔 들어요.
무슨 말이죠? 이게 10년씩이나 다녀놓고 왜 저 정도 수준인가 이런 말이잖아요.
그 얘기를 지금까지 몰랐어. 20년도 아니고 30년을 다녔는데 왜 저럴까? 여러분 이게 스님들에게도 되게 뼈아픈 말씀 중에 하나
거든요. 스님들은 이제 안거를 치르면은 법납을 한 살씩 한 살씩 먹는데 절에 들어온 지 20년 30년이 됐는데 그 모양이다. 이런 소
리를 들 으면 정말 이게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바깥에서는 뭔가 막 이루려고 하죠. 집을 한 채 만들고 재산을 불려놓고 자식 농사 잘 짓고 이런 것일 수 있겠지만, 절집은 법재인
데 법에 대한 공부 또 법에 대한 어떤 성취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실 출가 연수 비교해서 그정도면은 참 열심히 수행하셨구나.
뭐 이런 말을 들어야 되는데 스님은 왜 출가 삼십 년 됐는데 그 모양이에요 이런 자 이 근데 스님들은 이걸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
여. 여러분들은 좀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절에 다녔는데 이제 삼십 년 되셨는데 왜 그 모양이 그러면 휙 그리고 가버
려, 굉장히 이게 잘 들어야 되는데, 내가 이제 호구조사는 안 해보겠지만 십 년 이상 된 사람은 손은 안 하겠지만 우리가 하여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정 정도의 성과가 맞춰지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데 십우도는 열 개의 그림 중에 성취한 것을 지금 나타내기 때
문에 이 한 걸음 더 나간다고 하는 것에 표현으로 망우재인이라는 말을 썼어요.
그러니까 소가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앞 시간에 전 전 달의 여섯 번째 기우귀가를 얘기하면서 진리는 다 알았어요.
그리고 나서 수행자의 갈 길은 진리는 잊어 잊어버리는 거예요.
왜 잊어버리느냐 이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성취하기 위해서 했던 그 상황을 딱 성취했으면 그다음 상황으로 나가야 되니까, 이제
까지 했던 것은 마음 놓고 소를 잃어버리는 형태로 해서 각 가지 수행방편을 딱 내려놓는 것이죠.
이게 이제 금강경 같은 데는 되게 어떻게 유명하게 표현돼 있습니까? 뗏목의 비유 같은 것으로 표현돼 있잖아요. 강을 건널 때 뗏
목이 필요해서 뗏목을 탔으면 건넜으면 뗏목은 놔두고 가야지 뗏목 때문에 아주 그 강을 건너다는 고마움 때문에 이 목은 내가
소중히 갖고 있어야 겠다라고 집이 산에 있는데 그 산에 들고 가는 건 어디서도 알리잖아요.
또 거기는 또 거기에 있어야 뗏목이 가장 잘 쓰여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정 정도의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성취된 바 있으면 그
다음 단계로 나가야 되는데 이 망우재인은 아마도 그렇게 다음에 단계로 가기 위해서 망우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놓은 거죠.
그러니까 이제 이 정도 되면 여러분 진리는 진리는 됐어요.
근데 뭐가 남아 있어요 지금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
조금 이제 어려운데 일곱번째 때 9번째, 10번째 가면 되게 어려운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이게 어려운데 우리가 공부를 할 때도 가령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큰 진리 중에 하나는 무아를 갖다가 공부할 때 무아
를 알았단 말이에요. 무아가 이런 것이 그런데 “나”는 남아 있죠.
항상 얘기하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이분들이 지금 말하는 듣고 있는지 그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삼법인 같이 무상하
고 무아하고 일체개고 열반적정 이런 거 설명하실 때 무아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잖아요. 큰 진리니까 그 무아를 알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알긴 알았는데 나는 실존적으로 남아 있죠.
이것도 네~ 라고 대답하면 안 돼. 아니 무아를 공부해 놓고 내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이거 큰일인데 역설이고 반어예
요. 내가 없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다 이해했어요. 그런데 여전히 나는 남아있어요. 그러나 그 남아 있는 말을 진짜 나로 보지 않
죠. 그러니까 나를 보면서 내가 무아인 것을 아는 거예요.
이게 참 미묘하죠 실제로 존재하는 나를 보면서 그 나가 무아인 줄 아는 거야.
이 정도 돼야 된다니까. 그러니까 무아를 다 공부하고 났으면 그 무아를 통해서 존재의 무아성 같은 것을 이해할 줄 알아야 부처님
의 무아를 우리가 제대로 공부한 것이잖아요.
여기 지금 망우존인 망우재인이란 말도 부처님의 진리는 다 이제 알았어요.
근데 이제 여전히 그 진리를 안 주체는 남아있는 거예요.
이 주체를 어떻게 해야 될까? 여기서부터는 이게 깨달음이라고 하는 흔적을 지우기 시작해요. 이게 이제 깨달음의 본채로 가버리
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엇이 됐든 무엇이 오든 그 경계의 자유로워져야 되는데, 이 망우재인까지
는 내가 공부를 해서 부처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던 거다.
그러나 여전히 미세하게 내가 남아 있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는 거예요.
이걸 재인 존인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존재가 망우의 존재의 이해와 함께 가야 되는 것이죠.
그런 단계로 이걸 봐야 되는 거죠. 열심히 진리를 찾아서 공부 잘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까 어 진리가 없어졌어요. 소가 없어져 버
렸어. 기도하고 수행하는 건 수단인 것이에요.
그 성취를 했단 말이에요. 그 성취가 된 상태가 완성태인가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지금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거예요.
망우존인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저는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공부 열심히 하시고 일정한 정도의 부처님 말씀은 이해를 했다고
봐요.
그런데 이제 여전히 여러분들에게 습기가 남아 있어요.
여러분 그 습기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꼴이잖아.
불자가 절에 왔어요. 불교 공부를 10년 했어요.
그걸 알아요 근데 왜 갈등하고 다투고 여전히 불편할까?
이게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배운 대로 나의 흔적을 지워나가야 되는 거죠. 망우재인이 바로 이제
그런 상태의 출발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니까 꼭 여기 계신 이 동자 승이 무슨 뭐 갈등하고 무슨 시비하고 그런다는 게 아니라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해야 된다는 거야.
저는 여러분들이 공부한 걸로 치면 나만큼 공부한 것 같아요.
다 아니면 할 수 없지만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전히 중생의 삶을 버리지 못한 거는 습기가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흔적이 아직 남
아 있는 거. 망우재인는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제 말씀을 충분히 알았지만 여전히 나라고 하는 습기가 무아라고 하는 데 있어서 그
냥 다 넘어갔는데 이건 다음 다음 나오니까 여전히 아직은 습기가 남아 있음을 좀 봐야 되는 거예요.
도고마성이라고 했죠 공부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열심히 하셔놓고서 맨 마지막에 가면 그 공부했다는 생각 때문에 여전히 흔적이 좀 남아 있어. 나는 뭐 우리끼리 다 아는 얘기니까
우리끼리 얘기합시다. 바깥에 나가 좀 그렇긴 하지만 인터넷에 보니까 또 스님 한 분이 그냥 뭐 결혼을 했느냐 어쨌느냐 아이가 있
느냐 하고 되게 시끄럽대요.
근데 이런 기사들이 확실히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또 문제면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잘 몰랐다면 바로 잡으면 될
것인데 여전히 중생들의 관심은 이분이 카이스트를 다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에 아까 우리 스님 한 분도 그렇게 해서 날아갔잖
아. 누구 있었잖아요 괜히 좋은 집에 살아가지고 말이야.
이분이 이야기할 때도 그 이분의 어떤 됨됨이나 수행의 어떤 정도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분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이게
되게 궁금한가 봐. 나도 서울대학에 다시 한 번 가볼까 생각 중이야. 왜 이런 게 중요하게 되었을까? 도고마성이라 아니 도를 이룬
사람들이 도를 이루기 전에 학교에서 출가하기 전에 배웠던 학교 도대체가 무슨 상관인가 모르겠어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훨씬 더 자기의 수행이나 자기의 어떤 그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도 있거든요..
절집에 들어왔으면 그걸 평평하게 봐줘야 되는데 여전히 우리들 시각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거야. 그 스님은 지금 문제가 아니
고 그걸 보는 사람들이 지금 시각을 얘기하는 거야. 여기도 아마 그럴 거요. 그 스님 얘기하면 그 카이스트 나온 스님 말이지 그리
고 그 스님이 남는 게 그거밖에 없나 봐.
이 스님이 공부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법문을 하시고 어떻게 수행을 하고 이런 데 관심이 없어요. 학교 나오고 출가자. 일은 묻지
않는 게 우리의 불문율인데 출가하기 전에 그 학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니까 참 뭔가 아쉬운 것이다.
망우재인 같은 걸 공부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습기에 대해서 여러분 정말 처절하게 통찰하시고 반성하고 성찰하셔
야 돼요.
그런 생각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건 남의 일이니까 놔두고 여전히 여러분들은 불교 공부했지만 맨날 싸우고 맨날 갈등
하고 맨날 시비하고 그러는거 어이 재인이 남아 있었요. 이거를 없애는 공부를 망우를 재인이 함께 없어지도록 망우 했던 그 공부
의 영역으로 이걸 끌고 가셔야 돼요.
그래서 옛날 어른 스님들도 대혜 종고 스님 같은 분은 부처님 만나면 부도 죽여버리고 조사 스님 만나면 조사도 죽여버려라. 한
이야기가 정말 칼들고 막 죽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거기에 걸리는 거야.
거기에 그걸 넘어가야 되는데 여러분 부처님 말씀 배우신 건 아주 잘하셨어요.
근데 그 배운 것이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습기로 인해서 그 배움 자체가 희석되는 건 누구한테 책임 있는 거 같아요?
대답도 안 한다. 그래서 망우재인 나의 습기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이런 주제예요.
넘어가 봅시다. 여덟 여덟 번째 그림 좀 보여주세요.
여덟 번째 그림 저 끝에 제목 한번 읽어보세요.
인우구망 말 이런 뜻이죠. 여기 이제 여기 지금 일곱번째 그림에서 얘기했던 이 재인이 드디어 사람과 소가 함께 함께 없어져 버렸
어요. 이걸 보명스님의 목우도에서는 서로 상 자를 쓰고 잊을 망 자를 써서 상망이라고 표현해 놨다고. 이 그림 자체가 함께 없어
져 버린 거예요. 함께 잊혀지는 거지. 서로 잊은 거예요.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돼 버린 거예요.
우리가 이 사람이 갖고있는 기본적인 안 이 비 설 신을 통한 세상과의 어떤 경계의 삶 속에 있다면 소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는
거니까 마음의 본질을 얘기하는 본성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본성을 알았는데 여전히 습기가 남아 있는 경계가 이제 여덟 번째 그림 쭉 보게 되면 열심히 수행해 아까 망우재인 망우
존인이 열심히 수행해왔고 이제 인로 둘 다 경계 자체가 서로 없어지게 되는 소는 진리니까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람은 나라고 본다면 이건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거야.
이 경지가 돼야 우리가 깨달음을 이제 완전히 정각을 성취했다 대각을 성취했다 깨달음을 얻었다. 이 정도 되는 거야. 여러분 가끔
우리가 공부하다 보면 어떨 때는 기도가 되게 힘들고 어려운 날이 있죠
어떨 때 경전 공부 강의를 듣는다면 이상하게 그날 공부가 잘 안 돼.
이유를 보니까 아 전날 술을 많이 먹었는데 해장을 못 했구나.
숙취에 잠이 덜 깨거나 아니면 술이 아니더라도 아주 힘든 일 멀리 갔다. 왔고 충분히 쉬지 못하고 이렇게 와가지고 강의를 듣거나
공부를 하거나 정진을 하고 기도를 하면 어떻게 돼요? 잘 안되죠. 집중도 잘 안 되고 왜 그런 줄 아세요? 여기처럼 굳이 우리가 주
간 객관 이렇게 사람과 소 이렇게 얘기 안 해도 나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몸하고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과 생각이 이게 일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신하고 마음이 일치가 안 되면 이 멀리 갈 것도 없다니까.
스스로를 보면 알아요. 어제 잠은 잘 잤어요? 네 해장은 하고 왔어? 그 이제 듣기가 편안한 것이지. 근데 이제 예를 들어서 어저께
굉장히 피곤한 일이 있었거나 힘든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 왔으면 마음은 열심히 보고 들으려고 하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니까 힘
들어요.
인생이 힘든 건 되게 어려운 거 같지만 별거 없어.
육체하고 마음이 일치가 안 되는 거야.
마음이 원하는 바하고 육신이 원하는 바가 다르다니까.
삶이 괴롭지.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참선하자고 잘 앉아 있으면 마음은 공부하고 싶은데 몸은 관절염 신경통 허리 어깨 막 디스크
막 이런 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힘들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돼요?
마음에 중심을 두고 육신을 좀 편안하게 해서 자세를 좀 편안하게 해도 돼요.
몸은 잘 공부하려고 하는데 마음과 생각이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해? 그럴 때는 화두 같은 걸 딱 들어가지고 빨리 집중시키
고 그런 기술적 방법들을 써가지고 공부들을 해야 되는데, 결국 그 본질은 내 마음과 생각과 몸이 하나가 간극을 줄여나가는 게 공
부하는 거라니까.
무슨 깨달음 얻는 게 공부가 아니고 뭐 얻기는 뭘 얻겠어 얼마든 이제 부지런히 하셔야지 이거 웬만큼 해가지고 되지도 않아.
괜히 깨달은 척하고 공부한 척하고 그러지 말고 적어도 공부한 사람은 몸이 마음이 하자는데 역 경계가 오면 안 되는 것이고, 몸은
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딴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사람을 공부한다고 그랬는데 그 정도 돼야 뭔가 마음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고 다 공부하는 사람이 우리가 뭘 알아가지고
그분의 깨달음의 경계를 판단하고 감히 저 정도면 뭐 공부 열심히 했구나! 그런거 하고 하겠어요. 그런데 보여줘.
몸하고 마음이 너무 편안해진 거예요.
그런 것 같네. 그래서 이 여덟 번째 인우구망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진리가 둘 다 이제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객관 주관 이런 거 얘기하는데 이렇게 이 정도 돼야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데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한 것을 아는 단계가 이제 인우구망의 단계에 이게 이제 사실은 사람과 소가 둘
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하나가 돼가지고 구분을 못 하는 거야.
무분별한 거야. 이 무분별의 지가 여기서 딱 나타나는 것이 그걸 그게 불교의 교학적으로 공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지.
부처님하고 내가 다른 존재인가 존재의 근본으로 들어가 봤다는 거죠.
그게 인우구망이에요. 중생이 열심히 수행정진 해가지고 성불했어요.
부처님이 그러셨어요.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 하나가 된 거예요.
하나의 제 모습을 찾은 거니까 본래부터 다른 분이 아니라니까.
그게 이제 인우구망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예요.
근데 아까 요 앞에도 얘기했지만 망우재인처럼 공을 알았는데 여전히 습기가 남아 있으면 얼마나 지금 약간은 지금 모자란 상태
가 됐는데 이 정도 이제 인우구망 정도 되면 이제 완전한 상태로 이제 여겨지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깨달음의 상태는 이 여덟 번째 인우구망의 상태라고 보는 거 십우도는 사실은 이 인우구망이라고 하는 이 상태를 위
해서 앞에 소 찾아가는 이야기가 이제 쭉 이렇게 전개가 됐다는 거죠.
어떤 심우도에서는 여덟 번째 그림에서 끝내버린 그림도 있어요.
왜냐하면 정각을 성취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이것을 조금 대승의 확장적 종교 인식을 좀 하자면 아홉 번째 열 번째 그림이 이제 뒤
따라서 나오게 되는 거죠. 번째 그림이 9번째 그림이 이 앞에 여덟 번째 인우구망은 그냥 원 하나만 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 9번째 그림은 다시 이 깨달음의 상태 원안에 가만히 잘 안 보이겠지만 저게 무슨 그림이에요? 나무하고 꽃
하고 산하고 물도 흘러가는 게 좀 보이고 그래요.
그러니까 저 그림은 그냥 자연 그대로의 우리의 세상의 상태를 그냥 원 안에다가 이제 표현해 놓는 거예요. 그걸 이제 우리가 반본
환원 이렇게 표현을 해놨어요. 반본이라는 말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환원이라는 말도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둘 다
여기서 본과 원, 본은 근본을 얘기하는 것이고 원은 처음에 나왔던 것이 그 원류할 때 그 원이니까
이 근본과 원류가 어디에 있어요? 이 그림으로는 반본환원 그래가지고 근본으로 돌아가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이제 그림
이 등장하는데 그러면 어디가 근본이고 어디가 원 시작점이에요? 내가 이렇게 물어볼 때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가만히 있지 말고
고개를 갸우뚱하라고 아! 강의는 듣고 있구나 아니야 이 사람이 자고 있는지 지금 멍 때리고 있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
이게 좀 교감을 하려면 대답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잘 모르겠거든. 해봐 거기를 그래 이야기하면서 일체감이 좀 생기지 아 고민하는데 잘 모르는구나. 그래 내가 그다음에 대답해줄
무슨 기운을 좀 에너지를 좀 얻을 건데 뭔 얘기를 물어보면 눈이 풀려가지고 이렇게 날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여기 반본환원 밑에 저기 지금 앞에 보이나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은 절로 핀다.
이렇게 지금 설명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반본환원의 이 본과 원이라고 하는 근본 장소 근본의 어떤 그곳 이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
지 않고 그냥 강물은 흐른다는 거예요. 꽃은 핀다.
이게 원래 옛날 스님들 법문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예요.
법정 스님이 이걸 가져다가 당신 산문집에 제목으로도 썼어요.
이게 수류화개라는 말인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물은 흐르고 꽃이 핀다라는 이 두 단어의 상고 관계가 무슨 관계예요
당연한 거죠. 물이 흘러야지 물이 고여 있으면 그 썩어 그건 좋은 물이 아니에요.
꽃은 꽃을 피워야 꽃다운 것이지. 그러니까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건 자연의 순리와 섭리에 맞춰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지금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은 저절로 핀다. 이렇게 해놨어요. 그리고 나서 한폭의 그림을 딱 갖다 놨다고
저 그림이 우리가 흔히 흔히 이렇게 표현할 때 서술적으로 표현할 때 자연의 모습을 그려놓은 거야.
자연이라는 단어를 한번 고민해 볼까? 자 자가 무슨 자 , 스스로 자, 연 자는 그러할 연 자. 그럼 자연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스스로 그러하다는거. 근데 여러분들 자연 그러면 무슨 생각이 주로 나요? 꽃, 산, 물 이렇게 생각나죠?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막
숲이 있는 이런 환경을 자연이라고 여기잖아.
우리가 이미 세상을 인식하는데 중생 인식의 수단은 뭐냐면은요. 이걸 대상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념을 딱 만들어놔야 그
개념이죠. 이 개념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착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고집부리고 막 성질내고 내가 이거 이거 아
니면 안 된다. 이러는 걸 집착이라고 알고 있는데 천만에 말씀이예요.
집착은 생기는 순간 착이 생겨요. 방하착이란 말이 내려놓는다 이런 말이잖아요.
방하착이란 말이 뭘? 내가 가지고 있는 성질머리를 아이고 내가 생각해도 이 성질머리를 내려놔야 그런 건 공부가 아니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못된 일을 내려오는 게 그 어려운 일이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방하 착의 착은 지금 얘기해. 자연 그러면 일으키는 그 생각들이 어느 순간 우리도 모르게 사실인 것처럼 받
아들일 그 인식의 오류를 교정하자는 얘기거든요.
이게 어려워요. 이미 근데 여기는 이제 내가 이제 강의할 때 엊그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좀 웃자고 우리끼리니까 편안하게 좀 얘
기를 하면 가면 예를 들어서 달마 대사께서 혜가 스님에게 괴롭다고 하니까 괴로움 가져오느라 그랬더니 찾아봐도 괴로움이 없는
데요. 그랬더니 그러면 원래 없는 거네 편히 마음을 먹어라.
괴로움이란 없다. 그래서 달마가 혜가에게 준 가르침을 우리가 통칭해가지고 안심 법문이라고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해줬다.
여러분들은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달마가 혜가 스님에게 안심 법문을 설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대개 어떻게 생각해요? 아 마음을 편하게 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하시잖아요. 근데 다른 데 이제 불교의 어떤 상
관성이 조금 적은 분들한테 가서 달마가 혜가에게 안심법문 하셨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소고기 부위를 생각해 우
리가 일상의 삶을 표현할 때 행주좌와 어묵동정 이런 걸 하거든요.
행주 그러면 걸래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묵동정할 때 어묵 그러면 오뎅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여러분 이게 웃을 게 아니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서술적 설명에는 대상을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니까 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안심 법문 그래도 소고기 법문인가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왜 안심에 관심이 있거든 안심에!
자기가 먹는 소고기에 관심이 주로 가 있는 거예요.
그런 걸 우리가 착이라고 한다. 착. 착은 그래서 시비나 고락이나 이런 어떤 감정적인 개념으로 착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착 자체
는 만들어지고 있는 개념의 시작점부터 얘기하는 게 그리 방하착하라고 하면 내려놔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간단한 게 아니라니까.
가끔 막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그래요.
스님 제가 욕심이 너무 많았고 욕심 내려놓기로 했으니까 그거 내려놓는 게 아니야.
욕심 내려놓고 어떻게 살라고 그래요.
욕심이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 되고 이 욕심 중에 내가 어떤 것은 너무 가지려고 하고 어떤 욕심은 그까지 것하고 톡톡 쳐버리는 그
런 욕심도 있다니까.
그런 걸 분석적으로 보지 않고 욕심 내려놓겠어 뭘 내려놓겠다는 거야 그런 사람들이 되게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야
자기가 이렇게 욕심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려놓는 거야.
뭔지 모르는데 뭘 내려놔 지갑 내려놓은 내려놓는 줄 알고 재산 내려놓는 줄 알고 그래서 말이 좀 이제 샜는데 자연이란 말은 “스
스로 그러하다는 거예요. ”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 그건 무슨 말이죠?
사물의 흐름이나 세상의 어떤 순환에 이치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에요.
그게 자연이죠. 여러분들은 자연입니까?
자연의 반대는 말을 인위라는 말을 써요.
인위적 이런 말을 써. 인공 이런 말을 써요.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걸 자연의 반대말로 쓴다고.
여러분 뭘 잊어버려야 되는지 알겠어요? 어떤 상태가 구망 인우구망이 돼가지고 단번에 환원에 갈 것이냐 자연스럽게 거기로 돌
아가야 되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반본환원 하나만 하라고. 그러니까 무슨 어머니 얘기 태어나라니까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순리와 그 세상의 이치에 맞게 살아오지 못했던 여러분들의 인공적인 탐진치의 삼독 이런 걸 내려놓으시고 자연스러운 상태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부딪히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내 생각 내 고집 조금 내놓기 시작하면 부딪힌다.
그 인공적이다. 다 듣고 있는 것인지, 내 마음과 내 바깥에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건 내가 자연 그림 속으로 쑥 들어간다는 얘기가
아니고, 자연의 흐름처럼 나의 삶의 흐름이 그러하더라.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이죠. 그러하다.
이게 초점이 반본환원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근본이 어딥니까? 그러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시면 95점짜리 대답 돼.
여여합니다. 그러면 98점짜리 된다니까.
아무소리도 안 하고 그냥 가볍게 미소지어지면 그거 100점짜리 되는 것이고 그런데 또 이걸 외운다.
또 그린 게 아니라 나의 삶 자체가 그러한 삶으로 가려고 하는 그런 노력들이 되게 필요한 거죠. 반본환원 하는 그래서 저 안에다
가 자연스러움의 여러 경계들을 여기다 가득 채워놓은 다 저렇게 저런 것이 반본환원 하나의 거죠.
진짜 지혜의 모습은 바로 저기서 나온다.
우리가 본래 청정한데 본래 청정해요.
여러분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티끌이 와서 묻기도 하고 먼지가 앉기도 해. 티끌 먼지를 어떻게 할 거야 앉으면 털어내면 될 것
인데 우와 안 졌다. 이렇게 호들갑 좀 떨지 말고 살다가 조금 힘든 일이 생기고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털어내면 되지 극복하려
고 노력하시면 되는 것이지. 세상은 다 있어요. 우리 눈앞에 다 있어요.
비록 가유 본질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상의 형상의 모습도 있지만 그런데 그 안에서 또 실상을 찾아내야 되지 않겠어
여러분 금강경의 경전은 비상을 얘기해요.
상에 걸리지 말아요. 법화경 같은 거 상에서 실상을 봐라.
이렇게. 그러니까 우리 경전 공부하는 분들에게 금강경의 공부는 생각을 털어내는 데 있다면 법화경의 공부는 그 안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는 이런 공부가 방점이 서로 조금 달라. 물론 이제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하나지만은 겉으로 표현하기 그래요.
그래서 금강경은 무수하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하는 자꾸 얘기하는 것이고 법경 제법의 실상을 봐라
그것이 마치 연꽃처럼 뿌리는 비록 우리가 먼지와 티끌과 더러움 속에 있더라도 그 안에서 본래의 진리의 모습을 표현해야 된다.
그래서 그래서 이름도 삳다르마푼타리카수트라 이잖아요.
그 진리의 법이 묘하게 서려져 있는데 그것이 마치 연꽃이 처염상정 하듯이 이렇게 비유로서 이제 얘기를 하는 것처럼 이 반본환
원의 이 경지는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 세상에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이 아닌 그러할 그러하다. 하는 이 경지로 여러분들
이 자꾸 자꾸 무게 중심지로 옮겨주시면 돼요. 근데 혼자만 하면 안 돼.
사람 만날 때마다 이 둘 간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야 되거든.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휴대전화 안에 전화번호 몇 개나 가지고 있어요
대답 안 해도 되지만 가령 예를 들어서 휴대전화 안에 전화번호 100개 정도 갖고 있어.
100명하고 만날 때마다 자연스러워해.
그걸 해야 돼. 그 정도 돼야 우리가 인우구망을 반본환원을 하는 정도 되요.
근데 안 그렇죠 휴대전화 이렇게 쭉 보다가 이 인간 전화번호가 아직도 여기있네.
지우면 될 것을 꼭 그걸 보고 아이구! 내가 이 인간하구, 쓸데없는 망상 이렇게 하잖아.
우리가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 거예요.
반본환원은 자연 그러한 경지 우리가 그러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알았습니까? 설명을 좀 더 해줘야 되는데 지금 시간이 없어.
갖고 지금 됐다. 대지에 10번째 그림 우리가 해놓고 나서 잔소리를 해야지.
여기 10번째는 너무나 중요한 그림이어서 한번 소리내서 한번 읽어보세요.
뭐라고 써있어요. 입전수수 그 밑에 더 다 보여요.
세속의 저작거리로 들어가 입전이라고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
이게 수수라는 표현을 했어요. 그래서 입전 수수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분이 저기 저 그림에 나온 분이 저기 저 분이 누구에요? 달마요.
누구 같아요? 다들 알던데 포대화상 포대 화상이 이렇게 조각되어져 있는 사찰에 가 보면 포대화상에 배가 불룩하시잖아요.
배가 유난히 검은 그거 시커먼 분들이 많아.
그분 배를 만지면 소원 성취된다고 하고 다 배만 만지고 있는데 여러분 이 포대화상 그림이 나왔으니까 포대화상을 그려놓은 이
유가 있는데 포대 화상은 법명이 포대가 아니에요.
그건 알지 저분이 지금 갖고 다니는 저 주머니 저게 포대잖아요.
그래서 그냥 저분을 그냥 통칭 해가지고 우리가 포대 화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중국에서는 저분을 실존 인물로 봐요.
실제로 여러 조사 스님들의 전기가 담겨져 있는 경덕 전등록이라고 하는 책에도 이분이 등장해요. 조사 스님들이 한 모습으로 당
나라 말기 스님이시라는데 명주 지방에 이 명주가 어딘지는 정확하게 저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명주의 동화현이라고 하는 곳에
서 태어나셔가지고 거기서 수행하신 스님인데 원래 이름이 원래 이름이 계약했다고 계 자. 게다가 이 차 자, 여기 금 차할 때 여
차, 이 차 이렇게 할 이 장소 할 때 그 차 그래서 계차라는 법명을 갖고 있었다고 그래요.
계차. 근데 이름도 이거 되게 사실은 한번 들여다봐야 되는 이름인데 그냥 계차라는 이름이 그냥 이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을 맺는 거야.
무슨 계약을 내생의 복덕과 또는 금생의 선행 금생의 복덕 이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을 맺은 거지. 이름도 그래서 계차라
는 스님이에요. 이분이 포대를 갖고 다니시면서
여러분들이 모아둔 그런 물건들을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또 어떨때는 그냥 막 원하는 사람들한테 나눠졌다고 해서 그 이분을
중국에서는 포대 화상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 포대화상을 미륵 부처님의 화신으로 여겨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포대 화상을 미륵 부처님으로 여긴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이 포대 화상이 56억 7천만 년 후에 이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해주시러 오는 미륵부처님과 동일시 됐다는 건 그런 선행을 베푸는
포대화상뿐만 아니라 그걸 본 받아갖고 베푸는 중생들의 모습 불자들의 모습 수행자의 모습들이 있어야 그분은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걸 이 성불의 수기를 미륵불의 화신의 포대 화상이 실제로 선행을 베풀면서 보여주시는 거죠.
어떻게 보면 내 생의 꿈과 희망의 아이콘 같은 분이에요.
포대화상. 이 포대 화상에 대한 신앙이 한국하고 일본하고 중국의 3개국이 아주 강한데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거 보면 여러분들이
그런 거 보면 상당한 퀄리티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소원 정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있을 것 같고 참 좋아 보이긴 하는데 한국은 되게 이 포대 화상이 소원 성취 그저 포대 안에 들어 있는 이 물건들이 이
복덕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라고 그래서 그걸 받으면 좋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 복덕을 나눠주는 거 우리도 하자.
이런 차원에서 포대화상하고 자꾸 접촉하고 이러면 내 삶 자체가 내 생에 좋은 삶을 받을 것이고 내 생에 복덕을 질 것이다.
이런 이제 좀 신앙적인 측면에서의 포대화상을 접근했다고 일본에 가니까 일본에는 사찰에 가면 사찰에 가면 이 불교의 정권 말
고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도나, 또는 민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어떤 신화 전설들이 아주 그 훌륭한 분들을 신격화해가지고
요. 일본 사찰에 여러분 가시면 패키지여행을 다니면 그런 건 잘 몰라.
일본 사찰을 이렇게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삼성각 같은 그 전각들이 있어요.
우리는 삼성각 우리는 산신각 일본은 이걸 칠복신이라 그래갖고 칠 일곱 명이 나와.
그중에 이 포대 화상이 일곱 번째 신이에요.
호테이라는 유명한 신앙 칠복신 일곱 명의 복을 가진다는 신이 있는데 여기 이제 광목천 무슨 하늘나라 사천왕으로 들어가 있고
막 그래요. 우리나라도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이 굉장히 오랫동안 있었는데 요즘은 포대 화상이 중국화된 분이라서 그런지 잘 신
앙하지 않더라고 그런데 옛날에 보니까 기록들에 보니까
소원 성취하려면 이분 배를 만저야 된다.
민간신앙이 하여튼 이 있었나 봐요. 말 나온 김에 술은 뭐 주로 드세요? 맥주 많이 드세요 국민들 국민주 맥주하고 대개 소주 요즘
소주하고 맥주를 섞어서 드시데, 여러분 좀 어른들은 다 아시겠지만 옛날에 두꺼비 그려진 소주, 전에 혹시 금복주라고 있잖아. 어
떻게 알아 도대체 얼마나 먹었길래 이 금복주에 등장하는 금복 그분이 포대 화상을 모델로 한 거 알아요. 포대 화상에서 따와 가지
고 금복주 술 모델로 그려놓왔 다니까 그게 나중이 두꺼비로 이제 변화긴 하지만 근데 이 단순히 왜 근데 포대 화상을 금복주에 로
고에다 갖다 놨을까? 불교는 여러분들 재가 오계에 불음주계가 있잖아요. 술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계는 받았는데 먹기는 먹어서 대답을 안 하는 거 있어요. 나는 만약에 이걸 알고 그랬다면 이 금복주 로고를 만든 사람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혹시 그냥 모르고 소원 성취 그냥 복 받아라.
이렇게 했다면 그럴 것이다. 이야기 이게 이제 확인이 안 돼 가지고 여러분 이 포대화상이 불음주계를 가르치고 있는 불교의 스님
이신데 술병의 모델로 들어가셨던 거예요. 이거 이상하지 않아?
그 힌트가 입전수수의 포대 화상의 그림과 연관지어서 생각하시면 저는 그렇게 만약에 그런 생각으로 이 금복주의 모델로 포대화
상 썼다면 그거 쓴 사람은 너무 너무 대단한 수행자 불음주계 그런데 스님이 술병 라벨에 들어가 있어.
이건 입전수수을 의미하는 거예요. 술을 먹되 술에 취하지 않고 술의 의미를 십분 살려서 술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간
삶을 잘 이끌어. 만약에 이런 뜻으로 포대화상을 그 금복주의 모델로 놨다면 나는 이분은 너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죽었을
거예요.
봤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포대 화상이 예전에 그림 보면서 그 소주의 라벨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까. 대단한 그런 생각으로
모델 했으면 대단해, 왜냐하면 입전 수수에 등장한 이 포대 화상이 바로 그런 분위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 이제 세속 입전 전자는 시장 전 자 잖아요.
시장 저작거리로 들어가서 이 손 수 자, 하고 펼칠 수 자를 써서 수수라고 하는 손을 펼쳤다. 관세음보살께서 바깥에 주로 입상 모
습이시면 대개 여러분 감로수병을 들고 계시거나 손을 표셔요.
자기 수수라고 해 중생들에게 손을 쫙 펼쳐주는 모습을 보이시거든요.
그 의미로 여기다가 수수하는 걸 넣은 거예요.
깨달음과 진리가 세상에 많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보여지고 그들에게 함께 진리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자세로 가는 것이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내가 있고 사자들이 있어요.
내가 있고 세상에 있어 세상에 수 많은 존재들이 다 있는 것이죠.
내가 진리를 이뤘다면 이 진리를 이룬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세상에 나가서 그 진리를 사실은 실현시키셔야만 돼요.
그런데 세상은 여러분 위험해요. 왜냐하면 탐.진.치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카이스트 스님은 말이야 그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가득한 그 안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지킬 때 진짜 공부하는 사람인지?
여러분 시내에 나와 가지고, 세속에 나와 가지고 포교 열심히 하는 스님들 항상 훌륭하다고 생각하셔야 돼요.
가끔 사고치는 스님들이 한 분씩 계실지 몰라도 이 위험한 저작거리에 나와서 저렇게 공부하고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 그 모습을
본래 잊지 않으시면서.
포대는 복과 덕이 가득 담겨져 있는 것인데요.
저것은 단순히 이름이 아니고 상징하는 거예요.
포대 화상이 미륵불이 되는 이유는 세속의 저작거리에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도 안겨주고, 이 한 분의 그림에서 수많은 의미
들을 우리가 엮어낼 수 있기 때문에 입전수수의미에 마지막에 불교가 다시 중생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상징 인물로 포대화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만상이 자연스럽게 있는데 그 안에서 열심히 진리가 계속해서 활약하고 활동하고 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래요 어떻게 보면 부처님은 2천600년 전에 우리 곁으로 오셨다가 열반하셨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법신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본체로서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작동하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게 그분의 부처님의 입전수수의 우리들 세상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도 당연히 열심히 공부하셔가지고 포대화상의 역할을 당연히 하셔야 되는 것이죠.
그건 너무나 필요한 일인데 어쨌든 이 심우도 공부를 통해서 한번 여러분 우리의 신행 모습을 좀 들여다보고 새롭게 한번 정리해
보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이 십우도 10개 표 하나 보내라 그랬는데 혹시 있습니까?
한번 여기 갖고 계시죠? 이거 한번 보세요.
이게 이제 마무리하는 이제
심우도(尋牛圖) 십우도(十牛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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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尋牛) - 시작 , 발심, 목표가 어디에? (소를 찾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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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人) =나)
견적(見跡) – 스스로를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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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牛) = 소와 관련된 주제)
3,견우(見牛) – 목표가 분명해져야
4,득우(得牛) – 이제 알았다. 방향설정
5,목우(牧牛) – 끊임없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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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人) +우(牛))
6,기우귀가 (騎牛歸家) – 신행
7,도가망우(到家忘牛) 망우재인(忘牛在人)–보살행과 보살도 ( 집에 돌아오니 소가 없어저)
8,인우구망(人牛俱忘) – 불의 마음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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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반본환원(返本還源) – 그러하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 중생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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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심우도라고도 하고 그림이 10가지에서 십우도라고도 해서 여기 제가 1,2,3,4,5,6,7,8,9, 10 이렇게 써놨는데요.
그림하고 내용들이 좀 어려워서 제가 제목 가지고 아주 간단간단하게 요점만 좀 써놨어요.
여기 등장의 주요 주인공 주연이 사람하고 소 두 개예요.
사람은 당연히 나를 의미하는 것이고 소는 당연히 부처님의 진리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처음에 우리가 공부하자.
이게 심우의 단계라고 했어요.
진리를 찾아 나서자 시작하고 발심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한번 돌이켜봐야 될 건 목표점을 어디다 두고 있느냐 이 항상 고민하셔야 돼요.
여러분 너무 원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반드시 성불하겠다.
여기다 목표를 꼭 두셔야 돼요. 하다가 안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처음부터 나는 30%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택도 없다. 3%도 안
돼. 처음에 발심하고 시작하셨을 때 목표는 반드시 진리를 다 이루는 성불에다가 반드시 둬야 된다.
그리고 나서 내가 정말 성불할 수 있는 여지가 어디에 있을까를 스스로 돌아봐야 돼요.
스스로 스스로 돌아볼 때 견적이라고 할 때 이 적자가 많은 십우도 십우도의 해석에는 소의 발자취를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데 저
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스스로의 자취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공부해야 될까 내가 공부를 하려면 어떤 자세를 갖춰야 될까 이것이야말로 견적의 핵심이 아닐까 그래서 여러분 견
적의 관계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야 돼. 내가 술을 좋아한다. 이런 걸 알아야 돼요.
내가 사람들하고 이렇게 좀 수다 떠는 거 좋아한다.
이런 거 알아야 돼. 그래야 공부하면서 고쳐야 될 부분들이 분명해지지.
여러분들은 이미 일취월장하셔 갖고 나는 술을 먹대 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먹다 이런 소리 있었고 나는 수다를 떨지만 수다에는 집착하지 않을까 이런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은 자기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는 것만큼 중요한 공부의 시작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는 자기를 폄훼할 필요도 없고 자기를 너무 높일 필요도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견적의 단계로 보는 것이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모두 소에 관련된 주제어들
이에요.
소를 보고 소를 얻고 소를 길러내는 건 이것은 진리를 향해서 내가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이 세 가지 그림으로 표현돼 있어요.
목표를 이제 분명히 설정했기 때문에 방향을 설정해 갖고 이제 가다가 보니까 방향이 제대로 온 것 같아.
이야 됐다.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끊임없 정진하는 거야.
이게 이제 우리가 지금 여러분의 단계가 견우 득우 목우의 단계로 있다고 저는 봅니다마는 물론 이 중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 분
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신행 상태를 좀 냉정하게 본다면 지금 3, 4, 5번을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이 중에 가끔은 기우귀가 배운 대로 행위하는 거요. 이걸 신행이라 그래요.
여러분 불교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신행의 종교라고 제가 시간 날 때마다 강조하는 이유는 공부한 것이 실현되는 종교이기 때
문이에요. 우리는 추상적으로 얘기하지 않아요. 개념적으로 얘기하지 않아.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믿으면 천당 갑니다.
이런 식의 개념과 추상을 가지고 우리가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니까요.
지금 하는 거예요.
배우고 공부했으면 지금 내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씩 하나씩이라도 하는 것이다.
이게 되게 중요한 도가망우는 집에 딱 도착했더니 아까 소가 없어져요.
소가 이제 집에 딱 들어갔더니 이제부터는 불자가 다 됐으니까 보살행 열심히 하셔야 돼요.
진리는 이제 알았어요. 이제 행위만이 필요한 거예요.
여덟 번째 인우구망 하는 거예요. 도가망우는 아까 망우재인 망우존인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좀 설명을 좀 쉽게 하기 위
해서 집에 도착해서 소를 잃어버렸다 소를 잊어버렸다. 이렇게 표현을 해놨죠. 인우구망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제 내 마음 안에
도 도장을 꽉 찍어가지고 완전히 일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6, 7, 8번은 나와 진리가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해요.
이 정도 되면 깨달음을 이제 얻었다고 보고 그다음에 오늘 지금 설명했듯이 다음번 하나 입전수수는 오로지 이런 삶으로서 계속
우리들을 끌고 다니는 것이요. 여러분 우리가 개별적인 나 이제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고 잠깐 전해드립니다.
개인은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 한 분 한 분 다 마찬가지죠.
개인은 개별 의식이 있어요. 자의식이라는 게 있어.
자기 생각이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사실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해석하고 하는 것이거든. 지금도 저는 계속
해서 이 자의식이 세상에 여러 경계들을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다섯 가지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법문도 듣고 이해도 하고 그런 것이죠.
그 안이비설신의 이 자꾸 내 마음과 생각에다가 들은 것을 종합해 가지고 자꾸 전달을 해주고 있단 말이에요. 의식에다 자꾸 전달
을 해요. 서양의 유명한 칼 융이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이분은 우리 불교하고 되게 비슷한 말을 해서 잠깐 이런
말씀을 좀 인용하면은 그니까 가공 가공된 이게 안이비설신 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으로 우리의 경계들이 가공된다는
거야.
끊임없이 자꾸 첨삭이 되어지고 자꾸 생략이 되어지고 덧붙여지고 그런다.
그 가공된 의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요.
개악 개인을 만들었다는 데 이걸 칼 융 같은 사람은 에고ego라고 그랬어요.
에고 이거는 가짜라는 거예요. 에고가. 왜냐하면 가공됐기 때문에 감각이 가공이라고 나한테 전달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에고의
관점으로 보면 어떤 것이든지 현상을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분석적으로 보는 거야.
부분적으로 단편적으로 보고 여기에 자기 견해가 생기고 단견이 생기고 편견이 생긴다는 거예요. 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집이 센 사람은 지금 에고가 너무 작동을 많이 하는 거예요.
칼 융 같은 사람은 이 에고ego 말고 또 다른 데가 있다고.
이 융은 이제 영어로 하면 조금 설명이 쉬울 것 같아서 내가 하는 건데 영어는 못 알아 들면 에고ego는 가공된다.
융은요 본래적 자아를 뭐라고 그러면 셀프라고 그래요.
셀프 자의식이라고 그랬다고. 이게 있다는 게 둘이 같이 있대. 에고가 있고 자의식이
자의식은 순수한데 에고는 안이비설신의을 통해서 가공돼 갖고 지금 만들어졌다는 거야.
근데 우리는 이 에고를 자기인 줄 알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으니 셀프를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된다.
여러분들이 가끔 살다가 보면 그럴 때 있죠 가끔 자기가 자기한테 놀랄 때가 있어.
내가 이런 면이 있었나 그런 것도 없어
아니 가끔 보면 내가 이럴 수도 있나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아요? 야 나에게 그게 이제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왜 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고 자기한테 놀랄 때도 있게.
좋거나 나쁘거나. 그러니까 그런 건 뭐냐면은요. 자기가 자기도 지금 잘 모르는 거야.
자기한테 있는 것도 몰라.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나면
내가 이런 면이 더 노력하셔야 돼요.
더 노력해야 그 본질적 본래적 자아를 만날 수가 있는 거야.
심우도는 그렇게 이 자아를 찾아가는 그 방법을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이렇게 만들어가는 거 중의 말씀을 좀 빌리자면 에고로 살
지 마시고 세이프 하세요. 세이프. 세이프는 음식점에 가가지고 갖다 먹는 게 세이프가 아니라 세이프는 본래 자기를 회복하는 우
리 불교로 이야기를 잠깐 바꿔서 얘기하면 여러분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아는 것과 똑같아요.
왜냐하면 나 안에, 내 안에 세상 여기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깨달음,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세상과 타자와 다르지 않아요. 남을 돕는다. 그것은 자기를 도울 때 그게 가능해지는 거야. 만해 한용운 스님이 뭐라고 그랬
냐면 나는 곧 당신입니다.
이래서 님의 침묵이라는 글을 쓰셔요.
나는 당신을 너무너무너무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나는 당신입니다. 이 유명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말씀이에요.
말씀 기억하시면서 심우도 공부를 통해서 여러분이 여러분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불자들이 되셨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을 해 봅니다. 알았습니까?
귀한 법문 감사드립니다._()_
진공 이호진 홍보부장님 좋은 사진자료 항상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동안에는 상을 통해서 부처를 느낄 수 있고 떠올릴수 있지마는 참 부처의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의 불심이 깊어지면 상에 대한 기본 자세를 터득하였기 때문에 이 법당 저 법당에 천불 만불을 늘어 놓아도
거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금강경26분)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 제10대 자문위원 법연 이동엽 합장 ]
첫댓글 남전스님의 감로 법문은 언제들어도 마음을 청정하게 해줘서 좋아요.
항상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