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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37~40절/신앙의 최저선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모순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가장 종교적이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충성심을 갖고 있으며, 모세의 율법을 가장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보이고 있는 태도는 적의이고 살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모순을 직선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그런 직선적인 태도는 이들의 적대감을 부추겼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37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40절에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지적하셨고, 결국 59절에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하신 말씀에서 유대인들 속에 숨겨두었던 살의가 행동으로 나오는 것을 읽게 됩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의 지적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44절) 오늘날에도 이런 모순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비록 많은 목회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일지라도, 이것은 사실이고 성경이 지적하는 바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모순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붙들고 있는 신앙의 최저선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7절) 이것은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이며 외적인 조건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고 충청도 사람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7절에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치 여러분이 양문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혹은 양문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은 분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외적 조건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가지고 신앙의 최저선일 때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이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어떤 근거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 앞에 있던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최저선은 무엇이며 여러분은 신앙의 근거로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오늘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회피하지 말고 대면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근거, 신앙의 최저선으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가?”(37절) 하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앞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예수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첫 번째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32)하는 것이었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는 그들을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그들을 죄의 모든 속박과 결과들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죄의 형벌에서, 죄의 습관과 능력, 그리고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자아에 묶여서 사는 타락하고 왜곡된 인생의 틀에서 그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갖는 결과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을 대적하게 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30절에 “많은 사람이 믿더라.” 했던 바로 그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설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까지는, 그리고 자신이 말씀의 표적으로서 피할 수 있는데 까지는 좋을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37절에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내게 걸림이 될 때 발생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자유하게 하는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할 곳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이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은혜를 통해서 맺혀진 열매는 누림의 축복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중간에 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시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1.질문들저는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믿는다.’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염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야 합니까? 여기에 그 시금석이 있습니다. 31절과 37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로 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에 의해서 여러분 자신의 영적 상태를 시험해보십시오. 저는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영적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기준들을 제시하겠습니다.1). 하나님의 말씀인가, 인간의 말인가?첫째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인간의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는가, 목사의 말로 들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 강단에서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인간의 말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라는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이것은 분별을 요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억지로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서 전해질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실 때에만 제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경건서적을 읽으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기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향해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말해줄 것입니다.2)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 있는가, 없는가?두 번째 점검 질문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면 그 말씀은 결코 그 사람 안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교양강좌 정도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배가 형식화되고 삶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영적상태를 말해는 것입니다. 3)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읽을 때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십니까, 아니면 새로운 사실을 아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을 언제나 제시합니다. 그 말씀은 언제나 우리 자신들에게는 순종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 정도를 깨닫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의 지식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이 경계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착각하는 교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은 치유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서 현실적 평가와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쌓아 올린 사회 혹은 교회에서의 경력에 비례할수록 그것은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이것을 피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할 영역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길입니다. 이 의지의 복종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될수록 그 말씀은 더 이상 그 사람 안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편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보게 되고 순종할 영역을 찾아서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듣고만 계십니까?2. 지침이렇게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가지 성경이 가르치는 실제적인 지침을 생각해보지요.1)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히 3:7~8, 15). 강퍅함은 불신이다(히 3:18~19).첫째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우리는 성경에서 듣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구약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강퍅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강퍅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최악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듣지 않는 마음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말씀에도 그는 감동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강퍅한 마음을 불신이라고 지적합니다(히 3:18~19). 이 강퍅함이라는 불신은 그들 자신이 출애굽을 한 1세대들이었고,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들 스스로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37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그들 안에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2)믿음으로 들으라(히 4:2).두 번째 지침은 믿음으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 하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청각장애인들을 의식하신 말씀이었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말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 영적귀로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었고, 은혜를 받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4장 2절에서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들은 말씀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말씀대로 준행하겠다.’. 대답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던 사람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불신 가운데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믿음으로 듣지 않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믿음과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3) 말씀은 기도로 소화되어야만 한다(딤전 4:5).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권면했습니다(딤전 4:5). 믿음으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반응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말씀이 기도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그리고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바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제가 전하는 설교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기도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변하고, 그것을 간절히 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기도로 소화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깊은 기도로 소화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거룩하신 성품들이 흘러나오고 풍겨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향기로 받으시는 순종은 바로 여기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용장들은 다 이 과정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저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통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오늘 진단의 질문들, 그리고 실제적 지침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여러분의 감정과 상관없이, 여러분의 형편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나의 상태나 상황과 상관없이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은 때로는 여러분의 상태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내 아픈 곳을 찌르거나, 내게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도 있고 외면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가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실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다(37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동일하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참 제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하는 불신자입니까?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붙들고 계시는 여러분의 신앙의 최저선은 과연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정말 거듭나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확인하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다는 것입니까? 모태신앙이란 것입니까? 예전에 어떤 특이한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전한다는 양문교회에 다닌다는 것입니까? 구원 초청에 응하여 앞으로 나가서 기도를 받았다는 것입니까? 영접 기도를 분명하게 따라 했다는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붙들어야 하는 한 가지 신앙의 최저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여러분에게 구체적 진단방법과 실제적 지침을 드렸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결코 오늘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살아생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명확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우리가 그날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사람으로 예외 없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에 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자비를 따라서 우리에게 복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