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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檀園(박달나무 단자 동산 원자) 김홍도 선생님의 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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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다른 표기 언어 金弘道 동의어 사능, 士能, 단원, 檀園, 단구, 丹邱, 서호, 西湖, 고면거사, 高眠居士, 첩취옹, 輒醉翁
요약 한국적 풍속화로 조선 시대 4대 화가에 꼽히는 화가로 호는 단원.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이며 어려서 경기도 안산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 이론가인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다. 1781년에는 정조어진 익선관본 도사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 지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목차접기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서호(西湖)·취화사·고면거사·첩취옹(輒醉翁)·단구(丹邱).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칩거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77년 별제로 있으면서 강희언(姜熙彦)·김응환(金應換)·신한평(申漢枰)·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그림제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1781년에는 한종유·신한평 등과 함께 정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쳤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을 지내기도 했는데,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1810년경을 전후하여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세계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과 수파묘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군선도병 群仙圖屛〉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 김홍도에 대한 평가홍백화의 글과 조희룡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유운홍(劉運弘)·엄치욱·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1784년작)·〈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1804년작),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김홍도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김홍도(金弘道, 1745년 ~ ?)는 조선 후기의 화가김해[1]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2] 주로 어명·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 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다.[3]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 목차생애[편집]유년 시절[편집]출생과 가계[편집]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장담 문씨김해(金海)이고 5대조부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증조할아버지인 김진창(金震昌)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4] 할아버지는 김수성(金壽星) 부터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선대가 역관·서리를 지낸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와 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檀園 李琉芳, 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5] "단로"(檀老)나 "단옹"(檀翁)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 무렵의 호다.[5] 그의 유년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김홍도에 관한 문헌인 오세창의 편저인 《근역서화징》속에 들어있는 〈호산외사〉에도 가장 중요한 김홍도의 생부모와, 형제관계, 본처와 자녀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6] 강세황[7] 이렇게 김홍도의 유년시절이 베일에 가려진 것은 〈호산외사〉를 저술한 조희룡(趙熙龍)이 김홍도를 평소에 숭배한 나머지 상세한 사실은 의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8] 이러한 일들은 김홍도의 출신 성분이 중인이라는 점과 관련있어 보이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9] 미술세계에 들어오다[편집]한편 당시에는 화원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가계로 보면 김홍도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寫字官) 출신이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을 참고하면 김홍도의 부친인 김석무(金錫武)의 장인, 즉 김홍도의 외조부는 장필주(張弼周)이고, 그가 속하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사회의 명문거족이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다 자신의 화재(畵才)가 돋보여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세계에 소개되었으리라.[5] 강세황의 만남[편집]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10] 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11] 강세황의 칭찬[편집]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전기 생애[편집]이처럼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김홍도는 20대에서 부터 이미 화명(畵名)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대략 1773년(영조 49년)경에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13] 그는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년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司圃署)에서 종6품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게 된다. 그리고 1776년에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14]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4] 정조와 김홍도[편집]김홍도는 영조 말년에 세손(정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5] 김홍도와 정조와의 관계는 조희룡의 《호산외사》 속에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供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王旨)에 맞았다." 또는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16] 또한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후기 생애[편집]김홍도의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0세 되던 해인 1784년에 그린 《단원도》이며 이 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인인 김홍도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상태를 반영한 것이다.[18]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19] 이 되어 2년 5개월 간 근무하였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1791년민중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4] 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김홍도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 생활 이후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20]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4]
노년[편집]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한두 살이던 1805년이나 1806년[4] 그의 아들 김양기 김홍도의 교류[편집]김홍도는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문학, 철학, 음악 등 다방면의 소양을 닦아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김홍도가 교유한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인과 중서출신 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는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과,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위항 시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남인들이나 위항 시인, 그리고 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의 풍속화나 진경산수 그림의 특징[편집]
무동(舞童, 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 회화적 성과와 영향[편집]그는 김응환에게 사사했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잘 표현했다. 풍속화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도 그렸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여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해서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작품[편집]작품으로 《군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등이 있다. 군선도[편집]풍속화[편집]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거의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내려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는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김홍도가 등장한 작품[편집]텔레비전[편집]영화[편집]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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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철우선생 오늘도 수고 많으셨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