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무등산 약사암
일 시 : 2024.10.10(목)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10명
불 참 :
회 비 : 100,000원
식 대 : 83,000원(애호박찌개 5, 김치찌개 2, 청국장 1, 매밀전병 1, 공기 1)
금일 잔액 : 17,000원
이월 잔액 : 562,000원
총 잔 액 : 579,000원
강공수가 타고 온 승용차에 편승하여 함께 부곡정으로 갔다.
박남용이 조금 늦어서 10시 15분쯤 산행을 시작하였다. 8명(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등)이 맑은 가을 하늘을 이고 걸었다. 오고가는 산행객들은 표정은 제각기지만 모두 산을 즐기러 왔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였다. 집에서 나올 때에는 조금 쌀쌀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아주 상쾌한 공기 덕분에 아마 인간 생활 최적의 기온 속을 통과하며 산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증심사로 올라가는 길을 지나고, 등나무 천장 아래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강공수가 재촉하여 약사암까지 곧장 올라갔다. 석등에서 나오는 시원한 석간수(石間水)를 표주박에 떠서 한 바가지씩 마셨다.
서쪽에 있는 요사체는 막바지 공사에 접어들었는데, 지금 벽과 창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벽의 단열공사와 창호 공사가 끝나면 페인트 공사와 홈오토메이션으로 마무리를 할 것으로 보였다.
이용환이 딸이 울릉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울릉도 호박엿’을 사와서 가져 왔다면서 2개씩 맛보기로 나누어 주었다. 호박엿이라 쌀엿보다 당도는 떨어졌지만 이에 달라붙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우리 마을은 인근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로 이름이 난 마을이었다.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소득이 다른 마을에 비해서 높은 편이어서 잘 사는 마을이 되었다. 미작(米作,쌀농사)과 맥작(麥作,보리농사)으로 이모작(二毛作)을 하여 항상 양식이 풍부한데다가, 길쌈(누에고치로 비단 생산, 삼농사로 삼배 생산, 무명으로 면포 생산, 모시농사로 저포 생산)으로 경제적 교환기치인 포목을 생산하였고, 1937년 이후로 인근에 있는 보성강발전소에서 다른 마을보다 일찍이 전기를 끌어다가 사용하면서, 다른 마을은 해만 떨어지면 그 날의 노동시간이 끝나는데, 우리 마을은 밤 10시까지 노동 시간을 연장하여 다른 마을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으로 소득도 더 많아 지는 것은 마땅한 이치였다.
그런데 요즈음은 또 한 가지 특별 소득 창출로 경제적 이득을 보고 있다. 그것은 ‘엿과 조청’의 생산이다. 각 농협단위로 정미소에서 벼를 도정하는 과정에서 싸라기가 나오는데, 싸라기는 보통 쌀의 반값이다. 엿의 재료는 쌀과 엿기름인데, 싸라기를 쌀의 반값으로 구입할 수 있으며, 엿을 만드는 과정은 쌀과 엿기름에서 우러나온 엿물을 끓이는 연료가 필요한데, 연료를 무엇을 사용하는가 하면, 바닷가 어촌계에서 그물을 설치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 막대를 사용하다가, 바닷물에 부식되어 더 이상 쓸 수 없어서 폐기처분할 경우에, 그 부식된 폐 말목을 무상으로 가져다가 엿을 골(다릴) 때 쓰는 연료로 사용하니까, 엿을 만드는 원가 즉 비용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저렴하므로, 여기에 착안한 주민들이 너도 나도 엿 만들기에 달려들어 20~30여 농가가 농외(農外) 소득을 올려서 알음알음으로 판매하거나 인터넷 판매까지 하고 있어서 가구 소득이 다른 마을에 비해서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을의 이름은 ‘박실’이다. 한자로는 박곡(亳谷)으로 표기한다. 보성군에서 예로부터 살기 좋은 삼대(三大) 마을이 있었다. 1 ‘도계’(미력면), 2 ‘당촌’(복내면), 3 ‘박실’(득량면)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1 ‘박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보낸 소년 시절인 1940년대에는 우리 마을 인구가 100여 호(가구)에 5~6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은 30여 호에 30여 명일 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이 1인 가구에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하여 입주한 가구는 현 보성군수의 누님이 주택을 신축하여 입주하였고, 전남교육감으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부부교사가 건축비만 2~3억을 들여 신축한 건물에 입주하였고, 부산의 어떤 기업체 장이 이 시골구석에 또 건축비만 3억 이상을 들여 ‘세컨 하우스’(Second Hous)를 짓고 있으니 그만큼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음악정자로 내려왔다. 김상문이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전남대 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를 받고 왔다는데, 전립선 검사 결과,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PSA 수치가 17’이라고 하였다. 윤상윤이 그것은 위험한 수치라고 말하면서 전립선 암 징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안 좋은 수치들이 결과로 나왔지만 김상문은 그런 것에 걱정보다는 묵묵히 걷고 또 걸어서 하루 2만보 이상을 채운다는 것이다.
강공수의 ‘금주의 노래 부르기’ 시간이 되었다. 먼저 공지영 작가의 ‘소중한 나의 생(生)’을 낭송하였다.
‘소중한 나의 생(生)’
내가 몇 번의 봄을 맞을까/ 내가 몇 번의 새싹을 더 보고/ 내가 몇 번의 낙화비를 맞을까/ 소중한 이 날들/ 아아 너무도 소중한 나의 삶//
공지영은 1963년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나왔다.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 호에 단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표 작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다뤄 새로운 여성문학, 여성주의의 문을 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설가 2~3위를 차지한 작가이다.
오늘 부른 노래는 김용호 작사, 김동진 곡 ‘저 구름 흘러가는 곳’과 강소천 작사 스코틀랜드민요인 ‘귀뚜라미 우는 밤’ 두 곡을 불렀다.
식당으로 장휘부도 와서 함께 하였다.
첫댓글 오늘도 유려한 필체로 쓴 산행후기를 잘 읽었는데 우리 15야 밝은 달 회원 모두 컴퓨터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더 많으면 좋은 글 함께 공유할 수 있을탠데 아쉬움이 커 좋은 글 쓰느라 우리 목요산우회 장 수고 했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