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세례 Baptism of Jesus -
☆ 2014년 가해 1월12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청주] 세례의 의미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42, 1 - 4. 6 - 7
† 제2독서 : 사도 10, 34 - 38
† 복음 : 마태 3, 13 - 17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오늘 전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대한 순종과
예언의 성취를 위해 겸손하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성부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우리 역시 주님의
세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세례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품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은총을
청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는 온유하고 자비한 모습으로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고 예언한다.
이로써 그는 민족들의 빛이 된다(제1독서).
★ 베드로는 신심 깊은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며,
하느님께서 만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신다. 그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복음).
◈ 오늘의 묵상
황량한 광야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요르단 강에 고개를 숙이신 채
서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세례자 요한의 표정은 경건하고 감격에
차 있습니다. 그의 손바닥에 담긴 물이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적시고
이윽고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고개를 드신 채 물에서 나오시자,
하늘에 성령의 표징이 나타나면서 성부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무나 생생한
표현의 말씀이어서 그런지,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예전의 많은
영화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퍽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드러내곤 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면,
이제 주님의 세례에서 비롯된 우리의 세례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차례입니다. 성인이 되어 오랜 기다림과 어려움 속에 세례 받은
분이라면 세례를 받는 그 순간의 기쁨과 감격을 생생히 떠올려 보십시오.
유아 세례를 받았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살아온 인생 여정이 어떠했는지 잠시 되돌아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새롭게 의식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순한 성찰이 거듭될 때 인생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이는 더
이상 이름이나 명예 따위에 갈급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세례의 의미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태3,13-17)
세례를 받았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아무아무에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제대로 해야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어둠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그리고 그
표징으로 우리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
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합니다.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 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 다. 기쁨도 슬픔도!
3. 만져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 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이러한 삶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
오셨습니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7).
이 말씀은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그리고 듣게 되는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초를 맞이하면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런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혼사를 위해 길일을 택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등지는 일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점집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묵주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는 한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티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구원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게 될 때 내 삶이 주님의 삶으로 바뀌고, 은총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의
시작이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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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에게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었는데 성당이 너무 낡아 비만 오면 물이 새는데도 보수할 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뭄으로 고생하는 교우들에게 헌금 걷기도
그렇고....
하지만 교우들 중 부자로 소문난 할머니 한 분이 홀로 사시길래 그
할머니 댁에 가서 성당을 위해 1억만 봉헌해달라고 청했지만...들은
건.... “택도 없는 소리 절대 하지 마이소! 1억이 무슨 아 이름인줄
아는교?”였습니다. 아무리 여러 번 설득을 했지만 소용이 없어
포기하려고 할 즈음 사제관에 그 할머니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장 할 이야기가 있으니 퍼뜩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뭔
소린가 해서 왔는데..할머니 가로되..“지사..마..신부님의 딱한 처지를
듣고 1억을 성당에 봉헌할라꼬 하는데...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더..
마..그건예...’홀로 살면서 자식같이 아끼는 개 한마리가 있는데..그
개에게 세례를 주시오. 그래야 그놈과 천당에도 같이 갈거 아닙니껴”
세상에..이게 말이 됩니까? 개에게 세례 준다는 게..신부님도 어이가
없었지만 눈앞의 1억 때문에 할머니에게 비밀 지키라고 하고는 한밤중에
몰래 사제관에 그 개를 데려다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성당 보수를 성공리에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성당
보수공사를 마무리했으면 홀가분해야 할텐데 영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급전이라고 해도 개에게 세례를 주다니..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교님께
갔습니다. 주교님을 만나 개에게 세례 준 이야기를 했는데 주교님이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부! 개에게 세례 준 댓가(?)로 얼마
받았나? 한 백만...”신부님은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러면
천만원이라도 받았나?” “아닙니다. 1억원입니다.”그러자 주교님께서
물었답니다. “그래? 그럼 견진은 언제 줄거지?”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세례는 영원한 생명과 회개로 인한 깨끗해짐을 의미
요 며칠 계속해서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10년 전에 생활했었던 갑곶성지가 떠올려집니다.
초창기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혼자서 뭐든 다 해야
했었지요. 문제는 그런 일들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수도가 얼어버리는 것이었지요. 여기에 보일러에 들어가는
수도관까지 얼어버리면 난방도 되지 않아서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모릅니다.
물이 나오지 않으니 어렵고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씻지도 못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가 없고, 심지어는 화장실도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을 흔하게 볼 수 있고 또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잘 몰랐는데, 막상 사용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물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긴 사람 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물이라고 하지요. 그만큼
물은 인간에게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으며, 또
깨끗해지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이렇게 물에는 생명 그리고 정화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통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즉, 세례를 통해 참 생명을 받으며,
죄의 회개로 인해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물의 세례인데,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냥 일회적인 예식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일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중요한 지는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겠다고 다가서자 깜짝
놀라면서 말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세례는 영원한 생명과 회개로 인한 깨끗해짐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또한 더 이상 깨끗해질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지요. 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세례이기에 당신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나도 이 세례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이렇게 받고 있는데, 나약하고 부족한 너희가 어떻게 세례를 가벼이
여기는가?’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세례를 기억해봅시다.
그 당시(유아세례 받으신 분은 기억할 수 없겠지만)에 받았던 질문을
이곳에 적어봅니다. 이 질문에 천천히 답변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세상의 것들을 향해서가 아닌, 주님께로만 향했으면 합니다.
+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 버립니까?
+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하여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 죄의 근원이요 지배자인 악마를 끊어 버립니까?
+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 성부를 믿습니까?
+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 성령과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행복은 학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있는 보석을
발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이동연).
중요한 것은 집중하는 것
어제는 괜히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머릿속도 복잡하고 그러면서 괜한 짜증도 마음속에 생깁니다.
그 마음을 좀 풀려고 묵주를 들고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동네를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닭을 키우는 어떤 집 앞을 지나가다가 여러 마리의 닭 중에서
움직이지 않는 닭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인 것 같습니다. 암탉은 절대로 하나 이상의 알을 품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로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알 하나만을
품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의 답답함이 조금 사라집니다. 집중하지
않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했던 욕심들이 답답함과 짜증을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일을 많이 하려는 자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라는
말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집중하는 것입니다. 암탉이 한 개의 알을
소중히 품고 있듯, 너무 무리하지 않고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세례의 은총을 늘 기억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세례의 은총을 늘 기억하십시오.'
2014년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복음묵상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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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라 하면 지은 죄를 씻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만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죄로 인해
생겨나는 세상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아픔도
기쁨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 누구의 죄라도 함께 보속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보다 나은 세상과 개인을 꿈꿀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매일 매일을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때가 묻었으면 닦으면 된다.
닦으면서 닦아주면서 비록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남는다 해도 함께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이 복음적 삶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예수님께만 한정된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딸 그리고 마음에 들게
창조된 귀한 자녀들이다.
사랑 받고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분께서 나를 마음에 들게
만드셨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보는 거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분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마음만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있단
말인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참된 겸손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주님 세례
2014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레 축일
루카3,13-17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참된 겸손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주님 세례>
지금은 세례성사 예식이 많이 간소화되었습니다. 세례 성사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순간 세례 집전 사제는 세례 대상자의 이마에
세례수를 부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과거의 세례성사 예식은 좀 더 구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생생했고 더 실감났습니다.
본 성전 외에 세례당이 따로 건축되었는가 하면, 성당 한쪽에 세례대가
따로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세례 성사 예식 전 세례 대상자는 대중탕처럼 생긴 세례대 저쪽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세례 대상자는 입고 있는 세상의
옷을 벗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세례대에 담긴 물에 온몸을 침수합니다.
그리고 반대쪽 계단을 통해 걸어 나옵니다.
입교자는 세상의 옷을 벗음을 통해 지금까지 걸치고 왔던 낡은 인간,
죄로 물든 인간,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세례대 저쪽 건너편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통과하듯이
세례수를 통과해 이쪽 즉 약속의 땅,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이러한 건너옴의 예식을 통해 입교자는 새 인간, 영적 인간,
영원한 생명을 지닌 불멸의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 생각할수록 은혜롭고 감지덕지한 은총의 성사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걸로 삶을 마감합니다. 정작
중요하고 진정한 태어남인 세례 성사를 통한 새로남 없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초대받습니다. 그야말로 참 생명을 얻고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세례 받지 않는 인생은 완결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이래서 이웃 전교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는 우리에게 큰 의문부호가 하나 다가옵니다.
세례성사는 죄가 많은 우리 인간들,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성사입니다. 그런데 무죄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나약한 한 인간(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 세례 사건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사건입니다. 인간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일인데 완전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구간
탄생으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 사건을 통해 또 다시 자신을 극도로 낮추십니다. 보다 완벽히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표현이 예수님 세례인
것입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아랫사람 앞에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녀들 앞에 내가 담당하고 있는 학생들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주님 세례 축일
2014년 가해 1월12일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내려 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 3,13-17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자매님께서 천주교회를 다니는 언니와 함께 성지순례를 왔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잘하고,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는 전형적인 열심한
개신교회 신자였습니다. 언니는 동생 못지않게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성물 판매소를 하고 있으며 신앙생활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영하는데 동생은 영성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하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동굴에서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
그림을 보고 그 동생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라떼라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데 언니가 조용히 이야길
합니다. 동생이 세례 받기를 원하는데 주면 어떨까요? 순간
생각했습니다. 저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지금 마음이 흔들릴 때 세례를
주고 천주교로 확 끌어 들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서
본당에 가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으라고, 그 동생은 정말 열심히
교리를 배웠고 성탄 무렵에 헬레나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언니에 뒤지지 않는 열심한 신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 천주교로 개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이름 이외에 서양 이름이 있는데 자기도 그런
서양이름을 갖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긴 가브리엘, 베드로, 젬마, 헬레나, 루가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이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멋있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가 단순히 새로운 이름 하나 더 얻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세례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저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보았던 신문의 기사 내용이 생각납니다. 중국에서는 장군들이 매년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낸다는 기사였습니다.
장군들은 군 생활을 오래하였지만 장군이 되면서 병사들과는 많이
떨어져서 지내게 되고 그래서 병사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병사들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장군들은 매년 며칠씩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하고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병사들과의 일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체험이 장군들에게도 좋은 시간이 되고 있으며 병사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장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장군들도 그런 체험을
할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특권층’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런
특권층은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특혜를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특권층 중에 특권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몸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과 권한이 있지만 섬기려는 삶을 사시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세례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특혜를 받고 섬김을
받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않는 삶,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않은 삶 이였으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 이였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자녀로서 권리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세례”가 곧 구원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이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받은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바른 인생길을 가야합니다.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합니다.” 둘째, 그러면서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든 영광과 기쁨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시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수는 강하다."
2014년 가해 1월12일 예수 세례 축일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복음 : 마태오 3,13-17
< "순수는 강하다." >
"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 아이가 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피카소가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순수.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힘든 것, 그러나 꼭 찾아야 되는 것, 무엇보다 급한 일.
작가 송정림씨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타인의 불행에 가슴 아파 눈물짓던 동정심, 노래 한 소절에 가슴이
아리던 감정, 시집을 끼고 다니며 시 한 수를 외우던 설렘, 아주 작은
기쁨에도 티 없이 기뻐하던 순수성. 도대체 누가 훔쳐 버린 걸까요?’
그리고 송 작가는 그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기 위해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잔인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천진난만한 아이들 소리. 그곳으로 무엇인가가 떠내려 옵니다.
소녀의 주검입니다. 소녀는 순수성을 상징합니다. ‘시’는 바로 순수.
영화는 처음부터 단언을 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시는 죽었다고, 순수는
사라졌다고.
예순여섯의 미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홀로 손자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녀는 소녀 같은 마음을 지녔습니다.
“난 꽃을 매우 좋아해 꽃을 보기만 해도 배불러서 밥 안 먹어도 돼요.”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얼마 안 되는 순수한 사람입니다.
미자가 듣는 시 문학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모두 순수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 드렸던
순간, 첫 아이를 낳는 순간, 반 지하 방에 세 들어 살다가 자그마한
임대아파트를 얻어 들어갔던 순간, 이룰 수 없었지만 사랑을 느꼈던
순간,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어떤 한때.
그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고, 순수하게 감사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발표할
때 발표자들은 하나같이 울먹입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순수를 지니는
일인데,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그 순수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살아왔음을
느끼는 자각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렇게 대부분은 그 순수를 잃고
지금까지 단 한 편의 시를 써 볼 마음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시를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이렇게 흘러왔습니다.
물론 미자도 시를 쓰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어요?”
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순수를 지킬 수 있어요?”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 누구도 시원하게 대답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미 순수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미자는 그래서 엉뚱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 미자에게 현실이 닥칩니다. 사랑하는 손자가 오프닝 장면에서
보였던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자와 친구들이 그
소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거지요. 미자는 손자가 괴로워하기를 바랍니다.
나쁜 짓을 하면 괴로워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에는 피멍이 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는 무덤덤합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손자와 같이 죄를 지은 아이의 부모들은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합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미자는
갈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자의 마음에서 벌써 순수가
사라져 버린 것이 미자는 슬픕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변인처럼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는 미자를 ‘시나 쓰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시는 죽었고, 세상은 손자처럼, 혹은 손자의 친구, 그 부모님들처럼
무신경합니다. 미자가 즐겨 쓰던 하얀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갑니다.
그 하얀 모자가 날아가 버린 것처럼 미자도 순수를 버립니다.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러나 미자는 손자를 위하는 게 진정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손자의
죄를 덮는 것이 진정으로 손자를 위한 길인지 갈등합니다. 죄를 지은
자식은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순수입니다. 순수는 곧 사랑입니다. 미자는 손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지요. 손자를 경찰에게 넘깁니다. 그리고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시
한 편을 완성하게 됩니다.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순결한 눈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에서 걸어 나와 미자가 묻습니다. 당신 마음 안에서 순수는
안녕하시냐고.
[참조: 내 인생의 화양연화 중, ‘순수는 강하다’]
세례란 무엇일까요? 물로 씻고, 옛 나를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 이것은 이제 무뎌진 감정을 걷어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나의 불편함부터 생각해버리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작은 멸치들을 볶아 놓은 것을 먹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와 같은 사람들도 만나기도 했지만 창피해서 말 못하던 것인데, 사실
저는 그 멸치들의 눈이 싫었습니다. 자기를 먹는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집에 꽃을 꺾어가고 싶었지만 꽃이
아파할까봐 꺾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순수함은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의 아픔부터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순수함이 있다면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더 닮아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서른 살까지는 그렇게 당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을 깨고 나와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세상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곧 세례인 것이고 그
세례는 이 세상에 나가 다른 이의 고통을 대신 져 주라고 나를 밀칩니다.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정말 강한 것은 순수함이라고. 그리고 그 순수함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 사랑은 온 세상과도 맞서 이길 수 있는 강함이라고.
지금 개봉하며 많은 관객을 끄는 영화 ‘변호인’을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부산에서 가장 잘 나가던 한 변호사는 정치와 관계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돈, 명예보다 한 아이의 아픔이 더 가슴깊이 다가왔습니다.
순수성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을 희생하며 가난한
이를 위해 싸워나가게 됩니다. 정말 힘없고 비겁했던 것은 세상에
타협하며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아픔을 품어주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 일어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음은 깨끗해지고 순수해진다는 뜻입니다.
그 깨끗한 눈으로 보니 온 세상엔 눈물 날 감동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의 눈을 만들어주시고, 또 바오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게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눈은 나를 소진시키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위해서 눈물 흘려 줄 수 없다면 아직 우리는
온전히 세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수는 강합니다. 매일
매일의 세례로 순수의 힘을 회복합시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2014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하늘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례자 요한이 그랬고 예언자들이 그랬던 거지요.
그런 예언자처럼은 아니라도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사람은 좀 있지요.
양심은 하늘과 통하므로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우린다고 봐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이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이니 좀 많은 편이지요.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3,1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은근한 사랑의 불이되길
2014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오 3,13-17)
은근한 사랑의 불이되길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오늘은 주님의 세례축일입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분을 지난주에 우리는 보았고, 이제
그분께서 인간에게 나와서, 세례자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분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인간의
품위는 한층 더 거룩해지고 높아집니다. 바로 우리가 받는
세례성사도 그렇게 놀라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신성에
참여하는 품위로 올려지는 성사인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이 원문에는 아주 지극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주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인간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부모가 아기를 낳고 이놈이
웃음을 짓기 시작하고, 손. 발을 꼼지락 꼼지락 움직일 때, 그때
쳐다만 봐도 애간장이 녹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잖아요?
그렇게 사랑스럽다, 인간의 표현으로 한다면. 저도 조카들 한 달
만에 가서 보면 이놈이 금방금방 큰 것 같고, 눈을 뜨고 쳐다보면
정말 귀엽고, 발을 살살 간질이면 발을 꼼지락 거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아드님을 사랑하셨다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드님,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똑같이 우리들이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는 순간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딸이다.' 하고 선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온 세상
창조주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힘이 나고 기운이 뻗치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 살면서 지칠 때, 기운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제
그제 1박2일 봉사자들과 워크숍 다녀오고, 어제 미사 세대하고,
오늘 아침부터 계속 미사하고 몸은 지쳐있지만, 그렇지만 주님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 성체 앞에 가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 머물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지쳐있고
힘들 때, 그분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그분께
나와서 기도하고, 의탁하면 그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면서
또 다시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누굴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총회장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다,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을 다 극진히 애잔히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사랑받는 자녀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다' 하는 것들을 정말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보내면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저를 정말 극진히 사랑 하시나요!'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린다면
우리 안에,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더욱 기쁨으로 새록새록
돋아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인가?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훼의 종은, 하느님의 종은 외치지도, 큰소리를 내지도 않으면서,
심지를 꺼버리지도, 부러진 갈대를 꺾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생명을
살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분, 그 분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종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이미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종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해당되는 말이지만, 바로 주님의 자녀인 극진히 사랑받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녀들에게 내가 소리를
버럭버럭 낸다든지, 너 성당 안가다가 너 큰일 난다. 당신이
성당안가니까 그렇게 되는 것 아니야! 한다면 그것은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는 것이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소리를 내지 않고, 아주 은근하게 조용하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요리를 할 때도 은근히 요리를 해야 맛이 좋습니다. 묵은지
돼지등갈비 찜을 할 때도, 한꺼번에 다 넣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갈비를 생강과 함께 부르르 끓여서 찬물에 씻어서 놔두고,
묵은지 배추김치도 머리만 잘라서 너무 잘게 자르면 맛이
이상합니다. 긴 채로, 두꺼우면 반씩 찢어서 집어넣고, 이게
끓기 시작하면 등갈비를 넣는 겁니다. 그리고 육수물을 넉넉히
많이 넣어가지고 오래 끓여서 한 시간 이고 한 시간 반이고
은근한 불에서 충분히 끓일 때 묵은지에 양념이 다 돼있기 때문에
다른 간을 하면 안 되고 짜지 않고 맛있게 됩니다. 그런데 성격
급한 사람은 처음에 끓기 시작 하고 맛보다가 간장을 넣게 되면
짜지게 되어 맛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한 시간이고 한 시간 반이고 은근한 불에서 오래 끓이다
보면 김치도 흐물흐물하고 갈비도 흐물흐물 해서 소주나 막걸리랑
곁들여서 "오늘 내가 묵은지 했는데 한 잔 받으시오" ‘당신
얼마나 힘들어" 하며 기쁘게 웃음으로 대해 주는 겁니다. 성당에
다녀와서 자주 웃으면서 이렇게 은근한 사랑을 대할 때, 사랑이
전달이 돼서 나도 성당에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지난 1박2일 동안 워크 샾 에서, 어떻게 하면 냉담자 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가? 에 대해서 배웠는데 거기서 첫 번째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 이오 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화나고 속상하게하고 억울하게 해서 안 나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하고 사랑으로 다시 접근 할 때 마음이 열리기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꺼져가는 심지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성사주면서 성사 보러 들어온 신자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며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어요 하면 무서워서 누가
고해성사를 보러 오겠습니까! 10년 20년 묵은 죄인이 들어오더라도
하느님께선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오시기 힘이
들었습니까? 주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속도
가볍게 줘야지, 처음 온 사람에게 묵주기도 20단 십자가의 길을
해라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
감사합니다 3번 이러면 얼마나 보석이 쉬워요... 그렇게 해서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맛들이고 그러면서 점점
심지에 불이 붙고 그 영혼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해소에 들어올 때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두렵습니까!
나름대로 반성하고 생각하고 들어오신 분에게 야단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지난번에 미사 빠졌는데 바로 고해성사보기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겠어요. 그럴 때 미루지 않고 잘 왔다고
격려해 주는 것이 심지를 태우는 겁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가정에서 꺼져가는 심지에 자꾸 불을
붙여주고, 꺾인 갈대에 다시 생기를 북 돋아 주고 하는 모습이
우리가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복하게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속에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못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들의 빛이 되어서 사랑이 되어서 은근하게 자꾸 불을
지펴 주면은 힘을 얻고 다시 나올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감옥 이라는 것이 어둠 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꼭 교도소에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 가까이에 내 가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어둠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 자신이 극진한 사랑을 베풀어서 하느님이 그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이 세례 받을 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내가 마치 아기를 보면서 귀여워하고 끔찍이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나도 또한
그러한 사랑이 되어서 내 가족과 내 이웃에게 은근한 사랑의
불이되기를 이 미사 중에 간절히 청합시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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