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 오후 2시.
전 날 저녁 약속한대로 김영수, 김성현, 문시언, 그리고 기사를 자청한 소제, 넷이서 경북중학교 한문 선생님이신 김경진 선생님 참배 길에 나섰습니다. 하고 많은 스승님이 부족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많은 영향을 주셨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스승님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머릿 속에는 중학교 졸업할때 선생님에게서 받은 전교생 모두에게 주신 '문패'를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고하건데 육송으로 된 가로 세로가 약5*25센티의 나무 위에 한자로 우리학교 교표인 "中學"이 불에 달군 놋쇠로 각인이 되어 있고, 한자로 "姜壽均"이라고 쓰인 문패를 전교생 졸업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 문패를 보관하고 계시는 학형이 계시면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경북중고등학교 박믈관'에 보관하기 위해 공고를 한 일이 있으나 아직 아직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나의 기억엔 선생님은 얼마나 엄하셨던지 감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선생님이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한문 시간이지만 한 단원(과)을 열번 써 오는 숙제가 놀기에 바쁜 나에겐 무척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기억엔 한문 시간에 종아리 맞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종아리에 시퍼런 멍줄이 있어서 반바지를 입은 하복기에는 그게 하교 할 때 큰 고민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대구종합운동장 앞이라 걸어가는데 한 시간 씩 걸렸는데, 가는 길에 약전 골목을 지나면 신명여고에서 나오는 우리 동네서 제일 이쁜 여학생이 내 다리의 종아리를 보고 웃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잉크로 다리에다 음폐하기 위한 먹줄을 몇 개그려서 하교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 날 비가 와서 완전히 망쳤습니다. 그 난처한 상황에 난 완전히 울상이 되었고 그 이쁜 여학생은 날 두고두고 이야기꺼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종아리 맞은 기억만이 무성한 선생님을 찾는데 기사 역할을 자청해서 가는 나의 머리 속에는 '참 멋쟁이 스승'이란 생각이 뇌리에 가득했습니다. 교무실에 청소 검사를 받으러 갈 때면 항상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그 많은 나무조각이 가득 쌓여 있었고 항상 붓글씨를 쓰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엔 그게 우리에게 주실 선물인지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졸업 30주년 기념 문집"을 만들 때 "내가 공사석에서 한문 때문에 무식하다는 소릴 듣지 않은 것은 중학교 때 김경진 선생님에게서 배운 한문 실력 때문이다"라고 말 한 동학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도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계셨음에도, 자세가 틀린 제자에겐 그 공포의 "옻칠한 까만 회초리"가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동차가 의성 IC를 나와 비안면으로 갔습니다. 이 곳 지리는 고향이 비안인 김영수 형이 안내를 했습니다. 형의 고향이 비안 자락(自樂)리라서 곧 산제2리 마을을 찾았습니다. 커다란 동구의 느티나무 아래서 선생님의 묘소를 아는 친척분이 오신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창 모내기에 바쁜 철이라 안내 받기가 오히려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논에서 신는 긴 장화를 신으신 아주머니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습니다.
손에는 모내기 하다 온 물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우리는 선영의 초입만 가리켜 주시고 바쁜데 돌아 가시라고 한 후 먼 발치에서 말한 그 망두석이 있는 곳에서 선생님의 묘를 찾았습니다. 비석의 글을 보니 선생님의 묘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래 가지고는 못찾겠다 싶어서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 올려고 내려왔습니다.전화 벨이 울리더니 "찾았다" 고 했습니다. 묘를 찾기 위해 근방 가시 밭 길을 두리 번 두리번 찾는데 고생을 덜하게 한 공로는 문시언 형이 가장 컸습니다. 문 형 왈
"내가 걸음은 잘 못 걸어도 멀리 보는 눈은 있데이.."
"맞네 문수보살은 앉아서 구만리를 본다드니 문 형이 제일 뒤에서 올라 왔는데 저 멀리 있는 묘를 잘 찾았네! 오늘 밥 값은 톡톡히 했네...하하"
내가 저 아래 산 입구에서 큰 소리로 칭찬 반 핀잔 반으로 산 위를 향해 소리치니 문 형이 하는 말
" 암 인제사 알아보네. 그렇지 문수 보살도 문(文) 씨고 나도 문(文) 가 아이가... 그러니 요 정도야 하하"
가는 봄 날 한 낮 초로의 네 제자를 기다렸음인지 멀리서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준비한 제물을 차렸습니다. 엊 저녁 젯상 차림에는 월성동의 지하 선술집 식당 "장 여사"의 도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우리들이 나드리를 나갈 때면 박달 도령에게 허리춤에 도토리 묵을 채워주는 금봉이의 정성과도 같이 자상하고 곰살맞게 준비를 해줍니다. 나이야 우리보다 아래지만 이럴 때는 국화 꽃 옆에 선 꼭 큰 누님 같이 든든하답니다. 법주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초헌관 김성현, 아헌관 문시언, 종헌관 김영수, 그리고 독축관 강수균. 뭐 그런대로 격식을 갖추고 잔을 올렸습니다. 묘지가 남향이라 도열한 제자들의 어깨 위에 햇뼡이 따뜻했습니다. 품 속에서 50년이나 덥혀 기다렸던 스승님의 손길인가! 일기예보엔 큰 비가 내린다드니 이렇게 조용하고 좋은 날씨가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엔 만감이 스쳤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첫댓글 삼 헌관과 독축관 모두 어려운일 하셨습니다.선생님항태 배운 문자중 春水滿四澤이 떠오르는 군요.
아 맞아요. 그 댓글이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꿈을 청운이라고 하시며, 칠판에 명필로 쓰신 그 때 그 여름 날의 그 뭉게구름이 생각나네요.
봄 못에는 못물이 가득하고, 여름구름은 봉우리도 많을시고... 뭐 이런 뜻이..
봄 못에는 못물이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봉우리도 많아라.. 뭐 이렇게 배운 것 같은데요... 그 다음은 가을과 겨울 이야기인데...
그 문패에 김경진선생님과 같은 경사 경짜라고 소제의 이름을 멋 있게 써 주셨는데........ 가신 흔적만 보이시니 옛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납니다.
정말로 좋은 일을 하였소.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시겠지요. 멀리서나마 감사드리오. 항상 좋은 소식 전하여 주구려.
현봉 형! 좋은 일은 무슨..., 늦게나마 '굽은 나무 선산지키는 역할을 했다'라고나 할까. 뭐 고향 사는 재미가 이런 재미 아니겠습니까? 칭찬을 해 주시니 오히려 머쓱합니다요.
"春水滿四澤하고 夏雲多奇峰이요 秋月揚明輝요冬嶺秀孤松이라"이싯귀가 50년전 고 김경진선생님의 가르침이군요. 강 학장님 좋은 일 많이하고 계시네요.서울 오시거던 사촌동생과 함께 한잔 합시다.
화봉의 한문실력을 보니 확실한 소파 선생님의 수제자군요. 선생님의 묘소에 잔디는 어데가고 잡초만 수북하구만요. 올 가을에는 벌초하러 갑시다.
벌초라.. 거참 마음에 드시는 제안이시구먼....,그런 이야기를 우리 또 만나서 이야기 해 봅시다요.
화봉 형의 문자가 화면 가득하네요, 우린 벌써 소년 시절에 이런 문자를 줄줄 외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다른 학교 학생들 들었으면 난리나겠네...
위엄있던 선생님, 꼭 열번씩 배운 한자들을 써 오는 숙제덕으로 시험마다 100점씩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한문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군요. 중3때부터 한문장을 공부하는 것이었는 데, 그때쯤은 영어와 국어에 더욱 관심했던 것같군요, 그러지 않았더면 정시식, 강수균. 그외 유불교에 조예를 가진 친구들과 비슷할 뻔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