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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6강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말씀 / 마가복음 10:1-31
요절 /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오늘은 결혼과 하나님의 나라,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재물이 많은 한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지 배웁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에 관해 말씀하셨던 곳은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이었는데, 그곳을 떠나 남쪽 유대 땅의 경계선을 넘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당시 문서들을 보면 이혼에 관련된 문서가 매우 많습니다. 문헌을 보면 랍비 중에는 밥하는 자기 아내의 뒷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이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혼에 관한 문제를 꺼낸 것만 보아도 이혼이 당시 사회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대구시장이 ‘아내를 지키는 것이 상남자’라고 말했다가 곤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사회적으로 소란이 되는 문제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말인데 권력과 연관된 부분이기에 민감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살았고 그걸 비판하던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해 죽었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칼이 숨어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헤롯왕을 비방한다고 예수님을 고소할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도 참수당할지 모릅니다. 반대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다고 하면 예수님은 사랑도 없고 상남자의 자격도 없다고 공격당하게 될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결론을 내려 답하기보다는 모세가 명령한 것이 무엇인지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의 창세기를 염두에 두고 이 질문을 던졌는데, 바리새인들은 거기서 한참 더 나간 신명기 24장 1절을 기초하여,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와 너희 조상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일 뿐, 본래의 명령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근거로 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동등하게 창조하셨고, 사람이 성장하면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한 몸이 된다’는 말은 성적 연합을 말하는 데 꼭 육체적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인격의 결합, 마음의 결합을 포함합니다. 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희망과 근심, 사명까지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겉으로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인격이 살지만, 내용으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또 부부는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혼은 ‘사람이 나누는 것’입니다. 부부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독립된 두 인격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입니다. 또 예수님은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결혼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맺어진 하나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이루어진 결혼임을 영접하므로 연합관계에 들어간다면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결혼관에 비춰볼 때, 모세 때로부터 예수님 당시까지도 사람들이 이혼하는 것은 재혼하기 위한 하나의 편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모 그룹 모 회장은 유학 시절 열띤 사랑과 교제를 하며 사귄 그 여인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다른 여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 소송으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형사법에서는 더 이상 간음이 죄가 아닌 것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11,12절을 보면 성경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 같은 일들이 분명 간음하는 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결혼은 서로 좋아해서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지면 헤어집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합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에 따라 살기보다 따로따로의 자기중심성이 강하게 자리 잡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부부임에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상대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기 쉽습니다. 상대를 사랑하기보다 자기 사랑이 큰 사람일수록 상대에게 더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부부임에도 자기만을 주장하고 요구만 하는 사람은 한 몸에서 찢겨 나가려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럴 때 찢겨 나가고 나누어지는 아픔과 고통을 맛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은 자기 유익과 정욕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맺어진 열매이기에 결혼한 부부는 그 열매에 합당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과 배려와 존중과 섬김을 감당하며, 한 인격이 되어 한 사명을 섬기며 일생을 함께하므로 주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부부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부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면서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몇몇 극성스러운 부모가 예수님이 만져 주실 것을 바라며 예수님에게 자기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만져 주심을 바랄 때는 주로 병 고침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프지도 않은 아이를 단지 만져 주심으로 복 받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데려오니, 제자들이 화가 났는지, “지금 여기가 아이들 데려와서 만져달라고 할 정도로 한가한 곳인 줄 아느냐!” 성질을 내며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면서 분노하셨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주 중요한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라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18장 15절에서는 ‘어린 아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기처럼 영접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린 아기는 부모를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나름대로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고 붙들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기처럼 받들어야 한다니, 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길로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고민하던 문제와 이 사람의 질문이 겹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태도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는데 이 사람은 달려와서 꿇어앉아서 물었습니다. 절박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자세로 학교 선생님이나 은사님에게 질문해 본 적 있습니까?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질문할 정도로 어떤 문제에 대해 간절하고 절박함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린 아기처럼 천국을 받든다는 것이 바로 이런 태도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예수님의 대답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선한 선생님’이란 호칭에 대해 문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선하다는 표현을 함부로 쓰느냐”라고 혼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계명인 십계명의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모든 계명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네가 이 계명을 다 알고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것을 잘 지키고 있는지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는 정말 자신만만합니다. 우리가 겉보기에도 훌륭해 보입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인간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양심대로 성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자신을 잘살고 있다고 생각해 마땅히 그 대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3:23).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심을 가르쳐주시므로 진정한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삶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배워야 함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질문인 “무엇을 하여야”에 상응하는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이 유대 땅으로 들어오셨고 바리새인들과 첨예하게 갈등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제대로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려 나와 무릎까지 꿇고 질문합니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가족 중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실 만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 ‘슬픈 기색을 띠고’라는 부분을 ‘충격을 받고’라고 번역하는 주석가가 있고, 또 ‘분개하며’라고 번역하는 분도 있습니다. 원어 단어의 어근이 ‘분개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슬퍼했는지, 충격을 받았는지, 분개했는지, 아무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간절하고 절박하게 구하던 영생을 누릴 방법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인데 그는 경험하지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큰 축복인 줄로만 알았던 제자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며 수군거립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람에게 없었던 ‘한 가지’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의지와 성실이 강한 사람은 사람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소유가 많은 사람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을 사람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종교적 영역의 일부분만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린 아기와 같은 생각은 아닙니다. 어린 아기는 전적으로 부모를 의존한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기는 자기는 할 수 없는데 아빠는 슈퍼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슈퍼맨이어서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린 아기의 생각입니다. 부모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 아기처럼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선악을 판단하는 것, 나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운 것을 판단하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본문은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자신은 가난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핵심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탐욕 때문에 영생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졌으니 탐욕 부리지 말라는 것도 핵심은 아닙니다.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핵심입니다. 소유가 우리를 책임지고 지켜줄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아기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을 때 평온함을 얻습니다. 엄마 아빠를 따라갈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과 함께할 때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따라갈 때 참된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아기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영생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아시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청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보화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하고 전폭적으로 의지할 가치가 충분한 분이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얻고자 이전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찌꺼기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깊이 만나게 되니까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예수님과 견줄만한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요,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깨닫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집과 가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예수님이 사역을 섬길 때 ‘거점 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당연히 처자식도 종종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핵심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소유와 가족에 집착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도, 지금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가 버린 양들에게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소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보상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주와 복음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 살며 주님을 따를 때, 현세에서도 크게 축복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주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100배로 보상해 주십니다. 또 내세에서도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보상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습니다(31).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이 뒤집힙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재물이 많은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맛보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런 일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역시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누구보다 더 많이 받을 거야’라는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내가 먼저’ 되었다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자만하지 말고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따라야 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라는 진리를 꽉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성경적 결혼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 아기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생보다 우선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얻고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다 능히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믿음에 기초해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 속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복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