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의 항일 독립운동가 박용만
박용만(朴容萬, 1881~1928)
박용만은 일제강점기 외교관이자 언론인,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군사학교인 소년병군사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등 무장항쟁론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4년,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농장(Kearney農場)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1912년 첫 번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 때 『국민개병설』‧『군인수지』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고, 이때(1911)부터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는데,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훈련을 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즉 박용만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선구자인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천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있었으므로,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폈다.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며 자리잡자 하와이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후 이승만과의 정치 싸움에서 밀린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대한인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남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독립단을 창설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 부총장에 선임되어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차츰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는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그로 인해 변절한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급기야 1928년 의열단원 이해명(李海鳴, 본명 이구연, 1896~1950)에 의하여 밀정으로 의심을 받고 북경에서 암살된다.
그리고 소영웅주의자 성향의 이해명은 임정 내의 박용만 정적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박용만의 정적들을 통해 중국 고위층과 연결된 덕분인지 ‘의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받았다.
박용만은 일제가 불령선인으로 지목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승만과 대립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한 것으로 인하여 평가가 늦어진 독립운동가이다. 출세주의자 이승만과는 달리 박용만과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미주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끈 진정한 투사였다. 독립투사 박용만의 독립정신을 기리자.
1904년 한말 풍운 속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1910년 나라를 잃게 되니,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로 독립운동에 몸 바쳐 오다 1928년 10월 17일 48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피살되었다.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철원읍 중리에서 1881년 윤 7월 2일에 태어났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학을 했다. 미국에서 약 10년간 독립운동을 하였고, 중국에서 약 10년간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오로지 군사운동을 주장하며 독립군을 키워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외교노선을 택했고, 안창호는 교육과 문화노선을 택했는데, 박용만은 군사운동을 택했다.
박용만은 24세 되면 1904년 10월에 미국 유학 길에 올라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서 1906년 9월에는 헤이스팅 대학 정치학과에서 군사학을 연구하여 1910년 9월에 졸업을 했다.
박용만은 1909년 7월부터 구국활동을 벌였는데, 당시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박용만은 1912년 하와이 교포 사회의 지도자로 옮겨가기 전까지 소년병학교를 운영하고 1911년 2월에는 신한국보 주필로 활약했다. 또 그 시점에 『군인수지(軍人須知)』 등의 저서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2년 교포가 많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을 초대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했다.
거기서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어서 교포사회에 자치제를 확립시켰다. 여기에서도 군사운동을 계속하여 대한조국민군단을 설치하였다. 마을마다 군부대를 조직하고 전체를 군단으로 통합하여 사령부를 두고 박용만은 군단장에 취임하였다. 마을에서는 경찰제를 만들어 자치규약을 두고 치안에 힘썼다. 1915년 6월에는 『아메리칸혁명사』를 번역 출판하였고, 1917년 11월에는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년 3월에는 대조선독립단을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독립운동 방법에 견해차가 커서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박용만은 중국으로 건너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5월 19일 신채호와 신숙 등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군사통일초성회를 결성하였다. 국제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안과는 달리 독립군을 통합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1923년 중국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7월에는 호놀룰루에서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활동했다.
1926년에는 북경에서 대본공사를 설립하여 군사운동을 본격화 하였다. 그리고 1927년 4월에는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정신교육을 위하여 초등국어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그렇게 민족운동을 펼치던 중 북경 대본사에서 1928년 8월 17일 오후 8시 이해명(李海明)이 쏜 권총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