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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영! 네 말을 모두 알아들었어. 그동안 내가 좀 미련하고 답답하여 네 마음을 알지 못했다. 지난 일은 모두 잊어라. 이제부터는 너를 외롭고 슬프지 않게 해줄게.”
막상 영섭이 이렇게 나오자 보영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보영이 기대했던 대답은 그럼 우리 사이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거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자던가 하는 정도이었는데.
영섭이 이렇게 쉽게 자기 마음을 받아주니
그러나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영섭의 이와 같은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초등학교에서부터 15년이 넘도록. 뛰는 가슴과는 달리 보영은 조용히 영섭의 손을 맞잡으며 영섭의 두 눈을 응시했고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한없는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몰라보게 더 가까워졌다.
영섭의 마음을 얻은 보영의 아름다운 얼굴은 한여름에 소낙비를 맞은 장미처럼 활짝 피어난다.
틈나는 대로 찾아가 만나는 혜선이 보영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요사이 얼굴이 꽃처럼 피어나느냐고 물었고 보영에게서 영섭과의 관계를 듣고는 그렇게 영섭이를 좋아하더니 잘 되었다며 자기 일처럼 좋아하고 축하해 주었다.
한 편 어려서부터 부유하게 자라며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한 번도 놓쳐 본 적이 없는 태만은 영섭과 그렇게 만나서 보영과 영섭이 연인 사이라고 알고도 보영을 잊지 못해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은 한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가 없어 언젠가는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보영에게 대학 동기으로서 연락도 하고 직장동료로서 만나서 협조도 받으며 보영과의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두 사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기회를 기다리며 보영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문산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현영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영국으로 연수를 떠난 희수에게서는 떠나는 날 공항에서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통 소식이 없다.
희수의 집에 전화하여도 희수가 해외연수를 가기 전에는 자상하시던 어머니가 무엇 때문인지 현영의 전화를 떨떠름하게 받으시고 그런 어머니한테 여러 번 물어 경우 희수의 주소를 알아서 몇 번 편지 하였지만, 답장이 없더니 나중에는 반송이 되어 돌아온다.
처음에는 자리를 잡느라고 늦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수의 변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이 있을 때 그것도 영섭이 군대에서 아무 소식이 없이 지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따르던 희수가 영섭이 제대에 맞추어 연수를 떠나더니 외국에서 한자의 소식도 없다는 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정조는 자기에게 빼앗겼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 자기를 따랐지만, 이제는 후회하고 자기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한 생각이 들수록 어림없는 짓이 되게 하리라는 맹세를 한다.
어쨌든 희수는 자기와 살을 섞은 사이다.
그것도 여러 번, 그래서 한때는 자타가 공인하는 연인이었던 그런 그녀를 놓칠 수는 없다.
만약의 경우에 자기가 희수를 갖지 못하게 되면 어떠한 짓을 해서라도 영섭도 갖지 못하게 하리라고 마음먹는다.
내가 못 먹는 감이라면 너도 못 먹는다는 그런 심보다.
그러나 희수의 소식이 두절 되며 희수에게로 향할 수 없게 된 현영의 마음이 숙영에게로 옮겨지며 숙영과의 사이가 말할 수 없이 가까워지고 전부터 현영을 좋게 보던 숙영의 부모들은 현영이 승낙하면 둘을 결혼시켰으면 하는 눈치다.
21
영국으로 해외연수를 나와 있는 희수는 어떨까?
영섭을 피하고 현영과의 사이를 정리하려고 해외연수를 나왔지만, 영섭의 제대 전에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그것을 정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타국에 홀로 나와 있는 희수는 외롭기 짝이 없다.
미리 준비하고 3학년을 마치고 나왔으면 같이 오는 동료들도 있고 대화도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지금보다는 잘 통하여 조금 덜 외로울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그리고 고독이 엄습하면 할수록 현영이 생각보다는 영섭의 생각이 더 났다.
뱀에 물렸을 때 영섭에 등에 업혔던 생각에서
임진강에서 놀던 때 영섭의 영상. 영국군 전적지에서, 신산리 뒷산에서, 그리고 영섭이 군에 들어가기 전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마음을 나누던 추억 이런 모든 것들이 그리움이 되어 희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 끝에 현영에게 정조를 유린당하던 생각이 미치자 몸서리가 쳐지며 현영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협박이 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사람과 관계를 유지했을까 그것도 자타가 공인하는 연인으로서 까지 후회가 막급이다.
정조를 잃었을 때 현수 오빠에게라도 이야기하여 사태를 수습했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섭에게도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이해해 줄지도 모를 텐데 아니 이해하여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현영에 정조를 잃었다는 부끄러움과 그것을 빌미로 하는 현영의 협박만 무서워 그가 이끄는 대로 끌러갔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어리석고 유약한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면 자기의 의사를 확실히 하리라
현영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영섭에게 용서를 빌리라.
영섭이 자기를 이해하고 받아주면 자기의 남은 생애를 영섭을 위하고 사랑하며 살고 영섭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으면 수녀가 되어 한평생 영섭의 행복을 빌리라 마음먹으며 영섭이 영상이 어떻게 이렇게도 자기의 전 생애에 깊이깊이 각인 됐나 자기도 놀라며 아마도 사춘기 소녀 시절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고 그 사랑을 이때까지 알게 모르게 키워왔기 때문인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어서 인가 그리고 아직은 영섭이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기다려 주리라는 마음이 일며 만리타국의 외로움 속에서도 영섭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저리면서도 더운 바람이 일어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리고 행복해지는 것을 희수는 기쁨으로 생각했다.
하루하루 영섭을 생각하며 이국에서 고독을 참으며 연수를 받았다.
연수초기에는 모자라는 준비를 보충하며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영섭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내던 날들이 날이 가며 자리가 잡히고 습관이 되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희수의 마음이 2년이 끝나가며 귀국이 가까워지자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귀국하면 영섭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현영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 하는 걱정으로
군대 가면서 헤어진 후 5년여 만에 만나게 되는 영섭.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참으로 그리워지는 얼굴이다. 고등학교 2학년 입대 전에 빵집에서 자기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던 영섭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위에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영상!
비릿하게 웃으며 조롱하는 것 같은 현영의 모습이 떠오르자 희수는 도리질을 한다.
희수는 부모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귀국을 했다.
비행장에는 아버지가 마중을 나오셨다.
귀국하여 영섭이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집에서 쉬면서 현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영섭 모르게 영섭의 학교를 가보고 하여 우선 영섭과 현영의 근황을 탐문하여 보았다.
영섭은 4학년 후 학기를 맞이하고 있고 현영은 계속하여 문산 근처에서 군대 생활을 하는 것을 알았다.
영섭에게 옛날에 알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다른 사람이 나왔다.
일요일을 기다리다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집에서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처음 희수를 못 알아보셨지만, 희수의 설명으로 알아보시고 ‘이번 주에는 학교에서 바쁜 일이 있어 안 내려왔다’라고 대답하셨다.
같은 나라에서 어제나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영섭이 있는데도 통화가 안 된다는 것이 희수를 미치게 만들고 그로 해서 더욱 영섭이 보고 싶다.
다음 주 월요일 보고 싶은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학교로 찾아갔다.
교무과로 가서 4학년 토목과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알아보고 근처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수업이 끝나는 시간쯤 하여 강의실 밖에서 기다렸다.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또 강의실 밖에서 영섭을 기다리며 희수는 마음을 조인다.
‘5년 동안 못 본 영섭이 어떻게 변했을까?’
‘나와 현영과의 관계를 알았을 영섭이 나를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 외면하면 어쩌나?‘
‘만나면 처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너무 오래되어 혹 나를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다 과 친구들과 어울려 나오는 영섭을 5년 동안 못 보는 사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한눈에 영섭을 알아보았다.
영섭을 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희수는 영섭이 자기를 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과 친구들과 어울려 나오던 영섭은 강의실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그냥 ‘누구를 기다리는 여자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다 이상한 영감에 다시 보고는 그녀가 희수인 것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 서 버린다.
영섭도 고등학생 때보고 5년 만에 처음 보는 희수를 충분히 알아보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영섭이 먼저 움직인다.
얼마 안 되는 거리 희수를 향하여 다가가는 영섭은 그 거리가, 만 리나 되는 것 같고 그 거리를 가는 동안, 만 가지 생각이 얽힌다.
‘해외연수를 갔다더니 언제 돌아 왔나?’
‘희수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배신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가?’
‘이제 와 그 변명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도 뻔뻔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는 영섭.
5년 전 희수라면 아니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지 않은 희수라면 달려가서 안고 오랜 헤어짐 후의 만남으로 환호할 텐데 친구 현영의 여인이 된 희수를 이제는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다.
영섭이 움직이면서 희수도 움직인다.
희수 앞에 선 영섭은 감회가 깊은 표정으로
“참! 오랜만입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영섭과 반가운 해후를 기대했던 희수는 영섭의 냉정한 태도에 서러운 생각이 밀려왔지만 자기가 없는 동안 현영과 자기와의 관계를 주위 사람들에게 듣고 더욱이 현영이 자랑처럼 영섭에게 이야기했을 터이니 영섭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러움을 참는다.
그리곤
“네! 오랜만이에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영섭이 앞장서고 걷고 희수가 뒤따른다.
생각 같아서는 희수를 떼버리고 가버리고 싶지만, 한때나마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라 희수를 데리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을 동안 둘이는 아무 말이 없다.
영섭은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망막하다.
이미 남의 여인이 되었고 제대를 하고도 2년이나 지난 지금 군대에서 왜 편지 못 했었는지 해명을 한다는 것도 우습고 왜 영섭이 군대 있는 동안을 기다리지 못하고 현영과 사귀었는지 추궁하기도,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묻기도 난감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있다, 생각이 나서
“언제 귀국하셨어요?”
하고 묻는다.
“한 달쯤 됐어요.”
‘그러면 그동안 현영과는 여러 번 만났을 것이고 이제 무슨 일로 자기를 찾아왔는가.’
‘옛날에 한때나마 좋아했던 남자가 어떻게 변했나 알아보려는 심사인가.’
고등학생 때, 보고 실로 5년 만에 만나는 희수 참으로 많이 변하여 완전히 아가씨로 피어나 있다.
더욱이 외국을 다녀와서 세련미가 넘쳐 봄에 흐드러지게 활짝 핀 벚꽃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보영이 여름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핀 장미 같다면 희수는 봄 벚꽃 같다.
“외국에서는 불편 없이 잘 지냈습니까?”
“네! 잘 지냈어요?”
대답하는 희수는 영섭이 얼마나 자기와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만나서 지금까지 말이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하는 말이 모두 경어이고 그것도 처음 대하는 남녀 간에나 사용하는 존칭어다.
생각 같아서는 영섭의 품에 매달려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5년이라는 세월의 공백과 자기에게 절실하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는 영섭의 태도를 보고 희수는 슬픔에 젖어든다.
영섭도 속으로는 희수가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쩜 영섭이 희수보다 이 만남을 더 반기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남의 여자 그것도 자기와 제일 친하다고 여기던 친구의 여자가 된 희수를 예전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영-영섭 오-오빠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불러보는 영섭이라는 이름과 오빠라는 명칭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친근감이 든다.
영섭도 실로 오랜만에 희수가 부르는 오빠 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맴돈다.
“네! 잘 지냈습니다. 현영이는 잘 있지요?”
할 말이 없어 그냥 물어보는 물음이다.
“모르겠어요. 아직 만나지 않았습니다.”
“네? 아직 만나지 않았다니 현영이 어디 먼 곳에 갔습니까?”
“아니 모릅니다. 찾아보지를 않아서.”
희수의 목소리가 잠긴다.
영섭이 묻는 의도가 짐작됨으로
‘이 건 무슨 말인가? 상식적으로는 귀국하자마자 만나야 할 애인을 귀국하여, 한 달이 넘도록 만나 보지 않고 있다가 자기를 처음 찾아왔다는 희수의 말은.’
영섭은 묘한 감정에 빠진다. 기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은
“현영이 문산 근처에 있는 공병대에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
하다가 자기가 물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말문을 닫았다.
“만나기가 거북하고 싫어서---”
희수도 말끝을 맺지 못한다.
영섭은 또 의문에 부딪혔다. 현영에게서 들은 말로는 두 사람이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라고 했는데 지금 희수가 하는 말은 전연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현영의 말이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자기와 희수와의 관계를 훼방하기 위한.
영섭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첫댓글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무혈님!
지키미님!
구라천리향님!
다라방님
감사합니다
읽어 주시는 여러분이 있어 행복합니다.
즐거운 많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