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조선의 왕과 왕비,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한 왕조의 무덤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왕 27명과 왕비의 무덤 42기(基) 중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비 신의왕후),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을 제외하고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기 고양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은 조선왕릉 중 경기 구리의 동구릉(東九陵)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서오릉은 광화문을 기준으로 '서쪽 5개의 능’이 자리한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일산의 호수공원이 34만평인데, 서오릉은 57만평이다.
서오릉은
1. 성종의 친부 의경세자(덕종)와 인수대비(소혜왕후)의 경릉
2.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
3. 숙종의 비 인경왕후의 익릉
4.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5.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
의 순서대로 들어섰다.
또, 서오릉에는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의 묘인 순창원(順昌園),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장조)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綏慶園),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조선왕실 무덤 형태인 능, 원, 묘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서오릉이다.
조선 왕실의 무덤은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墓)로 구분돼 불렸다.
서오릉에 가끔 간다.
서울 서쪽의 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이야기가 많아서다.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지하철 3호선 녹번역에서 내려 버스를 탄다.
서오릉에는 숙종과 그의 왕비 넷이 잠들어 있다.
숙종과 인경-인현-인원왕후, 한때 왕후였던 장희빈이다.
능 입구의 주차장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 명릉(明陵)이다.
숙종과 첫번째 계비 인현왕후(1667~1701)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있다.
같은 언덕에 봉분이 둘이다.
인현왕후는 기사환국(1689년)의 여파로 폐서인됐고, 친정어머니 외가와의 인연으로 3년간 경북 김천의 청암사 극락전에 머물렀다.
갑술환국(1694년)으로 복위되지만, 잦은 병마에 시달리다가 1701년 괴질로 사망한다.
숙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명릉(明陵)이라는 능호와 함께 서오릉에 능을 마련하고 사후에 옆에 묻히겠다고 했다.
인현왕후 사후 숙종과 혼인한 인원왕후(1687~1757)의 능은 오른쪽 위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있다.
인원왕후는 훗날 영조가 즉위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숙종의 정비였던 인경왕후의 익릉(翼陵)은 명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경왕후는 19세 때인 1680년(숙종 6년) 천연두로 사망했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며 <사씨남정기>를 지은 김만중이 숙부이다.
명릉에서 안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는 희빈 장씨(1659~1701)의 묘, 대빈묘(大嬪墓)가 들어서
가 있다.
‘대빈'(大嬪)이란 ‘크고 높은 후궁’을 뜻한다.
대빈묘는 이끼로 덮여 쓸쓸하게 떨어져 있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아들인 경종이 왕이 되면서 옥산부대빈에 추존됐다.
숙종과 희빈 장씨, 장옥정의 만남은 청계천에서 이뤄졌다.
조선의 왕은 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섣달 그믐날이면 융복(戎服)을 입고 역대 왕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모신 영희전(永禧殿, 지금 중부경찰서 터)으로 참배를 갔다.
영희전을 가려면 수표교(당시엔 탑골공원 앞에서 을지로3가)를 건너야 했는데, 20세의 숙종은 수표교를 건너면서 장옥정과 눈이 마주쳤다.
22세의 장옥정은 궁녀로 궁궐에 들어오게 됐다(1680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자못(매우) 아름다웠다'고 장옥정의 외모를 기록하고 있다.
궁궐 여인의 외모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륵된 것은 장옥정이 유일하다.
장옥정은 정1품 희빈으로까지 수직상승했고, 1689년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았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나서서 원자 책봉을 강력히 반대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 이후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된다.
정통과 질서를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정실부인을 내치면서 후궁이 왕비가 된 것이다.
중인 출신, 궁녀 출신으로 왕비가 된 것은 희빈 장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대거 등용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킨다.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그로부터 7년 후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가 발각돼 사사(賜死)됐다.
사사된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년)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묘가 조성됐다.
그러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1719년(숙종 45년)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했다.
서오릉으로 옮겨진 것은 1969년이다.
희빈 장씨는 중국을 수시로 드나드는 역관 집안의 딸이었다.
지금의 은평구 불광동의 폐교된 은혜초등학교 일대(불광동 331번지)에 장희빈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흔적은 없다.
역관 집안이었기에 불광동 인근에 정착했던 듯하다.
불광동은 한양도성 밖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희빈 장씨는 신분 사회에 도전했다.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려 했다.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의 관계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의 대결이자 양반과 중인의 대결이었다.
희빈 장씨는 돌고 돌아 죽은 지 270년이 지나서야 숙종 가까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1.5km 떨어져 있다.
영국의 헨리8세는 캐서린 왕비를 쫓아내고 시녀였던 앤 블린을 왕비로 만들었다가 단두대로 보내버렸다.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로마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성공회의 수장이 됐지만, 앤 블린의 영광은 3년도 가지 못했다.
헨리8세는 안착하지 못한 왕조의 후계자(아버지 헨리7세가 튜더왕조를 열었다)였고, 절대왕권과 후계자에 대한 열망은 사랑보다 훨씬 컸다.
로마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성공회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과정에서 헨리8세의 절대왕권은 성장했다.
숙종 역시 서로를 공격하며 죽이는 붕당정치의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됐다.
양대 세력에 속해 있던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는 부침을 겪어야 했다.
희빈 장씨 몰락에 일조한 영조의 친모 숙빈 최씨의 무덤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소령원(昭寧園)이다.
숙빈 최씨는 궁중에서 청소 등을 비롯해 세숫물 떠다드리기 등 허드렛일을 맡았던 무수리 출신이었다.
영조는 재위 중 소령원을 자주 찾고 이곳을 성역화했다.
1725년에는 소령원 앞에 어머니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와 장희빈 간의 틈을 비집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왕의 어머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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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능과 능을 연결하는 순환로는 그 자체로 삼림욕 코스다.
ㅡ윗줄은 쌍릉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왼쪽에 숙종의 2계비였던 인원왕후의 능이 보인다.
ㅡ아랫줄은 가운데와 오른쪽은 희빈 장씨의 대빈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