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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괴수 평수길(平秀吉.豐臣秀吉)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했다. 드디어는 명나라를 침범할 계략으로 현소(玄蘇) 등을 보내서 우리나라에 글을 전하기를 ‘길을 빌리자[假道]’고 말하였다. 그 말씨가 너무도 오만하므로 우리나라는 대의를 들어 그 사신을 물리쳐 끊었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수길은 막장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서 정병 20만을 뽑고 평행장(小西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宗調信)등을 선봉으로 삼아 우리의 8도를 짓밟고 우리의 5묘(廟)를 헐고 우리의 삼경(三京 한성ㆍ개성ㆍ평양)을 함락하고 우리의 두 능(陵. 선릉과 정릉)을 불태웠다.
다행히도 명나라 천자가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도독 이여송(李如松)으로 남북 관병(南北官兵) 4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하므로 드디어 평양 대첩을 이룩했다. 그리고 정유년(1597, 선조 30) 난리엔 양 경리(楊經理)와 마 도독(麻都督)을 보내어 직산(稷山) 대첩을 이룩했으며, 무술년(1598)엔 군문(軍門.명나라 관직명)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서로(西路)의 제장들을 각각 파견하여, 도독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로 들어와 울산에 주둔했고, 도독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로 들어와 사천(泗川)에 주둔했으며, 도독 유정(劉綎)은 서로 들어와 순천(順川)에 주둔했고, 도독 진인(陳璘)은 뱃길로 들어와 적을 노량(露梁)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마침 수길이 일본에서 죽자 적들은 군병을 철수하여 모두 돌아갔다.
● 이에 앞서 대마도 도민들은 배로 화물을 실어다 우리의 쌀과 포목을 바꾸어 감으로써 그 생활을 유지해 왔는데, 병란을 치른 뒤부터 그들은 굶주리고 헐벗어 생활이 곤란케 되었다.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는 연달아 귤지정(橘智正)을 시켜 포로 되었던 남녀를 보내오며 화친을 요청하고 시장을 개통할 것을 애걸하였다.
● 한편 원가강(源家康.德川家康)은 관백(關白)이 된 뒤 스스로 변명하기를,
“임진ㆍ정유의 변란 때, 나는 관동(關東)에 있어 일찍이 전쟁에 관여한 일이 없었으니, 조선은 나와 원수 될 것이 없으므로 화친하기를 청한다.”
하므로, 우리나라는 승려 송운(松雲) 유정(惟正)을 일본에 보내어 적정을 정탐하고 포로 된 남녀 1천 3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를 요동에 있는 각 아문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 병오년(1606, 선조 39) 겨울. 일본 국왕 원가강은 수교문(修交文)을 보내어 우호를 통하는 한편, 병란 때 우리의 두 능을 침범한 범인 두 명을 압송해 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나이 20여 세로, 임진년엔 5세도 채 못 되는 나이였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사복시에 삼성(三省.인륜에 관계된 사건을 심문할 때 의정부ㆍ의금부ㆍ사헌부가 합석하여 죄인을 국문)을 설치하고 그들을 국문, 처형하고는 국치를 씻었노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다 그 실없음을 비웃었다.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등이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일본에 가게 되자, 참판 윤안성(尹安性)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회답사라 이름 하여 어디로 간단 말인가 / 使名回答去何之
오늘의 이 화친 의의를 모르겠네 / 此日和親意未知
한강에 머리 돌려 강가를 바라보라 / 試向漢江江上望
두 능의 송백 가지도 안 돋았네 / 二陵松栢不生枝
이 시는 장안에 전송되어 식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 만력 35년(1607)은 곧 선조대왕 즉위 41년인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여러 달 동안 옥후가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조회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목왕후(仁穆王后.선조의 계비 김씨)는 손수 언문교서를 써서 빈청(賓廳)에 내리고 세자에게 전위 문제를 논의하라고 유시하였다. 영의정 유영경은 밀계(密啓)를 올려 이를 막는 한편, 원임대신을 배제하여 참여하여 듣지 못하게 하였다.
영창대군 의(㼁)는 이때 겨우 세 살이었으나, 광해(光海)는 동궁에 있은 지 20여 년인데, 사리에 어둡고 괴팍하여 제 마음대로 하므로, 선조는 그가 장차 막중한 짐을 지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매우 걱정한 나머지 폐립(廢立)할 뜻을 갖고 있었다. 유영경이 선조의 이러한 뜻을 받들기 위하여 전위의 하교를 막은 것이었다.
● 무신년(1608, 선조 41)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의 소장이 영남에서 올라왔다. 그 소장의 사연은 대개, 사직을 위태롭게 도모한다고 유영경을 몹시 공격하였는데, 심지어는 사미원(史彌遠)이 제왕(濟王) 횡(竑)을 임의로 폐한 고사를 인용,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삼사(三司)는 계를 올려 정인홍을 변방으로 멀리 정배하는 한편, 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ㆍ정조(鄭造) 등이 몰래 인홍을 사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소를 올렸다 하여, 그들도 모두 양계(兩界)로 귀양 보냈다. 상은 또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제후의 아들은 천자에게 명을 받은 자여야 비로소 세자라 이르거늘 지금 세자는 천자가 봉하였는가? 나라 사람들이 아는가?”
라고 하여, 조야가 크게 놀랐으며 닥쳐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더니, 2월 초하루에 선조가 수라를 들고 그날로 폭사했다. 조야는 모두 독약을 넣었을 것 이라고 의심하였으나,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 줄은 역시 알지 못했다. 선조는 임종시에 일곱 사람의 재신에게 유언하기를,
“불선한 내가 왕위에 오른 후로 신민(臣民)에게 죄지음을 깊은 골짜기에 빠지는 것처럼 여겼는데, 홀연히 중병을 얻었소. 무릇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수(數)요, 사람이 죽고 삶은 명(命)이오. 마치 밤과 낮을 어길 수 없듯이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대체 무슨 말을 또 하겠는가? 다만 대군이 아직 어려서 그의 장성함을 보지 못하니 그것이 근심일 뿐이오. 내가 죽은 뒤,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 만의 하나라도 사설(邪說)이 있거든, 바라건대 제공들은 보살펴 붙들어 주오. 감히 이를 부탁하는 바이오.”
하였다. 이른바 일곱 신하는 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신흠(申欽)ㆍ한준겸(韓浚謙)ㆍ서성(徐渻)ㆍ박동량(朴東亮)ㆍ허성(許筬)이었다.
● 15일. 삼사(三司)의 고변으로, 임해군 진(珒)을 진도에 안치하는데, 미처 귀양 가기 전에 교동(喬桐)에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무장(武將) 박명현(朴命賢)ㆍ고언백(高彦伯)ㆍ민열도(閔說道)ㆍ양학서(楊學瑞) 등이 임해군과 내통하였다 하여 모두 장살(杖殺)되었고, 종실 서흥군(西興君)ㆍ홍산군(鴻山君)ㆍ수산군(守山君)도 모두 여기에 연루되어 장살되었으며, 이 때문에 죽은 궁중 노비들의 수효도 거의 백 명에 이르렀지만, 그 단서는 잡지 못했다.
● 금군(禁軍) 김위(金渭)는,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칼을 싸 가지고 들어가는 상황을 목격하였노라고 소를 올려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그는 그 공으로 송산군(松山君)에 봉해졌다. 이 후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자가 잇따라 생겨났다.
● 한강(寒岡) 정선생 구(鄭先生逑)는,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전은의 설[全恩之說.부자나 동기간 등 가까운 사이에는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전히 한다는 설] 을 주장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장하게 여겼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원익)은 영의정으로서 또한 차자를 올려 구명을 호소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좇지 않았다.
● 7월. 명나라 조정은 도사(都司)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을 보내와서 임해군의 미친병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밝게 조사하였는데, 이때 임해군은 교동에서 배를 타고 서강(西江)으로 오면서 거짓 미친 행동을 하여 그들 차관(差官.명나라 사신)에게 보임으로써 듣는 이들을 슬프게 하였다.
이날 임해군은 즉시 배소로 도로 돌아갔으며, 삼공(三公)은 왕대비의 명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차관에게 글을 올려 임해는 왕통을 이어 받을 수 없다는 사리를 극력 진술하였으며, 성균관 유생 신득연(申得淵) 등과 장안 백성 고덕창(高德昌) 등도 교외(郊外)에서 글을 올렸다. 이는 대개 임해군이 젊을 적부터 소행이 어그러져서 크게 인심을 잃은 탓이었다. 때문에 조야에서는 광해가 왕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오히려 두려워했었는데, 막상 광해가 즉위하니 포학무도하여 그 근심됨이 임해보다 더 심하였다. 선조가 폐립할 뜻을 두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식을 알기로는 아버지가 제일이란 교훈이 참으로 격언이다. 임해군은 위리 안치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별장 이정표(李廷彪)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에 보인 별시(別試)에, 박자흥(朴自興)ㆍ조길(曹佶)ㆍ허요(許窑)가 급제하고, 변헌(卞獻) 또한 급제하였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이는 이르기를,
“문중(門中)ㆍ동내(洞內)ㆍ혼가(婚家)의 경사 자리인데, 산승(山僧)은 또 어찌해서 그 사이에 끼었는고.”
하여, 한때 그 말이 성행되어 잠을 막는 이야기거리로 되었다. 이는 곧 박승종(朴承宗)ㆍ이이첨ㆍ정조(鄭造)ㆍ허균(許筠)ㆍ조탁(曺倬)등이 시관이 되어 급제시킨 것이니, 박자흥(朴自興)은 박승종의 아들, 이이첨의 사위, 정조의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허요는 허균의 조카요, 조길은 조탁의 아우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허균은 사정(私情)을 썼다고 승복하여 함열(咸悅.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유배되고, 허요는 삭과(削科)되었다. 까닭에 권석주(權石洲.권필)는 허균을 전별하는 시에서,
가령 과거에 사정을 썼다 하여도 / 假令科第用私情
아들ㆍ사위ㆍ동생보다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
유독 허균만이 그 죄를 받으니 / 獨使許筠當此罪
세간에서 공정한 길이란 과연 행키 어려워라 / 世間公道果難行
하였다. 변헌은 또한 승려로서 환속한 사람인데, 대간에서 아뢰어 삭과하였으니, 매우 우습다.
●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 좌찬성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회재(晦齋)ㆍ퇴계(退溪) 두 선생에게 왕자(王子.봉성군 완)를 죽이고 창기에 빠진 과실이 있다고 극구 헐뜯었다. 성균관 유생 이목(李楘) 등 5백여 인은 소를 올려 양현(兩賢)을 구해(救解)하는 한편, 인홍이 양현을 무함한 죄를 진술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소두(疏頭.연명으로 소를 올릴 때 맨 첫 머리에 이름이 적힌 주동이 되는 사람) 최유연(崔有淵)ㆍ이민구(李敏求)ㆍ 한필기(韓必起) 3인을 금고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재임(齋任) 등 5명을 비롯한 모든 유생들이 모조리 성균관을 비우고 가버렸다. 이때 성균관 지사(知事)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은, 유생들을 돈유하라는 명을 받고 성균관에 와서 절구 한 수를 읊조리기를,
거문고 소리 끊어진 독서재 에는 / 絃歌聲斷讀書齋
저녁나절 새 파람만 옛 거리에 메아리 지네 / 向晩東風響古街
보슬비 한 뜰에 방초는 우거지는데 / 微雨一庭芳草合
석양에 말없이 빈 뜰을 내려 오네 / 夕陽無語下空階
하였다. 이때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그의 스승 정인홍을 위하여 몹시 그 도(道)를 찬양하고 양현을 헐뜯었다. 좌의정으로 있던 오성부원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올린 차자에서,
“조식(曹植)의 문하에 인홍이 없었던들 도가 더욱 높았을 것이고, 인홍의 악함은 여량을 얻어서 죄가 더욱 깊다.”
하였는데, 한때의 명언이 되었다.
● 임자년(1612, 광해군 4) 2월. 황해도 역적 김세제(金世濟) 일명 경립(敬立)이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의 꾀임으로 김직재(金直哉)와 더불어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 김직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가 된 사람으로, 임진년 난리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적에게 포로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적에 의해 삶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서도 얼굴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여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한 지가 오래였다. 사대부치고 누가 김직재와 더불어 역적을 공모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참판 윤안성(尹安性) 부자와 사인(舍人) 정호선(丁好善) 형제들이 다 여기에 연루되어 같은 날 하옥되고, 그 외 평소 자기와 감정이 있는 자를 많이 끌어들였으므로 여러 날 구속되었다. 윤안성ㆍ정호선 등은 석방되었으나 양원(梁榞)ㆍ이호양(李好讓)ㆍ신열(申悅)ㆍ광산령(光山令) 등 수십 인은 그 이름이 김백함(金伯諴)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모두 멀리 변방에 유배되었다.
● 신율은 오히려 옥사가 차차 누그러질까를 겁내어서 유팽석(柳彭石)이란 자를 매수하여 주육을 듬뿍 먹이고 잡아매어 왕옥(王獄)으로 보내면서 신황(信黃)을 잊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른바 신황이란 자는 신천(信川)에서 귀양 사는 승지 황혁(黃赫)을 말한다. 유팽석은 상경하자 곧바로 황혁의 이름을 들어 모역의 괴수로 만들었으므로, 황혁은 그의 손자 황상(黃裳)과 첩의 소생 황곤건(黃坤健)과 함께 모진 신문을 받고 죽었다.
● 그의 첩 전춘앵(囀春鶯)은 해주 기생이었다. 그는 노비 수십 식구와 함께 주인의 억울한 사정을 샅샅이 진술하였으나 그 진술이 무분별하여 죽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편지 왕복을 하였다 하여 조수륜(趙守倫) 선생은 신문을 받다가 죽고, 정자(正字) 이덕수(李德洙)는 이산(理山)으로 정배되었으며, 권석주(權石洲) 또한 시안(詩案)이 죄가 되어 곤장을 맞고 정배되었는데, 겨우 동대문을 나서다가 죽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궁궐 버들 짙푸르매 꾀꼬리 이리저리 날고 / 宮柳靑靑鶯亂飛
온 성안 오얏 꽃ㆍ복사꽃 봄볕에 아양 떠네 / 滿城桃李媚春暉
온 조정은 모두 태평세월 구가하는데 / 朝家共賀昇平樂
뉘라서 바른 말이 포의에서 나오게 하였나 / 誰遣危言出布衣
● 포의(布衣)는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인데, 그는 전시(殿試)의 대책문(對策文.과거시험 질문)에서 시국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 말이 광해의 비위를 많이 상하게 하였으므로 이에 노한 광해는 곧 그의 이름을 방(榜) 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양사와 삼공이 번갈아 차자를 올리므로 비로소 복과(復科)되었다.
● 유팽석은 역모에 참여하여 알았다는 이유로 역시 신문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마음에 깊이 뉘우치면서 말하기를,
“신율이 나를 그르쳤구나.”
하였다. 결국 그는 매를 맞아 죽었을 뿐 아니라, 형(刑)이 사후에 뒤쫓아 시행되었다. ‘이상하도다. 가벼이 간악한 사람의 달콤한 말을 믿다가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자신이 빠지게 되면서도 깨닫지 못한 자’라는 말은 바로 팽석을 두고 한 것이다.
●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의 침실 뒷벽에, ‘차군만리행(嗟君萬里行)’이란 구절이 완연히 쓰여 있었다. 자획으로 봐서 한 집안 사람의 글씨도 아니며, 그렇다고 바깥사람의 손이 미칠 곳도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광해군이 외딴 섬에 안치되게 된 것은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이첨의 집에서 빚은 술이 변하여 피가 되었다는 설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게 전해졌다. 이 역시 멸족의 화를 당할 조짐이 벌써 10여 년 전에 미리 보인 것이리라.
● 계축년(1613, 광해군 5) 4월 28일. 사형수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은 이이첨의 꾀에서 비롯되었다. 응서란 자는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서자로서,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ㆍ허홍인(許弘仁)ㆍ유인발(柳仁發)ㆍ박치의(朴致毅)ㆍ이경준(李耕俊) 등과 뜻이 합하여 사생을 같이할 벗을 맺었다. 그들은 모두 이름난 집의 서자들로 문예까지 곁들였는데 혹 선학(禪學)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론 병서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 오가면서 교분을 둔 자들은 곧 허균ㆍ이재영(李再榮)ㆍ이사호(李士浩) 등의 유였다.
● 무신년(1608) 봄. 서양갑ㆍ심우영 등은 이경준ㆍ김경손(金慶孫) 등과 연명으로 소를 올려 벼슬길을 터주기를 바랐으나 시행이 되지 않자, 앙심을 품고 돌아가 여강(驪江.한강 상류)에다 토굴을 파고 한집에서 살 계획을 하였으며, 기린도(麒麟島.황해도 옹진에 있는 섬)에 곡식을 쌓아 후일의 관군을 대피할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혹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본뜨기도 했는데, 그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 계축년(1613) 봄. 장사꾼 하나가 동래(東萊)에 가서 은(銀)을 무역하여 서울로 올라오다가 조령(鳥嶺)에서 피살되었다. 그 은장수의 종 춘상(春祥)이 뒤를 밟아 여주(驪州)까지 달려와서 드디어 도적들의 거처를 밝혀내고 곧 포도청에 이를 보고하여 비밀리에 체포하고 보니 바로 박응서였다.
● 광창군(廣昌君) 이이첨은 영창대군이 늘 대비 곁에 있는 것을 매우 못 마땅히 여겨 온갖 간사한 꾀를 내서 대군을 죽이고자 하는 판에 응서의 죄가 참형에 해당함을 듣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먼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의 집으로 찾아가 허리 굽혀 절하니, 희길은 이를 피하고 감히 받지 못하면서,
“알 수 없습니다. 영감께서 저에게 절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이첨은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복상(福相)이 많소. 오래지 않아 반드시 큰 공훈을 세울 것이니 지극히 축하할 만하오.”
하였다. 그리고 밤에 일가인 이의숭(李義崇)을 다시 포도청에 보내어 가만히 응서를 꾀어서 말하기를,
“너의 죄는 참형에 해당한다. 그냥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말대로 소를 올려 고변하는 것이 어떠냐? 영창(永昌) 추대를 그 종지로 만들고 또 평소에 절친했던 사람과 무사들 중 쟁쟁한 사람들을 끌어넣어 그 일을 사실화시킨다면 비단 죽음만 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훈(正勳) 또한 기록될 것이다.”
하니, 응서는 살 길을 얻었노라 기뻐하며 옥중에서 글을 올리되, 이첨의 지시대로 따랐다.
또 이응준(李應俊)을 끌어넣어 격문을 만들었다 하고, 김경손(金慶孫)ㆍ김평손(金平孫)은 격문을 전하노라 하였다. 그 격문에, ‘참 용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니 가짜 여우가 먼저 우는구나[眞龍未起 假狐先鳴]’라는 말이 있는데, 참용은 영창을 가리키고 가짜 여우는 광해를 뜻한 것이라 한다.
● 서양갑ㆍ심우영ㆍ유인발ㆍ이경준ㆍ김경손 등은 투옥되고, 박치의ㆍ허홍인은 도망하였는데 수일 뒤에 허홍인은 이양백(李養伯)에게 붙들렸고, 박치의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허홍인ㆍ심우영 등이 잇따라 처형되었다. 서양갑은 자기의 어머니가 모진 매를 맞는 것을 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치기를,
“전하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의를 내세워 적(賊)을 친 것이거늘, 어찌해서 반역이라 하옵니까?”
하고는, 부왕을 시역한 것, 형을 죽인 것, 손윗사람을 간음한 것 등을 들어 큰소리로 뜰에서 외쳤다. 사관들은 차마 이것을 사책에 쓰지 못했다고 한다.
● 5월 초 6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ㆍ안악군수(安岳郡守) 김래(金琜)ㆍ 진사 김규(金珪)ㆍ현감 심정세(沈挺世)ㆍ동자(童子) 김선(金瑄) 등이 모조리 하옥되고, 16일 종성 판관(鍾城判官) 정협(鄭俠)의 진술로 걸려든 신상촌(申象村.신흠)ㆍ이월사(李月沙.이정귀)ㆍ김선원(金仙源.김상용)ㆍ한청평(韓淸平.한응인)ㆍ황회원(黃檜原.황신)ㆍ한서평(韓西平.한준겸)ㆍ판서 서성(徐渻)ㆍ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ㆍ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ㆍ최기남(崔起南)ㆍ김상준(金尙寯)ㆍ안창(安昶)ㆍ조희일(趙希逸)ㆍ조위한(趙緯漢)ㆍ한시일(韓時一) 등이 서소문 바깥에서 심문을 당하니, 곡성이 하늘에 진동하고 기상이 처참하였다.
● 오성(鰲城.이항복)은 이조 정랑으로 있을 적에 정협을 천거하여 종성 판관으로 삼았기 때문에 스스로 미안하게 여겨 사직을 고하였으며, 한음(漢陰.이덕형)은 영의정으로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편전 앞문에 엎드려 영창을 죽이자고 청하였다. 영창의 나이 그때 겨우 아홉 살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으니, 어찌 당을 지어 반역할 리가 있겠는가? 한음의 덕망은 조야가 모두 머리 숙여 왔었는데, 이날의 처사는 중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 고변이 있은 처음에 대관 중에서 맨 먼저 영창을 죄주자고 청한 자는 장령 정호관(丁好寬)이며, 폐모(廢母)를 청한 이는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이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으로 폐모를 청한 이는 진사 이위경(李偉卿)인데, 이위경의 소하(疏下)로는 성하연(成夏衍)ㆍ채겸길(蔡謙吉) 등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진사 어몽렴(魚夢濂)ㆍ박자응(朴自) 등과 명륜당에서 서로 힐난하다가 위경 등은 박자응에게 내쫓기어 혜민서에 소청(疏廳)을 차리고 영창대군과 김제남의 죄부터 청한 다음 대비 폐위에까지 언급하였다.
그리고 박자응 등은 성균관을 점거하여 어몽렴을 소두(疏頭)로 삼고 소를 썼는데, 화의 근본을 제거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이는 곧 영창대군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김제남도 죽여야 함을 가리킨 말이었다.
● 이때 서인(西人)으로 불리는 자들은 칠신(七臣)이 구금된 이래로 조정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으며, 남인들은 다만 그 성패를 좌시할 뿐이었다.
한편 대북(大北)은 이이첨이 정조ㆍ윤인ㆍ한찬남(佷纘男) 등과 더불어 원흉인 정인홍을 방패로 삼고, 광해의 사랑을 독차지한 김 상궁(金尙宮)과 결탁, 그를 심복으로 만들어 광해군을 미혹시킨 뒤에 전적으로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당을 많이 만들어 요직에 배치하게 되자, 마을에서 부형을 배반하고 벼슬을 바라는 자들이 날마다 그 문으로 운집하였다. 그들은 국구(國舅.김제남을 말함)의 처형과 모후(母后)의 폐출론을 들어 다투어 소장을 올리고 초야의 공론이라 하였다. 이것은 모두가 이이첨과 허균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다.
● 소북(小北)인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초방(椒房.후비의 궁전)의 지친으로 앞뒤에서 한편이 되어 상대와 맞서는 태세를 이루었는데, 희분은 폐중궁(廢中宮.광해비)의 오라비요, 승종은 세자빈(世子嬪)의 할아비로서 그 세력은 이첨과 좋은 적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창(三昌)이라 불렀으니 즉, 이첨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이요, 승종은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이요, 희분은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이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의 아비 박자흥(朴自興)도 이첨의 사위였다. 세자빈의 아비와 할아비로서 조정을 제맘대로 움직이는 터였지만, 형상을 숨기고 남을 넘어뜨리는 이이첨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이첨도 군상과의 관련을 굳게 함이 저렇듯 오로지 하였지만, 또한 그들의 사이를 동요하기는 어려웠다. 이첨의 간악 혹독함과 유희분ㆍ박승종의 탐심은 다같이 방자하기 형언할 수 없지만, 유와 박의 재주는 이첨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첨의 재주는 악한 짓을 하는 데는 가장 잘하였다.
● 박승종이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폐모하자는 의논을 심히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조직(趙溭) 등이 상소하여 모후(母后)를 구원하다가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다. 승종이 그들을 백방으로 보호하여 끝까지 심문한 적이 없고 보면, 또한 희분의 유는 아니다. 그런데 그 후 박홍구(朴弘耈)가 재판관이 되자 아뢰어 조직을 심문하였다. 광해군은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창덕궁으로 옮겼고 대비는 그대로 서궁(西宮)에 있었다. 그러므로 폐모론이 일어나자 대비전이라 부르지 않고 서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대비에게 사은숙배의 예를 오히려 폐지하지 않았는데, 정사년(1617) 겨울, 희분이 병조 판서가 되어 서궁에 숙배하지 않았다. 자전(慈殿)에게 숙배의 예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희분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폐비하자는 의논을 모아 정청(庭請.세자나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전에 이르러 큰일을 계품하던 일)한 것도 희분이 부임한 지 5~6일 후였다.
● 대북 사람들은 그때까지 박승종이 다른 의론을 내세울까 두려워 몇 년간 정청을 발의하지 못하다가 희분의 한 번 거취에 결정되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에 이론이 발의되자,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북청(北靑)에 유배되고, 영의정 기자헌은 애초에 유배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배소에 가지 않았다. 전 승지 정홍익(鄭弘翼)은 종성에 유배되고, 전 목사 이신의(李愼儀)는 회령에 유배되었다. 정언 김덕함(金德諴)은 온성에 유배되고, 정자 김지수(金知粹)는 경원에 유배되었다.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이는 판중추부사 윤방(尹昉)ㆍ전 판서 김상용(金尙容)ㆍ참판 오백령(吳百齡)ㆍ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권(金權)ㆍ동지 오윤겸(吳允謙)ㆍ첨지 이경직(李景稷)ㆍ정랑 박자응(朴自凝) 등이었다.
● 계축년(1513, 광해군 5) 가을, 유학(幼學) 조경기(趙景起)는 정조ㆍ윤인을 베어서 인륜과 기강을 바로잡기를 청하였고, 갑인년 2월, 사직(司直) 정온(鄭蘊)은 소를 올려, 대비에게 효도할 것, 영창의 호를 추복(追復)할 것, 정조ㆍ윤인ㆍ정호관을 국경 밖으로 추방할 것, 정항(鄭沆)을 효수하여 국민에게 사죄할 것 등을 청하였다.
●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 유생 정복형(鄭復亨)ㆍ권심(權淰)ㆍ이안진(李安眞) 등이 잇달아 소를 올려 정조ㆍ윤인의 폐모하기를 주장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광해는 분연히 말하기를,
“정조ㆍ윤인 등이 가벼이 대론(大論)을 발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시끄러운 싸움터로 만들었으니, 삭직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그러다가 갑인년 겨울, 다시 특명을 내려 정조ㆍ윤인의 관직을 회복시켜 경연에 두게 하였다. 그러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차자를 올려,
“정조와 윤인을 대간에 복귀시킨 것은 곧 모후를 폐출할 조짐이라고 바깥 의논이 자자합니다.”
하였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곧 사관을 보내어 완평부원군에게 힐문하기를,
“이 말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말일 것이오. 임금을 섬기는 데 속이지 않는 것이 대신의 직분이니, 경은 사실대로 대답하오.”
하였다. 완평부원군은, 길에서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광해는 세 차례나 사관을 보내어 반복 힐문하였지만, 완평부원군은 끝내 길에서 흘려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양사(兩司)는 이원익이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서 임금의 악을 수창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이내 여강(驪江)으로 추방하였으며, 또 남이공(南以恭)을 전에 이원익이 체찰사로 있을 때 종사(從事)로서 그의 집에 왕래하면서 조정을 비방하였다 하여, 변방에 유배하기를 청하였다.
● 을묘년(1615) 3월, 진사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은 각기 유생 30여인을 거느리고 잇따라 소장을 올려 정조와 윤인을 죄주기를 청하고 이원익을 구원하다가 무적은 거제에, 택뢰는 남해에, 효성은 진도에 각각 유배되었다.
● 정미년(1607) 겨울, 선조대왕의 옥후가 편치 못할 때이다. 궁중에 드나드는 무녀(巫女)가 의인왕후(懿仁王后.선조의 비 박씨)의 혼이 옥체에 빌미가 되었다 하여, 궁중에서 유릉(裕陵)으로 사람을 보내어 재앙을 물리치게 한다는 말이 바깥으로 번져 나왔다. 박동량(朴東亮)은 곧 의인왕후와 종남매 간이므로 이 말을 듣자, 김제남이 이를 금지하지 못한다고 통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 말이 원정(元情) 중에 미치게 되어 이로 말미암아 양궁(兩宮) 저주의 옥사가 크게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녀들 중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던 향이(香伊)ㆍ환이(環伊) 등 4~5인이 사사되고 장님무당 고성(高城)에게도 또한 형이 내려졌다.
● 김응벽(金應璧)의 공초에 ‘목릉(穆陵.선조능)에도 저주한 곳이 있으니 파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윤중삼(尹重三)과 선공제조 송순(宋諄)을 파견하여 응벽을 감독해서 능을 파게 했는데, 현궁(玄宮)까지 거의 파 들어가자 응벽은 다시, 저주가 이 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릉(成陵.광해 어머니 능)에 있다고 하였다. 다시 즉 성릉으로 가게 하였는데, 수레가 거의 동네 어귀에 이르자 갑자기 자살하였다. 사실 응벽의 생각은 두 능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키자는 것이었는데, 광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흉적의 속임수에 빠져 능침에 욕을 끼치고 선조의 영령을 놀라게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을묘년(1615, 광해군 7) 여름, 유학 조직(趙溭)은 소를 올려, 주상과 대비가 양궁에 따로 있는 것이 옳지 못함을 극력 진술하였다. 그 소 가운데, '천일(天日)을 격리했다. 모후를 유폐했다. 적막한 궁에서 귀신과 더불어 이웃 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광해는 크게 노하여 승정원에서 조직을 불러들여 묻기를,
“전부터 양궁에 따로 거처한 것은 유독 오늘만이 아니거늘 네가 '유폐'란 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니, 조직은 대답하기를,
“옛적에 따로 거처한 것은 또한 오늘과 같은 거조가 있어서 그러했습니까?”
하였다. 조직은 곧 구금되어 신문을 당하다가 멀리 외딴섬에 유배되었다.
● 한음(漢陰.이덕형)이 계축년에 올린 차자에서 영창대군의 죄를 들어 말한, ‘천천히 방침을 하더라도 어찌 편의한 것이 없으리이까?’라는 것은 명백하지 못한 것 같고 차자의 내용도 긴요한 말이 없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폐비 때 수의(收議) 중에서 명백하고 정대(正大)하기로는 오성(鰲城.이항복)이 첫째요, 그 다음은 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이었다.
● 이이첨은 유희분과 박승종을 몹시 꺼려 그들을 넘어뜨릴 음모를 생각함에 극단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 교리 정문익(鄭文翼)은 유희분과 박승종의 심복으로 해주에 있었으므로, 한찬남은 허균과 꾀를 통하여 봉수(烽燧)의 부정을 적발한다고 칭탁한 뒤에, 선전관 유세증(兪世曾)을 해주에 파견, 무뢰한들을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주에 고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 책자를 바쳤는데, 정문익의 이름이 첫줄에 쓰여 있고, 무신 김흠(金欽)ㆍ김선(金瑄) 등 4~5인과 서울에 있는 조사(朝士)들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었다.
이때 해주 목사 최기(崔沂)는 그 내력을 환히 알았으므로,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고변자를 장살(杖殺)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졌다. 한찬남은 최기가 고변자를 죽여서 그 흔적을 없앴다 하여, 그를 의금부로 잡아다가 역적죄를 적용, 장살한 다음 사후에 전형(典刑)을 추시(追施)하였다. 그리고 최기의 아들 최유석(崔有石)과 조카 최유함(崔有涵)ㆍ최유영(崔有泳)은 다 극형을 받았으며, 사위 유찬(柳燦)은 옥중에서 죽고, 외손과 친속들은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또 정문익은 외딴섬으로 유배되고, 해주 사람 김흠 등 수십 인도 죽거나 아니면 유배되었다. 이연평(李延平.연평부원군 이귀)과 김창일(金昌一)은 최기가 붙들려 올 때 길 옆에 나와 보았다고 하여, 중도 부처되었으며, 유찬의 아들 유시영(柳時榮)과 유찬의 동서 윤훈거(尹勛擧)도 다 장류(杖流)되었다. 최유석의 아내 이씨는 곧 한음의 손녀로, 남편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다가 약을 마시고 자결하니 사람들은 모두 불쌍히 여겼다.
● 허균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아들로, 명문에 태어났고 또 그의 문장은 당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천성이 요망하고 행실 또한 괴이하였다. 상(喪)을 입는 동안에 기생을 가까이 하는가 하면 참선도 하고 부처도 섬기는 등 보고 들어서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만년에 대북에 투신하여 이이첨을 깍듯이 섬겨 폐모론을 담당하였다. 그는 괴상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낙천군(洛川君) 김개(金闓)ㆍ사간 신광업(辛光業) 등으로 심복을 삼았는데, 그 종적이 간교하고 비밀스러워서 단서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형에게 죄를 지어 향당(鄕黨)에서 용납되지 않는 하인준(河仁俊)ㆍ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ㆍ서상안(徐尙顔)ㆍ남정엽(南正燁) 같은 자들이 그의 문으로 폭주하여 열 명씩 백 명씩 떼를 지어 다투어 소장을 올려 폐모하기를 주청하였다. 혹 성균관에 근거를 두어 출세의 디딤돌을 삼기도 하고, 미리 과거 제목을 내서 급제의 길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살에 편지를 묶어 서궁에 쏜 것은 극히 요괴하였으며, 방(榜)을 걸어 남문에 통유한 것은 더욱 참혹하였다.
● 무오년(1618, 광해군 10) 8월이 되자, 도성이 떠들썩하고 조야가 시끄러워졌다. 내란이 조석 간에 일어난다면서, 이고 진 행렬이 밤낮으로 잇따르고, 달리는 말과 수레는 거리를 메꾸었다. 그 비참한 정경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 장령 한명욱(韓明勖)은 계를 올려, 남문에 방(榜)을 건 것은 필시 하인준이므로 이 자를 엄중히 국문한다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인준을 국문하니, 그는 허균이 잘 안다고 끌어들였다. 허균을 국문하자, 그는 일일이 진술했는데, 곧 폐비를 칭탁하여 궐내를 범하자는 역모였다. 그리하여 황정필(黃廷弼)ㆍ이국량(李國樑)도 모두 처형되고 김개는 결국 장살되었다. 광해가 망하기 전에 이 무리들이 먼저 처형 되도 매우 통쾌한 일이다. 신광업(辛光業)은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가 반정 초에 처형되었다.
● 광해는 음란하고 포학한 것이 날로 심하여져서 널리 후궁을 선발하였으니, 허 숙의(許淑儀)는 부사 허경(許儆)의 딸이요, 윤 숙의는 현감 윤홍업(尹弘業)의 딸이요, 홍 숙의는 군수 홍매(洪邁)의 딸이요, 원 숙의는 수사(水使) 원수신(元守身)의 딸이요, 임 숙원(任淑媛)은 임몽정(任蒙正)의 첩의 딸이요, 정 숙원은 정지한(鄭之罕)의 누이동생이요, 김 상궁은 천한 노비의 딸이요, 이 상궁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 첫 벼슬을 시도하는 음관(蔭官)이나 변장(邊將)ㆍ변수(邊守)를 희망하는 무신이나 감사 또는 수령을 제수 받으려는 문사들은, 남몰래 궁중의 하인을 통하여 다투어 뇌물을 바치었다. 때문에 숙의의 친정집과 상궁의 일가붙이들은 권세가 혁혁하여 문 앞이 항상 붐비었다. 비단 함부로 벼슬자리를 노리는 자와 죽을죄가 면제되기를 바라는 자들만이 달려가서 빌붙는 것이 아니라, 상전을 배반한 노비, 묵은 빚을 받으려는 자들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이익을 탐내는 몰염치한 자들은 부귀공명을 누리게 되고, 예의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는 몸을 끌고 용감히 물러났다.
● 광해군 역시 관직을 제수할 때에 바치는 은이 많고 적음을 봐서 그 품계를 높이고 낮추었다. 또 인경궁(仁慶宮)ㆍ경덕궁(景德宮)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여 담장을 넓히었고, 산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거대한 뗏목이 강에 잇따랐다. 세금을 한정이 없이 징수하여 민력이 고갈되었고, 장정을 자주 징발하는 바람에 중들이 성 안에 가득했다. 이때에 터를 바치거나 돌을 바치거나 은을 바치거나 목재를 바치거나 혹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거나 혹 숯을 태워 쇠를 불리거나 한 자들은 다 이마에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반열에 서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 불렀다. 이충(李沖)은 여러 가지 채소를 헌납하여 호조 판서에 오르고, 한효순(韓孝純)은 산삼을 바치고 갑자기 정승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산삼 각로를 사람들은 다투어 흠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는 세력을 당할 수 없네 / 雜菜尙書勢莫當
● 식년(式年)에 실시하는 강경과(講經科)를 보면 응시하는 자들이 서서 삼경 중에서 각각 한 대문씩을 미리 외어서 과거 때 배강(背講)하므로 통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대북(大北)의 자제라면 글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다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일곱 대문을 통하는데 원하는 대로 해준다.[七大文通從自願]’라는 말이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다.
● 누군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재영(李再榮)의 대작으로 급제하자, 어떤 이는 시를 이렇게 썼다.
양근 태수 불이 나게 드나들더니 / 揚根太守往來忙
감사댁에 경사 났네 / 方伯家中慶事昌
● 김충보(金忠輔)는 초명이 김유영(金有永)인데, 그는 최희남(崔希男)의 배반한 종으로 성병사(成兵使)의 계집종 은종(銀從)의 남편이다. 그는 유희분을 배알하고 각 집의 공물(貢物)을 방납(防納.이조 때 공물을 대신 바치던 일. 이때 토산물이 아닌 공물이 책정된 경우, 구매하여서라도 이를 상납해야 했음.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취리하는 상인 혹은 아전이 중간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납을 막고 대납을 하였음)하여 그 이익을 유희분과 나눠 먹었다. 유희분은 그 사람됨을 착하게 여겨 그를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천거하였는데 일자무식이라 하여, 순검사(巡檢使) 권반(權盼)에게 내침을 당하였다. 유희분은 은을 상납하게 하여 통정대부로 승진, 장기 현감(長鬐縣監)에 제배하였다.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옮겨 조도사(調度使)를 겸한 그는, 여러 읍을 순력하면서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 궁궐 건축비로 보조하는 한편, 그 나머지는 유희분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몹시 기뻐하여 가선대부로 포상하였다.
은종(銀從)의 아비 언종(彦從)의 묘가 군위(軍威) 땅에 있는데, 김충보가 군위에 도착하여 본현(本縣)을 시켜 요전상(澆奠床 산소에 차리어 놓는 제물)을 갖추어 그 묘에 제사하게 하였다. 향소(鄕所) 이종가(李從可)는 제물을 가지고 가서 묘 밑에 앉아 탄식하기를,
“세상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언종은 사사노비인데, 내 사족(士族)의 자식으로서 언종의 제물 감독관이 될 줄이야 예전엔 미처 생각도 못하였다.”
하고 씁쓸해 하였다. 이 또한 젊은이들에게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겠기에 여기에 기록한다.
● 양주(楊州) 대탄(大灘) 근처에 나이 스무 살이 지나도록 장가를 못 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밭과 노비를 팔아 조도령(調度令)에게 베를 바치고 통정대부 직첩 한 장을 샀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일러 ‘도령님 첨지[都令主僉知]’라 불렀다.
또 경상도 진해에 처녀 한 사람은, 부모가 다 돌아가자 그 유산을 물려받아 비단과 베를 많이 쌓아 두고 있었는데, 조도사(調度使)가 강제로 처녀에게 숙부인(淑夫人) 직첩을 받게 한 뒤 그의 비단과 베를 빼앗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아기씨 부인[阿只氏夫人]’이라 불렀다. 세상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겠다.
● 정몽필(鄭夢弼)은 이조의 서리 정애남(鄭愛男)의 조카로, 몰래 김 상궁과 통하여 늘 궐내에 있으면서 사람 죽이고 살리기를 하고픈 대로 하였으며, 수령과 변장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사간 조경 일장(趙絅日章.일장은 조경의 자)의 종이 주인을 배반하고 정몽필의 집에 들어간 뒤, 주인이 되찾을까 염려하여 백단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정몽필은 곧 포도청에 부탁하여 군졸을 풀어 일장을 체포, 변소에 감금하고 그를 윽박질러 문권(文券)을 만들어 바치게 한 뒤에 놓아 집으로 돌려보냈다. 반정 뒤에 그는 종루(鐘樓)에서 효수되었다.
● 노적(奴賊)은 곧 건주위(建州衛.만주에 있는 여진족의 근거지)이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봄, 적의 세력은 치열하고, 병마 또한 정예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가리켜 남조(南朝)라 부르는 등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장차 함부로 날뛸 조짐이 있었다. 이에 천자는 진노하여 양호(楊鎬)를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로 삼고 이여송(李如松)을 총병(摠兵)으로 삼는 한편, 특히 도독 유정(劉綎)을 보내서 10만 군대를 조발하고 또 우리나라에 명해서 건주(建州)를 협공하게 하여 적의 섬멸을 함께 약속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았다. 그들은 병졸 2만을 거느리고 행군, 우모령(牛毛嶺) 산채에 도착하자, 유정의 10만 병졸은 적에게 대패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교 유격(喬游擊)은 목을 매어 죽었다. 군병들은 서로 짓밟아 시체는 1백여 리에 깔렸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장수와 졸병을 친히 거느리고 무장을 푼 다음 적에게 투항하였다.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좌영장(左營將)으로서, 대장의 항복을 보고 그 분함을 이기지 못했는데 심하(深河)에 이르러 버드나무를 의지하고 화살을 뽑아 적 8~9명을 연달아 쏘아 죽였다.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칼을 휘둘러 적을 베다가 칼이 부러지니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 노적(奴賊)은 그 나무를 불러 ‘장군류(將軍柳)’라고 하였다.
● 신유년(1621) 겨울,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처음 유격 장군이 되어 임반(林畔)ㆍ용천(龍川) 등지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노적 수천 기(騎)는 얼음을 이용, 압록강을 건너와 밤중에 모 도독의 진영을 불의에 습격하였다. 유격 장군 모문룡은 말을 타고 달아나고 한군(漢軍) 천여 명은 거의 다 죽어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민들은 한 사람도 노략질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대개 광해군이 비밀히 강홍립에게 분부하여 노적에게 투항하게 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 모문룡은 가도(椵島)에 들어가 자리 잡고 대장기를 세워 대중을 불러 모았으며, 요동 백성을 불러들여 시장을 넓혔다. 군량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져갔고 물자는 중국에 의지했다. 그리하여 변방을 진압한 혁혁한 큰 공은 없었지만, 때때로 병력을 과시한 조그만 공로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게 보고함에 이르러서는 사실보다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써 일약 도독의 지위로 뛰어올라, 분수에 넘치는 개부(開府.부서를 개설하여 요속들을 두는 것)의 높은 대접을 받았다. 10년의 영달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원통하게 죽고 마니, 아! 애석하고 애석하다. 그는 원숭환(袁崇煥)에게 참살되었고 원숭환 또한 뒤에 환관에게 피살되었다 한다.
● 계해년(1623, 인조 1) 반정은 부득이한 거사였다. 광해는 악행이 상주(商紂)보다 심하고 죄는 양광(楊廣)보다 많았으니, 진실로 할 만한 세력만 있다면 누구나 베는 것이 옳았다.
거의 공신(擧義功臣) 1등은, 김유(金瑬)ㆍ이서(李曙)ㆍ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김자점(金自點)ㆍ이귀(李貴)ㆍ심기원(沈器遠)ㆍ심명세(沈命世)ㆍ최명길(崔鳴吉)이요, 2등에는 이시백(李時白)ㆍ장유(張維)ㆍ이시방(李時昉)ㆍ김경징(金慶徵)ㆍ심기성(沈器成)ㆍ원두표(元斗杓)ㆍ이해(李澥)ㆍ홍진도(洪振道)ㆍ신경유(申景裕)ㆍ이항(李沆)ㆍ구인후(具仁垕)ㆍ최내길(崔來吉)ㆍ신준(申埈)ㆍ이중로(李重老) 등이며, 3등엔 김연(金鍊)ㆍ이후원(李厚源)ㆍ조흡(趙潝) ㆍ유백증(兪伯曾)ㆍ박정(朴炡)ㆍ유구(柳䪷)ㆍ송영망(宋英望)ㆍ신경식(申景植)ㆍ신해(申垓)ㆍ 홍서봉(洪瑞鳳)ㆍ홍진문(洪振文)ㆍ이의배(李義培)ㆍ이원영(李元榮)ㆍ홍효손(洪孝孫)ㆍ한여복(韓汝復)ㆍ이기축(李起築)ㆍ노수원(盧守元)ㆍ이덕부(李德符)ㆍ이사주(李師周) 등이었다.
● 반정하던 날, 의거하는 장수들이 제각기 무리를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해는 벌써 황혼인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의 군사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그날 믿는 바는 오직 이서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였다. 주상(主上.인조)이 친히 연서관(延曙館)까지 마중을 나가서야 비로소 모두 합세하여 행군할 수가 있었다. 한밤중에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가 선봉이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돌격,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곧 장신(張紳)의 장인으로, 일찍이 양(兩) 대장과 더불어 내응하기로 서로 약속됐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졸은 한 사람도 나와서 방어하는 자가 없었다. 초관(哨官) 이항(李沆)은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반정 군을 맞아들였으며, 제장들은 주상을 받들어 인정전(仁政殿)에 오르게 했다. 궐내에 입직한 관원들은 앞을 다투어 숙배를 드리는데, 보덕 윤지경(尹知敬)만은 천천히 직소(直所)에서 나오더니 어좌 앞에 서서 말하기를,
“거조(擧措)를 알고 난 후에 절하겠소.”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이는 종묘사직을 위한 계교요.”
라고 말하자, 지경은 급히 절하였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은 군사들의 손에 붙들려 들어왔는데, 영문을 몰라 숙배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칼로 치려고 하니, 연평(延平)이 그를 붙들며, 말하기를,
“이는 곧 반정이요.”
하자, 덕형은 비로소 꿇어 절하였다. 백관ㆍ상하ㆍ군민들은 다 주상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앉게 하였다. 아! ‘연서(延署)’라는 참언(讖言)이 이날에 와서 꼭 들어맞았으니, 만사는 다 미리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인정전에 등극한 후에 광해 부자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상하는 모두 허둥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이윽고 어떤 장사꾼이 와서 광해가 뒷담을 넘어 도망해서 지금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보고하는가 하면 또 내관인 배(裴)씨는 와서 폐동궁(廢東宮)이 담을 넘어와서 저의 집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곧 군병을 풀어 궐내로 태워오는 한편 양 대장은 곧 경운궁(慶運宮)으로 달려가, 문무 백관과 상하 군민이 다 성상(인조)을 추대한다는 뜻을 대비 전에 아뢰고, 어보(御寶)를 바쳐 대비의 처분을 기다렸다. 대비는 곧 어보를 성상에게 돌려 종사와 신민의 주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광해의 불충ㆍ불효함과 백성들에게 포악한 죄를 들어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아 강화도로 내쳐 안치하고,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柳)씨도 함께 위리 안치했으며, 폐세자는 폐빈 박씨와 함께 위리한 후 별장(別將)을 정해서 지키게 하였다. 상은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보내주고 때때로 내사(內使)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하였다.
● 반정 때, 종사관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은 다 낭관을 제수하고, 김경징(金慶徵) 역시 좌랑을 제수했다. 김원량(金元亮)에게는 사평(司評)을 제수하여 정훈(正勳)에 기록하고 그 나머지 홍제원 집결에 동참한 자들도 유생ㆍ무사를 막론하고 다 6품 이상을 주어 외직 또는 내직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훈공은 별단에 기록하였다.
● 군문(軍門)에서 행형 한 명단은, 김 상궁(金尙宮)ㆍ박정길(朴鼎吉)ㆍ한찬남(韓纘男)ㆍ백대형(白大珩)ㆍ박홍도(朴弘道)ㆍ정몽필(鄭夢弼)ㆍ강익(姜翼)ㆍ윤천생(尹天生)이고, 정형한 명단은, 이이첨ㆍ이원엽ㆍ박응서ㆍ이홍엽(李弘燁)ㆍ이익엽(李益燁)ㆍ이위경(李偉卿)ㆍ정조ㆍ윤인ㆍ정인홍(鄭仁弘)ㆍ윤유겸(尹惟兼)ㆍ원종(元悰)과 내관 조귀수(趙龜壽)ㆍ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ㆍ유세증(兪世曾)이고, 베기만 한 명단은, 이정원(李廷元)ㆍ유희분ㆍ유희발(柳希發)ㆍ채겸길(蔡謙吉)ㆍ황덕부(黃德符)ㆍ한정국(韓定國)ㆍ한정국(韓正國)ㆍ한안국(韓安國)ㆍ한희(韓暿)ㆍ한오(韓晤)ㆍ윤삼빙(尹三聘)이다.
● 반정 이튿날 표신(標信)을 보내어 박엽(朴燁)을 평양에서 베고, 정준(鄭遵)을 의주에서 베었다. 정준은 정조의 아우인데 의주 부윤으로서 당시 의주부에 있었기 때문에 오랑캐에게로 달아날까 염려해서 사사(賜死)한 것이며, 박엽은 뇌물을 많이 바침으로 해서 광해의 총애를 받아 평안 감사가 되었는데, 살인하기를 마치 쑥대 베듯 하여 관서 지방의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은 자였다.
이해 정월 보름날 밤에 박엽은 시인 변헌(卞獻) 등과 더불어 법수교(法水橋) 위에서 달 놀이를 하였는데, 술이 얼큰해지자 절구 한 수를 이렇게 읊었다.
평양 감사 한 대이건만 / 一代關西伯
법수교는 천 년이라네 / 千年法水橋
아마도 오늘밤 저 달이 / 只應今夜月
끝내는 가련한 밤이 되리 / 終作可憐宵
시의 애절함이 그의 평소 작품과는 딴판이다. 그의 죽음의 징조가 이미 이 시에서 보여 진다.
● 각 도에서 작폐(作弊)한 네 조도사(調度使) 김순(金恂)ㆍ김충보(金忠鞴)ㆍ왕명회(王明恢)ㆍ 지응곤(池應鯤) 등 4명은 각기 현지에서 효수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씻어 주었다. 박종주(朴宗冑)는 대구에서 참했는데, 그는 대북파의 명사로서 남의 논밭과 노비를 빼앗아 영남 사람들의 원망을 산 자이며, 양호(梁護)는 제주에서 효수하고 그의 재산은 몰수하여 호조에 충당했는데, 그는 목사로서 백성을 착취한 자이다.
● 13일 밤, 경기 감사 박자흥(朴自興)은 탈출 도주하여 양주로 달려갔다.
마침 박안례(朴安禮)가 부사로 있었으므로 자흥은 거기서 군병을 조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반정의 정확한 소식을 듣고는 곧 군사를 해산하고 단기로 도주하여 그의 아버지 박승종과 함께 과천에 있는 어떤 절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옷 속에서 유표(遺表)가 나왔는데, 거기에,
“신 승종 부자가 능히 바로 구원하지 못해서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조정은 곧 그의 일가붙이들을 시켜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여 초빈(草殯)하게 하였다. 박승종 부자는 혼조(昏朝.광해조)와 가까운 사돈으로서, 그 형세가 장차 보전하기 어렵게 되자 하루아침에 자결하였으니 마땅하다 하겠다.
승종의 거리낌 없는 탐욕과 방종은 사람들이 운운하는 바이지만, 염치라곤 도무지 없고 사치와 탐욕이 극에 달한 유희분(柳希奮) 정도까지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사류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고, 폐모론이 진작 결정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보면, 그에게 공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또 그가 반정 소식을 듣고 표(表)를 남긴 뒤 자결한 것은 곧 그의 마음이 죽고 사는 데 그렇게 구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자응(自凝)은 정청 때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소 거처하는 방을 ‘읍백(揖白)’이라 이름 한 자인데 유희분의 아들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박승종의 논밭과 노비는 다 적몰되었으니, 송 태종(宋太宗)이 한통(韓通)을 포증(褒贈)한 전례 로 볼 때 성조(聖朝)에 대한 유감이 없지 않다.
● 6월 초 3일, 강화도에 위리 안치된 폐 세자가 땅을 파고 울타리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다가 순라군졸에게 발각되었다. 이때 연평군 이귀는 도헌(都憲), 이준(李埈)은 집의, 심기원ㆍ김자점은 지평, 윤황(尹惶)은 사간, 김상(金尙)은 정언으로 있었는데, 연평군과 김자점ㆍ심기원은 법대로 처벌할 것을 주장했고, 윤황ㆍ이준ㆍ김상은 전은(全恩)을 주장했다. 이날 이준은 철원 부사로, 윤황은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김상은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각각 보냈으며, 폐 세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폐빈 박씨는 이보다 먼저 목을 매어 죽었으며, 폐비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은 이해 가을 스스로 굶어 죽었다.
폐 세자가 울타리 밖으로 나올 때, 그의 소매 속에서 편지 하나가 나왔는데 이는 곧 황해 감사에게 발송하려는 것이었다. 황해 감사 이명(李溟)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는데, 연평군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곧 석방되었다.
● 홍제원(弘濟院)에서 진영을 짤 때에 멀리서 온 군졸들은 그 대부분이 유생들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잡탕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못하였다. 이때 역적이 된 이괄(李适)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아직 왕께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는데, 김명숙(金明叔)의 부름을 받고 군관들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나왔다. 대장은 무신 중에 대장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은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 그를 대장에 추존하고 곧 승상(繩床)에 앉힌 뒤 양 대장 이하 모두 그에게 재배하니, 그때서야 군중은 엄숙한 기율이 서는 듯하였다.
뒤에 반정의 공을 논함에 있어, 이흥립(李興立)을 도감대장(都監大將)으로써 내응(內應)한 공이 많다고 하여, 1등 훈(勳)에 기록, 공조 판서를 제수했는데, 이괄의 이름은 3등 훈에 기록 판윤(判尹)을 제수하였으므로, 그는 마음에 원망을 품고 역모의 뜻을 몰래 쌓아오던 중, 마침 조정은 평안남도 국경을 칠 양으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에 주둔케 했으며, 이괄로 부원수 겸 평안도 병사를 삼아 영변(寧邊)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정병 2만을 요청하므로, 조정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충청ㆍ경상ㆍ전라의 군사에서 뽑아 보내 주었다. 이때 유몽인(柳夢寅)ㆍ이유림(李有林)ㆍ황현(黃鉉) 등이 모역죄로 처형된 뒤라서 도성 안에는 많은 변괴가 있었기 때문에 도감 장관 중 성안에서 사는 이가 거의 10여 가에 이르렀는데, 대장이 영을 순식간에 각 집에 전달한다면 그것은 곧 군병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하여 인심이 뒤숭숭해서 아무도 그 전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 문회(文晦)ㆍ우(李祐) 등이 고변하기를, ‘이괄과 그 아들 이전(李荃)은 모역할 기미가 뚜렷이 있다’고 하자, 승평(昇平.김유) 이하는 무고(誣告)로 여기고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연평군만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사실이든 거짓이든 고변이 일단 들어 왔으니, 이괄을 체포하여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은 연평에게 이르기를,
“이괄이 어찌 모역할 리가 있겠느냐?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이귀의 계청(啓請)을 나는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모두 연평의 계청을 그릇된 것으로 여겼는데 문회와 이우 등의 고변이 또한 의심이 없는 듯하므로 금부도사 심대림(沈大臨)과 선전관을 영변(寧邊)에 보내서 이전을 나문(拿問)하게 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에 도착하자 그 소식이 벌써 병영에 알려졌다. 이때 이괄은 한명련(韓明璉)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군병을 일으켜 급히 자산(慈山)으로 출병케 하고, 자기와 합세해서 서울로 들어가려는 계책을 꾸미는 한편, 관하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아문 바깥에서 군병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도사와 선전관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이괄은 이들을 잡아 뜰 안으로 끌어들여 칼로 난도질하여 불 속에 던진 다음, 항복해 온 왜병 수백 명으로 선봉을 삼아 그날로 행군하였다. 이들이 안주(安州)를 거치지 않고 자산 길을 택한 것은 그때 도원수가 기성(箕城)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성(山城)에 진을 친 이들은 한명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별장 유순무(柳舜懋) 등 4인은 각기 수백 명씩 인솔하고 밤을 타 도망하여 곧장 원수부(元帥府)로 가서 죄를 내리기를 기다리니, 원수는 믿어 의심치 않고 전날보다 더 낫게 대해 주었다. 명련이 자산에 이르자, 이괄의 군대는 그 위세를 더욱 떨쳤다. 삼남에서 선발한 군병과 본도의 군병이 모두 이괄의 휘하에 들어갔는데, 도원수는 군병 없는 장수로서 다만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이 인솔하는 군병 수천 명만을 이끌고 적진 뒤에서 서서히 행군하여 황해도 경계로 들어왔다. 아군은 신교(薪橋)에서 크게 패하고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에 이르러,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평산 부사 이확(李廓)은 역시 적에게 패했다. 이중로는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확은 쌓인 시체 속에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적병은 곧장 임진강까지 이르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 하였다.
● 2월 초 8일. 대가(大駕)는 남으로 옮겼으며, 초 10일 적병은 서울에 입성, 경복궁 옛터에 진을 쳤다. 흥안군(興安君)은 일찍이 이괄의 추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왕을 뒤따르지 않고 뒤에 처져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괄은 군병으로 그 궁을 호위하는 한편 거리에 방을 붙여, 성 안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본업에 종사케 하였으며, 또한 성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백관을 배치하여 조정의 형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동안 세력을 잃었던 사람과 무뢰한들이 잇따라 모여들어 그 수조차 알 수 없었다.
● 11일. 원수(元帥)는 제장들을 독려, 합전함으로써 마지막 승부를 결정하는데, 남병사(南兵使) 이수일(李守一)ㆍ황해 병사 변흡(邊潝)ㆍ안주 목사 정충신(鄭忠信)ㆍ철산 부사(鐵山府使) 민여검(閔汝儉)ㆍ중군(中軍) 남이흥(南以興)ㆍ별장 유효걸(柳孝傑)과 조시준(趙時俊)ㆍ첨사 이경정(李慶貞) 등이 각기 부하를 거느리고 길마봉 위에 결진, 성 안을 굽어보았으며, 종사관 김기종(金起宗)은 여기저기 왕래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때 이괄은 저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를 칠 때 한 것처럼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적을 섬멸한 뒤에 모여서 밥을 먹자’ 하고, 군사를 내몰아 싸웠다. 그리고 성중 사람들로 하여금 성에 올라 이를 구경하게 하였다. 싸움이 어울린 얼마 뒤 항복한 왜병이 올려보고 쏘는 조총의 화약 연기가 서풍에 날려 자욱한 안개처럼 진중을 가로 덮었다. 그러자 적병들은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질서를 잃고 갈팡질팡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이를 틈탄 아군은 용기 백배, 총과 활과 돌을 비 오듯 퍼부으니 적은 이를 지탱하지 못해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 위에서 관전하던 백성들이 성문을 굳세 닫고 소굴을 소탕하니, 이괄은 항복한 왜병과 친신군관(親信軍官) 얼마만을 거느리고 그길로 삼전포(三田浦)를 건너 이천(利川) 꽃고개로 달려갔다. 그는 마을로 들어가 말도 먹이고 밥도 짓다가 그날밤 군관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에게 참수되어 머리는 행재소(行在所)에 전달되었고,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말을 타고 탈주, 오랑캐 땅으로 잠입하였다.
● 대가(大駕.임금의 행차)는 금강을 건너서 공주(公州)에 머물다가 5일 만에 환도하였다. 신경진(申景禛)과 심기원(沈器遠)은 흥안군을 마음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수일 동안 갇혔다가 파직 방송되었다.
● 당초에 금부도사의 장살(戕殺) 장계가 올라오던 날 밤, 그 진위 여부를 변별하지 못한 탓으로 39인이 일시에 참살되었으니, 이는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변고로 나라의 명맥이 그때 벌써 상했던 것이다. 원통하고 억울함을 이루 다 말하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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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사기문(逸史記聞)은 찬자 미상(未詳)이지만 의미있는 민간기록으로 보인다. 임진란후의 인조반정,병자호란,그리고 삼학사의 한사람이였던 홍익한이 심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이 일기형식으로 실려있다. Upload 용량이 많아서 1/2, 2/2로 분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