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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신도회장으로 취임한
'이승현'인팩 코리아 대표이사
글 김형근 (본지 발행인)
2023년 1월에 한국불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사 신도회장에 취임한 이승현 회장은 1958년 전남 완도의 어룡도(魚龍島)에서 태어나 대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 섬은 큰 물고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 개에게 꼬리가 잘려 승천하지 못했다 하여 ‘어룡도’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회장이 태어난 시기에는 20여 가구 200여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14가구에 30여명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부산과 여수에서 목포와 인천으로 오가는 선박은 어룡도 곁을 지나쳐 가야 하므로 1910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건설된 어령도 등대는 유명하고 지금은 국가 문화유적이다.
어룡도에서 바다 건너 바로 보이는 곳이 땅 끝 마을 해남 송호리 포구이다. 송호리 포구는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자락 바다 가에 있다. 그 반대쪽에 대흥사 말사인 미황사가 산 아래 있다. 그러니까 어룡포에서 바다 건너 달마산이 있는데 산 너머에 미황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회장의 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대대로 집안 여인들은 바다건너 미황사와 대흥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서 식구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다.
이 회장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니면서 한자도 배웠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중.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은 울산에서 ‘울산과학대’를 졸업하였다. 그 후에는 한국에서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1970년대에 현대중공업을 시작으로, 옥포에 있는 대우 조선소, 부산에 있는 대한조선공사, 삼성조선소 등에서 일을 하였다.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거북선을 만들겠다는 꿈을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꿈이 조선소에서 직장 생활을 할때는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항상 꿈을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 회장은 스티브 잡스 등이 주도하여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혁명적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뒤쳐지지 않고 그 흐름을 따라 갔다. 이 회장은 삼성조선에서 6개월쯤 근무하다가 삼성그룹 내에서 반도체 통신의 신규 사업이 많아지고, 반도체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삼성반도체 통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진국가의 대부분의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는 직원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는 이공계 출신이었지만 삼성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업경영 전반에 대해 공부를 하는 행운을 만났다. 미국의 IBM을 비롯하여 포드, AT&T, 노스롭 그루먼, 크라이슬러, 일본의 닛폰전기(日本電氣), 아지노모도 등의 세계적인 기업을 방문하여 세계 초일류 회사의 프로세스를 공부하여 삼성이 그러한 선진기업과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회장은 삼성에서 업무개선(감사)팀에서 6년간 일을 하였다. 항상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그는 삼성에서 제작한 ‘삼성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이 상은 더 확대되어 ‘자랑스런 삼성인 상’이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방송통신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고, 입학 조건이 까다로워 입학이 매우 어렵고, 학사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고려대학교의 ‘E-MBA'를 졸업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92년 말 삼성전자 일본 주재원으로 출국해 약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세계적인 IT 강국이었다. 그는 21세기 기획단으로 선발되어 닛산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한 삼성자동차 업무에도 관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해 삼성은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였고 이회장은 이 자동차 사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1999년부터 이 회장은 일본에서 삼성전자의 신규사업팀장을 맡았다. 당시 삼성전자 제품은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서 저가 제품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신규사업팀의 임무는 세계적인 일본 회사들을 제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즉 보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저가 제품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당시 주변 여건은 뭐하나 좋은 것이 없어서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어려운 일이라 보통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할 일이지만 이 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해결의 문은 열릴 것이다고 생각하고, 일본 소니 본사를 바라보면서 결기를 다졌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사귀었던 사람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 많은 책을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다. 또 전자상거래(e Business)용어를 최초로 작명한 ‘맥케나’ 미국계 회사가 있는 것을 알고 그 회사에 컨설팅을 의뢰하였다. 이회장은 ‘맥케나’ 회사와 회의를 한 후에 일본에서 일찍부터 전자상거래를 시도하였다. 전자상거래는 대리점이나 여러 가지 전자제품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닌 회사와 소비자간 직접 거래이다. 지금이야 매우 활성화 되었지만 1999년 당시에는 새로운 판매 방식이었다. 물건을 직접 보지 않고 사는 새로운 방식이라 소비자들은 주문을 할지 말지 망설였고, 불량품이나 고장이 나면 애프터서비스도 문제라고 구매자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회장은 불량품은 무조건 완제품으로 교체해준다는 선전을 하고, 주문한 사람에게 배달도 이틀이면 도착하게했다. 이러한 서비스는 당시 일본에서는 매우 앞선 것이었다.
아무리 물건이 좋아도 구매자들이 모르면 물건을팔 수 없다. 그래서 구매자들이 주문을 할 수 있도록 알리기 위하여 도쿄 한 복판 최고급 호텔에서 삼성전자 다기능 모니터와 LCD 모니터를 알리는 화려한 홍보행사를 하였다. 이 행사는 아사이 TV, TV TOKYO 등 7개 방송사, ‘일본 경제신문’ 등 18개 신문사, 그리고 MBC, SBS, 동아일보 등 무려 60개 일본 국내외 언론 매체가 취재를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언론이 매우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 주어 이 홍보 행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일본인에게 최고의 인기 뉴스 시사 프로그램인 TV TOKYO의 ‘World Business Satellite'는 ’한국의 Power, 그리고 위협‘이라는 제목으로 2분 20초에 걸쳐 탑 뉴스로 일본 전국에 알렸다. 언론에서는 LCD의 본고장이자 전자기술의 본 고장인 일본 한 가운데서 삼성이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에 크게 놀랐으며, 그 기술을 높이 평가를 하였다. 일본TV와 후지TV 등에서는 삼성의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알리는 특집 방송을 했다. 이런 언론의 보도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으며 삼성LCD는 액정의 종주국 일본에서 새로운 강자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삼성전자 다기능 모니터와 LCD 모니터를 통해 일본을 놀라게 한 결과는 미국 최대 전자제품 판매점인 베스트바이를 비롯한 미국 대형 양판점, 그리고 프랑스의 다티(Darty), 영국의 딕슨, 이태리의 대형 유통점들에게 액정 제품은 일본의 샤프와 한국의 삼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주었고, 훗날 삼성의 LCD TV가 세계 1등 TV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이 회장은 판단한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10년간 일본 삼성에서 근무를 마치고 이 회장은 2001년 5월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당시 한국은 미국, 일본과 더불어 디지털 TV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우던 시기였다. 이 회장은 “앞으로 액정TV가 대세일 텐데 액정모니터로 세계 1등을 하고 있는 모니터 사업부와 화질과 각국 방송규격을 잘 알고 있는 텔레비전사업부가 분리되어있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없으니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의견은 받아들어져 통합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회장은 ‘소니를 이기자’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2000년 초만 해도 TV는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그리고 유럽의 필립스 등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 TV시장을 삼성이 장악하기 위해 이 회장은 5명으로 구성된 LCD TV PM 그룹을 신설하여 초대 그룹장이 되었다. 많은 어려움이 회사 안에도 있었고, 소니와 샤프 등은 디자인이 뛰어났다. 어려운 조건에서 고전하고 있던 중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40인치 액정TV 개발에 성공하였다.
지금은 85인치도 있지만 당시에 40인치 TV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전자 쇼에 출품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삼성전자가 액정TV 선두주자로 우뚝 올라서기 시작했다. 당시에 삼성에서도 LCD TV가 대형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회장은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전념하면서 일본을 능가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에 전념하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꼭 LCD TV로 세계 1등을 해보겠습니다.”
이 회장의 소원대로 삼성은 TV를 비롯하여, 스마트 폰과 반도체 제품도 이제 소니와 일본 제품을 넘어섰다. 삼성 TV가 세계 1등이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합해진 것이지만 그 주역은 이 회장이었다. 그래서 이 회장은 본인의 저서나 명함에도 ‘세계 1등 TV 주역’이라고 새겨져 있다. TV가 세계 1등이 되던 2006년 초 이 회장은 삼성을 떠났다.
삼성 일본 주재원시절과 LCD TV로 전자제품의 대명사였던 소니를 제치고 삼성 TV를 세계 일등
TV로 만든 과정의 이 회장의 활동을 보면 미 프로농구 단신 선수였던 ‘먹시 보그스’가 생각난다. 세계최고의 농구 재능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을 하며 경기를 하는 미국 프로농구에서 160cm 단신 가드로 농구 황제라 불리던 마이클 조던의 공을 빼앗기도 했던 먹시 보그스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가 활약하던 시기에 가드는 190cm도 되어야하는 시절이었는데, 160cm로 미 프로농구계에서 13년 동안 주전으로 코트를 누비면서 성공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였다. 상식적으로는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삼성에서 이 회장이 했고, 미 프로농구계에서는 먹시보그스가 해냈다.
인팩 코리아 창업
삼성을 떠난 이 회장은 초정밀 커넥터를 생산하는 ‘제이에이이(JAE) 코리아’로 법인장으로 출근했다.
이 회사에서 2015년까지 근무했다. 조선소로 시작하여 삼성과 ‘제이에이이(JAE) 코리아’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 생활을 한 후의 다음 행로는 ‘인팩코리아’ 창업이었다. ‘인팩 코리아(INPAQ KOREA)’ 모 회사는 ‘인팩테크놀로지’는 1998년에 설립되었고 그룹 전체적으로 약 5천명의 종업원이 있는 대만 회사다. 인팩 코리아는 2008년 설립한 한국법인으로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TV, 자동차 등 전류가 흐르는 모든 제품에 사용되는 수동소자류와 RF 안테나를 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등 글로벌 기업에 제품을 공급하며, 세계 최고의 휴대폰과 디지털 TV에는 인팩의 부품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GPS 안테나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이다.
인팩이 한국에 진출하였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하였다. 사업을 잘 할 사람을 찾던 인팩과 이 회장은 2007년에 만났다. 이 회장은 이 회사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전문 경영인이 아닌 주인으로, 본사와 파트너로 참여하는 형식으로 ‘인팩 코리아’를 설립하였다. 대만에 본사가 있는 인팩의 파트너로 ‘인팩코리아’ 회사를 창업한 것이다. 그러나 회사를 설립한 직후에 금융위기가 닥쳐 큰 위기를 맞았다. 전 세계 국가와 기업들이 초긴축 경영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초기 자본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회장은 경험하지 못한 큰 위기를 맞았지만, 자본금도 증자하고 정성과 최선의 노력을 하여 고비를 넘겼다. 이 회장은 “인팩 코리아가 이룬 성과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세계 일류기업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하여 부품을 공급하게 된 점” 이라고 평가한다.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경제인협회 부회장,
한미동맹재단 부회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
회장은 한국의 주요 산업현장이었던 조선소와 삼성그룹 계열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인정을 받고, 공적도 이루었다. 또 인팩코리아를 창업하여 사업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교우회 부회장과 경제인회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한미동맹재단 부회장 겸 이사, 전 한국외국기업협회 회장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한다.
올해가 한미동맹 70주년이기 때문에 한미동맹 부회장으로 그는 이 단체의 일로 좀 바쁠 것 같다.
2022년에도 이 단체에서 하는 행사 때문에 워싱턴DC를 방문하였다. 어떤 단체이던지 본인이 속한 단체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하는 그는 이 단체에서 앞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는 “주한미국 사령관이 Korea Defense Veterans Association · KDVA회장입니다. 회원이 350만명입니다. 이들에게 우리가 대접을 좀 소홀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도 일본에서 주둔하면서 군대 생활을 한 미군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잘 관리하여 이들을 친일파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들의 활동을 도와서 한국에서 미군으로 근무한 사람들을 한국 팬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참전하여 전사한 분들의 동상도 만들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알리는 공모전을 하고 싶습니다. 한국전 참가자와 그 가족들을 초청하여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또 한 가지는 바둑대회입니다. 컴퓨터로 하는 많은 게임이 있습니다. 이 컴퓨터 게임에서 전쟁게임도 많고, 살인을 하는 게임이 많아서 그런 영향으로 총기사고를 비롯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세계적으로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둑은 죽이는 것이 아니니까, 미국 뉴욕의 센추럴 공원에서 바둑대회를 하려고 합니다. 바둑협회는 대한체육회 산하기관으로 회장이 편강한의원 원장이고, 제가 바둑협회 수석부회장입니다. 주한미군이 많이 거주하는 평택에 바둑교실을 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2023년 조계사 신도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조계사를 세계 일등 사찰로
만들고 싶다.
서울 조계사는 조계종 총본사로 조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총무원 청사가 조계사 안에 있으며,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 취임식을 조계사에서 한다. 이런 행사를 비롯하여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에도 이에 관련된 조계종 불교 행사는 조계사에 한다.
부처님 오신 날을 비롯하여 이런 행사에는 각 정당의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들, 문광부 장관이 참석을 한다. 때로는 대통령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조계사이기 때문에 조계사 신도회장은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신도회장’과 더불어 불교신도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조계사는 임원 숫자만 320명이다. 조계사는 불교대학을 비롯하여 부속 기관도 아주 많다. 이런 조계사 회장으로 이 회
장이 올 1월에 선출되어 취임식을 가졌다. 이회장은 삼성TV를 일등TV로 만든 것처럼, 조계사를 세계 일등 사찰로 만들려는 원력을 세웠다.
불교와 인연
완도 어룡도 섬에서 태어나 조계사 신도회장이 된 이 회장은 증조할머니를 비롯한 조상들의 영향으로 불교적인 분위기속에서 성장하였다. 이 회장에 의하면 “선조들께서 역경을 많이 격어서 자손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독자입니다. 증조할머니가 힘드셨겠지요. 할머니께서 세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증조할머니부터 불교에 귀의하셨습니다. 증조할머니부터 우리 조상들이 해남의 대흥사와 미황사를 자주 가셨습니다. 이 사찰들이 우리 조상들의 원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삼성은 직장 생활이 치열합니다. 힘들고 그럴 때 저는 부처님 공부를 좀 하였습니다.” 라고 집안의 불교 내력과 본인의 불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 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2천년에 하동에 새로 건립한 칠성사, 충무 용화사, 그리고 서울 도곡동 봉은사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불명은 무애(無碍)로 불국사 회주스님인 성타스님으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어룡도에 2020년에 해수 관음상을 세울 정도로 불교에 대한 신심이 있다. 아래는 이 승현 회장과 인터뷰이다.
질문 조계사 신도회장으로서 하고자 할 사업이 무엇입니까 ?
이승현 회장 제가 “취임사에서 ‘세계 일등 조계사’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선 현재의 조계사 일주문을 정비할 예정이며, 앞으로 조계사 경내 정비를 계속해 나갈 계획입니다. 나는 조계사를 세계 최고의 도량으로 만드는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불교가 좀 더 글로벌하게,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다음 세 가지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인도가 불교 탄생지이지만 현재는 인도 불교가 아주 미약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인도보다 환경이 훨씬 좋습니다. 현재 세계가 전쟁과 갈등이 많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국인, 유럽인등 타민족 인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조계사에 오면 그들을 마음 편안한 느낌을 갖도록 해주는, 쉼터 같은 장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현재도 조계사는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주 남산에 신라시대에 조성된 넘어져 계시는 열암곡 마애 부처님이 있습니다. 2007년 발견 당시에는 상호까지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부처님입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이 이 부처님을 바로 세우자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우리 불교인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이 수 백 년을 쓰러져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일으켜 세우면 대한민국의 국운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계종에서 추진하고, 조계사가 조계종의 본찰 역할을 하니까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서로 분열하고 계층별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계사 신도들이 앞장서서 우리나라가 화합하는 나라가 되도록 실행하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화합이 된다면 국가에 더 큰 힘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분단된 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세 가지 사업을 자세하게 말했다.
넓은 세상에는 각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거나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는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그치면 존경을 받지는 못한다. 성공하였지만 남을 도우면서 사는 사람, 장학사업이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 사회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섬에서 태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 여러 분야에서 성공하고 또 사회와 국가를 위한 일을 많이 하면서 존경받으며 보살행을 하고 있는 이 승현 회장이 조계사 신도회장으로 취임하여 불교계에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 회장이 그의 삶에서 축적된 경험으로 조계사를 세계 일등 사찰로 만드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일시: 3월 8일
장소: 조계사 경내 임원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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