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구절사 / 주용일
구절사에 가려면 물길 거슬러 오르며 몇 번이나 길을 끊는
물소리를 건너야 한다. 숲보다 더 울창한 구절양장의 물소리에는
징검돌이 없어 단박에 건너뛰지 않으면 넘을 수 없다.
물소리를 넘어서서도 자꾸만 쓰러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그럴 땐 갈참, 졸참, 신갈나무나 물푸레, 서어나무 같은
것들의 둥치를 붙잡고 발목 추슬러야 한다. 물소리 그치고
마음의 소리도 그칠 즈음 능선 아래 가난한 아내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구절사 일주문이 있다. 거기, 온갖 소리들이 원음의
자리에서 고요해진 대적광전에서 보리수나무 꽃들은 만발한다.
고요의 꽃들이 핀 화엄의 구절사에서 구절초 따위의 꽃들을
찾지 마라. 이미 당신 마음에 꽃 피는 구절사는 있다.
들판에서 무릎 꿇다 / 주용일
봄비 그친 산골짜기 천수답,
묵어 버려질 듯도 싶은 무논에서
늙은 부부가 손모를 낸다
못줄 띄우고 벼 포기 꽂은 자리,
자박자박 일렁이던 흙탕 가라앉으며
한 자 한자, 한 줄 한 줄
또박또박 논바닥에 새겨 넣은
육필의 푸른 글자들이
얼비친 하늘 배경으로 선명하다
행간과 자간이 빈틈없다
한 나절 걸려 한 마지기 푸른 원고를 완성하고
늙은 부부는 찔레꽃 덤불 곁에서 들밥을 먹는다
흙내 맡으면 푸르게 자라는 시,
행간에는 백로 왜가리 걸어가는 시,
이삭 쑤욱 솟아오르는 시,
돈이 되지 않아도 기죽지 않는 시,
묵히면 준다는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는 시,
얼쑤 어-얼쑤 뻐꾸기 추임새도 들어 있는 시,
누군가의 식탁에 올라
한 사발 김 오르는 뜨끈한 밥이 되는 시,
그 푸르게 쓰여 진 한 편의 시를 읽어내다가
세상 앞에서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던
뻣뻣한 나의 시가, 나의 오만이
뼈 부러지듯 털-썩 무릎 꿇다
몰록 / 주용일
사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당신 가슴처럼 둥글고 도발적인 저것,
입안에서 굴리면 말랑말랑 혀에 감긴다
이빨이 없어도 소리가 되는 무봉(無縫)의 언어,
유방이라는 단어에 뿌리가 닿아 있다
나는 문득 성욕을 느낀다
하고 싶어 하고 싶어
마당에선 봄볕에 눈뜬 목련이
피고 싶어 피고 싶어 소리 지른다
볼록렌즈에서 튀어나오는 얼굴들처럼
볼록한 네가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순간 둥근 네 몸을 끌어안고
기쁜 땀 흘리고 싶어 나는 발버둥친다
언어와 벌이는 눈 못 뜨는 환한 낮거리,
히히, 이런 날은 몰록
나도 피고 싶어, 피고 싶어, 소리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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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에서 보리수나무 꽃들”이 만발하는 ‘구절사’는
“몇 번이나 길을 끊는 물소리”를 징검돌 없이 단박에 건너
뛰고, 그렇게 “물소리를 넘어서서도 자꾸만 쓰러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워가며, 가난한 아내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주문 너머에 있다.
물소리를 건너고, 자꾸만 쓰러지는 마음을 일으켜 세워가며
가는 길이란, 우리가 꿈꾸는 지점에 닿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 먼 길을 돌고 돌아왔지만,
거기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이미 자신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까지 오는 멀고 먼 여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의 떨림,
그 아름다운 찰나가 빚어내는 황홀인 것이다.
“온갖 소리들이 원음의 자리에서 고요해”지는 것처럼, 먼 길을
돌아온 시인의 발걸음이 멎는, 거기,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인이
그토록 꿈꿔온 ‘그것’이 만발하는 꽃처럼 완성되는 것이다.
/ 박완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