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 22대 왕인 정조 임금을 빼놓을 수 없어. 정조는 임금 중에 과천에서 가장 많이 자고, 가장 오래 머문 임금이야. 그러다 보니 과천의 고개, 객사, 동이름도 새로 지어 주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많아.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일찍 여의었어. 할아버지인 영조가 후궁과 신하의 꼬임에 넘어가 사도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지. 영조는 아들이 임금자리까지 빼앗으려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거든.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다 가두어 죽게 했어.
정조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걸 늘 마음 아파했어.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를 찾아 정성스럽게 전배(궁궐, 종묘따위에 찾아가서 절하는 것)를 했어. 정조는 원래 양주 배봉산(영우원)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현릉원)으로 옮기고 더 자주 전배를 다녔지.
그 때는 수원을 가려면 과천을 꼭 거쳐야 했어. 그래서 정조는 수원을 가기 위해서 과천을 지나갔던 거야. 정조가 한 번 거동할 때마다 신하 약6,100 여 명이 모시고 왔대.
정조가 한강을 건너 과천까지 오면 밤을 맞게 되었던 모양이야. 과천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는 거지. 객사는 사방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고 산새들이 지저귀고 있어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어.
"여봐라, 이 객사를 이제부터는 온온사라 부를 지어다. 예로부터 부림이라고 불렸다더니 숲이 우거져서 마음이 한층 평온하고 아늑하다."
정조는 나무판자 위에다 穩穩舍(온온사)와 富林軒(부림헌) 편액을 써서 객사에 붙이라고 내주었어.(정조 14년, 1790년 2월 10일) 그 편액이 지금도 중앙동동사무소 뒤편 온온사에 남아 있지.
정조는 학자 못지 않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야.
정조는 과천에 와서 문엄리에 사는 선비 강씨가 여든여섯이나 먹은 늙은인데도 책읽기를 부지런히 한다는 말을 들었던가봐. 정조는 선전관을 문엄리로 보냈어. 강씨를 불러 시짓기를 하려는 게지. 그런데, 선전관이 혼자 돌아와서 아뢰기을,
"노인이 죽은 지 사흘이 지났다 하옵니다." 하는거야.
이 말을 듣고 정조는 애석한 마을으로 시를 지어 추모했대. 또, 과천현감을 불러
"쌀과 포를 주어 장례를 돕고, 문엄리를 문원이라 부르도록 하라."고 명령했어. 정조는 '공부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문원이라 지어 준 것이지.
이제 찬우물 동네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 줄 게.
어느 거둥길에 정조가 갈현동 앞을 지나가다가 목이 말랐나 봐. 물을 청하니 신하가 떠왔을 테지. 물을 벌컥벌컥 한 숨에 들이키더니
"물을 마시니 가슴이 뚫린 듯 차고 달구나. 이 우물에 벼슬에 내리도록 하라."
하고 벼슬을 내렸어. 그 뒤로 사람들은 찬우물을 벼슬받은 우물이라고 해서 가자우물이라고 불렀대. 가자우물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 과천 시내에서 안양가는 방향으로 찬우물 들머리 오른편에 있지. 지금도 우물자리가 보존되어 있으니 한 번 가보렴. 물이 차고 단 지 한 번 마셔보렴.
...........
.......... 이하는 생략함. 찬우물의 유래는 비교적 짧아 윗부분를 다 소개했음.
첫댓글 그런 유래가 있군요. 과천에 살면서도 몰랐어요. 재미있네요. 아이의 사회시험에 나오고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저희 애가 이 문제를 틀렸어요. 유래를 모르니 당연히 틀릴수밖에요. 엄마도 모르니...아이와 선배님덕에 유래하나를 배웠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