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7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故鄕 예루살렘 》
슥 14:12~15
<고향은 진주와도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 믿는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마치 ‘고향’과도 같습니다.
☞‘고향’은 무엇일까요?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태어나서 자라다’는 말은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 ‘자의식’은 무엇일까요? ~ 나의 나 됨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자의식입니다.
부모님의 사랑 아래, 친구와 마음껏 뛰어놀면서, 세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세상에 나가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며, 나는 어떤 일을 할까, “나의 나 됨”이 시작됩니다.
“내가 나(我)가 되는 그때 그 시절 그 곳” 거기가 ‘고향’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래야 잊히지 않습니다.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진주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고향은 진주와도 같습니다!”
☞ ‘진주’는 무엇일까요?
조개의 연한 속살에 박힌 모래 알갱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나 아프다고 뱉지 못합니다.
속살에 박힌 모래 알갱이를 진액으로 감싸기 시작합니다. 아프니까요!
점점 진액이 흘러나와 모래 알갱이의 표면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만들어갑니다.
진주조개는 자기 살 속에 모래 알갱이를 품고 있으면서 거기에 적응합니다.
때로는 자기 안에 진주라는 보석이 있는 것조차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고향이 그렇습니다. 우리 가슴 속의 보석 진주, 고향, 그 고향의 의미를 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향을 잊고 살아도, 진주가 점점 커지듯이, 고향의 의미 역시 작아지지 않습니다.
고향은 우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 깊은 향수, 귀한 진주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리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아래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꿈,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육신의 고향에서 육신의 아버지 품에서 나의 나 됨을 알았지만, 이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새로운 자아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꿈을 꿉니다.
☞ 새로운 고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고향이 어딘지 아세요?
<믿는 이의 고향 예루살렘>
예수 믿기 이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리운 고향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믿음의 고향, 신앙의 고향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입니다.
☞ 어떻게 예루살렘이 우리 신앙의 고향이 되었습니까?
고향은, 부모님 사랑 아래 마음껏 뛰놀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세상에 나갈 꿈을 꾸던 때!
그때가 고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구세주로 섬기기로 맹세했습니다.
예수 믿는 순간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육신의 부모가 아닌, 영적인 부모!
죽어있던 영이 살아났습니다. 태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영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태어난 우리의 영이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가운데 쑥쑥 커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내가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다가 천국으로 갑니다.
이렇게 새로운 영적 자의식을 갖게 되고, 믿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면서 자라난 고향!
그 고향의 대명사가 “예루살렘”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가운데 내가 영적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자의식, 새로운 꿈, 새로운 사명, “새로운 진주”가 된 곳!
거기가 ‘예루살렘’입니다.
☞ 하나님은 어떻게 나와 만나주시고, 어떻게 나를 양육하십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어 인류를 만나주신 곳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한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러나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까지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 싫다고 부모 품을 떠났다고 해서 천륜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배신했지만, 하나님과 우리, 끊어질 수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 최종적으로 악을 심판하고, 선을 칭찬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인류가 죄악에 빠져 살아가지만, 그중에 더러 의인이 눈에 띕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징벌하고, 아담의 자녀 중에서 ‘셋’을 통하여 의의 계보를 잇도록 하십니다.
의의 계보는 ‘에녹’으로 이어졌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휴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를 발견합니다.
노아와 그의 일가족을 홍수에서 구출하여 인류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찾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와 만나주신, 첫 번째 지구상의 만남의 장소는 ‘시내 산’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 율법을 주시고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광야 40년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성막을 제작하도록 하시고, 이동하는 성막 안에서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자의식과 세상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꿈을 꿉니다. ‘새롭게 거듭난 자의 고향’입니다.
성막은 나중에 성전이 됩니다. 다윗이 꿈꾸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장소, 이는 곧 고향입니다.
시내산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변천하였습니다.
어느 한 장소에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곳, “고향”입니다.
영적 고향이 어느 한 장소였던 시대, 예루살렘 성전 시대는 거기서 종말을 고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성전 돌 하나도 돌 위에 있지 못하고 허물어지리라!
이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장소가 지상의 어느 한 곳이 되는 시대의 종말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자– 부활– 승천– 성령강림”으로 새로운 시대, 성령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곳>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곳은 이제,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장소에서 만나던 옛날 옛적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내 산이 있었습니다. 성막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 옛적 향수처럼, 아련하게 하나님과 만나던 고향,
예루살렘은 이제 믿는 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고향이 되었습니다.
☞ 예루살렘에 성지순례 갔을 때,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1958년에 최갑석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입니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필 맞춰 불던 옛동무여~>
우리의 고향, 찾아가봐도 어릴적 그 고향은 아닙니다.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예루살렘, 지금 가봐도, 옛적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역시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고향은 우리 가슴 속에서 진주가 되었습니다. “고향은 진주가 되었습니다!”
고향은 아버지의 품속에서 내가 자라던 곳입니다. 그 고향은 진주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고향, 영적 고향 예루살렘, 그 고향도 우리에게 진주가 되었습니다.
☞ 오늘 본문 12절을 봅니다. 본문에서 진주가 된 고향 예루살렘을 추억할 수 있습니다.
(슥 14: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꼭 어린 시절 나를 보호해 주시던 아버지와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건드렸다?’ 아버지가 나서서 징치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울타리가 되어주시고, 의지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그렇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보호하심은 마치 고향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고향, 자의식, 진주, 새 고향 예루살렘>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향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고향에서 우리는 ‘나의 나 됨’을 꿈꾸고 알아갔습니다.
고향은 마치 진주와 같습니다.
내 가슴 속에서 내가 진액을 쏟아내어 감싸고 감싸면서 보석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했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육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나 됨”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자란 곳 고향이 나를 나 되게 하였습니다.
육신으로 살다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새로운 나가 됩니다. 거듭남입니다.
죽어있던 영이 다시 살아나서 자란 고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서 내가 새롭게 내가 됩니다.
우리에게 그 고향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육신의 고향땅도, 영의 고향땅도 내가 자랄 때, 그 모습이 아닙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의 시조입니다.
우리에게는 설날과 추석 명절이 있습니다. 명절이 명절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향수입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입니다.
고향에서 자라도록 키워주신 아버지가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가 계시고 조상이 계시는 곳!
우리가 거듭나기 이전에는 고향이 그거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시 태어나 자란 곳 그 고향, 예루살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고향’하면, 늘 두 곳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고향이 둘인 사람들, 그 이름 ‘크리스찬’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