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산악 마라톤으로도 유명해
방울새 노래하고 강물이 춤추는 ‘신선들의 무릉도원’
<지난 글에 이어>
여섯 시간에 이르는 산등성이 길과 계단 길과 비단길과 물길을 거쳐 오후 늦게 둘째 날 숙소인 이리스 번 산장에 도착했다. 이리스(Iris)는 ‘홍채’, ‘붓꽃’, ‘무지개의 여신’(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옴)이라는 뜻이다. 명사로 쓰인 번(burn)은 ‘개울’, ‘시내’. 나는 이 산장을 ‘무지개의 여신이 사는 개울 산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맘에 안 들어도 할 수 없다. 억울하면 직접 갔다 와서 반론을 펴도 좋다.
대부분의 산장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중 하나는 산지기(warden, 혹은 ranger라고 부른다)와 등산객들의 저녁 만남이다.(Hut Talk라고도 한다.) 보통 저녁 식사를 마친 7시나 7시 30분쯤 열린다. D.O.C에서 파견된 산지기들은 날씨와 트랙 상태 등을 설명해 주고 구간 안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안내해 준다. 위대한 올레길 산장 가운데 서른 곳이 넘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등산객 입장에서 말하면 산지기들은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대단한 입담가들이었다.
해마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 산악 마라톤 열려
케플러 트랙 이리스 번 산장의 산지기는 다른 위대한 올레길에 견줘 케플러 트랙의 독특한 점을 알려주었다. 케플러 트랙에서 해마다 산악 마라톤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위대한 마라톤’인 게 분명해 좀 자세히 적는다.
케플러 산악 마라톤(The Kepler Challenge Mountain Run)은 1988년 12월 17일(토) 처음으로 열렸다. 보통 3박 4일 걷는 이 60km 구간을 마라토너들은 짧게는 대여섯 시간에서 길게는 열한 시간 사이에 주파한다. 뉴질랜드의 남녀 마라토너들은 물론 전 세계에서 뜀박질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첫 회 149명이 완주했다.
남자 최고 기록은 호주 출신인 마틴 덴트(Martin Dent)가 2013년에 세운 4시간 33분 37초이다. 100m를 평균 27초에 뛰었다는 뜻이다. 산속 흙길 돌길 물길을 뛰고 또 뛰어 그 시간에 끝냈다는 것은 우사인 볼트를 넘어서는 초인에 가까운 일이다.
여자 최고 기록은 영국 출신인 젤라 모랄(Zelah Morrall)이 2003년에 세운 5시간 23분 34초이다. 젤라는 바로 한 해전인 2002년에도 출전했는데 그때는 카메라를 들고 뛰다가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 여유(?)를 부려 5시간 40분에 완주했다.
이 대회는 해마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린다.(올해는 12월 3일) 케플러 트랙을 속성으로 즐기려는 등산객들에게는 특별한 이벤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 새 기록을 세우면 5천 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웹 사이트: keplerchallenge.co.nz
산새 친구 팬테일, 부채꼴 꼬리 흔들며 따라와
이리스 번 산장을 출발해 셋째 날 목적지인 모투라우 산장까지는 16.2km, 5~6시간 거리다. 첫날 걸은 길과 견주면 이 길은 아주 쉬운 길이다. 약간은 지루할 정도로 같은 모양의 길이 이어진다. 몽환적인 길도 잠깐이지 그게 길게 늘어지면 꿈에서 깨게 된다.
등산객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것은 산새 친구이다. 이 구간에는 유독 팬테일(Fantail, 공작비둘기) 새가 자주 보인다. 손 한 뼘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크기의 이 새는 부채꼴 꼬리를 흔들며 등산객들을 따라다닌다.
‘뭘 그리 급하게 가세요. 좀 쉬다 가시지요.’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 친구의 매력적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끼가 무성한 바닥에 덥석 앉아 새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새들이 배낭 옆까지 다가와 “지지배배”(분명 이 소리는 아닐 것이다. 새 소리의 대명사 같아 한 번 써봤다.)하며 선창을 하면 난 뜬금없이 동요로 후창을 맞춰줬다. 새들도 외로웠는지 피하지 않고 열심히 3절까지 노래를 했다. 이제 와 다시 생각해도 산속 음악회는 정말로 훌륭했다.
1984년 ‘빅 슬립’ 발생…축구장 45개 면적 초토화돼
등산객의 지루함을 정신 차리게 해주는 또 다른 것은 자연의 무서움을 실물로 보여준 현장이었다. 이 구간 중간에는 ‘빅 슬립’(Big Slip)이라는 곳이 있다. 비단길이라고 할 수 있는 쉬운 길을 한동안 걷다가 이곳을 맞닥뜨리는 순간, 갑자기 머리칼이 곧추서게 된다. 그동안 보아 온 멋진 풍경이 다 어디 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빅 슬립은 1984년 1월 26일(목) 이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초토화된 일을 가리킨다. 하룻밤 새 300mm의 비가 내렸다. 영국 런던이나 호주 멜버른의 1년 강수량과 같다. 이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축구장 45개 면적의 숲이 엉망이 됐다. 40여 년 전인 그날의 흔적은 지금도 계속 남아 있어 등산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빅 슬립을 지나자 다시 비단길이 열렸다. 표범 같던 자연이 양같이 순해진 느낌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깊은 산 속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푸른 빛을 띠었다. 그만큼 날씨가 좋았다는 말이다. 나무마다 지난 세월을 말해주듯 진한 이끼가 빼곡히 끼어 있었으며 심심치 않게 중간중간 수명을 다한 고목들이 큰 대(大)자로 누워 길을 막고 있었다. 깊은 산속이 아니라면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산속을 걸을 때 나만의 시간 죽이기 방법이 있다. 하루 대여섯 시간 넘게 걸을 때 써먹는다. 먼저 발걸음에 맞춰 숫자를 센다. 그렇게 천 걸음 세다가 좀 지루하면 두 걸음에 하나씩 숫자를 잇는다. 두 걸음째 “하나”, 네 걸음째 두~울”, 여섯 걸음째 “세~엣” 이런 식이다. 그 사이 오래 전 군대에서 배운 제식훈련을 한다. 흥에 겨우면 흘러간 유행가나 은혜로운 찬송가를 번갈아 가며 목청껏 부른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무려 ‘오천 번’이 넘는 혀 놀림을 하는 등 나만의 재롱잔치를 벌인 끝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모투라우에서 한국 사람 만나
모투라우 산장은 마나포우리 호수(Lake Manapouri, 면적 142km2)와 붙어 있다. 마나포우리는 ‘슬픈 마음’이라는 뜻이란다. 갑자기 나도 슬퍼진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에 그런 이름을 붙여주다니. 속 깊은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산장에 다다랐을 때 귀에 익은 언어가 들려왔다. 내 모국어인 한국말이었다.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산장 앞에서 쉬고 있던 그들 눈에도 내가 한국 사람으로 보였는지 엄지를 세우며 “정말 대단하시네요”하고 감탄을 했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등산 무용담을 조금 늘어놓았다. 무려 100시간 만에 한국말로 나눈 대화였다.
숙소에 배낭을 풀어 놓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슬픈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살에 비늘이 돋았다. 물이 너무 차가워 도저히 수영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사진만 몇 장 찍고 숙소로 돌아갔다.(참, 이곳에는 두꺼운 양말도 뚫고 들어가 몸을 문다는 샌드 플라이가 많다. 꼭 긴 팔 윗도리와 긴 바지를 입어야 한다.)
‘레인보우 리치’ 너머 계속 걸어야 트랙 진수 맛봐
다음 날 64km 대행진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모투라우 산장에서 레인보우 리치(Rainbow Reach) 주차장까지는 6km, 1시간 30분~2시간 거리다. ‘레인보우 리치’(무지개가 닿는 곳), 지명이 정말 낭만적이지 않은가. 많은 등산객이 여기에서 케플러 트랙 산행을 마친다. 무지개를 잡았는데 더 걸어 뭘 하나, 하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지개 너머까지 걷고 싶었다. 원래 시작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래야 완주 도장을 찍을 수 있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위대한 올레길 여행기 뒤편을 ‘스포일’(spoil, ‘영화의 결말을 미리 말해 준다’는 뜻)한다. 나는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열 곳’(NZ Great Walks 10) 중 최고를 케플러 트랙으로 꼽는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밀퍼드 트랙이나 루트번 트랙보다 케플러 트랙을 앞세운 이유는 바로 이 트랙 맨 마지막 구간(9.5km, 2시간 30분~3시간 30분 거리) 때문이다.
이 구간은 한 마디로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이다. 3시간 넘게 꿈속을 걸은 느낌이다. 방울새(bellbird)가 노래하고 강물(Waiau River)이 춤을 춘다. 200m 안팎의 평지는 초단(초록빛 비단)을 깔아 여행객들을 반긴다. 그 어디에서 쉬든 거기가 바로 천국이다.(참고로 내가 있었던 초가을 그날 날씨가 최고였음을 밝힌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마디.
혹시 시간이나 체력의 문제가 있어 케플러 트랙 완주가 힘들다면 꼭 이 구간만은 걸어 보길 바란다. 케플러 컨트롤 게이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면 된다. 작은 배낭 안에는 야외용 담요, 커피, 과일 몇 개가 담겨 있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아니 무조건 천천히 걷기를 권한다. 뉴질랜드 반나절 소풍 중 최고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이 대목에서 노파심 때문에 또 한 마디. 날씨가 좋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왕복으로 걷기는 힘드니까 레인보우 리치(주차장)까지만 목표로 하고 차 편은 따로 알아서 해야 한다.
<케플러 트랙 편 끝.
다음에는 라키우라 트랙(Rakiura Track) 편이 실립니다.>
첫댓글 힘드셨을 여정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트랙 맨 마지막 환상적인 구간만이라도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방울새, 강물과 함께 초단 위를 천국의 춤사위로 걸어봐야지 꿈 꿔 봅니다.💃🧚♀️🧚
젊음과 용기가 부럽습니다. 뉴질랜드는 확실히 젊은 피가 어울리는 다양한 모험이 기다리는 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