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계 진화타겁(軫火打劫)...
진화타겁이란 말 그대로 불난 틈에 도둑질한다는 뜻이다. 출전은 어디인지 모르겠다. 내가 중국 고전을 다 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출전을 명시한 것이 하나도 없는 터라. 아무튼 불이 나면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건을 훔쳐 나온다고 하는, 상대의 곤란을 틈타 이익을 취하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계략 되겠다.
초나라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낸 오왕 합려는 결국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월왕 구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 아들인 부차는 당연히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 나무섶에서 잠을 자며 맹세를 했고, 마침내 회계산에서 구천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구천을 오나라로 끌고가 노예로 전락시켜 부려먹으니, 구천은 살기 위해 부차의 똥까지 핥아야 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 원한이 사무쳐 겨우 부차의 온정으로 월나라에 돌아와서는 곰의 쓸개를 핥으며 역시 복수를 맹세했다. 저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다.
그런데 당시 오는 부차 자신도 꽤 유능한 군주였거니와 손자병법의 저자이기도 한 손무와 오자서라고 하는 명신이 있어 초와 제라고 하는 두 강대국을 패퇴시킬만큼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패배하여 기세가 꺾인 바 있는 월나라로서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오나라를 상대로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중국 사대미녀로도 꼽히는 서시를 비롯 미녀를 바치고 온갖 물자를 오나라에 바치면서 스스로를 철저히 낮추며 부차의 방심 속에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제나라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지게 된 노나라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찾아와 오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일을 꾸미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오나라 역시 노나라를 노린 바 있었기에 오나라가 제나라를 일방적으로 누르는 것을 바라지 않던 자공이 월나라를 이용해 오나라의 배후를 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월나라로서도 더없는 기회였기에 월왕 구천은 병사와 무기를 바침으로써 오나라가 군사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긴다.
결국 구천에게 반심(叛心)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차는 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애릉의 싸움에서 제나라의 대장인 국서와 전상을 사로잡는 한편, 전쟁의 혼란 속에 포식가가 제도공을 죽여버리고는 조공을 약속해 오자 제나라는 한 순간에 오나라의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누구나 욕심이 생긴다. 초와 제, 두 강대국을 굴복시킨 이상 천하에 오나라를 상대할 나라는 없다고 할 정도이니 이 기회에 천하의 맹주 자리를 노리게 된 것이다. 오자서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난세의 군주로서의 야심이 부차로 하여금 끝끝내 황지로 천하의 제후를 모아 회맹을 하기로 결심한다. 구천이 바라던 바 대로였다.
구천은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십 년 절치부심하며 노려 온 기회인지라 가진 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구천이, 모든 전력을 이끌고 떠나버린 오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전연승, 순식간에 여러 성이 구천의 손아귀 아래 떨어졌고, 월군은 오나라 영토 깊숙이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부차가 그 소식을 듣고 군을 이끌고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구천의 월군이 오나라 깊숙이에서 부차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오강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했을 때는 구천의 월군은 충분한 휴식과 보급으로 최상의 상태에 있었고, 부차의 오군은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친 데다 굶주리고 물자도 부족했으니 결국 부차는 월군에 크게 패하고 고소대로 쫓겨 들어가 거기에서 월의 대장 계영에게 잡혀 자살하고 말았다.
물론 오군이 제군을 공격하는 자체는 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오의 전력으로 제를 굴복시키자면 오의 거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되면 오는 사실상 텅텅 비어 버린다. 더구나 자공의 부추김으로 그 야망이 부풀대로 부풀어 회맹을 하겠다며 군을 이끌고 더욱 깊숙이 중원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제는 월군이 오를 공격하더라도 바로 돌아오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다른 것이 위기가 아니라 월군의 존재 자체가 위기가 된다. 한 마디로 빈집털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제 구천은 오왕 부차가 떠난 사이 오의 성과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부차를 기다렸다가 오강에서의 한 번의 싸움으로 부차와 오의 주력을 섬멸하여 오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있다.
유비 역시 진화타겁의 계략을 가장 훌륭히 사용한 이 가운데 하나다. 적벽대전으로 온통 형양일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유비는 거의 무혈입성하듯 형주의 양양, 강릉, 남군, 나아가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의 네 개 군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여기에 기존의 강하와 하구를 포함 형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유비로서는 서주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근거를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형주만으로는 부족했다. 일단 형주는 사방이 뚫려 있어 조조가 마음 먹고 공격해 들어온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는 지형이었던 데다, 적벽에서 싸움의 주역을 맡았던 것을 이유로 손권이 권리를 주장해 오자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었던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형주는 너무 작았다. 땅 넓이만 놓고 보면 충분히 넓은 땅이기는 했지만, 중원을 차지하고 앉은 조조나 강동에 근거를 둔 손권에 비한다면 인구도 물자도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다. 하나가 더 필요했다. 보다 안전하고 보다 풍요로우며 장차 중원을 도모하는 데 있어 근거가 될만한 땅이. 바로 익주였다.
당시 익주의 자사로 있던 것은 탁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당시 유주의 자사로 있던 유언의 아들 유장이었다. 천성이 온화한 편이던 유장은 익주의 토호들에게 상당히 휘둘리고 있었는데, 그런 내정의 혼란은 한중에서 세를 불리고 있던 장로로 하여금 기회를 노리도록 만들었다. 결국 유장은 혼자의 힘으로는 장로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다른 세력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유장의 사신으로 유비를 찾은 것이 장송이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만일 제대로만 된다면 유장의 공식적인 요청을 받아 구원군으로서 당당히 익주로 군을 이끌고 들어갈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결국 유비는 장송을 철저히 구워삶은 끝에 내응을 약속받고, 장송을 통해 익주 내부로부터도 여러 협력자를 확보한 뒤, 장송으로부터 제공받은 지도를 가지고 익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구원군으로서, 그리고 유장이 유비의 의도를 깨닫고 의심하게 되었을 때는 그 의심을 빌미로 유장을 공격하여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익주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다. 이로써 삼국지의 세 솥 발 가운데 하나인 촉의 근거가 만들어진다.
명은 멸망하던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세계최대최강의 대제국이었다. 아무리 한창 일어나고 있던 청이라지만 단번에 어찌 할 수 있는 그런 상대는 아니었다. 더구나 청과 명 사이에는 산해관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었으니 청의 시조인 누르하치가 산해관의 지성인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포탄에 맞아 전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산해관이 아닌 명 내부에 있었다.
당시 명은 정덕제 이후 정통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로 이어지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면서 국정의 난맥이 깊어진 상태였다. 북로남왜의 침입에, 잦은 자연재해에, 세금은 무겁고, 관리는 부패하고, 조정은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연히 그러한 혼란상황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으니, 마침내 명에서도 하남과 섬서에서 왕가윤이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킴으로써 결정적으로 망조에 들게 된다.
물론 명도 제국으로서 백 년 넘게 중국을 다스려 온 관록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왕가윤과 그를 이은 고영상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명을 떠나 있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고영상의 사위이자 틈왕의 호칭을 이어받은 이자성이 관아와 탐욕스런 지주의 곳간을 열어 땅과 쌀과 돈을 나누어주며 민심을 얻기 시작하자 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낙양과 개봉, 승천이 이자성에게 함락당하고, 서안에서 마침내 대순의 황제로 즉위한 이자성이 동쪽으로 북경을 향해 군을 휘몰아 오자, 결국 명은 변변한 저항 없이 북경을 내주었고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그 역사를 사실상 마감하게 된다. 바야흐로 틈왕 - 아니 대순의 영창제의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이 꼬이려니 하필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가 건드린 여자 가운데 오삼계의 애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삼계라는 인물은 차라리 아버지가 인질로서 이자성에 의해 죽더라도 여자를 빼앗긴 원한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고 하는 열혈한이었다. 원래는 대세가 이자성에게로 흐르고 있으니 이자성에게로 투항하고자 했던 오삼계였지만, 결국 여자를 빼앗긴 것이 원인이 되어 청의 병력을 끌어들여서라도 이자성을 죽여야겠다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청의 실권자는 청태종 홍타이치의 막내동생이자 갓 황제의 자리에 오른 어린 순치제의 섭정으로 있던 친왕 도르곤이었다. 누르하치가 그 재능을 아껴 유난히 사랑했다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던 도르곤은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고 나와 그를 찾아오자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을 자랑하는 청의 강병이지만 산해관을 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로써 당당하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해관을 지나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서툰 짓은 하지 않았다. 오삼계가 세운 명분은 반란군에 의해 황도가 함락당하고 황제가 죽었으니 이웃나라로서 마땅히 도와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알아서 명분을 갖다 바치는데 이쪽에서도 그만한 예는 갖추어야 했다. 몇 번 전혀 생각이 없는 척 고개를 젓다가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도르곤은 마침내 군을 이끌고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게 되었으니, 그 다음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이자성을 몰아내고, 명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포섭할 자는 포섭하고 제거할 자는 제거하고, 이로써 명을 대신하여 만주족의 청 왕조가 중국의 지배자로서 새로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도르곤은 명을 대신하여 청왕조를 연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었는데,
"청은 연경 - 즉 북경 - 을 이자성에게서 빼앗은 것이지 명나라로부터 취한 것이 아니다."
결국 도르곤이 말한 그대로 청은 명과 싸워 북경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이자성이 북경을 공략하여 차지한 그 혼란을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북경과 명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지, 불이 난 틈을 타서 물건을 훔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훔치게 된 진화타겁의 극치라 하겠다.
근대로 오면 입장은 역전되는데,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난징조약을 맺게 되자, 청의 약세를 본 프랑스와 독일, 미국, 러시아까지 끼어들어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는 1860년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다시한번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청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니, 이것이 2차 중일전쟁, 그 결과 텐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이 맺어지면서 청은 철저히 제국주의 열강의 먹이로 전락한다. 한 번 약세를 보인 적은 철저히 물어뜯어 뼛골까지 빨아먹는다는 진화타겁을 훌륭히 실천한 경우라 하겠다. 이후 1899년이 일어난 의화단의 난과 그 결과 맺어진 신축조약은 겸사겸사라 하겠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도 진화타겁의 책략을 아주 적절히 사용되었었다.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미묘한 것이었는데, 비록 명목상으로는 청이 조선의 종주국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사실상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구도였다. 처음에야 그것이 중화사상을 근거로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으니 청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부딪히면서 근대적인 국제관계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자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근대 제국주의가 말하는 속국의 의미 그대로 조선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원래 조공과 책봉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적인 국제질서라는 것이 중국 자신이 만든 것이기에 이제 와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거나, 아니면 다른 수단으로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기에는 이미 조선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근대적인 외교관계까지 맺은 당시 상황에서 여러가지로 명분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마침 조선에서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명성황후 민씨를 내쫓고 다시 대원군을 권좌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같은 사실을 청출사일본대신으로부터 전해들은 서리북양대신 장수성은 함대와 군대를 준비시키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다. 바야흐로 당당히 명분을 가지고 조선으로 군을 파견하여 내정에 깊숙이 간섭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대원군을 납치하고, 반란군의 수괴를 체포하고 처벌하는 반란을 진압하고 수습하는 모든 과정에서 청은 주도하여 추진했다. 그러는 한 편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겠다면서 리훙장의 추천으로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임명하는 한편, 통리군국사무아문과 통리통상교섭사무아문을 설치하고, 군제개혁을 실시하여 4개 친영을 창설하는 등 내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때 이태원에는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주재 통리교섭통상사의로 와 있던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국왕조차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상 이 시기 조선은 명실상부 청의 속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내정과 외교 모두 철저히 청의 종주권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 당시 그 잘나신 명성황후 민씨와 그 척족들은 뭘 하고 있었느냐? 정신이 없었다. 일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그들에게는 조선이 흥하고 망하고 하는 것보다, 백성이 살고 죽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가문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말하자면 불 난 집에 들어와 물건 들고 가는데 더 가져가라 던져주는 꼴이랄까? 망하는 집구석 꼬라지가 대개 이렇다. 결국 민씨 일족의 부정과 부패와 무능과 무기력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일단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30년 전쟁 당시 신교파인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한 프랑스는 아직 가톨릭이 대세인 가톨릭 국가였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의 재상은 가톨릭의 사제인 추기경 리슐리외였다. 그러나 리슐리외는 추기경이기 이전에 프랑스의 재상이기를 원했다. 그의 후임자인 마자랭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도 가톨릭 국가이기 이전에 세속의 왕국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넓은 영토와 비옥한 토지, 그리고 농업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비약적으로 늘어난 생산을 바탕으로 언제든 유럽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인접한 강대국 신성로마제국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보유하고 있고, 스페인의 왕위까지 차지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가 장차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적이었다.
그런데 마침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신교를 지지하는 제후와 도시들과 가톨릭을 신봉하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와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보헤미아에 가톨릭을 강요하던 페르디난트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신교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5년만에 진압당하고,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구원군으로 뛰어들었다가 마침내 1629년 뤼베크 평화조약으로 물러나고,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북유럽의 사자로 불리우던 나폴레옹 이전의 천재전략가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스웨덴군을 이끌고 독일에 상륙하여 신교의 편에 서서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는데, 유능한 재상인 리슐리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던 스웨덴과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있던 스페인과 대립하던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혼란에 끼어든 것이다.
사실 당시 프랑스의 군사력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이렇다 할 큰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탓에 지휘관도 병사도 하나같이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강점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너른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과 그를 바탕으로 한 풍족한 재정과 인구였다. 오죽하면 싸움에 패해도 죽어간 병사 만큼 파리에서만 하루에 새로 태어난다 했을까. 사실상 신성로마제국과의 주(主)전선을 담당했던 스웨덴의 기적과도 같은 승리도 프랑스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얻은 것은 매우 컸다. 나중에도 여러 차례 독일과의 사이에 문제가 된 알자스와 로렌도 이때 획득한 영토이거니와, 스페인을 나가떨어지게 만들고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함으로써 그를 대신하여 서유럽의 새로운 강자로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프랑스가 신성로마제국과 직접 실력을 겨루고자 했다면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노력과 피해도 더 컸을 테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이 처해 있던 혼란과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노려 이용함으로써 더 적은 시간과 더 적은 노력으로도 마자랭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주도하여 맺을 때에는 이미 프랑스가 바라던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적의 약점을 노림으로써 나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진화타겁의 원칙을 적절히 활용한 예라고나 할까?
2차 세계대전 당시 구(舊)일본제국이 거두었던 놀라운 전과도 진화타겁으로 인한 성과였다.
아다시피 당시 동남아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정확히는 1940년 독일에 의해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점령당하고 영국이 고립된 이후, 동남아시아는 사실상 본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해 있었다. 그것을 일본은 놓치지 않았다.
사실 당시 일본으로서는 중일전쟁만으로도 사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비록 중국의 상당부분을 지배 아래 두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대도시를 중심으로 점과 점을 잇는 부분적인 지배에 불과했고, 공산당과 연합한 국민당군의 지원은, 미국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여전히 거세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으로부터 자원금수조치를 당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이제까지의 모든 성과를 포기하고 중국을 토해놓느냐, 아니면 무주공산이 된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의 석유와 기타 자원들을 손에 넣고 전쟁을 지속하느냐, 이미 중일전쟁의 성과에 고무되어 있던 일본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일단 진주만에서 미국 함대를 한 번 조져주고, 인도차이나로, 인도네시아로, 말레이시아로, 싱가포르로, 본국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들을 차례로 접수해갔다. 일단 명분은 대동아공영권이었는데, 서구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고,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한다고 하는 명분은 초기 이들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그 허구성이 그대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무튼 육군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별볼 일 없던 일본이 전쟁 초기 잠깐이나마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그 대부분을 지배 아래 두고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마디로 빈집털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유럽의 열강들의 어려움을 적절히 틈타 이용한 데에 있었다.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영국을 털어먹은 것도 진화타겁의 훌륭한 한 예라 할 것이다.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식민지만 많았지 많은 내외적인 모순으로 인해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동안 투자해 놓은 것이 있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독자적인 기술을 많이 확보해 놓고 있었다. 세계최고수준의 레이더 기술과 독일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있던 제트엔진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경제적으로 이미 세계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놓았지만, 그러한 첨단기술에 있어서는 영국에 비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미국은 바로 그것을 노렸다.
나치 독일이 바로 도버해협 건너에서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고, 독일의 폭격기들은 매일같이 영국 상공으로 날아와 폭탄을 떨구고 가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독일의 잠수함들이 영국의 생명선이랄 수 있는 바다를 막아 영국을 고사시키려 하고 있었고. 비록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독일을 물리치려 해도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열악해질대로 열악해진 영국의 재정으로서는 전비를 마련하기도 벅찼다. 그런 때 미국이 접근했다. 도와줄테니 기술을 내놓으라고.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기술을 내놓으라고. 어째야 할까? 오죽하면 독일보다 더 악랄한 것이 미국이라 했을까?
하긴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10여 년 전 우리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1997년 초유의 외환위기로 말미암아 IMF의 관리체제 아래 들어갔을 때 우리 역시 당장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수의 우량기업을 헐값에 외국자본에 팔아야 했다. 정상적으로는 절대 그 가격에 팔 수 없는 기업들이었다. 아니 몇 배의 돈을 주더라도 팔지 않았을 그런 기업들마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그러한 기업들마저 극심한 자금난에 빠뜨려 버렸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경제의 체질개선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이유로라도 서둘러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노렸다. 외국자본은 바로 그것을 노려 헐값에 도리어 큰소리치며 배짱 퉁기며 기업들을 사들였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다 굽신거려야 했었고.
비유하자면 우리 스스로 불을 지르고 제때 끄지 못한 상황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집안의 물건들을 죄다 들고 가버린 꼴이다. 그렇다고 외국자본더러 뭐라 하기도 뭣한게, 바로 그것이 글로벌이고 자본주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인정도 뭣도 없이 오로지 이익에 대한 추구와 그를 위한 기술만이 있는 세계화시대의 국적없는 자본의 현실이다. 책임이 있다면 스스로 지킬 능력도 되지 못하면서 불까지 지른 우리 자신이지 자본주의가 시키는 그대로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이미 약점을 보인 한국을 뼛골까지 빨아먹는 데 성공한 외국자본의 유능함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징징거림도 아니고, 진정으로 글로벌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려 한다면 우리 역시 다른 누군가의 약점을 노려 뼈 한 조각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빨아먹을 수 있는 비정함과 철저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다시 한 번 같을 꼴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진화타겁이란 매우 비겁하고 비열하고 치사하고 야비한 전략이다. 말 그대로 도둑놈의 전략인 때문이다. 불 난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이 도둑놈이 아니면 뭐가 도둑놈일까? 더구나 불이 난 틈을 타 물건을 훔치고 있으니 도둑놈치고도 상당히 양심이 없는 더러운 도둑놈이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이런 더러운 도둑놈을 좋아할까? 당장은 이익이 되니 웃는 얼굴을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그를 믿지 못하고 이익이 있다면 언제든 안면몰수하고 뒷통수를 치게 된다. 개인 단위에서 진화타겁의 계략을 쓰는 것을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따라서 진화타겁은 항상 그러한 주위의 인심과는 상관없는, 상대적으로 주위의 인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 단위에서 쓰는 것이 타당하다. 집단 단위에서야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성보다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더 중요하기에, 차라리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더럽고 치사한 수를 쓰더라도 이쪽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때라도 인심을 잃어 그것이 다시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술적으로 꾸미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기왕에 이익을 얻을 것이라면 인심을 잃고 이익을 얻기보다는 인심도 얻고 이익도 얻는 것이 항상 더 좋은 법이니까.
야생에서 느리고 약한 동물은 가장 먼저 포식자의 먹이가 된다. 다치거나 병들면 또 그것대로 포식자는 더 쉽게 먹이를 포획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계에서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약자를 누르고, 약자를 짓밟고, 불리함이나 약점을 노리고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말하자면 정글의 법칙이라 할 것이다. 생존 자체가 정의가 되는. 살아남는 것만이 정의가 되는. 병법삼십육계의 다섯번째 진화타겁은 바로 그러한 계책이다. 양심도 윤리도 체면도 없는 인간의 가장 저열한 본능 그 자체인 것이다.
아아, 한 번 날아가는 바람에 또 한 번 더 쓰고 말았다. 솔직히 먼저 쓴 것이 훨씬 간결하고 좋았는데. 항상 보면 두 번 째 쓸 때면 글이 더 늘어지고 더 난잡해진다. 한 번에 휘리릭 갈겨쓰는 타입이라. 생각이 많아지면 글마저 조잡해지는 거지.
그나저나 쓰는 나는 재미있는데 읽는 사람은 어떨까? 리플이 없어서 통... 재미있나? 재미없다고 해도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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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잎 클로버 원문보기 글쓴이: 네잎 클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