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동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당시32세) 는 1층으로 내려와서 경 비원 엄현에게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근무용으로 차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주세요." "근무용이라니까요." "과장님이 달라고 하셔요.".
엄현은 허리에서 권총을 풀어서 건네주었다. 이기주는 박선호와 같은 해병대 출신(하사)으로서 태권도가 3단, 유도가 초단이었다. 다른 경비 원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에 공기권총으로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근무 할 때도 허리에 찬 권총에는 항상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박선호 과장 은 '지시만 떨어지면 아무데나 쏴도 좋다'는 지침을 주어놓고 있었다.해 병대 출신끼리의 독특한 인간관계 덕분에 이기주는 박선호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박선호는 이기주로부터 5연발 38구경 리볼버와 권총집을 받아가지고 는 탄알집을 열고 다섯 발이 든 것을 확인했다. 권총을 다시 집에 넣고 혁대에 끼운 뒤에 허리에 찼다. 이기주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오면서 박선 호는 "M15로 무장하고 와. 양복 상의 안에 넣고"라고 했다. 이때 박선호의 눈에 뜨인 사람이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 유성옥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유성옥은 성격이 괄괄하고 용감하며 복종심이 강한자이므로 그를 선발하기로 결정했다'(합수부 진술서)는 것이다. 박선호 이기주는 같이 대기실 입구에 있는 총기함으로 갔다. 경비원이 꺼내주는 기관단총 M15 한 정과 15발이 든 탄창 한 개를 이기주가 받았다. M15는 M16 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내고 쇠손잡이를 붙여 기관단총처럼 변형시 킨 것이었다.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는 M15를 양복 저고리 안에 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박선호는 신관을 나서서 건물의 모서리를 돌아 길을 건너가다가 따라오는 이기주에게 불쑥 "유성옥이 총 쏠 줄 아는가"라고 했다.
"유성옥은 육군중사출신입니다." 총을 잘 쏠 줄 아는 지는 모르지만 육군중사출신이니 최소한 쏠 줄은 알지 않겠느냐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권총에 장전하고 오라고 해." 유성옥은 그날 오후 동대문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6만원어치 사다가 주방에 가져다 준 뒤에 대기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기주는 대기 실 문앞에 서서 안에 있는 경비원들한테 "과장님이 유성옥이 권총을 휴 대하고 나오라고 하신다"라고 소리쳤다.
유성옥이 황급하게 일어나 엄현을 향해서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했 다.
"내가 차고 있던 것은 과장님께서 가져갔고 저 방에 있는 유석술이 차고 있을 거요.".
누군가가 유석술이 한테서 권총을 받아서 유성옥한테 가져다 주었 다. 유성옥은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면서 뛰어나갔다. 이기주,유성옥 두 사람은 캄캄한 가을 밤공기를 가르면서 박 과장을 따라나섰다.
"그 총 숨겨." 박 과장이 이기주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M15를 외투 안에 가리느라고 애를 먹었다.세사람은 본관 정문을 통과하여 구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쪽문을 지나 그때 만찬이 무르익고 있던 나동의 뒷마당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이때의 심정을 박선호는 군검찰의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본인은 이기주 유성옥 두 명을 제미니 차에 태워 곧장 나동으로 올수도 있었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본관으로 해서 몇번 멈추다가 구관을 지나 나동으로 들어섰습니다.'.
유신정권의 핵심 인물 네 명이 식사중인 나동 건물의 캄캄한 뒷마당 구석쪽으로 걸어가면서 박선호가 말했다.
"부장님 지시이다. 오늘 일이 잘 되면 한 몫 볼 것이다. 저 방안에서 부장님이 쏘는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주방앞에 있다가 경호원들을 몰아붙여." "경호원이 총을 쏘면 어떻게 하나요." 이기주가 겁먹은 듯 물었다.
"그때는 쏴버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박선호도 마찬가지였다. 박 과장은 유성옥에게 "제미니를 주방 쪽에 옮겨놓아"라고 했다.
"주방 앞에 차를 대놓고 그 안에서 기다려. 경호원이 뭐라고 하면 과장이 시켰다고 해. 주방앞에 서있는 경호원들은 주방으로 몰아넣는다. 반항하면 사살해.".
박선호는 나동 정문초소로 가더니 경비를 서고 있던 서영준에게 이 기주와 교대하라고 지시했다. 서영준은 '교대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 는데 무슨 교대인가'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말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선호는 나동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나오다가 정문에 서 있는 이기주를 보니 윗옷 안에서 M15의 개머리판이 삐죽이 나와 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났다.
권총으로 바꿔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기주는 박 과장이 권총으로 바꾸어 차고 오라고 했을 때 '이 길로 도망가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그는 법정에서 진술하기를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과장이 나를 신임했는데 거절할 수가 있는가. 과장이 유사시에는 생명을 걸고 충성하라고 했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항소심에서 "과장님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원망도 했으나 저를 신임했기 때문에 그와같이 시켰을 것이라고 자위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전에 박선호와 박흥주 두 사람이 김재규로부터 거사에 대한 지시를 갑자기 받았을 때 느꼈던 똑 같은 충격과 당황을 이번엔 이기주와 유성옥이 느끼고 있었다. 이기주는 법정에서 "과장의 지시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부터 뜁니다"라고 했다. 변호사가 "불응한다거나 승낙한다거나 선택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무조건 지시에 따랐습니다. 상관의 지시이니까 무조건 따르고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유성옥은 그때 나이가 서른 여섯이었다. 경기도 고양이 고향인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모는 두살때 죽고 계모밑에서 살았다. 중 학교 2학년을 중퇴한 다음에는 근처 미군공병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주 워 팔아 생계비를 보탰다. 그의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서울에 가 져다가 파는 등짐장수였다. 유성옥은 어릴 때는 고아처럼 자랐다. 그에 게 군대는 피난처이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