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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포도 ]
살인죄로 교도소에서 나온 남자, 비관적인 자의식으로 방황하는 목사, 조상대대로 살았던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피난민들의 아이러니하면서 가슴에 와 닿는 조합으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흥행 공식과도 같은 러브스토리가 배제된 영화지만, 원작이 주는 묵직함 때문에 굳이 로맨스가 없어도 스토리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영화 <분노의 포도>는 〈에덴의 동쪽〉 원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미국 대공황기에 경제적 곤궁에 빠진 톰 조드의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1939년 출간된 직후 빠르게 대중을 매혹시켰고, 스타인벡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194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이십세기 폭스의 프로듀서였던 대릴 F. 자눅은 원작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판권을 구입하여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에게 연출을 의뢰했습니다. <시민 케인〉(1941)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그렉 톨랜드가 촬영을 맡았고 존 포드의 작품 〈젊은 링컨〉(1939),〈모호크족의 북소리〉(1939)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헨리 폰다가 다시 한번 출연하여 주인공 톰 조드 역을 맡았습니다.
그렉 톨랜드의 촬영은 전반적으로 짙은 어둠을 의도적으로 지향했습니다. 예컨대 톰이 가석방 직후 마을을 찾았을 때 아직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숨어 살던 남자가 톰에게 지난 일들을 이야기해주는 장면은 캄캄한 어둠과 흔들리는 촛불의 강한 대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 트럭이 찌그러질 정도로 짐을 잔뜩 싣고 캘리포니아로...
혹은 후반부에 벌어지는 폭력들도 영화적으로 잘 표현된 짙은 어둠 덕분에 더 큰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죠.주인공 톰 역할을 했던 헨리 폰다의 역할도 큽니다. 헨리 폰다는 다소 우울하고 외로운 듯한 인상을 지닌 방랑자나 홀대받는 젊은 하층민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영화의 경우 결말부가 원작 소설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아기를 사산한 톰의 어린 누이가 굶주림에 빠진 한 노인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영화에서는 톰과 어머니와의 헤어지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 어머니
온갖 고난을 겪은 다음 사회의 어두운 모순을 깨닫고 변혁의 의지를 갖게 된 톰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가족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삶의 지속을 강조하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새로운 활동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훗날 헨리 폰다는 이 작품을 회상하며 그 당시 존 포드가 서민들의 감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증언합니다. 예컨대 그는 출소한 톰이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에 대해 말합니다. 원래 헨리 폰다는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그 장면을 연기하려 했다고 합니다.
* 목사 케이시
하지만 존 포드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시골 사람들은 가족끼리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은 어머니와 아들이 손잡는 것으로 연출됐습니다.
물론 아들과 어머니가 만나는 이 장면은 아들과 어머니가 헤어지는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마지막 장면과 대구를 이룹니다. “시골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작별을 고합니다.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 영화사의 초창기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여성이라는 어머니가 극의 중심점에 서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 아리조나 주로 들어선 조드 가족
[ 간략한 줄거리 ]
영화가 시작되면서 깔리는 음악은 ‘홍하의 골짜기’라는 민요입니다. 존 포드의 영화 음악은 미국이나 아일랜드의 서정적인 민요를 배경으로 사용해서 미국적인 정감이 우러나오도록 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드 일가가 나중에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될 때도 이 음악이 애절하게 울려 퍼집니다.
전신주가 끝없이 펼쳐진 길을 톰이 걸어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톰은 어렸을 때 자기에게 세례를 준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목사는 한 때는 열정적이었으나 지금은 영혼이 메말라 버린 파계한 목사이기도 합니다.
4년 만에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 톰을 기다리는 것은 빈집 뿐입니다. 그들 가족이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아왔던 땅은 거대 회사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는 사실을, 땅을 뺏기고도 떠나기지 않고 버티고 있던 뮬을 통해 알게 됩니다.
삼촌 집에 임시로 가 있던 어머니와 일가족을 만난 그들은 인부를 구한다는 광고지를 보고 꿈에도 그리던 캘리포니아로 떠나기로 합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거짓된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들에게 두 손 들고 환영해 줄 낙원은 없는 법입니다.
조드 일가는 자동차를 구해서 짐을 싣고 캘리포니아로 향합니다.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평생 가꾸어 오고 지켜 온 것에 대한 애착입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목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는 캘리포니아로 들어서며 차 속에서 숨을 거둡니다. 평생을 땅에서 살아온 그들은 땅을 떠나는 순간 목숨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어렵게 도착한 조드 일가에게 캘리포니아는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들은 여행자 캠프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은 먼저 온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고용하여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고용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오키(서부로 밀려드는 오클라호마의 유랑민을 말함)를 연행하려는 경찰을, 어떤 오키가 주먹으로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톰도 여기에 끼어듭니다.
톰은 가석방 중이므로 사건을 일으키면 다시 수감될 처지이기도 합니다. 목사 케이시가 대신 붙잡혀 가고 톰은 몸을 피해야 할 처지가 됩니다. 유랑민 캠프를 불 지르려고 한다는 음모를 들은 톰은 소식을 전하고 가족은 다시 캠프장을 떠납니다.
그들은 우연히 복숭아 따는 일을 하게 되고 시간당 5센트의 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농장의 분위기가 뭔가 수상합니다. 어딘지 이상한데 감을 잡을 수 없었던 톰은 우연히 케이시를 만납니다. 그는 이 농장 안에 있는데 파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 당 5센트를 주다가 나중에 2.5센트로 깎인 것에 대한 항의의 파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 처음 장면, 감옥에서 나온 톰
농장주는 사설 경비원을 고용하여 케이시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날 밤 케이시는 그들에게 걸려 목숨을 잃게되고 그 과정에서 톰은 케이시를 친 보안관을 살해하게 됩니다. 조드 일가는 다시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우연히 들른 캠프는 정부의 농업국에서 운영하는 캠프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모처럼 인간 대접을 받으며 잠시 편안함을 맛봅니다. 매주 토요일에 벌어지는 댄스파티도 있습니다. 하지만 톰 조드에게 다가오는 수사망은 그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가족과 헤어져 새로운 사회 투쟁의 길을 걷기 위해 떠납니다.
[ 1930년대 미국 중서부를 휩쓸었던, 먼지 폭풍 혹은 모래 사발(Dust Bowl) ]
대평원(그레이트 프레어리). 축복받은 땅. 북미 대륙 중앙의 넓은 초지와 풍부한 수자원은 19세기 초중반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인 목축 지대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사막도 있지만 지력 좋은 땅이 널려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씨를 뿌리고 한없이 나아가 돌아오면서 추수한다’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세계적인 경제·사회분석가 겸 행동주의철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육식의 종말>에 따르면 미국 중서부의 공짜 목축업이 시작된 곳도 대평원이었습니다. 스페인 선교사들과 목축업자들이 기르다 멕시코 독립전쟁 때 놓아버린 소들은 야생에서 1830년대에 30만 마리, 1860년대에는 350만 마리까지 늘어났습니다.
목장주나 축사, 사료가 없이도 소들은 최적의 조건에서 자랐습니다. 대평원의 다년생 풀이 소에게는 이상적인 식량이었던 겁니다. 심지어 겨울에도 자라는 천연 목초를 뜯어 먹으며 소 떼는 번식하고 유유히 돌아다녔습니다. 대평원에서는 스페인이 놓친 소뿐 아니라 북미 대륙에 6,000만 마리가 있었다는 미국 들소(버펄로)까지 배불리 먹었습니다.
1890년 미국 국세조사국이 공식적으로 서부 개척 종식을 선언했을 때. 대평원에는 서유럽 전체 면적과 맞먹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농사도 잘됐습니다. 세계적인 냉해로 국제 곡물 가격이 두 배 치솟은 1894~1895년 유달리 미국만 대풍을 거둔 것도 대평원의 옥토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부터 대평원에 재앙이 찾아들었습니다. 무성하던 풀밭이 사막으로 변하고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먼지 폭풍이 일었습니다. 세상이 꼭 먼지 구덩이(Dust Bowl) 같았습니다. 여름 기온이 5℃에서 43℃를 오가는 이상 기후에 비도 내리지 않아 강줄기가 메말랐습니다.
* Dust Bowl 지역
최악의 가뭄은 1934년과 1939년의 가뭄이었고, 최악의 먼지 폭풍은 1935년에 발생했습니다. 더스트 볼은 한때 비옥했던 땅을 황무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오클라호마 주와 텍사스 주, 캔자스 주, 콜로라도 주, 뉴멕시코 주, 그리고 심지어 동부에 위치한 주까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한낮에도 강력한 모래바람이 하늘을 가려 밤처럼 캄캄한 적도 많았습니다. 대평원에서 이는 모래 폭풍이 뉴욕과 워싱턴까지 날아가 사람들을 질식시켰습니다. 다락에 먼지가 쌓여 천장이 무너지고 겨울이면 붉은 눈이 내렸습니다. 온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더스트 볼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시카고의 1935년 7월 24일 낮 온도가 관측 이래 최고치인 섭씨 44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축복의 상징과 같던 대평원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이유는 인간의 탐욕과 가뭄. 영농기계화 바람 속에 1차대전으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대거 도입된 들창코 괴물이라는 별칭을 가진 트랙터를 모는 농장주들은 야생풀을 뿌리째 갈아엎었습니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야생 초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야생화한 소 떼가 뜯어먹고 빗물에 의한 토양 침식을 막아주며 지하수를 가두는 역할을 했던 야생 초지를 없애고도 미국인들은 <문명의 발달로 인한 농업기계화 찬가>를 불러댔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소출이 늘어났으니까... 땅은 곧 지력을 잃었습니다. 지반이 약해져 옥수수 줄기가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알곡을 생산하지 못하는 농지를 떠나 살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중부에서 서부로 떠난 인구가 250만 명. 미국 역사상 단기간에 이토록 많은 인구의 이동은 없었습니다. 고향에 남고 싶어도 대부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농사가 안돼 은행 빚으로 사들인 트랙터는 고물로 변해가고 원리금을 갚지 못해 집과 땅을 금융회사에 내준 채 쫓겨나듯 삶의 터전을 등졌습니다.
새로 이주한 곳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29년 가을 월스트리트의 주가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 대공황 탓이었습니다. 어딜 가도 실업자 천지고 일자리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간혹 일감을 주는 회사나 농장주들은 터무니없는 품삯을 주며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중부 출신 이주 농민들에 대한 일부 농장주들의 착취와 비인간적인 행태를 취재하던 <샌프란시스코 뉴스> 신문사의 한 기자는 취재 수첩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미국의 사실주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1939년)>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분노의 포도>의 가장 유명한 구절.
‘사람들의 눈에는 낭패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간다.’
[ 1929년 대공황 ]
* 검은 목요일
1928년 8월, 대통령 후보인 후버 (31대 대통령 당선)는 선거유세에서 이렇게 떠들어 댔습니다.
“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 어느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빈곤 극복이 절정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제 구빈원은 우리 사회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1929년이 시작되고 나서도 미국인들은 지난 몇 년 동안의 호황일로의 번영이 계속 지속되고, 나아가 놀랄만한 경제, 사회적 발전이 뒤따라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해 3월 쿨리지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가격으로 볼 때 주식가는 싼 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경제전문가들마저도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건재하다.“
미국 예일대학의 첫 번째 경제학 박사로 미국이 낳은 최고의 경제학자로 불린 어빙 피셔도 “주가는 영원히 높은 고원처럼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며 1929년 미국 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후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의 그러한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그해 9월부터 사실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식시장의 주가는 몇 번의 하락을 되풀이하면서 그때 마다 다시 상승하여 간신히 현상유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23일 수요일에 이르러 증권시장에서는 마침내 돌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정오가 되자 개장 무렵의 침묵을 깨고, ‘팔자’는 주문이 쇄도하였습니다. 거래고가 어찌나 많은지 주가 표시기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자 노련한 투기꾼들은 이날 저녁부터 주식시장에서 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이 주식시장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문들은 그날 밤 서둘러 주식시장을 떠나가는 주식 투자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거의 전 지면을 할애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태를 조금이라도 호전시키려는 의도에서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내일이 되면 주식시장은 반드시 조직적인 지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그러나 주식시장은 이미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 팔아! 팔아! 모두 팔아! >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전 11시, 뉴욕 월스트리트 ‘뉴욕거래소’에서 이상한 징후가 감지되었습니다. 매도 주문이 갑자가 늘어나더니 이는 곧 눈덩이 사태로 변해 너 나 할 것 없이 “팔아, 빨리 팔아. 얼마라도 좋다. 팔기만 하면 된다”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다우존스지수는 이날 20퍼센트 이상 하락해 299.47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거래된 주식은 하루 최대 거래량인 400만 주의 3배가 넘는 1290만 주였습니다. 시카고와 버펄로 주식거래소는 낮 12시 반에 아예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피셔의 공언은 헛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피셔는 명예만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사업을 통해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목요일의 공포에도 주식을 팔지 않던 그도 결국 며칠 뒤 계속 이어진 ‘검은 월요일’과 또 한번의 ‘검은 목요일’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가 잃은 재산은 1000만 달러로 추산됐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이 되었을 때 큰 손들은 물론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들은 중매인들에게 주식판매가를 지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손실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되도록 비싸게 팔아 주시오!” 판매자들의 절망적인 외침 소리가 입회장에서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구매자들의 ‘사자’ 소리는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날 저녁, 폭락 사태를 거듭하는 주식시장의 지주들 여러 명이 월가의 전설들 중의 하나인 토머스 라몬트 사무소에 긴급히 모여들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된 지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최소한 공황은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2억 4천만 달러의 유지 자금을 출자했고, 이 자금은 3일간 엄청난 해일을 그런대로 막아 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주변의 또 다른 거물들이 지원을 해주지 않는 한 더 이상 지탱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이때 후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기본적인 사업, 즉 상품 생산과 분배는 여전히 건전하며 또한 번영을 약속해줄 만한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0월 29일에 또 한 번의 대폭락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은행가들도 손을 들어버렸고, 11월 중순에 이르렀을 때 손실 총액은 3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의 주식은 휴지 조각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번영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마침내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 왜 그랬을까요?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5년에서 27년까지 미국경제는 여러 면에서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호황의 시기로 분류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경제의 호황을 선도한 산업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산업이었던 자동차와 석유산업, 라디오, 냉장고를 중심으로 하는 가전산업, 그리고 주택건설 붐에 따른 건축업이었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상업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각종 전기제품들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고가였던 이들 제품에 대한 소비 촉진을 위해 신용할부 판매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공산품의 생산 증가와 그로 인한 설비투자의 확대는, 호황의 혜택을 누리던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주식에 비정상적인 투기열풍을 불러 일으켜 주식시장에는 거품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주가는 기업의 자산가치나 수익성에 대한 전망과는 상관없이 과도하게 올라있었고, 이발사,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주식뿐이었습니다.
실제로 1921년 8월 24일 63.9였던 다우존스산업 평균 지수는 1929년 3월 9일 6배 가가이 급등하면서 사상 최고치인 381.17에 올라섰습니다. 1929년 3월 제31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허버트 후버가 “빈곤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큰소리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내의 경기는 이미 1927년부터 하강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고 있었고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공산품의 생산도 1929년 봄부터는 본격적인 감소세로 돌아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1920년 초 외국으로부터의 이민이 차단되면서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중단되자 주택수요가 감소하면서 건축경기도 위축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실제 경기는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전부터 이미 악화되어 오고 있었지만, 1929년 9월에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주식시장 붕괴 직전까지도 주가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이즈음 또 다른 불황의 그림자는 농업부문에서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농업기반이 회복되면서 1925년 후반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의 재고 증가와 가격 하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5년의 세계 농산물 가격지수를 100으로 할 때, 1929년 10월의 가격지수는 70으로 하락한데 비해 재고는 약 75%가 증가하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미국의 농부들도 수년간 지속된 농산물의 과잉생산과 낮은 가격, 그리고 재고유지를 위한 금융비용의 압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농업은 총고용의 4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산업이었는데 농민소득의 약 28%를 차지하는 농산물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농민들의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
1930, 31, 32년의 미국내 농산물 가격하락률은 각각 40%, 28%, 12%로, 1932년 말의 농산물가격은 1925년 가격의 24% 수준에 불과하였습니다.
농업부문에서의 심각한 불황은 곧 바로 농민들의 구매력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농부와 비숙련 노동자의 소득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그간의 투자확대로 생산된 많은 공산품들을 구매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생산력과 구매력간의 이 같은 괴리는 대공황을 초래한 수많은 원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곳곳에서 누적되어가던 불안 요인들이 한 순간 폭발한 것이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이었습다. 이날 뉴욕 월가)의 증권시장에서는 아침부터 광적인 '팔자'주문이 폭주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단 몇시간 만에 파산해버린 투자가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면서, 그 날 월가에는 고층빌딩의 창문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 대공황 이후 >
하지만 그 해가 다 가도록 실제로 뛰어내린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이 후, 미국의 수많은 은행과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미국과 전 세계 경제는 끝없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1929년 10월의 주가 대폭락 이 후 뉴욕 월가의 기관투자가들은 주가붕괴로 인한 파산을 방지하기 위해 주가 지지에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1930년 봄이 되면서부터 주가하락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던 1932년 여름의 주가는 1929년 9월 최고치의 약 10분의 1, 1930년 연초의 약 6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하였습니다.
주식시장의 붕괴는 곧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집니다. 주식에 투자한 기관은 물론 도산한 기업에 대출자산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연쇄적으로 파산을 하게 된 것은 오늘날의 예금보험공사와 같은 금융안전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기업의 도산은 여기에 관련된 금융기관의 부실을 가져오고 금융기관의 파산이 또 다른 기업의 부도를 낳는 걷잡을 수 없는 악순환이 나타나게 된 것이죠.
1932년에 미국의 총생산은 1929년에 비해 절반으로 감소하였고, 실업률은 25%에 이르렀습니다. 문을 닫은 기업의 수가 9만을 넘었고 15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실직을 당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임금도 평균 50%가 감소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실업보험이나 여타 사회보장제도가 거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의 고통은 매우 컸습니다. 1931년 한 해에만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일찍이 이 같은 대량실업과 빈곤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다.
후버대통령의 이름을 따 '후버빌(Hoovervilles)'이라 불리는 임시 막사가 수많은 노숙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전국 곳곳에 세워졌으며, 그것도 모자라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신문지와 '후버 담요(Hoover blanket)' 한 장으로 밤을 지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다음 선거에서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민주당의 루즈벨트 후보에게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수요가 완전히 실종이 된 디플레이션의 시대, 이때는 현금을 가진 사람들의 천국이고, 당시 미국에서는 모든 물가가 거의 5분의 1 이상 하락하였으며 특히 부동산 가격은 10분의 1 이상 하락하였습니다. 수년전만 해도 10만 달러가 넘는 대저택이 3천 달러면 살 수가 있었으며 양복 한 벌은 10달러, 와이셔츠는 50센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극장의 입장료는 팝콘 값을 포함해도 10센트 미만이고. 기차는 텅텅 비어 있었고 농장에는 식품이 많이 쌓여 있었지만 이를 내다 팔 시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1933년 3월에는 은행 예금의 인출이 심해지자 20개 주에서 은행과 증권장을 일시 폐쇄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주가는 1930년 초 회복되는 듯 했지만 1930년 말 다시 곤두박질 치며 결국 1932년 대공황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증권시장 붕괴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전국적인 주식투기 광풍, 농민들의 소득 감소로 인한 소비수준 위축, 부채를 창출할 수 밖에 없는 지주회사와 투자신탁회사들의 확신, 불가능한 대규모 은행대부의 증가 등을 꼽았지만, 이미 버스 떠난 뒤의 손 흔드는 격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주식 브로커들이 뉴욕 맨허튼의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자살함으로써 끔찍하게 상징된 ‘검은 목요일’ 또는 ‘암흑의 목요일’은 그렇게 시작되어 이후 10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하게 됩니다.
1929년 미국은 세계 총생산량의 42퍼센트를 생산하는 초대국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경제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29~1932년 대공황 기간 동안에 실업율은 미국 22퍼센트, 독일 17퍼센트로 상승했습니다.
일본도 1930년 한 해 동안 300여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국은 1934년까지 실업율은 25퍼센트에 달했고 GNP는 30퍼센트나 떨어졌습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
1932년 대공황이 그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 갈 때 32대 대통령으로 루스벨트가 당선됩니다. 비록 루스벨트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적 상황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문을 닫는 공장수는 부지기수였고, 농장 폐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은행도산도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어느 대통령보다 불리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싸늘하고 음침한 날에 취임연설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나의 굳은 신념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법이든지 택하여 실험하는 것이 상식이다. 만일 그것이 실패한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것을 실험해 보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보자는 것이다.”
비참한 경제 상황에 빠진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의 대담한 약속을 들으며 용기를 얻어 갔습니다. 취임 다음날인 1933년 3월 5일, 루스벨트는 전국 은해 휴업을 선포하고 3월 9일에는 의회소집을 요구했습니다.
* 테네시강 유역 TVA댐
3월 15일에 은행들의 반 이상이 다시 정상 업무를 개시했습니다. 3월 12일에 루스벨트는 라디오 ‘노변담화’에서 “이제 금융제도는 안정되었습니다.”라고 국민들에게 확언하였습니다. 다음 몇 몇 주 동안에 현금 인출보다 예금이 많았는데 이것은 국민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3월 9일부터 시작하여 6월 16일까지 의회의 특별회기, 이른바 ‘100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메시지 전달과 열띤 입법이 계속된 기간이었습니다. 의회의 정책 심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이러한 행정부와 입법부의 박력 있는 행동주의는 국민, 그 가운데서도 특히 대공황의 가장 밑바닥 희생자들인 수백만 실업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 그 유명한 노변 담화
이후 뉴딜의 ‘구호 계획’, ‘개혁 계획’은 국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으나 그러나 가야 할 길은 멀고 먼 길이기도 했습니다. 당면 문제들 가운데서 실업이 가장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민간 노동력의 실업율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업부문에서의 미미한 회복세는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 뉴딜 정책
뉴딜은 경제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수동적이었던 국가를 간섭주의 국가로 만들어 놓았고, 소득 분배의 공평을 기하고 사회보장의 필요성을 인식시켰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하층 중산 계급 및 노동자 계급이 크게 대두하였습니다. 뉴딜을 지지한 사람들은 바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뉴딜 정책의 내용이 사실 과거의 정책들과 전혀 색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점배격, 노동자의 권익보호, 사회보장제도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혁신주의 운동이 항상 내걸었던 정책이었습니다. 다만 뉴딜은 미국이 일대 경제 난국을 맞이했을 때, 그러한 정책을 단시일에 대담하게 구현한 것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뉴딜은 자유시장경제라는 전통적인 기반을 근간으로 한 혁신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루스벨트 이후 미국은 역사상 가장 양극화가 감소되었고 중산층이 가장 두꺼워졌던 시절로 기억됩니다.
* 후버댐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1882년 뉴욕 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 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한 루스벨트는 부유한 가정형편 덕분에 개인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어려서부터 유럽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는 먼 친척 형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된 엘리너 루스벨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과 컬럼비아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0년 뉴욕 주 상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입문한 루스벨트는 각종 선거에서 여러 차례 낙선을 경험하는 등 초기에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의해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돼 1차 세계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전략 수립에 간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였으며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정치를 떠나 있을 때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려 양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팔과 손에까지 부분 마비가 왔습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기적적인 투병생활을 한 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며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서 연설할 때에는 그의 인간승리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 후 1928년 뉴욕 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고 결국엔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대공황을 수습하고 미국 최초로 4선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을 이끌다가 1944년 4월 12일 운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4명의 아들들이 모두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의 장남 제임스 루즈벨트 대위는 태평양 전쟁 당시 아버지에게 영향력 행사를 부탁(작전제외가 아닌, 주변에서 만류하니까 작전에 투입하게 하라는 압력)하여 전사할 가능성이 컸던 특수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아들이란 사람은 평발에 저시력, 그리고 위 절제술로 위장이 절반도 남지 않은 장애인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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