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건축사에 남은 위대한 건축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상적인 건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건축물들이 신비한 기분을 잃지 않는 것은 그것들을 둘러싼 이야기와 그곳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톤헨지를 고대에 우주적 힘을 숭배하는 이상한 종교의식이 열린 곳으로 생각한다. 또 몽생미셸의 요새 수도원은 천사장 미카엘의 기적적인 발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멕시코의 폐허도시 테오티우아칸에서 신들이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이처럼 신화와 역사적 사실들이 매혹적으로 어우러져 위대한 영지(靈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영지에서 성령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천 명의 순례객들은 오늘도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메카 순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카바의 성소에 넋을 잃는다. 기독교도라면 ‘말씀이 육신이 된’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교회에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세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들이 있다. 올림피아의 고대 그리스 스타디움에서는 4년마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를 기리는 경기가 열렸다. 암벽요새인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다. 아헨의 팔라틴 예배당에서는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고,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의 위풍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모든 건축물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혹시킨다.
지나가버린 시대의 메아리를 불러오는 동시에 과거를 추적해 나가려 한다.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학적 변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양식의 마천루나 몽상적인 설계로 지어진 두 개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없다면 지금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이 ‘역사의 재료’를 제공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새로운 대형 건축 프로젝트가 발표될 때마다 거센 논쟁이 일어날까?
무엇보다 건축과 연관된 문화·역사적 세부 내용들을 깊이 있게 얘기하려 한다. 건축물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건축물을 의뢰한 사람, 우연히 발견한 사람, 그것을 비평하거나 찬미하여 그것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얘기하려 한다.
이 여정은 5,000년 인류 역사와 모든 대륙을 포괄할 것이다. 19세기의 영국 작가인 리 헌트의 말이 진실로 다가가기를 바란다.
“한 장소와 흥미롭고 재미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잇는 기술만큼 큰 즐거움은 없다. 이 기술을 잘 익힐수록 더 많은 지식을 얻을 것은 확실하다.”
돌이 된 춤꾼들
스톤헨지의 수수께끼
영국 | B.C. 3100년 ~ B.C. 1100년 사이의 3기에 걸쳐 만들어짐
“딴 세계에서 온 환영인 양 우리 앞에 서 있는 알 수 없는 이들의 작품을 보고 우리는 이 황량한 황무지에서 고요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요한나 쇼펜하우어(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영국 여행에서 돌아와서, 1858년
마법사, 의사, 점성가라고 알려진 켈트족의 사제인 드루이드들은 신비의 베일에 덮여 있다.
19세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스톤헨지(Stone henge)라는 이상야릇한 환상열석(環狀列石)을 세웠다고 믿었다. 멀리서 보면 스톤헨지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거인처럼 평원을 압도하고 있다. B.C. 100년경에 ‘이교도 영국에 바치는 기념물’을 만들기 위해 드루이드들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스톤헨지가 켈트족의 사제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신전이 아니라 삼림개척지에서 의식을 열었으며, 스톤헨지(공중에 걸쳐 있는 돌을 뜻하는 고대 단어)의 기둥은 켈트족시대 이전부터 이미 수천 년 동안 남부 잉글랜드의 평원에서 비바람을 맞아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식을 치르는 곳, 기가 모이는 신화적인 중심점을 누가 만들었을까? B.C. 3100년경 이 신비로운 땅에 최초의 구조물을 세운 이들은 아마 신석기시대의 선조일 것이다. 그들은 원형 도랑을 파고 둑을 쌓아올린 다음 그 안에 원형으로 구덩이를 파놓았는데, 그곳에서 재로 변한 뼈가 발견되었다. 그 뼈의 정체는 인간제물의 유해일까? 그들은 지하세계와 접촉하는 목적을 제대로 수행했을까? 아니면 스톤헨지는 묘지 곧, 내세로 통하는 문으로, 망자들을 기리는 원무(圓舞)의식이 그곳에서 열렸을까?
B.C. 2000년경인 건축 2기에 스톤헨지에 세워진 원형 선돌[立石]들 또한 신비에 가려져 있다. 이곳은 원시적인 돌 숭배지였을까? 그중 한 기둥에 그려진 것과 같은 모신(母神)을 숭배했을까? 아니면 돌의 배치는 천문대 역할을 했을까? 그 원을 둘러싼 구덩이들은 태양과 달의 경로를 축소하여 재현해 놓았다. 또 환상열석은 천문학적 관측 사실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스톤헨지의 입구는 하지에 태양이 뜨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문학적 지식의 불가사의한 중심지로, 일식과 세상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성위(星位)를 연구하는 곳이었을까?
스톤헨지가 만들어진 시대의 사람들은 아일랜드와 유럽 대륙과의 금속무역과 농업을 통해 부를 쌓았다. 스톤헨지 근처에서 300개 이상의 선사시대 분묘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는 영국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다. 그 당시 솔즈베리 평원의 중심부에서는 청동도끼, 도끼창, 금 장신구 등의 교역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대한 원형 선돌들은 그 당시 지배계층의 권력과 부, 문화적 진보를 과시하기 위해 세워졌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량이 들었을 것이다. 돌의 일부는 바다와 강으로 운송해야 했고, 인부들은 25톤 가량 되는 기둥을 30개나 세워야 했다. 그리고 7톤 무게의 상인방(上引枋) 돌로 기둥을 이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서 생긴 원의 중심에는 45톤이나 되는 거대한 직립 돌 한 쌍 위에 육중한 상인방 돌을 덮은 거대한 삼석탑 다섯 개를 세웠다.
바깥쪽을 둘러 싼 돌기둥들은 안식일을 모독한 춤꾼들이 돌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100년 전의 사람들은 이 섬뜩한 전설에도 아랑곳없이 돌조각을 기념품으로 떼어가기도 했다.
스톤헨지는 한때 ‘이교도 영국에 바치는 기념물’로 여겨졌다.
이 환상열석은 신석기시대의 천문대였을까?
지구의 크기
쿠푸 왕 피라미드의 비밀
이집트 | B.C. 2551년~ B.C. 2528년
“피라미드에는 일꾼들이 무, 양파, 마늘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이집트 문자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총액은 은화 1,600탈렌트 정도였다. 그렇다면 철을 구하는 데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을까?”
- 고대 이집트를 여행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쿠푸 왕 피라미드의 건설??, B.C. 5세기
기자에 있는 세 개의 피라미드는 ‘죽음에 바치는 거대하게 치솟은 기념물’, ‘고인이 된 파라오들의 막강한 능보(稜堡)’,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영원의 집’이라고 불린다. 그중 쿠푸 왕 피라미드는 대(大)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이 피라미드의 면적은 5만 2,600평방미터가 넘고, 높이는 133.5미터에 달한다. 또 평균 2.75톤의 화강암 덩어리 230만 개 정도로 만들어졌다. 쿠푸 왕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유적이다.
내부의 좁은 통로와 복도를 따라가면 9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거대한 회랑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커다란 층계 하나가 연결 복도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이 거대한 건조물의 중심인 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피라미드의 중심축 위에 있는 화강암 석관에는 23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B.C. 2528년에 영면에 든 지혜로운 파라오 쿠푸가 서 있다. 고대 전설이나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보면 쿠푸 왕 피라미드에는 깨지지 않는 유리, 녹슬지 않는 무쇠칼 등 보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쿠푸 왕은 자신의 모든 재산과 함께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휑뎅그렁한 지하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바위를 깎아 만든 지하 동굴방을 비롯하여 수많은 방들의 벽과 천장에는 행성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프레스코와 보물들은 사라졌고 석관은 비어 있는데, 이는 도굴꾼들이 방들을 파헤쳤기 때문이다 B.C. 820년경까지도 쿠푸 왕의 시체는 토막 난 상태로 유럽 약제사들에게 조금씩 팔렸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미라를 빻은 가루가 약제로 흔히 쓰였다.
모든 사람들이 쿠푸 왕 피라미드를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랍에서는 그곳을 저술과 서체의 신이자 과학의 수호신인 토트의 집이라고 생각했으며, 십자군은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곡물창고로 여겼다. 또한 재난을 피하는 곳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또 사람들은 지구의 원주와 비중(比重), 행성의 궤도주기, 여성의 생리주기 등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피라미드의 치수에는 비밀스런 전조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영국의 학자 존 테일러는 쿠푸 왕 피라미드가 지구의 치수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세워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토대로 스코틀랜드의 왕실 천문학자이자 에든버러 대학의 천문학 교수였던 찰스 피아치 스미스는 영어의 ‘인치(inch)’는 노아가 방주(方舟)를, 모세가 성막(聖幕)을 지으면서 사용한 ‘피라미드 인치’라는 도량법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대 과학에서는 쿠푸 왕 피라미드를 이상적으로 보지 않는다. 엄청난 부피와 햇빛을 받아 빛나는 석회암 외피를 보면 이집트의 태양신이자 창조신인 아톤을 상징하는 건조물 혹은 원시시대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 매년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방책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쿠푸 왕 피라미드를 지어 올린 2만~2만 5,000명의 남자들은 3개월 계약으로 고용되었던 것 같다.
쿠푸 왕 피라미드 거대한 화랑
델로스 동맹국의 세금으로 지어진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그리스 | B.C. 448년~B.C. 443년 |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
“아크로폴리스만큼 많은 비판을 받은 건축계획도 없다. 그곳은 아테네에 불명예와 치욕을 안겼기 때문이다. 그 축조를 위해 세금을 낸 다른 그리스도시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이 낸 세금은 아테네를 금빛으로 칠하고 신전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허영 많은 여자처럼 보석으로 치장하는 데 쓰일 것이 아니라 전쟁비용으로 쓰여야 했다.”
-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A.D. 105~ A.D. 115년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이 유적은 연기와 잿더미속에 있었다. B.C. 480년 8월, 페르시아는 다시 아테네에 쳐들어가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그러나 얼마 후 아테네의 주도로 뭉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를 두 번이나 전패시켰고, 모든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앞으로 닥칠지 모를 공격을 대비하여 상호보호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해군 동맹인 ‘델로스 동맹’이다. 동맹국의 시민들이 과중한 세금을 내는 대가로, 아테네는 군사적 위협을 당하는 모든 동맹국을 보호해주기로 약속했다.
동맹 내에서 아테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테네의 유지들은 인상적인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가 한때 아테네의 왕들이 머물렀던 언덕 요새 아크로폴리스에 남긴 폐허 위에 건축물을 세울 계획이었다. 그곳은 아득한 옛날부터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된 곳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 계획이 진실한 신앙심이 아니라 세속적인 명예라는 불경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반대자들은 동맹국들의 반응도 우려했다.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해군력 증강이 아니라 아테네의 자기 숭배를 위한 거대한 기념물을 짓는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발명가’이자 고국인 아테네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정치 사상가 페리클레스는 “돈은 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하며 반대자들을 달랬다. 결국 동맹을 위해 징수된 돈은 한 푼도 그 계획에 쓰이지 않았지만 페리클레스의 주장은 회의론자들을 설득시킨 듯하다.
선거권을 가진 시민들 대다수는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질 건축물이 그 무엇보다도 더 장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힘을 상징할 만큼 훌륭하고, 전시대의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줄 건축물 ‘파르테논’이 40년 만에 탄생했다. 아크로폴리스의 최고 명물이 된 파르테논의 독특한 균형과 위풍당당함을 보고 낭만주의 작가들은 ‘가장 완벽한 고대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한때 그곳은 화려한 프레스코, 조각, 청동 화환, 황금빛 방패 등으로 밝게 빛났다.
파르테논은 여신 아테나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딸 아테나는 사랑하는 백성들을 돕는 일에 인생을 바치고 영원히 순결(그리스어로 ‘파르테노스’)을 지켰다. 그러한 아테나의 행적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 아테네 시민들은 파르테논의 중앙 성상 안치소에 금과 상아로 만든 1킬로미터 높이의 아테나 여신상을 세워놓았다. 가까이서 보면 그 위압감에 위축될 정도였다.
그러나 파르테논은 신전이 아니라 국고였다. 아테네 시의 재산뿐만 아니라 델로스 동맹의 자금도 그곳에 보관되었다. 동맹 사람들은 여신상을 긴박한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금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테나 여신상은 A.D. 500년경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불태워졌다. 가장 중요한 재산을 빼앗긴 파르테논은 그후 참배의 장소가 되어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이는 파르테논을 세운 이들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신화적 건설자인 에렉테우스를 기념하여 세운 에렉테움이 오스만 제국의 하렘으로 사용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아테네의 재산과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파르테논
이제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장엄한’ 전성기 때의 아크로폴리스, 레온 폰 클렌체의 유화, 1846년
그놈을 사자에게 던져버려라!
콜로세움의 검투사들
이탈리아 로마 | 베스파시아노 황제의 치세 기간인 A.D. 72년에 착공, A.D. 80년 티투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개장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찢어진 사자는 계속 살아 있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몸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마르티알리스, ??극적인 것에 대하여??, A.D. 80년 ?콜로세움의 공식적인 개장행사에?
희극작가들도 미소를 잃기도 한다. B.C. 160년, 로마의 작가 테렌티우스의 극 한 편을 공연하던 중 갑작스레 소동이 일어나 극이 중단되었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가 검투사(글라디아토르) 시합이 곧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퍼뜨린 것이었다. 검투 경기는 항상 패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시합으로, 처음에는 칼(라틴어로 ‘글라디’)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창, 그물 혹은 뜨겁게 달군 쇠막대도 무기로 등장했다. 통치자들이 백성의 눈에 들기 위해 준비한 이러한 구경거리가 시작한다고 하면 로마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콜로세움으로 달려갔다. 살인의 유흥은 상품이 되었고, 굶주림과 채찍질로 잔뜩 사나워진 곰, 사자, 호랑이가 검투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원래 죽은 자에 대한 숭배의식의 일부였던 검투사들은 B.C. 264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온다. 데시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페라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들은 세 쌍의 검투사들에게 시합을 시켰다.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면 망자도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종교적 관습은 행정장관이 개최하는 대중오락의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그 주인공들인 사형수들의 최종 심판일은 사람들에게 흥겨운 오락거리가 되었다.
희생자들은 로마제국 외지에서 끌려온 인질범, 노예, 죄인, 기독교인 등이었다.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에 선 이들은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탈리스 황제는 싫증난 젊은 애인을 떠돌이 검투사들의 감시인으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투기장에서 여러 번 승리한 자들은 사면뿐만 아니라 약간은 꺼림칙한 명예까지 얻었다. 그래서 더는 잃을 것 없는 도박꾼들, 모험가들, 부랑자들이 검투사로 자원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인상적인 투기장(鬪技場) 콜로세움(Colosseum)은 검투사와 야수간의 싸움이 최초로 벌어진 곳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4층짜리 타원형 건조물은 8만 7,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이 ‘세계적인 기적’에 경탄했다. 46미터 넘는 외벽이 우뚝 솟아 있는 콜로세움은 그후에 지어지는 관전 경기장들의 전형이 되었다. 1층 발코니는 황제와 조신들, 2층 발코니는 귀족들, 3층과 4층은 시민들의 자리였다. 수병들은 거대한 범포 차양을 맨 위층 회랑에 매달고, 240개의 기둥으로 그것을 받쳤다. 내부에는 계단과 입구가 체계적으로 설계되어 있어 관객들은 관람석으로 바로 들어갔다가 시합이 끝나면 신속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투기장은 검투사 300쌍이 동시에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광대했다. 지하에는 무기와 기타 비품들을 보관하는 저장실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데 그곳에는 야생 동물들을 가둔 우리 와 검투사들을 가둔 황제의 감옥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네로 황제의 거상(colossus)이 근처에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이곳의 이름을 ‘콜로세움’이라 불렀다. 콜로세움은 100일 동안의 축하의식과 함께 개장되었고, 그 기간 동안 투기장은 인간과 짐승들의 피로 흠뻑 젖었다. 의식의 최고 장관은 해전(海戰)의 연출이었다. 먼저 투기장을 물로 채운 다음 물속에서도 뭍에서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된 말과 소들을 물속으로 몰아넣었다. 마지막에는 검투사들이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접전을 벌이다가 최후의 한 사람이 쓰러지고 나면 황홀경에 빠진 군중들은 환호를 보냈다.
옛날의 그 광적인 분위기는 이제 평화로운 묵상의 기운으로 바뀌었다. 들 고양이들만이 따뜻한 햇살 아래 몸을 쭉 펴고 엎드려 있고, 관광객들은 로마 콜로세움의 옛터에 경탄을 보낸다.
수천 명의 목숨을 재물로 바친 투기장인 로마 콜로세움의 잔해는 재건되지 않았다.
계단과 입구들의 정교한 설계 덕분에 투기장의 출입이 용이했다.
로마의 기적
행성신들의 신전, 판테온
로마 이탈리아 | A.D. 118~128년
“로마의 모든 신전 중에 현재 ‘로툰다’라고 부르는 판테온만큼 훌륭한 것은 없다. 그 건축물은 너무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세워졌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 이름이 판테온인 것은 주피터는 물론이고 다른 여러 신들을 모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로툰다라고 불렀는데, 몇몇 사람들이 믿듯이 그것이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 안드레아 팔라디오, ??판테온에 대하여??, 1570년
완벽한 비율. 판테온의 구형 내부 공간의 높이는 원의 직경과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요부였다. 처음에는 카이사르, 그 다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같은 로마공화국의 권력자들을 새끼손가락 하나로 휘두른 이 이집트 여왕은 폼 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녀를 위해 열린 연회에서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포도주 한잔과 함께 값비싼 진주 반 개를 삼켰다. 그러한 허영심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연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처럼 클레오파트라도 독사의 치명적인 독으로 자살하면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진주를 삼킨 그녀의 의미심장한 행위는 로마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중세의 감정가로 25만 두카트 금화의 가치가 있는 진주의 나머지 반은 금세공인에게 보내져 판테온의 보물인 신상의 귀 장식물로 들어갔다.
고대 로마의 기념물 중 가장 잘 보존된 이 건축물과 클레오파트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악티움 근처의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참하게 패배시켜 두 사람을 자살로 내몰았다. 승리감에 도취된 아그리파는 자신과 장인이자 로마제국의 거룩한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를 비롯한 가족들을 기리는 판테온을 짓게 했다.
판테온(Pantheon)이라는 이름은 ‘만신전(萬神殿)’을 뜻하지만, 실제로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것 같지는 않다. 일곱 행성신, 즉 태양신 솔, 메르쿠리우스(수성), 베누스(금성), 유피테르(목성), 사투르누스(토성), 넵투누스(해왕성) 등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두 번이나 화재로 무너졌다가 B.C. 2세기에 지금의 형태로 세워진 판테온에는 일곱 개의 벽감(壁龕)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각각의 행성신이 한 자리씩 차지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 건축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시멘트 돔의 이중 셸 구조(지붕에 사용하는 구조재로, 곡면판을 외각에 사용한 구조-옮긴이) 안쪽에는 푸른 바탕에 황금빛 별들이 칠해져 있다.
우주의 조화에 대한 고대의 시각은 판테온의 건축을 통해 돌로 표현되어 있다. 원형 내부 공간의 높이는 원의 직경과 같고, 돔을 받치는 벽이 높이와 돔의 반경은 정확히 직경의 반이다. 판테온은 완벽한 비율 때문에 우주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긴 세월 동안 예술가와 여행가들을 감동시켜온 그 건축이 고대부터 일찌감치 ‘로마의 기적’으로 칭송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돔의 한가운데에 난 구멍을 통해 위에서만 햇빛이 들어오는 구형 내부는 로마시대의 중요한 국가적 행위가 벌어지는 무대였다. 황제의 왕좌는 빛이 들어오는 바로 그곳에 있는데 이는 황제의 적법성과 권력의 신성한 근원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기독교도인 황제들은 로마의 신 숭배를 금지하고 판테온을 폐쇄시켰다. 그러나 그 신전은 살아남아 기독교의 참배 장소로 바뀌었다. 신상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순교자들의 것으로 추측되는 해골들이 모셔졌으며, 그 건축물은 ‘성모마리아와 순교 성자들의 교회’로 개명되었다.
황제, 순교자 그리고 화가 라파엘의 마지막 안식처
판테온은 가장 잘 보존된 고대 로마의 기념물로, 거의 2,000년 동안 본래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여기도 물, 저기도 물!
카라칼라 목욕탕
이탈리아 로마 | A.D. 206~216년
“나는 대중목욕탕의 근처에서 지내고 있네.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요란한 소음에 시달려야 할지 상상해보게. 말싸움하는 젊은이들, 목욕탕에서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 누군가가 욕조 속으로 뛰어들면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튀는 물결, 소매치기 가 잡혔을 때 나는 야유소리, 겨드랑이 털을 뽑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러고 나서 어떤 사람이 공을 튀기며 횟수를 세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네. 그럴 때면 내 귀를 저주하지.”
-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A.D. 62년
이바노프가 재건한 황제의 목욕탕
고대 로마인들은 목욕을 필요악으로 여겼다. 사실 A.D. 200년까지만 해도 몸에 물이 닿으면 ‘몸의 원기를 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둔 대(大)스키피오는 9일에 한 번씩만 씻었다. 그러나 캄파니아에서 온천물을 끌어 쓰는 사설 목욕탕이 최초로 문을 열면서 목욕은 일반 대중의 유흥으로 발전했다.
수완 좋은 사업가들은 요금을 파격적으로 낮추어 대중에게 온수탕과 증기탕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여가사업을 번창시켰다. 목욕탕 주위에는 매음굴과 선술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몸을 깨끗이 한 사람들에게 환락을 제공했고, 공학자들은 목욕문화에 영원히 기릴 대변혁을 일으켰다. 석조물의 공동(空洞)을 통해 열기를 전달하는 마루 밑 난방장치를 발명한 것이다. 이로써 목욕탕의 커다란 욕조, 바닥, 벽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목욕탕은 더욱 호사스러워지고 안락해졌으며 기술적으로 점점 더 정교해졌다. 로마의 몇몇 목욕시설들은 현대적인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직접 건축 허가장을 내린 목욕탕만이 고객을 끌어들였다. 그 목욕탕들의 잔해만 봐도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라칼라 황제가 비아 아피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마 남부에 지은 목욕탕은 가장 광대한 목욕시설이다. 웅장하고 인상적인 건축물의 잔해는 10만 9,267평방미터에 이르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프레스코, 모자이크, 이국적인 식물들, 정교한 조각품 등으로 장식된 광대한 홀의 지붕을 육중한 기둥과 원주들이 받치고 있었다. 물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향신료를 탄 포도주와 향수를 물에 섞었다.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호사스러움은 목욕탕의 건축을 명한 사람의 아량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냉혹한 독재자 카라칼라는 위대한 박애주의자로 기억되길 원했기 때문에 최고의 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을 호화로운 환경에서 신민들이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거대한 은제 꼭지에서 뿜어져 나온 온수는 대리석 계단을 타고 내려와 채색 타일 위로 흘렀다.
물 소비량은 엄청났다. 카라칼라의 목욕탕 아래에 있는 광실(廣室)들은 다른 황제들이 지은 목욕탕보다 두 배 더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돔 천장, 반돔 천장, 반원형 천장, 궁륭 천장 아래에서 사람들이 목욕하고, 땀 흘리고, 휴식만 취한 것이 아니다.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영장과 사우나 외에도 스포츠 안마, 미용강의와 회의를 위한 시설, 심지어는 도서관과 상점까지 있었다.
누구나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다. 목욕탕은 대중의 건강과 교육을 장려하는 시설로, 로마의 공중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황제와 거지, 연인들과 중매쟁이, 과자장수와 소매치기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욕탕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리석 변기가 있었던 그 시절에도 목욕탕 이용객들의 교양없는 행동을 막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티투스 황제 때 지어진 목욕탕의 잔해에는 “이 욕탕 안에서 소변을 보거나 배변하는 자는 열두 신들과 디아나 그리고 주피터의 천벌을 받으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바노프가 재건한 황제의 목욕탕
비올레 르 뒤크가 복구한 전성기 때의 목욕탕
공중생활의 중심지였던 카라칼라 목욕탕은 마사지실, 도서관, 강의실, 상점 등을 갖추고 있었다.
신의 지혜에 바치는 거룩한 장소
하기아 소피아
터키 이스탄불 | A.D. 532~537년 |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와 트랄레스의 안테마우스
“칼부림 소리에도, 남과 서에서의 승전에도 심지어는 피로 뒤범벅된 패배한 폭군들의 전리품에도 나는 찬가를 부르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전혀! 나는 영광의 광휘에 휩싸여 전쟁의 모든 위업과 모든 궁전들을 무색케 하는 경이로운 신전 하기아 소피아에게 찬가를 바치려 한다.”
- 유스티니아우스 궁정의 의전관 파울루스, ??하기아 소피아를 찬양하며??, A.D. 537년
위기가 닥쳤다. 제국의 전역에서 비잔틴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높아지고 있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들을 재건하고 제국의 국경을 요새화하고 급수를 개선하느라 국고가 줄어들었다. 엄격한 긴축 재정과 높은 세금만이 국고를 채울 수 있지만 이러한 조치로 인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새로 책정된 세금 때문에 몰락한 소지주들과 실직한 공무원들, 이제는 하인들을 부릴 수 없게 된 명망가들의 시종들이 황제에게 타당한 대우를 요구하며 콘스탄티노플로 몰려오면서 수도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에게 질 나쁜 식량이 예전보다 더 적게 보급되었다.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결국 A.D. 532년에 니카 반란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노플의 반이 화염에 휩싸인 후 제국군이 역공을 펼쳐 히포드름에서 3만명의 반란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시체를 다 매장하고 불씨를 끄기도 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폭도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D. 360년에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즉 성스러운 예지(叡智)에게 봉헌하여 지은 대성당을 파괴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폭도들을 제압하고 거둔 승리를 축하하고, 폭동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거대한 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다.
조물주에게 바쳐진 다른 모든 교회를 능가하고 그 건축가의 영광을 전세계 국가에 영원히 되새겨줄 이 예배당에서 하늘과 땅이 결합할 것이었다. 건축가들은 황제의 어려운 주문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완공된 하기아 소피아는 세계 제일의 웅장한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의 52미터까지 솟아오른 중앙 돔이다. 반돔들이 옆에서 받치고 있는 대략 30미터 직경의 돔은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영향을 보여주는 종교 건축물들의 주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건축물도 하나의 지붕 아래 그토록 광대한 공간을 품고 있지 않다.
A.D. 537년 12월 27일, 헌당식에서 황제는 “내게 그러한 위업을 맡겨준 가장 높으신 분께 영광 있으라”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 최초의 신전을 세운 자를 떠올리며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말했다.
헌당식을 치른 후 400명의 성직자들이 하기아 소피아를 섬겼다. 그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심장으로 그리고 교황 다음으로 가장 높은 기독교 지도자인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의 대주교좌 성당으로 여겨졌다. 그 돔 아래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즉위식과 모든 중요한 국가의식이 열렸다. 1204년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 때 겁에 질린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돔 아래로 몸을 숨겼다. 서구의 침입자들은 쫓아냈지만 오스만 투르크족은 막지 못했다. 그들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미나레트(첨탑)를 네 개 더하여 모스크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그 성당은 여전히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이후에 지어진 이슬람 건물들은 예전에 기독교 교회였던 그 건축물의 설계를 따랐다.
이스탄불(이전의 콘스탄티노플)에 지어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웅장한 교회, 하기아 소피아
이제 찬송가는 울려 퍼지지 않는다. 1934년부터 하기아 소피아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기독교의 시작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
이스라엘 | A.D. 6세기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요셉도 갈리리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태어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 ?루가의 복음서? 2장 4~7절, A.D. 70년
기적의 밤이었다. 사해의 엔게디에서는 포도나무들이 한창 때를 지나 꽃을 피우고 있었고 화려한 저잣거리가 있는 중동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 근처의 들판을 지혜의 별이 비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구간에 모여 있는 이들 옆에 소와 나귀가 서서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에게 참배했다.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많은 전설 가운데 예수의 형제와 누이들이 요셉과 목자들과 함께 그의 탄생을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수는 요셉이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네 명의 아들(야곱, 요시야, 유다, 시몬)과 두 명의 딸(리시아와 리디아)을 형제자매로 두었을 것이다. 성서 외전의 한 이야기에 따르면 제벨과 살로메라는 두 산파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제벨은 마리아가 처녀라고 믿었지만 살로메는 이를 의심하여 증거를 원했다. 그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그녀의 손은 시들어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천사가 나타나 그녀에게 아기를 만지도록 명령했고 아기를 쓰다듬는 순간 그녀의 손은 나았기 때문이다. 이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이었다.
그 마구간은 사실 동굴이었을 것이다. 베들레헴 주위의 무른 석회암 절벽에는 사람이 만든 동굴들이 많이 있다. A.D. 3세기에 팔레스타인을 두루 여행하였으며 극적인 자기 거세로 유명한 초기 기독교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동굴과 그가 배내옷을 입고 누워 있던 구유가 있다”라고 썼다. 오리게네스가 살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 동굴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밀실 같은 구조물이 되어 있는데 바닥의 은빛 별 하나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그곳이 예수의 탄생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오랑식(五廊式)의 예수 탄생 교회는 이 동굴과 죄 없는 자들의 동굴, 구유의 동굴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그가 번역 한 불가타 성서는 가톨릭 교회가 유일하게 공인한 번역본이다)의 서재 위에 세워졌다.
여러 차례의 보수와 증축에도 불구하고 예수탄생 교회는 거의 1,400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기독교도들이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그 웅대한 건축물도 영광이 시절이 있었다. 십자군 운동 동안 예루살렘의 왕들은 그 교회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후에 그 지역이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가자 교회는 방치되고 잦은 지진으로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정교회 신자들과 가톨릭 교도들은 그 교회를 같이 쓰는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그러한 불화는 1810년에 두 신자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고고학적 연구에는 차질이 없었다.
몇 년 전, 교회 밑에서 더 많은 동굴들이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은 그리스도의 시대에 양치기들과 동물들이 동굴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기 파편들, 고대의 화롯불에서 나온 시커멓게 탄 돌들, 철기시대의 연장들, 유해 등을 발견했다. 현재 동물들은 교회나 동굴에 들어갈 수 없다. 16세기에 입구를 122센티미터 정도로 낮추어 낙타나 당나귀들이 그 성소에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
낙타와 나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16세기에 입구를 낮춘 예수 탄생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고 하는 동굴
황금도시의 신장
프라하의 흐라트차니
체코 공화국 | A.D. 9세기 말에 시작
“그 명성이 천상까지 닿을 거대한 요새가 보여요. 블타바 강의 물결이 감싸고 도는 숲의 한가운데에 서 있네요. 돌고래 모양의 산등성이가 광대한 암석 지대에서 갈라져 나와 강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어요. 그곳에서 나무로 상인방(上引枋), 우리말로 ‘프로흐’를 만들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될 거예요. 위대한 군주들도 이 상인방에 머리를 숙여야 하니, 그곳에 지을 요새에서 두 그루의 황금 올리브 나무가 일곱 번째 천국까지 자라 예시와 기적으로 세상을 비출 거예요.”
- 리부셰의 예언, 11세기
떨어지기에는 위험한 거리였다. 보헤미아 총독 관저는 프라하 요새의 외호(外濠)에서 13.7미터 정도 위에 있었다. 그러나 목격자들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가의 총독인 야로슬라프 보리타 폰 마르티니츠와 빌헬름 슬라바타 폰 클룸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을 뿐 목숨은 부지했다”고 한다.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과 격심한 말싸움을 벌이다가 본의 아니게 비서관들과 함께 요새에서 곤두박질 친 그들은 거름더미 덕분에 목숨을 구했지만, 그 사건은 개신교 귀족에 대항한 합스부르크 가톨릭교도들의 혁명으로 해석되었다. 프라하의 창문 투척 사건은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프라하의 언덕 요새인 흐라트차니(Hrad?any)는 성인들과 성상 파괴자들, 황제들과 폭군들의 소재지로, 1,000년 역사 동안 원한이 피를 부른 비극이 수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요새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A.D. 9세기 말경에 블타바 강의 얕은 여울을 지키기 위해 지어졌을 목조 요새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방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A.D. 973년에는 대공뿐만 아니라 새로 창설된 프라하 주교 관구의 주교도 그곳을 관저로 사용했다. 지금도 요새 방벽 내부에 서있는 성당은 중앙 유럽에서 세속적이고 영적인 권력이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다.
흐라트차니는 14세기에 첫 황금시대를 맞았다.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는 프라하의 요새를 권력의 중심점이자 순례지로 확장시켰다. 성 비투스 성당은 국가의 수호 성인인 바츨라프의 참배지, 왕관 표장을 모시는 납골당, 궁정 교회로서 보헤미아의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프라하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 도시 중 한 곳이었다.
프라하가 그 정도 위치까지 오른 것은 루돌프 2세의 치세 동안이었다. 예술애호가이자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576년 프라하에 자신의 관저를 짓고 유럽 전역에서 찾아온 유명인사들을 흐라트차니(폐위되고 나서는 그의 감옥이 된다)에서 맞았다. 그들 중에는 화가 주세페아르침볼도,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 그리고 루돌프 2세에게 사진기의 경이로움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랍비 예후다 뢰브 벤 베잘렐 등이 있었다. 동시대를 살던 어떤 이는 그 광경을 보고 “위대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프라하의 흐라트차니로 찾아와, 비범하고 특별하며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황제의 소장품들을 보았다”라고 썼다.
흐라트차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블라디슬라프 홀에서는 사교계 모임이 자주 열렸다. 그곳은 대관식, 궁정 축연, 마상 창시합 경기를 열 수 있을 만큼 웅대하여 루돌프 2세 치세 동안 페르시아의 양탄자 제조업자들, 네덜란드의 도공들, 뉘른베르크의 병 기공들이 자신의 상품들을 갖고 와 박람회를 열기도 했다.
루돌프 2세의 연금술사들이 금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 했던 흐라트차니의 북쪽 측면에 있는 황금소로(黃金小路)는 프란츠 카프카가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자신의 고향 프라하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가 프라하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이 작은 어머니는 맹수의 발톱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두 곳에 불을 질러야 할 것이다. 그중 한 곳이 흐라트차니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글에도 나타난다.
프라하의 카를대교에서 바라본 흐라트차니
흐라트차니의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마상시합과 전시회 등이 열린 블라디슬라프 홀
프란츠 카프카는 흐라트차니의 북벽을 따라 이어진 황금소로 살면서 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