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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도서 11:1-6
제목: 지혜로운 자의 삶
일시: 2021. 1. 24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단어들을 검색해 보면 검색어 1위는 코로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코로나와 관련된 단어들 즉 백신, 자가격리, 록다운, 마스크 등등이 랭크될 것 같다. 그만큼 코로나가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코로나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내일에 대해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post-corona시대의 삶에 대해 다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삶이 늘 그러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바로 그 왕 솔로몬의 지혜를 통해 우리의 삶을 잘 세워나가기를 바란다.
II.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떡”이라는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양식이요 내 소유이다. 그것은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 위에 던진다”라는 말은 내 손에서 떠났다는 말이고 다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 떡을 물 위에 던진다는 것은 헛된 수고를 하는 것이고 낭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자는 흘러가버리면 그만일 “물 위”에 “자기의 떡”을 아까워하지 말고 던지라고 촉구하고 있다.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에스더는 떡이 있었다. 그가 가진 떡은 왕후의 자리였다. 그런데 민족을 위한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떡을 던져야 했다. 에스더는 민족말살의 위기에서 침묵하고 있으면 왕후의 자리에 숨어 자신의 생명정도는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더는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반 위협 반 간청의 소리를 듣게 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에 에스더는 왕후라고 하는 자기의 떡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역사의 물결에 던지고 있다. 이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과감한 결단으로 자신을 던진 것이다. 몸을 날린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는 사재기를 하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가 걱정이 된다. 내 떡은 움켜잡고 사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떡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요 가진 내 떡을 과감히 물 위에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혼돈의 시대에 내 자신을 던지는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예)예레미야는 바벨론포로로 잡혀간 유다 포로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서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29:5-6)고 한다. 바벨론포로로 잡혀갔다고 해서 절망 속에 주저 앉아 있지 말고 주어진 그 환경 속에서 마음을 붙여 살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우쨀껴?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 것인가? 환경 탓하고 신세 한탄하고 슬퍼하며 살 것인가? 코로나가 우리를 포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에 더 이상 결박되어 살지 말라. 처음에는 코로나로 인해 당황하고 그것을 탓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계산에 넣어야 할 녀석이다. 이제 코로나는 더 이상 이유가 아니라 핑계가 된다. 내 떡을 움켜잡지 말고 내 떡을 던지라.
던져버린 떡이 자꾸 생각나고 아까운 생각이 드는가? 너무 조급해할 것 없다. 다시 얻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지혜자는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에스더는 자기의 왕후를 던지고 자기의 생명을 물 위에 던졌을 때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 자기 떡을 물 위에 던지는 사람은 손해 보는 사람 같으나 이익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 같으나 지혜로운 사람이다.
III.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주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아까워 못주는 것이 아니라 없어 못 줄 정도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나누어주기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고 필요이상으로 더 많이 갖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데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want”는 무한히 바라는 욕망이고 “need”는 삶의 기본적인 생필품이다. 지혜자는 want의 사람이 아니라 need의 사람이다.
손흥민의 년봉이 얼마인가? 153억이라고 한다. 세계 1위 메시는 연봉이 1280억이라고 한다. 그 연봉 액수를 들을 때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보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쓰지라는 생각이 든다. 손흥민은 일주일에 3억을 어떻게 다 쓰고 메시는 25억을 어떻게 다 쓰지? 어차피 손흥민은 need를 위해서는 그냥 된장국 김치 먹으면 되고 메시는 치즈와 쏘세지 먹을텐데.. 금은 보석을 먹는 것도 아닐테고... 나머지는 정말 멋지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혜자는 “얼마나 가지고 있지”라는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잘 쓰지”라는 생각으로 산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이야기한다.
지혜자는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 주라”고 한다. 이유는 무슨 재앙이 닥쳐와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다가 다 썩을 수 있다. 사용도 못하고 버릴 수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음식물이 냉장고에서 썩어나가고 교통딱지벌금을 내 손으로 송금할 때 아깝기 그지없다. 그럴 줄 알았으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나 줄 것을... 지혜자는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다 쓰지 못해 남는 것은 쓰레기가 될 수 있어도 그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자본과 재료가 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하찮은 것이어도 어떤이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한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럭셔리한 사치품이어도 어떤이에게는 꼭 필요한 필수품이 된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사는 방법이다.
누가복음 16장에 악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가 나온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의 재앙이 닥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일곱이나 여덟에게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었던 사람이다. 주인은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눅16:2)고 통보한다. 이때 그 청지기는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16:3)이라고 하면서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눅16:4)고 한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권한 안에서 곧 손을 놓게 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지혜로운 모습을 보였다. 주님은 곧 해고될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하셨던 것이다.
IV. "쏟아지면 쏟아진 대로 쓰러지면 쓰러진 대로“
지혜자는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이다. 겨울이 따뜻하면 좋다는 생각보다 겨울은 추워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겨울은 추워야 정상이고 여름은 더워야 한다. 더우면 더운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꾸 에어콘을 트니 오존층이 무너지고 에어콘병도 생기는 것이다. 봄에는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눈이 녹고 새싹이 나야 한다. 가을은 날씨가 맑고 청명해야 한다. 배고프고 졸린 아기는 울어야 정상이다. 어린아이들은 개구쟁이처럼 뛰놀고 사고를 쳐야 정상이다. 가만히 있으면 아픈 것이다. 구름이 비를 잔뜩 머물고 있으면 땅에 폭우를 쏟아야 정상이다. 강풍으로 인해 나무가 쓰러지면 그것 자체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독일의 Nature park 에 가면 그런 쓰러진 통나무들은 그대로 두는 것을 보았다. 차 안에 물건을 실을 때 가장 편안한 자세로 둔다. 병은 쓰러뜨려 버린다. 가장 안정된 자세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삶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사는 인생이다. 창조의 질서에 역행하지 않는다. 지혜자는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몰려 와도 서핑을 하듯이 그 파도를 타면서 넘어 간다. 2002년 11월 2일 서울의 어느 한 호텔에서 아버님이 제게 주신 “水流”라고 하는 호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 쉬워 보여도 아주 어려운 것이다. “자연스러워야지”라고 의식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된다. . “표정관리”한다는 말을 하는데 표정을 관리하기 전에 마음을 관리해야 자연스러워진다.
요셉은 인생의 서핑을 탔던 사람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 삶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인생의 파도타기를 했던 사람이다. 그를 시기하던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계획하며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요셉의 꿈레이스는 시작되었다. 그가 팔린 것은 애굽에 가기 위함이었다. 보디발의 집에 간 것은 감옥에 가기 위함이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 것은 총리로 발탁되기 위함이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 앞서 애굽에 선발대로 준비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렇게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 가게 된 것은 모세의 출애굽 역사를 연출하기 위함이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 역사를 역사 속에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구속사역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라는 것을 예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당신의 예언과 성취를 이루시는 섭리를 드러내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쏟아지면 쏟아진대로 쓰러지면 쓰러진대로 자연스런 삶의 서핑을 한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시는지 깨달으면서 산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연스런 섭리와 계획에 맡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V. “풍세를 살피지 말고 구름을 바라보지 말라”
우리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 주변 환경은 풍세와 구름같이 급변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풍세와 구름을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풍세와 구름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굳게 잡고 나아간다.
우리는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솔로몬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세계 최고의 지혜자 같은데 실컷 지혜의 말을 해 놓고는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혼자 세상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솔로몬의 “모른다” 지혜를 배워야 한다. 6절 말씀을 보라. “이것이 잘 될른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의 결단과 결정이 바로 된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해야 한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바이든이 미국대통령이 되고 5시간 만에 집무실의 모든 것을 다 교체했다. 그러나 딱 하나 가만히 둔 것이 있다. 그것은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1880년 러더퍼드 헤이스 당시 미 대통령에게 선물로 준 책상이다. “Resolute”라는 이름의 영국 배가 북극 탐험 중 실종됐는데 미국 선박의 도움으로 구조됐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 배를 구성했던 원목 일부를 떼어 배이름 Resolute를 따서 책상을 만들어 선물한 것이다. 그 뒤 백악관 창고에 있던 것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꺼내 집무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사용해 왔다. Resolute 라는 말은 단호하다는 뜻으로 결단을 의미한다. 그 결단의 책상에서 싸인을 할 때 국내 국제 사회에는 언제나 풍세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결단의 책상에서 무엇을 싸인할 것인가? 큰 결단을 해야 하는 미국대통령이나 작은 결단을 하는 우리들이나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내린 결정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지혜로운 자는 풍세나 구름을 보고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따라 결단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 결단의 책상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성경이다. 미국대통령이 취임식 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전통인데 조 바이든이 미국 46대 대통령이 되면서 사용한 성경은 바이든 대통령 가문이 1893년부터 소중히 간직해온 것으로, 상원의원과 부통령 등 바이든의 공직 취임 선서 때마다 사용했던 것이다.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 모든 국정의 결정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국을 통치하시고 축복하소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종종 God bless us 라고 할 때 us를 USA라고 하기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계획하시고 섭리 가운데 이끌어 주시옵소서라고 자신을 맡기는 자이다. 짧은 지혜로 하나님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설픈 내 생각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풍세와 바람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풍세와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 이렇게 코로나가 닥치기도 한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애가 생기기도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도 있다. 철저하게 계획한 플라눙A, 플라눙B, 플라눙C의 방어선이 다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어찌 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자의 사는 모습이다.
VII. 2021년 코로나로 인해 불확실한 삶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 1월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이제 딱 1년이 지났고 2월 14일까지 록다운이 다시 연장이 되었다. 열심히 백신도 만들어 맞고 있고 치료제도 만들려고 하지만 여전히 이 지리한 싸움을 올해도 계속해 나갈 것 같다. 코로나로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고 더욱이 불확실한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혜롭게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든” 솔로몬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지혜를 이 한 주간 마음에 품고 살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담대한 결단과 겸손과 인내와 소망 가운데 지혜로운 삶을 만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