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시인의 시집 『하루, 띄다』
책 소개
작가는 왜 「하루, 띄다」를 표제작으로 정했을까? 하루하루의 일상이 예사로워도 작가의 눈에 비치는 하루하루 일들은 즐거움과 긴장감 넘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림 그리듯 작가가 이 시조를 쓰게 된 이유가 있다. 사소한 일들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산개울을 건너려고 돌다리를 딛는 순간 흔들흔들 균형을 잃고 물소리와 함께 징검돌이 오른쪽으로 사람은 왼쪽으로 기울었다. “벗어난 경계에서도 그러나 중요치 않아.” 「하루, 띄다」는 감추어서 보여주기다. 바람의 길목에서 쉬어 가는 정겨운 풍경들이다. 김 작가는 아무렇지 않게 파묻혀 갈 하루하루에 눈에 띄게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사다.
시인의 말
계절은 떠날 때 더 아름답고 정갈하다. 긴 여운이
남은 산길에 거미가 집 한 채를 반듯하게 지어놓고
떠났다. 그 옆에 게으른 박쥐나무는 여름내 푸른
노래만 부르다 준비 없이 늦가을을 맞아 날개를 파
닥거린다. 어쩌면 나의 자화 상일지도 모르겠다.
군더더기 없는 시의 집을 지으려 하지 만, 아직
제자리걸음이다. 언제쯤 물방울처럼 투명하고 단
단한 주춧돌을 놓을까.
2024년 4월
김정수
약력
2012년 부산시조 성파백일장 장원
가람 이병기 추모백일장 장원
2013년 <화중련> 신인상
201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5년 울산시조협회 작품상
2020년 제1회 외솔시조문학상 신인상
2023년 영축문학상
시조집 「거미의 시간」 외
kimsi1002@naver.com
하루, 띄다
그 어떤 갑갑함도 너스레 떨다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어 예사롭고 수월해
센 고집 내세우지 말기 처방대로 믿고서
까마득 놓쳐버릴 비문법 글귀 따위
생뚱맞아 지적하면 중립에 삭둑 잘려
뜨겁게 오르는 온도 왼쪽으로 기울지
벗어난 경계에서도 그러나 중요치 않아
비로소 돌아온 길 여백을 채운 자리
바람이 나답게 살기, 건네는 말 정겹다
꽃피는 바다
한 공간 못 머물고 언제나 진행형을
미처 감추지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때로는 해무 속으로 떠돌기만 했었지
발길질 아득한 곳 여기까지 닿기 위해
바람의 불협화음 가슴으로 받아치다
시퍼런 매질까지도 끌어안고 뒹굴지
수평선 몰고 와서 모래톱에 부려놓고
꿀잠 든 갯바위에 소금꽃도 일깨워
수없이 피고 지면서 꽃씨 한 톨 둔 적 없다
이끼를 읽다
스스로 깊숙하게 갇혀도 보고 싶다
철없는 햇볕보다 살붙이 물가 찾아
산기슭 잘박한 등을 평평하게 다져가
설계한 맞춤형 집 폭신한 융단까지
함께할 이웃들과 소소한 정을 나눠
물바람 날라다 주는 유전 내림 이야기
막힘도 소통으로 둥글게 풀어가면
낱말의 씨앗 톡톡 시작한 발화점에
돌마루 포근히 꽂힌 푸른 신간 정갈하다
나무 성자
하늘로 닿기 위해 빈 어둠 더듬었던
소나무 뿌리들은 이젠 무얼 하려나
베어져 자유마저도 밑동에서 토막 난 채
지난날 품위 있던 풍경 아직 선한데
흘리는 송진 눈물 마지막 땅의 의식
어쩌면 비명도 없이 저렇게나 침묵일까
산비탈 가득 메워 눈부처 지운 자리
가진 것 아낌없이 비워서 더 가벼운
산개미 톱밥 하얗게 가는 행렬 장엄하다
저울추자리 찾다
식육점 주인 청년 고기 툭 올린 순간
정확한 범위 안에 멈춰 선 눈금 자리
손대중 노련한 칼질 예감으로 꽂힌다
넘쳐서 덜어내고 모자라서 채우면
풀렸던 추 하나가 과부하 짚어낼 때
외바늘 중량을 재며 이리저리 요동치다
헤아림 수도 없이 진자 운동 거듭했을
무게 짐 내려놓고 재확인 필요할 때
질량은 변치 않는다고 바람결에 전한다
해설
외솔 고향에서 시조로 길어 올린 소담스러운 이야기
-시조 미학의 극치, 김정수 시조론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시조로 외솔 정신을 이어가는 어느 시인 이야기
이제 울산시는 한글도시로 우뚝 섰다. 매해 한글날 특별 행사 규모가 문체부 전체 한글 예산보다도 많다. 세종국어문화원은 벌써 6회째 한글날 기념 외솔 최현배 선생 기리기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학술대회 긴 시간 동안 단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다소곳이 앉아 발표를 경청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울산이 낳은 시조시인 김정수 작가였다. 시조 작가라는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단아한 자태가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조 그 자체였다.
외솔 최현배는 워낙 큰 국어학자, 한글 운동가이다 보니 아주 빼어난 시조 작가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외솔이 남긴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시조는 열두 수, 「나날의 살이 」는 네 수, 「사철」은 여덟 수, 「공부」는 세 수, 「해방」은 한 수짜리로 모두 스물여덟 수나 된다. 대표 연시 「한힌샘 스승님을 생각함 - 가신 지 열다섯 해에」를 읽노라면 한글학자가아니라 시조 작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외솔기념관은 2023년에 재개관식을 열었다. 2010년 개관한지 13년 만이다. 재개관식에 참석한 김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울산에서 외솔 정신으로 살아가는 작가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 시인의 시조는 단시조에서 더욱 빛나는 듯하지만, 연시조는 연시조대로 리듬과 말결이 살아 톡톡 튄다. 「이끼를 읽다」는 초장 · 중장 · 종장이 삼태극 삼박자를 빚어내고 그것은 다시 1연, 2연, 3연 삼태극 삼박자로 뻗어나가, 고요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어 감성들을 깊숙이 뿌리내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