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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자(魔太子) 전(傳)
마태자(魔太子)가 어느 왕조 어느시대 왕자인지는 확실히 알수 없다. 다만 몇몇 문사(文士)의 잡저(雜著)에 그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또는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민담도 다소 있어 이중 믿을만한 것을 모아 기록해둔다.
선조(先祖 : 여기서는 그냥 선대(先代) 임금을 뜻한다)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남은 규(圭 )요. 차남은 옥(玉)이요, 삼남은 병(炳)이라 했다. 황후 구씨(具氏)가 첫 아들을 낳으매 난산으로 고생 끝에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이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일곱 살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밥을 자기손으로 먹지 못했다. 또한 종종 아무런 이유나 까닭없이 혼자 경회루에 나와 슬피우니 황후가 그 모습을 보고 ‘네가 이렇게 까닭없이 아무 때나 우니 선대의 대업(大業)을 이어받기 틀린 것 같구나. 나중에 바보 김숙자에게나 장가보내야겠다.’하며 탄식하였다. 이때 도성 근처에 사는 한 여인이 기이한 여자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얼굴이 기형에 자라서는 나이 열다섯살이 되도록 말과 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하고 턱과 목이 기형적으로 돌아있는 아이가 있어 어미와 함께 걸식을 하며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이 아이를 ‘바부 김숙자’라고 불렀다. 규(圭)가 이 말을 듣고 더 화가나서 처소로 돌아가 옷과 이불을 찢고 궁녀들을 때렸다.
14세가 됨에 황제가 ‘여러가지로 모자람이 있으나 이제부터라도 본격적으로 후계수업을 시키고자 한다’며 순행(巡行)길에 따르게 했다. 일주일만에 경산(慶山)고을에 다다라 황제가 몸소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민심을 살피나 규는 지루한지 몰래 그곳을 빠져나와 고을의 서씨녀(徐氏女)를 겁탈하였다. 나중에 황제가 보고를 듣고 놀라 태자를 크게 꾸짖었으나 다만 처벌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원망하며 말하기를 ‘아무리 일국의 태자고 왕자라 하나 앞날이 창창한 처자의 길을 망쳐놓았는데 어찌 보고만 있단 말인가 ? 아무래도 성군(聖君)이라 할수 없도다.’ 하였다
OO년 7월. 무더운 여름에 황제가 혼자 침수들고 있는데 괴한이 들이닥쳤다. 곧바로 내금위가 들어와서 괴한을 체포하였는데 경산고을의 홍진수(洪眞受)란 청년이었다. 포청에서 국문하며 죄를 물으니 ‘일전에 태자 규가 범한 서씨녀는 나와 한동네에서 동기나 다름없이 자랐는데 태자가 범하여 이후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소이다. 헌데도 임금은 백성의 아픔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으니 몽매한 폭군을 벌하고자 칼을 들었다’ 하였다. 신료들이 대궐을 범한 홍진수를 처벌할 것을 권했으나 황제가 듣지않고 진수에게 적당한 금과은을 내려 잘 타일러 고향으로 돌라보냈다.
얼마후 황제가 다시 부산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도 규를 데리고 갔다. 이번에도 황제가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민심을 살피는데 규가 몰래 빠져나가 고을 여인을 건드렸는데 이번엔 두명이었다. 한명은 성이 봉씨(奉氏)였고 또 한명은 유씨(兪氏)였다. 황제가 나중에 듣고 크게 놀라 피해입은 여성 가족에게 크게 사죄하고 금은을 내려 위로했다. 그리고 ‘이 아이가 계속 이러다간 나중에 전국(全國) 12주(州)의 여인을 모두 건드리겠구나 하고 순행길에 태자와 동행하는 것을 중단하였다.
이후 태학의 사예교수(師禮敎授) 송진과 엄준을 물러 규에게 예절과 염치를 가르치게 했다. 헌데 이때 송진은 슬하에 자녀가 없이 부모없는 어린고아 연진(蓮眞)이란 아이를 데려와 키웠다. 이때 나이 12세였는데 집에 돌봐줄 하인이 없어 부득이하게 태자를 가르칠 때 함께 데려와 태자를 교육하는 동안에 연진은 궁녀들과 어울리게 했다. 헌데 쉬는시간에 이번엔 규가 연진을 건드렀다. 황제가 더욱 노해 ’아무리 어리고 무례하기로 어찌 이런일을 저지를수가 있느냐 ? 너에게 범절과 예의를 가르칠때는 엄연히 스승이오 양녀도 엄연한 자녀일 때 스승의 자녀를 건드리는 패륜이 어느 천하에 있더란 말이냐 ?‘ 하고 태자를 엄히 꾸짖었다. 다만 송진이 사사로이 양녀를 궁에 데리고 출입한 것 역시 법도를 어긴일이라 이후 조정신료들이 황실의 허락없이 사사로이 가족을 궁에 들이는일을 금하였다.
규가 15세가 되니 태학으로 보내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였다. 규는 그곳에서 이인태,엄상원이란 이들과 어울렸는데 이들은 모두 귀족가문 자손이긴 하나 오래전에 비주류로 밀려난 한미한 집안의 자손들로 학문에는 관심없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규는 이들과 종종 사당패 공연을 즐겼는데 이때 완녀(婉女)라는 여인이 있어 요염한 춤과 노래로 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다. 하루는 규가 어울리는 이들과 공연을 보러갔다 완녀의 공연도중 무대로 뛰쳐들어 그녀를 안았다. 그런일이 있은지 얼마지나지 않아 이번엔 옥녀(玉女)라는 소리꾼이 타령 공연을 하는데 또다시 뛰어들어 배우를 안았다. 만약 일반백성이 이런일을 벌였다면 사당패에서도 관아에 고변을 해 엄중처벌을 요구할 일이었으나 태자의 신분을 고려 황실로부터 적절한 손해배상금만 받고 일을 마무리했다.
황제가 규가 거듭 여인을 범하는 사고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중신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했다. 어떤 재상이 말하기를 ’옛부터 적장손 계승이 원칙이나 장남이 문제가 많으면 다른 왕자중에 대안을 구한다‘하였으니 이 법도를 고려하소서 하였다. 다른 계파의 중신이 반대하며 ’아직 태자책봉도 되기전이요 혼사도 치르기 전이니 좀 더 두고보도록 합시다‘ 하여 일단 후자의 안을 따르기로 하였다. 다만 규에겐 근신의 필요가 있다하여 금강산 주지에게 은밀히 서찰을 보낸뒤 규를 그곳으로 보내 1년간 근신케 하였다.
규가 금강산 사찰에서 이번엔 비구니를 범해 주지가 ’더는 견딜수가 없소이다‘ 하며 황제께 상소를 올렸다. 황제가 격노하여 바로 규를 소환하여 몸소 국문하며 말했다. ’아무리 사내가 계집을 탐하는게 천지자연 순리이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네 어찌 무도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이럴수가 있느냐 ?‘ 국문을 마친뒤 태자를 밤에 은밀히 불려 몇가지 고사를 일러주었다. 하나는 나이들어 계집을 탐한 졸부(猝富)가 모함에 빠진 일이요, 또 하나는 고대의 어떤 제왕이 여색(女色)을 너무 탐하다 급기야 왕위에서 쫒겨난 일이고 또 하나는 계집을 너무밝힌 사내가 늙기도전에 병이들어 일찍 죽은일이었다. 황제가 태자를 엄히 꾸짖으며 ’바로 너처럼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다간 훗날 어찌되는지를 일러주기 위한 고사니라. 앞으로 명심하렸다. 엄히 꾸짖었으나 규는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이후에도 태자가 거듭 여자문제로 사고를치자 급기아 조정의 한 파벌에서 후계문제를 달리 생각할 대안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황제가 본성이 여색을 밝히는 성질은 아닌지라 황후 구씨 외에는 다만 지역연대를 위해 불가피하게 혼인동맹을 맺은 ‘승빈(承嬪) 염씨(廉氏)’와 ‘영빈(永嬪) 진씨(陳氏)’ 두명의 후궁만이 있을뿐이었다. 염씨는 딸만 둘을 낳았고 진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어려서 일찍 죽는바람에 이때엔 실의에 빠져 다만 술로 세월을 보낼뿐이었다. 일이 이와같자 다만 정비의 차남 옥과 삼남 병의 눈과 귀만 번득일 뿐이었다.
재상 안광일은 집안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운 명문 가문이었고 광일 역시 이때 정승 벼슬을 하고 있었다. 도성의 유명한 기방인 ‘홍화원(紅花院)’을 오랫동안 후원해왔는데 원(院)에서 보답으로 이 무렵 기방 최고 미녀였단 하영(何英)을 첩실로 바쳤다. 헌데 규가 소문을 듣고 한밤에 몰래 재상집에 침입 하영을 범하려다 하인들에게 잡혔다. 재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상(임금)께 고하였다. ‘신의 가문이 일찍이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워 죄지은일 없고, 신 또한 비록 부족하오나 나라에 최선의 보탬이 되고자 진력을 다하고 있는데 국본(國本)의 무도(無道)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를수 있나이까 ? 원컨대 폐하께선 부디 다른 대안(代案)을 세우소서’ 하였다. 황제가 광일을 겨우겨우 달래보내고 태자에 대해서도 ‘이 사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일이 아니다’ 하며 몸소 규를 옥에 가두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죄의 글을 올리기전까지는 석방치 않겠노라 하였다. 태자는 한달이 지나도록 반성의 글을 올리지 않았다.
황후 구씨와 진지하게 규의 태자책봉과 혼사문제를 의논하니 구씨가 말하기를 ‘이미 태자책봉의 문제는 중신들 대다수가 다른 대안을 원하고 있으니 천첩이 더 말할 여지가 없거니와, 혼사의 추진 역시 태자의 그동안 행동으로 볼떄 오히려 또다른 여인에게 상처만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렵나이다’ 하며 혼사 논의는 보류하고 다만 태자를 바로 훈육시킬 대안을 제안했다. 이때 황후의 모후 엄씨(嚴氏)에게 스무살 어린 이복동생의 아들로 노상도라는 이가 있었는데 성정이 반듯하고 언행에 어그러짐이 없어 칭송이 자자했다. ‘태자를 몇 달간 상도의 집에 살게 하여 바르게 훈육토록 하자’ 하니 황제가 약간 마땅치 않으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음에 황후의 제안에 응했다.
결국 태자가 상도의 집에 기거하게 되는데 황제가 깊은시름에 잠기는 것 못지않게 규도 한동안은 깊은 한숨이 떠나지 않았다. 이때 상도의 집에 만종(萬宗)이란 하인이 있었는데 비슷한 연배의 하녀 규리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허나 그 사이 규가 또 규리의 미색에 반해 범하려 하였다. 한밤중에 몰래 헛간에서 규리를 범하려 하니 만종이 보고 놀라서 돌로 태자의 머리를 찍으려 하였다. 허나 태자임을 알고는 황망히 놀라 달아나버렸다. 황제가 또 보고를 듣고 탄식하기를 ‘천한 종놈이 감히 일국의 왕자를 상해를 입힌 것은 분명 중죄이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또 이런 기막힌일이 어디있는가 ?’ 하며 격노 다시 태자를 소환하여 옥에 가두었고 만종은 수배되었으나 영원히 붙잡지 못하였다. 규리란 하녀는 이후 수치심을 못 이기고 목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무렵 차자(次子) 옥(玉)에게 작은 안질(眼疾)이 있었는데 궁중의술로 고치기 쉽지 않아 어의가 특별히 황제에게 간하여 지방의 소문난 명의를 특별히 불러 옥을 치료케 했다. 명의는 유진(柳眞)과 세희(世喜)라는 의녀와 함께 궁에 들었는데 명의가 옥을 치료하며 의녀에겐 탕약을 달이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규가 또 이를보고 탕약을 달이는 의녀를 범한뒤 ‘버선이 이쁘다’며 의녀의 버선을 빼앗아 달아났다. 황제가 다시 보고를 듣고 격분하였다.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하는구나. 형제간 우의는 나라기강의 중요한 질서중 하나이거늘 어찌 아우의 병중에 치료하러온 의녀를 범하려 든단말이냐 ?’ 다시 규를 옥에 가두고 반성하게 하고 빼앗은 의녀의 버선은 돌려주도록 했다.
하루는 황후 구씨가 먼저 황제를 찾아와 근심을 의논하였다. ‘규는 아무래도 천년대업을 이어갈 왕재(王才)로는 적합지 않은듯하니 더 늦기전에 다른 대안을 찾아소서’ 하였다. 황제가 탄식하며 은밀한 고민을 말하기를 ‘태조께서 일찍이 새나라를 세우신뒤 적장손 승계 원칙을 세우시가 ’다만 장자가 어질지 못하거나 문제가 많으면 다른 왕재중에 대안을 찾도록 하라‘ 하셨는데 지금 이 왕조가 어느덧 7대(代)째 적장자 계승을 못하고 있소. 심지어 나 역시 부왕의 3남으로 위에 두분 큰형님이 당시 나라에 큰 죄를 지어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한뒤 태자가 되어 이 자리에 앉게된 몸. 내 부왕께서도 유언을 남기시길 ‘네 다음대부터라도 태조께서 남기신 적장자 계승원칙을 지키도록 하라’ 하셨기에 꼭 그리되길 소망했건만 내 아들대에서조차 이런 나변이 생기니 어쩌면 좋단말이오. 7대째 적장손 계승이 안되는 왕실. 마치 어떤 저주라도 내린 느낌이오‘ 하였다. 황후 구씨와 거듭 근심하다 일단 좀 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청국 사신이 왔다. 양국 국경과 교역문제로 중대한 현안이 있을때인데 이때 사신으로 온 이는 욱태(旭泰)라는 인물로 이 무렵 청국백성의 신망을 한몸에 받는 원로중신이었다. 부사(副使)로부터 호위병과 말단 시종,하인에 이르기까지 수행원이 70여인에 달했는데 이번엔 규가 수행단의 말단 하녀인 소현(紹賢)이란 청국여인을 건드리기에 이르렀다. 욱태가 격노하여 황제에게 항의하기를 ’귀국 태자가 계집을 탐하는 무도함이 천지를 찌른다는 소문이 이미 청국까지 나있어 익히 들었소만 이정도 인줄 몰랐소. 아무리 천한 하녀라 할지라도 외교사절의 수행원으로 따랐을진대 그 신분은 마땅히 외교사절에 준할터. 태자가 어찌 이런 무도함을 범할수 있단말이오 ?‘ 하면서 태자를 폐위시키기 전까진 청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 버텼다. 황제가 일시적으로 다시 규를 가두고 사신을 거듭 좋은말로 타일러 돌려보내려 하니 ’다음 청국사신이 올때까지 폐태자 문제가 확실히 결론나 있어야 할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武力)으로 이 일의 책임을 물을것이오.‘ 하고 돌아갔다.
황제가 거듭 노하여 옥에서 나온 태자의 뺨을 때리며 꾸짖기를 ’황제가 외국과의 선린,외교를 제대로 하여 자국(自國)백성이 이웃나라로 인해 고통받는일이 없이해야 하는 것이 중대한 책무이거늘 너는 아예 전쟁을 불러일으킬 작정이냐. 어찌 함부로 강대국 사신의 하녀를 건드린단 말이냐 ?‘ 하였다. ’참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 아이로구나‘ 하며 탄식하였다. 황후 구씨거 그런 황제를 타일러 말하기를 ’의정부의 이노인이 황실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바 그에게 훈육시키도록 합시다‘ 하였다.
이노인은 원래 현왕(現王)과는 인연이 없으니 현왕의 조부가 젊은시절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일있는 은사(恩事)였다. 아들은 오래전에 죽었고 현택과 정택이란 손자가 있는데 모두 지역의 반듯한 선비였다. 다만 오래전부터 명예와 권세에 뜻이 없어 다만 고향 산기슭에 작은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심신을 수련할 뿐이었다. 황제가 특별히 친서를 보내어 이노인을 황도로 불러 ’부디 규를 잘 가르쳐달라‘고 하며 그를 이노인의 집에서 살게했다. 한편 이때 이노인은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부인 또한 상처하여 다만 열다섯살난 어린 후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헌데 규가 이노인의 집에 기거하게 된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이노인의 후실마저 범하려 들었다. 이에 격노한 이노인이 황궁으로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 미천한 늙은이가 배운것과 아는 것이 없어 다만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했으나 다만 옛부
터 어깨너머로 배운 선현의 글귀 한둘이 있어 주제넘께 아뢰나이다. 예부터 자식의 그릇된
길을 태장으로도 가르쳐 바로잡지 않는 부모는 참된 부모라 할수 없다 하였고, 또한 한번
어그러진 나라의 법도와 질서는 다시 되돌리기 힘들다는 말도 있노이다. 아무리 신분과
지위가 높아도 함부로 법도와 질서를 어기면 이는 나라 근본을 흔들리게 하는 뿌리가 될
수 있사오니 미천한 늙은이가 감히 원하옵건데 태자 규(圭)의 문제를 심중(深重)히 다시
생각하시오소서. ” 하였다.
황제가 고민 끝에 태자의 황자지위를 박탈하고 신분을 천인(賤人)으로 급 강등시켰다. 그리고 부산의 구석진곳에 있는 송림현(松林縣)으로 보내기로 했다. 황후에겐 ‘태자를 천한 신분으로 강등시켜 힘든일을 시킨뒤 정신차리게 할 것’이라 방침을 밝혔다. 그리고 송림현의 현령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규에게 미천한 일을 맡기고, 규는 지금 다만 천인의 신분일 뿐이니 만약 그곳에서 사고나 말썽을 저지를 경우 법도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현령이 고을에서 백정일을 하는 도진(都晉)이라는 이에게 ‘규에게 일을 가르치라’ 명했다. 도진에게는 규를 ‘먼 친척집 하인인데 흉년에 가솔이 모두 죽고 그 아이 혼자만 살아남아 거둔 것’이라 둘러댔다. 도진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수년전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뒤 장모와 함께 백정일을 보고 있었다. 이때 장모의 나이는 아직 50이 채 되지 않았다. 한편 현령은 간간이 관속을 보내어 규의 동태를 감시토록 했다.
규가 송림으로 내려간뒤 한달여 정도는 별다른 말썽이 없었으나 답답한 속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혼자 나가 술을 마시기 원했으나 송림이 워낙 시골이라 변변한 주막도 없고 다만 은밀히 밀주를 파는이를 알게되어 그곳에서 술을 사서 개울가에서 안주도 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 이때 도진의 처소는 백정일을 보는 가게와 붙어 있었는데, 처소는 방이 두 개라 원래 그 하나는 도진이 다른 하나는 장모가 써서 규가 들어온뒤엔 한동안 도진이 규를 자기 방에서 데리고 잤다. 이날 규가 밤늦게까지 혼자 술을 마시고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만 실수로 장모방으로 잘못 들어갔다. 때마침 날도 덮고 술기운도 올라 규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으로 옷을 벗었고 바로 잠자리에 든다는게 그만 장모를 위에서 덮치고 말았다. 놀란 장모가 비영을 질러댔고 도진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불을켜서 보고는 경악하였다. 바로 규를 현장에서 잡아 관아로 압송하였다. 규는 ‘이번일은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다만 밤새 술을 마시고 방을 잘못 찾아 들어갔다 헛디뎠을뿐 맹세코 도진어른의 장모를 범할 생각이 없었나이다’ 울며불며 빌었다. 현감이 골치아파하다 결국 황도로 보고서를 올렸고 격노한 황제가 다시 규를 황도로 소환하였다.
이때 왕조가 태조때부터 무속을 금하였으나 민간에 암암리에 퍼져있는 것을 완전히 막거나 뿌리뽑지는 못하였다. 마침 이때도 도성에 용한 무당이 있다는 소문이 들어, 규를 다시 감옥에 가둔 황제는 유명한 무당을 은밀히 불러 고민을 의논했다.
“ 왕조가 세워진지 어느덧 300년 세월이 흘렀고 태조께서 이미 일찍이 적장자 승계원칙을
세우셨건만 적장자로 이어지지 못하는 ‘저주’가 어느덧 7대째 이어지고 있소. 나 역시 선대
(先代)의 장자가 아니었거니와 그래서 더더욱 이 저주가 내 대에서 끊기기만을 바랬었는데
이미 그조차도 여의치 못하게 되었구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 ”
무당이 말하기를
“ 제가 오래전부터 황도의 풍수를 본바 황도 북쪽에 ‘황태산’이 있사온데 첫 번째 봉우리가
작고 두 번째,세번째 봉우리가 오히려 크고 높더이다. 이미 장자의 기가 떨어지고 차자와
삼자의 기가 승(勝)해진다는 조짐이 있었나이다. 또 황도 남쪽으로 큰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는강으로 왕국의 대다수의 대강(大江)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흐르는데 오직 남강(南江)만이 역행하고 있나이다. 이 또한 장자가 아닌 다른이의 기운이
승해질수 있다는 조짐으로 이 터는 본래 장자에게 흉지(胸肢)오이다. 원컨대 폐하께선 황
도의 풍수를 다시 생각해주시오소서. ” 하였다.
황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예부터 황도와 황궁을 옮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거니와 지금 갑자기 천도를 하거나
궁을 새로지어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면 백성들 원성이 높아질것이오. 어찌 쉬이 결정할
수 있겠소 ? ” 하자 무녀가 다시 대안을 말하기를
“ 황제께선 그럼 차라리 이 방편을 생각해보시오소서. 제가 예부터 듣기로 머나먼 북쪽 추운
나라에 이런 전설이 있나이다. 한 여인이 스무살 어린나이에 몹쓸짓을 당한뒤 장성한 딸이
있는 마흔살 남자에게 시집을 갔나이다. 여인도 자신의 딸을 낳았으나 여인은 전처의 딸은
집안의 대를 이을 자손이라 곱게 자라게 하고 일절 힘든일은 시키지 않고 자신이 낳은 딸
에게만은 일곱 살 나이부터 밤낮없이 ‘오뎅 만드는일’을 시켰나이다. 이때 날이 갑자기 추워
지고 한없이 눈보라가 치지 이 고장 백성들은 ‘이는 북쪽 설산(雪山) 산신령의 저주로다’ 하
며 앞으로의 일들을 울며 근심하였나이다. 계모는 어느덧 17세가 된 자신의 친딸과 그동안
만든 오뎅으로 따끈따근한 국물을 끓여 설산앞에 가져다놓고 ‘라메카메멀거니’란 주문을 외
웠나이다. 그러자 설산 산신령의 분노가 녹아 날이 화해졌나이다. 이는 곧 ‘라메카메 멀거니
’란 주문으로 설산의 분노를 잠재웠다는 이야기나 우리는 지금 북쪽의 기가 허하여 오래전
부터 북방 오랭캐의 침탈에 시달려왔나이다. 또한 이제와 왕조가 장자계승원칙이 이어지지
못하는것도 다 북방기운이 허한탓이니 폐하께선 신료와 내관 300인을 시켜 매일같이 오뎅
100개를 만든뒤 그 국물을 끓여 반도의 전통주인 ‘인삼막걸리’와 함께 매일 새벽 묘시(卯
時)에 북악산 정상에 제물로 바쳐놓고 ‘라메카메멀거니’란 주문을 외우시옵소서.
그러면 잠든 북악산 산신령의 기운이 500년만에 깨어나 ‘장자상속이 흔들리는 저주’를 그칠
수 있는 방도가 열릴것입니다. ”
무당이 간하자 황제가 말대로 매일같이 오뎅 100개를 신료,내관들과 빚은뒤 이들 300인과 새벽에 북악산 정상에 올라 ‘라메카메멀거니’란 주문을 외웠다. 규가 하루는 전날밤 마신술이 새벽까지도 깨지 않은 상태로 일어나서는 황제와 신료들의 새벽 북악산 행차를 막으며 ‘요사스런 무당의 말만 믿고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하는구나. 내 알기로 이전 왕조가 무당의 요설에 넘어가 나라에 망조가 들었기에 새로세운 우리 태조께선 무속을 일절 금하신걸로 들었다. 헌데 폐하께선 아무리 ’장자상속 원칙‘이 계속 깨지고 있다 하기로 우리의 태조께서 무속을 금하신 법도마저 깨시려 하시나이까 ?’ 하며 북악산으로 가져갈 제물들을 모두 흐트려놓았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벌이고 있는데 규는 근신해도 모자랄판에 또 이런 망동을 펴느냐 ?’ 하고 다시 규를 별궁에 가두도록 했다.
하루는 황제가 밤에 은밀히 차남 옥과 삼남 병을 불러 이와같이 말했다. ‘만약 너희가 황제가 된다면 나라를 어찌 다스리고 싶으냐 ?’ 하니 먼저 차남 옥이 말하기를 ‘저희 반도는 오래전부터 북방 이민족의 침탈에 시달려왔고 안으로는 여럿으로 갈라진 신료들의 파벌로 골머리를 썩어왔나이다. 신이 황제가 된다면 국방을 강화하고 병법을 열심히 장수들에게 익히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방비하고 안으로는 탕평책으로 신료들을 차별없이 등용 소통과 화합의 정치로 파당을 없애겠나이다.’ 하였다. 이어 삼남 병이 말하기를 ‘저희 반도는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왔는지라 저는 우선 백성들의 생산과 교역활동을 독려 물산이 풍부하게 생산되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만족해하며 ‘이런 훌륭한 왕재(王才)가 둘씩이나 있었는데 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랜시간을 근심하였던고 ?’ 하고는 둘째와 셋쨰를 품에 안았다. 이때 별궁에 갇혀있던 규가 어찌알고 빠져나와선 술에취해 칼을 들고 들어서선 난동을 피우기를 ‘대체 이 무슨 해괴망칙한 짓이냐 ?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무슨 다른 대안을 세운단 말이냐 ?’ 하고는 황제를 노려보며 ‘폐하께선 급기야 장자상속이 안되는 저주가 8대째 이어가게 하시려나이까 ?’하였다. 황제가 더욱 격노하여 ‘황궁안에 그것도 황제가 있는곳에 칼을 들고 들어서는 것은 동서고금에 모두가 금하는 역모로다’ 하고는 ‘내금위는 무엇을 하느냐 ? 대역무도를 저지른 규를 어서 빨리 옥에 가두어라’ 하니 병사들이 달려와 바로 규를 체포해갔다.
황제가 규를 법도대로 반역죄로 처단하려 했으나 구황후가 울며 만류하였다. ‘본래 신첩이 먼저 규의 문제있음을 간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제와 차마 어미로서 자식이 죽는 것을 볼수 있겠나이까 ? 폐하께선 통촉하여주소서’ 하니 일단 규의 처단을 잠정 보류하고 500리 떨어진 서천(西川)으로 귀양보냈다. 서천은 바닷가인데, 태자는 뜻밖에 귀양지에서 낚시를 익혔다. 생각보다 낚시가 취미에 맞았는데 그곳의 어부,낚시꾼들과 어울리며 고기잡이를 즐긴 것이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직접 잡은 진귀한 물고기를 황도로 진상해 올려보내기도 했다. 황제와 황후가 ‘규가 이제 좀 정신을 차리나보다’ 하고 마음이 누그러졌다.
1년만에 규는 사면되어 황도로 돌아왔다. 한편 이때 나라 머나먼 남쪽에서 종종 표류해오는 배가 있었는데 얼굴이 가무잡잡한 여인이 있어 백성들이 기이하게 여겨 이들을 흑녀(黑女)라고 불렀다.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재주가 좋아 종종 관아는 물론 궁에서도 의녀나 다모로 쓰는일이 있었다. 이때 황도에도 의녀로 일하는 흑녀가 두어명 있었는데 이중 한명을 태자가 또 겁탈하였다. 이름이 리아라고 하는 22세된 흑녀였는데, 태자가 황도로 돌아온지 일주일만이었다. 황제가 ‘제버릇 개못준다고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짓을 벌이느냐 ?’ 하며 다시 냉궁에 가두었다.
얼마후 태자를 풀어주니 이번에는 또다시 밖으로 나돌며 두명의 중년의 왜녀(倭女)를 겁탈하였다. 이때 나라에 남쪽 섬나라와 교류하는 상인이 많았는데 그러다 왜녀를 첩실로 들이는 행수가 있었다. 이때 태자가 겁탈한 왜녀는 한명은 진행수라는 이의 첩실로 이름을 타카코(貴子)라고 했고, 또 한명은 오행수라는 이의 첩실로 이름을 요코(洋子)라고 했다. 진행수와 오행수는 모두 귀족도 공신가문도 아닌 장사치에 불과했지만 조정에까지 주요 물품을 조달하는 거상(巨商)이라 나라에서 무시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요쿄와 타카코는 모두 이들 행수가 어린나이에 첩실로 들인 왜녀였으나 지금은 어느덧 20년이 넘어 모두 40이 넘은 중년부인이었던 것이다. 진행수와 오행수가 거듭 격노하며 태자를 처단하지 않을 경우 독단적인 행보를 보일수도 있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이때 마침 청국에서도 사신이 온다하며 ‘이번에 오면 폐태자의 일이 제대로 결론이 났는지 확인하겠다’고 하니 결국 규의 문제를 확실히 처리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국문장에 규를 끌어내어 물었다. ‘네가 지금까지 나라와 조정에 죄를짓고 태자로서의 행실을 저버린 죄가 100가지도 넘으니 이미 죽음을 면키 어렵다. 다만 사사로운 부자(父子)간의 정으로 선택권을 주겠다. (1) 사약을 들것인지 (2) 감옥안에서 물한모금,밥한술 들지않고 서서히 죽어갈것인지 (3) 귀양을 갈것인지 (4) 자루속에 들어가 멍석말이를 당할것인지’ 넷중 하나를 택하라 하였다. 규가 마침내 통곡하며 ‘소자가 아무리 용렬하다한들 이미 사면받을수 없는 대죄를 여러번 지은 것을 어찌 모르겠나이까 ? 다만 부자간의 사사로운 정으로써 죽음만은 면케하여 주시오소서’ 하며 결국 귀양을 선택하였다. 황제는 냉정히 돌아서며 태자를 동북 변방으로 추방할 것을 명했다. 태자가 귀양간곳은 이민족과의 접경지역인 동북의 척박한 고장으로 감자와 토란밖에 생산되지 않는 고장이었다. 한편 황후 구씨가 ‘자식을 제대로 훈육시키지 못한 어미의 죄를 함께 받겠다’며 폐비를 자처하였으니 이는 황제가 만류하여 보류되었다.
규가 귀양을 간곳은 동북방 이민족과의 접경지역이었다. 본래 귀양간 죄인은 나라에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자급자족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본래 황실에서 귀하게 자란 왕자인 규는 그곳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한채 망연자실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딱히여긴 이웃의 17세난 소정(小貞)이란 처자가 이를 딱히 여겨 종종 처소에 들러 밥을 지어주고 감자국,토란국 따위를 만들어주었다. 소정은 본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지금 나이 70된 할아버지가 그녀를 키워주었는데 나중에 조부가 이 사실을 알고 소정을 크게 꾸짖었다. ‘그자가 어떤자인지 알고 이리 경솔히 움직이느냐 ? 지금 이 나라안에 규의 죄를 모르는이가 없고, 지금은 어차피 죄인이니 더 이상 왕자도 태자도 아니며 복권될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자가 지금껏 저지른짓들을 생각하면 너에게도 무슨 패악한짓을 할지 모르는데 어찌하려구 이런 경솔한짓을 벌이느냐 ?’ 하자 소정은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굶어죽게 놓아둘수는 없는일 아니오이까 ? 또한 몇 번 그를 만나본바 진심으로 뉘우치며 자숙하는 모습이 보였는바 너무 걱정마소서.’ 하였다. 조부가 거듭 이건 아니다 싶어 손사래를 치자 소정은 ‘소녀가 무슨 다른뜻이나 야심이 있어 이런일을 벌이리까. 그저 우리고을에 귀양온 죄인을 측은지심으로 보살필뿐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규가 소정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이와같이 말했다. ‘네 이렇게 날마다 지성으로 나를 보살피는데 나는 이미 죄인으로 귀양온 몸으로 앞날을 보장할수 있는몸이 아니라 네게 해줄수 있는 것이 없구나. 아마 지금쯤은 황도에서도 새로운 태자를 정했을터 나는 네게 해줄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며 눈물로 탄식하고 후회하였다. 규가 1년여정도 소정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그러던 어느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정과 마을백성들이 백방으로 규의 행방을 찾을수 없었고 지역의 관장(官長)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후에도 규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의 행방을 아는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성들이 말하기를 ‘비록 적장자 계승이 잘 지켜지지 않는 나라라하나 이렇게까지 패악한 태자는 일찍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마(魔)가 끼었던 듯 하다’ 탄식하였다. 이후 백성들이 규를 ‘마태자(魔太子)’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