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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다니엘서 7장 9-14절, 요한복음서 18장 33-37절
육성한 목사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이자, 2024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무슨 얘기야, 아직 12월이 남았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시간 흐름에서는 1월 1일부터 한 해를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짜여진 또 하나의 시간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력입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준비하며 한 해를 시작하기 때문에, 12월 첫 주, 대림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그러니 교회력을 따른다면 오늘은 2024년 마지막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올해 마지막 주일이라고 하니 괜히 마음이 벌써 싱숭생숭합니다. 여러분의 올 한해는 어떠셨나요? 1월 1일에 설렘과 굳은 결심으로 세운 계획은 잘 지켜나가셨나요? 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작심삼일로 끝난 다짐들, 지켜보려고 했지만 분주한 일상 속에 포기한 계획들이 생각납니다. 삶에 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 것 같아 괜히 울적한 마음과 자책도 올라옵니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아쉬움 가득한 마음을 달래고자 연말을 더 바쁘게 보내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괜찮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삶을 위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충분히 열심히 사셨고, 정말 애쓰셨습니다. 물론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늘 이 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괜찮아, 고생 많았어!”라고 격려의 인사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이 따뜻한 다독임으로 우리의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하고, 새해를 시작할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새해를 시작할 때는 한껏 부푼 꿈과 기대, 소망들을 펼쳤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순간은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우리에게 다시금 소망과 기대, 이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전통적으로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그리스도의 주권과 섭리)이라도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그분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을 희망하는 주일입니다. 현실 앞에 기대와 소망이 꺾이고, 앞이 보이질 않아 낙담하고 있는 우리에게 교회 전통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다”라는 고백을 통해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을 일으키고, 새로운 날을 기대하게 합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그러나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고 고백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폭력과 불의가 가득한 세계 속에서, 전쟁의 포성과 피 흘림은 끊이지 않고, 기후 위기로 울려 퍼지는 지구의 신음 속에도 인간의 탐욕은 멈출 줄 모릅니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은 더욱 커지지만, 정의를 향한 외침은 쉽게 묵살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요? 공정과 상식, 최소한의 윤리조차 상실한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만행들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암담한 마음뿐입니다.
지난 13일에 경희대학교 교수와 연구자들(226명)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일반적인 시국선언문의 선언적이고 딱딱한 문체와는 다르게 시적인 언어로 윤석열 정부가 초래한 혼암한 현실을 드러내고 교육자로서의 부끄럽고 참담함 마음을 잘 담아 주목을 받았습니다. 선언문에서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통해 이태원 참사, 채상병 사건, 카이스트 ‘입틀막’ 사건 등 윤 대통령 임기 동안 벌어진 문제들을 열거합니다. 시국선언문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 나는 이태원 참사 이후 첫 강의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대답 없는 이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지 못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의 안녕을 예전처럼 즐거움과 기대를 섞어 이야기하지 못한다. / 나는 안타까운 젊은 청년이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어도, 어떠한 부조리와 아집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군휴학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학생에게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고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격려하지 못한다. / 나는 대학교 졸업식장에서 졸업생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팔다리가 번쩍 들려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나는 우리의 강의실이 어떠한 완력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절대 자유와 비판적 토론의 장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중략) 나는 매일 수많은 거짓을 목도한다. 거짓이 거짓에 이어지고, 이전의 거짓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진실을 담은 생각으로 정직하게 소통하자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하루하루 부끄러움을 쌓는다. 부끄러움은 굳은살이 되고, 감각은 무디어진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하루하루 인간성을 상실한 절망을 보고 있고, 나 역시 그 절망을 닮아간다.
우리는 이렇게 어두운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보다 울분 섞인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주님, 과연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서 당신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담은 고백이 힘을 잃은 듯하게 느껴지고, 우리의 이상이 현실 속에 잠식되고 있는 상황 속에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요?
[환상이 왜 필요한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다니엘서의 말씀은 다니엘이 잠을 자다 본 꿈과 환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읽지 않은 7장의 앞 절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늘로부터 사방에서 바람이 큰 바다 위로 불어닥쳤고, 그러자 바다에서 서로 다르게 생긴 큰 짐승 네 마리가 나타납니다. 바다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바다에서 짐승들이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활동을 방해하는 강한 세력들이 등장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네 마리의 짐승은 모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괴롭게 했던 바빌론, 메데, 페르시아, 헬라 등의 고대 제국들을 상징합니다. 이 제국들은 폭력으로 약한 나라들을 지배했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마치 자신들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무법했고 잔인하며 교만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그들을 생명을 취하며 나라를 확장했습니다. 다니엘서 7장의 짐승들의 모습은 바로 정의와 공의,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제국들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작은 뿔이 등장합니다. 이 작은 뿔은 입이 달려서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습니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포악함을 드러냈던 넷째 짐승에게서 나온 이 작은 뿔은 돋아날 때부터 남다른 힘이 있어 다른 세 뿔을 뽑아버립니다. 다른 뿔들보다 더 악하고, 지독한 느낌이 듭니다. 이 뿔은 이스라엘 백성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를 상징합니다. 악독한 왕이었던 그는 유대인들의 삶의 기반이 되었던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꺾어 버리고 헬라 문화와 종교를 심기 위해 종교적 행위들을 억압합니다. 율법을 읽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할례와 같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 행위를 금지한 것입니다. 심지어 성전에서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제사를 지내고 제우스신에게 바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제사음식이었던 돼지고기를 먹이고 거부하면 처형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이, 더 나아가서 다니엘서 전체가 이 엄혹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폭력으로 다스리며 생명의 존엄함을 해치고,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는 이들을 기괴한 짐승의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그들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며 우리가 결코 우상시할 수 없는 추악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여기고, 강한 힘과 능력을 보며 동경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오늘 다니엘서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짐승의 모습을 한 제국과 그 왕들이 만들어가는 이 사회 구조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고 바꾸어야 할 현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를 지켜라! 망상이 드러낸 진실]
2003년에 개봉한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1987>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조만간 외계인에 의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망상에 빠진 인물이죠.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외계인을 색출해내고자 온 신경을 쏟던 병구는 평소 안드로메다의 왕자로 의심하던 화학공장 사장, 강 사장(백윤식)을 납치합니다. 외계인이라는 자백받기 위해 머리털 밀기, 때수건으로 상처를 내 물파스 바르기 등 기상천외한 고문을 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러한 병구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며 병구가 외계인, 그리고 강사장에게 집착하게 된 원인이 드러나게 됩니다. 봉구는 강사장이 운영하는 화학 공장의 노동자였고 노동조합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애인이 파업현장에서 용역 깡패에게 목숨을 잃습니다. 병구의 어머니는 그 공장에서 일하다가 독극물에 중독되어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 강사장을 납치해 고문하는 봉구는 매우 폭력적으로 보이지만, 어릴 때 그는 폭력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고 늘 괴롭힘의 대상과 폭력의 피해자가 되던 사람입니다.
봉구는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폭력적인 사회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계인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사회의 꼭대기에서 위세를 떠는 권력자들이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할수록 봉구의 망상이 어쩌면 진실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사회 곳곳에 스민 폭력성, 가난한 이들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불의한 구조, 힘을 가진 이들의 횡포는 분명 우리의 현실이지만, 이 현실이 결코 당연하거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아닐 것입니다. 불의한 사회와 권력자들을 외계인으로 보았던 봉구의 시선은 진실에 가까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환상을 현실을 도피하는 것으로 여기거나 지금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생각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다니엘서가 말하는 환상은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분명히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먼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질서를 드러내고 우리가 꿈꾸고, 실현해야 할 진정한 현실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네 짐승이 등장하고, 위용을 떨치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 옛적부터 다스리시는 분을 봅니다.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위세를 떨치던 짐승들의 죽음도 보게 됩니다. 다니엘은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통치에 주목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이 본 환상을 통해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 우리가 결코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아니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다가올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우리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참사람이 다스리는 세상]
그렇다면 오늘 다니엘이 본 환상, 우리가 진정한 현실로 가져와야 할 환상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인자와 같은 이’가 다스리는 세상, 다시 말해 ‘참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다니엘은 하늘에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옛부터 계신 분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그 나라를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준비되어 내려왔기 때문에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고대 제국과 그 통치자들을 가리켰던 짐승과는 반대되는 존재로서 ‘사람’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환상 속에서 짐승은 하나같이 강하고 두렵고 사나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다릅니다. 부드러운 살을 가진 존재, 남을 지배하거나 해치지 않는 양심을 지닌 존재, 타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품으로 다른 생명을 끌어안아 살리는 존재, 부족함이 있더라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다독일 수 있는 존재, 지배가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참사람 같은 이가 다스리는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소망하고 이루어야 할 진정한 현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즉 사람이 되신 분, 그 참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고백하는 책입니다.(요1:14, 5:27) 그분만이 우리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빌라도는 예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금 빌라도는 시골 변두리 출신에 남루한 모습을 한 사람, 무리를 끌고 다닌다고 했는데 모두 도망가고 홀로 남겨진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계속되는 조롱 섞인 질문에 당당히 선언하십니다. “당신이 말한대로 나는 왕이다.” 그러나 중요한 한마디가 따라붙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쓴 공동체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왕이시며, 그분의 나라는 세상 권세들의 통치로 만들어지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지금 우리가 예수께서 왕이시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여전히 그분의 다스림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이, 그 진리가 몸을 입어 진정한 사람, 참사람이 된 사건을 예수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몸으로 입은 참사람,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부드러운 살갗으로 더럽고 가시 돋친 세상을 끌어안습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질서 속에서 모두가 자기 것을 지키고자 잔뜩 움츠러들고, 온 힘을 다해 타자를 밀어낼 때, 참사람 예수는 두 팔 벌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약한 이들을 억압하는 권력자에게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보면 마음 한복판이 부서져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참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향기, 그 고운 빛에 우리는 감격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분만이 우리의 왕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참사람 예수님의 통치를 기다립니다.
참사람 예수님은 우리의 이상입니다. 그분이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세상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과 소망은 우리의 생각에 머물거나 미래 저 멀리 던져 놓고 바라보는 것이 되어 선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보는 참사람의 이상은 우리 몸에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도 참사람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오늘’입니다.
우리는 모두 참사람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짐승이 위세를 부리는 세상 속에 우리는 참 인간성의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듯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참사람으로 존재할 때,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이 세상은 구원을 선물 받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그의 딸 음포 투투 사제가 함께 쓴 <선하게 태어난 우리>라는 책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선하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배려하는 마음, 선함에 대한 본능이야말로 인간을 연결하는 반짝이는 실과 같다. 물론 인간의 선함이라는 천이 빛을 잃고 너덜너덜해질 수도 있다. 잔인하고 냉혹한 행위도 저지른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간이 되는 경건함을 완전히 찢어버리거나 파괴할 수 없다. 우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선 그 자체인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으며 선을 위해 만들어졌다.(32p)
이 문장은 우리의 참 인간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소명을 다시 일으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짐승과 같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 무뎌지고 상처받아왔을지라도,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참사람입니다. 선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부드럽고 따듯한 선한 인간성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다니엘이 본 환상과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요한 공동체의 고백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떤 이상을 보고 있고, 어떤 현실을 이루고자 하는가?” 우리는 폭력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짐승이 아닌 참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이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이상을 향한 믿음과 소망이 분명 우리를 참사람으로 회복시킬 것이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설렘으로 시작했던 2024년도 이제 마무리되어 갑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우리 함께 우리 안에 심긴 하나님의 형상, 참사람의 본성을 되찾아 새해를 맞이합시다. 새해에는 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그분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질서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나갑시다. 사랑 가득 품고 참사람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향기, 그 고운 빛을 세상 속에 드러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진정한 왕이신 주님,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로운 빛을 기다리는 소망은 더 선명해지듯, 따스한 주님의 다스림이 우리의 어두운 현실 가운데 속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세상을 바로 보고, 당신의 뜻대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안의 선함, 당신의 형상을 회복시키셔서 예수님처럼 세상이 간절히 기다리는 참사람이 되어 세상의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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