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픈이란 말은 웃다+슬프다가 합쳐져서 만든 말로
뭔가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혹은 오히려 울고 싶은 상황일 때 쓰는 말이란다.
중국은 정말 무한정 웃픈 사연의 고장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중국에서 한 남성이 변비를 고치기 위해 살아있는 장어를 삼켰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다.
막힌 ?구멍을 장어가 시원하게 뚫고나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 때문에 저지른 일이겠지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변비를 치료하기 위해 민간요법으로 50㎝에 달하는 살아있는 장어 두 마리를 삼켰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변비를 고치기는커녕 도리어 엄청난 복통이 시작됐다.
그는 복통을 변비를 고치기 위한 과정이라고 여기고 참다가 참다 참다
결국 다음 날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남성의 수술을 집도한 일반외과 전문의 쑨하이진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환자가 살아있는 장어를 삼키면 변비가 낫는다는 민간요법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한다”면서 “검사 결과 그의 배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의 골격을 확인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남성은 장어 두 마리를 몸 안에서 빼내는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의료진에 따르면 장어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환자의 몸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살아 꿈틀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진은 “몸 안에 들어간 장어들이 환자의 결장 등 장기를 깨물고 장기 사이를 비집고 다닌 탓에 출혈이 상당히 심했다. 또 박테리아 감염도 심각한 상태였다”면서 “다행히 환자는 건강을 회복하고 있지만, 만약 수술을 통해 장어를 바로 꺼내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고 전했다.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웃픈 사연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곡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왜곡시키고 곡해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성경절을 많이 안다고,
성경의 내용을 많이 들이댄다고 다가 아니다.
정말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원리와
맥을 알지 못하면 자신도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천국문을 닫는 역할을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마 23:13)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를 실제 일어난 창조 역사가 아닌 비유이자 예언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대뜸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아담의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지, 하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 말고, 아담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기상천외한 답변인가? 하도 기가 막혀 물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진리의 기준은 성경인데, 성경에 아담의 아버지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랬더니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세기 2장 24절을 내 놓는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남자는 누구요? 아담이 아닙니까? 여기 분명히 보세요. 아담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 하와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잖아요. 여기 아담의 부모가 있었다고 소개하잖아요?
생전처음 이런 해석을 들어보고 정말 뭐라고 말해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정말 그 사람의 이야기대로 해보니 부모가 있다. 성경을 문맥과 배경을 무시하고 단어만 뽑아서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의 뜻은 아담이 부모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 이후에 있게 될 일반적인 결혼의 원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담의 부모,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인류가 있었다고 하면 심각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① 첫 번째는 “떠나”의 문법적 특징이다. 이게 과거형이면 아담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런데 '떠나(히. 야아자브)는 시제가 “미완료형”이다. 이는 동작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즉,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이고 이후에 태어나는 후손들은 계속해서 이 원칙을 따라 부부의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떠나는 것을 가정 형성의 원리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계속해서 준수되어야 할 결혼의 원칙을 말씀하는 것일 뿐이고, 아담에게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② 성경의 무수한 구절들과 대치된다.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이다. 이를 입증하는 본문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1-32절)다. 계보의 첫 부분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진술한 후(1절), 첫 사람의 이름이 '아담'이라고 소개한다(3절). 그 이전의 부모는 없다. 오히려 성경은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1-3)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윗대는 아담이고, 그 윗대는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첫 사람이 아담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다른 인류를 창조하셨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했을 것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③ 성경은 이 땅의 인류의 시작, 또 죄의 시작이 아담이라고 말한다. 만약 아담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존재할까? 황당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성경은 분명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④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기 전에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 2:4-5)
이때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실 때였고 사람은 없었다(창 2:6). 하나님은 이때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기에서의 '생령(히, 네페쉬 하야)'은 '생명 있는 존재' 또는 '목숨을 가진 존재', 즉 '생물(living being-NRSV, NIV, living creature-ESV)'이란 뜻이다. ‘령(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목숨' 또는 '전인적인 존재'를 뜻하는 말이지, 영적 존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⑤ 성경은 멸망과 구원의 핵심원리를 이렇게 소개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 내용을 좀 더 상세히 풀어쓴 구절이 로마서 5장이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4-15)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안에 속한 사람들, 곧 아담의 후손들이 다 죽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자, 곧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일어난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0, 23)
⑥그들이 창세기 1-2장을 비유로 푸는 이유는 마13:35절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5)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이라고 하여 창조를 비유로 푸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시78:2에서 인용된 것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시 78:2)
시편78편 전체를 읽어보면 창조가 비유라는 뜻이 아니라 창조때부터 하나님의 통치원리인 하나님의 계명,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5-8)
⑦예수님은 비유만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마13장 전체가 비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비유는 마13장에서 마치셨다고 분명히 기록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마 13:53)
성경은 역사서와 체험서와 예언서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생애, 부활, 승천이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 도래할 사건들도 분명히 역사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을 실제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근원,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온 인류에게 전해질 마지막 복음, 영원한 복음은 생명의 근원, 창조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이다.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성경전체의 시작인 창세기 1~2장이 실제이듯,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인 계시록 21~22장도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결론이고 완성이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1-5)
https://youtu.be/lZAo5miNkzQ
https://youtu.be/_PTit7ycq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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