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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워하는 영섭을 보며 자기의 잘 못을 빌고 그때는 정조를 잃었다는 강박관념과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어쩔 수 없어 현영을 따랐지만, 외국에 나가 있는 2년 동안 반성도 후회도 많이 했고 그동안 줄곧 영섭만을 생각해 왔다는 말을 하고 싶으나 영섭의 냉담한 태도가 희수의 행동을 막았다.
희수를 보는 영섭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제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고 연인이 된 보영이 있는 마당에 희수와 현영의 관계가 어떠하든 자기가 상관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다면 자기들끼리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보영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못처럼 찾아오셨는데 선약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영섭과 저녁 식사라도 하며 좀 더 이야기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으나 영섭이 선약이 있다고 일어서는데 더 잡고 있을 명분이 없다.
희수을 만나고 오는 영섭의 마음은 착잡하고 또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귀국한 지 한 달이나 되었다며 아직 현영을 만나지 않았다니 이유가 무얼까?
그러면서 왜 나를 먼저 찾아왔나?
희수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나와 만나는 자리에서 현영이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럼 만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나?
그것도 거짓말인가?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그렇게도 큰소리치며 희수는 자기 사람이라고 하던 현영의 말은 자기와 희수의 관계를 훼방하려는 현영의 거짓말인가?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몸까지 섞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희수와 같이 앉아있을 때 일어났던 의문과 새로운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내가 왜 지금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그들의 관계에 이렇게 신경을 쓰나 하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보영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해 보영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보영으로부터 오늘 영섭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보영에게 희수가 찾아왔었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공연히 보영에게 걱정거리를 주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영섭을 만나고 온 희수는 자기에 대한 영섭의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도 다정하던 영섭이 사무적으로 만 자기를 대하다니
자기의 죄책감과 야속한 마음이 비빔밥처럼 비벼져 떠올랐고 현영에 대한 원망과 분함이 커져갔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자기의 잘못인 것을,
그리고 이렇게 현영을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현영을 만나 자기의 생각을 확실히 전하고 현영과의 관계를 청산하여야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현영의 부대로 찾아가기가 싫고 현영과 통화를 하면 길어질 것 같아 귀찮은 생각이 들어 현영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누구냐고 묻는 현영이 어머니에게
“안녕하셨어요? 저 희수예요.”
외국에 나가기 전 현영과 몇 번 집에 찾아온 아들의 애인을 어머니는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 희수구나. 오랜만이다. 참 반갑다. 외국네 나갔다는 말은 들었다. 어제 귀국했냐?”
거의 며느리처럼 생각했던 희수의 전화를 어머니는 반갑게 받으신다.
현영 어머니도 희수가 외국으로 연수받으러 간 것을 아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분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어
“거의 한 달 좀 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 외국에선 잘 지냈냐?”
“네! 모두 평안하시죠? 그런데 어 어머니! 아니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제가 귀국해서 집에서 쉬고 있다고 현영씨에게 전해 주세요.”
마음이 불안해서 인가 말이 꼬여진다.
“현영이 문산에서 군 복무 중이다. 그곳으로 연락해 보아라.”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아주머니가 현영씨에게 전해 주세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하고 희수는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희수가 끊은 전화의 수화기를 놓으며 현영의 어머니는 오랜만에 전화를 한 희수가 좀 무례하다는 생각과 전에는 어머니라고 하며 살갑게 굴더니 희수가 전화도 무례하게 끊고 호칭도 아주머니로 바꾸어 부르는 것으로 희수가 외국에 있는 동안 아들과 희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일 날 외출하여 집에 왔던 현영은 희수가 귀국하여 집에서 쉬고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너희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냐? 희수가 옛날 같지 않더라.”라고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희수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희수가 자기도 모르게 귀국하였고 또 귀국해서 한 달 이상 집에서 쉬고 있다니.
적어도 귀국하기 전에 자기에게 편지라도 하여야 하지 않은가 하긴 외국에 있을 때 편지 한 장 없던 희수가 귀국한다고 편지를 하랴 만은 그렇다고 출국 전까지 그렇게 다정한 연인으로 지내던 자기에게 이렇게 할 수 있나 내가 그동안 저에게 들인 공이 얼만데, 아무리 생각해도 괘심한 생각이 든다.
그리곤 집에서 쉬고 있다고 전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전갈을 보낸 것을 보면 자기더러 희수를 만나러 오라는 뜻인 것 같은데 이것을 당장 가서 만나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이 희수를 끔찍이 사랑한다고 하는 현영으로서는 희수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속히 알고 싶고 그래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신산리로 희수를 만나러 갔다.
현영의 연락을 받고 시내로 나오는 희수는 현영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에 다소 놀라면서도 현영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산리 찻집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
현영은 희수가 못 보는 동안에 몰라보게 세련되어 더욱 아름다워진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고 희수도 군복을 입은 현영이 학생 때보다는 더 듬직해진 것을 현영에게서 느꼈다.
“귀국하면서 어째 나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는 하는 현영의 질문에
“그냥 조용히 귀국하고 싶었어요.”
희수의 대답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비행장엔 누가 나갔었어?”
“아버지가 나오셨어요.”
“다른 사람은?”
현영의 묻는 의도를 모르지 않는 희수는 격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아버지만 희수를 맞으러 나갔었다는 말에 다소 안심하며
“외국에 있는 동안 잘 지냈어?”
“네!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그동안 현영씨는 어땠어요?”
“나야 희수가 연락하지 않아 불안했지, 무슨 일 생겼었나 왜 편지 한 장 없이 지냈어?”
“바쁘기도 하고 생각할 일이 많아서---”
“그랬어. 그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이제부터 다시 사이좋게 정답게 지내면 되지.”
현영은 이 말을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까지 말을 한 희수는 참아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래도 한때는 자기 마음을 주던 사람에게 편지 한 장 없이 지내다 2년 만에 나타나 절교를 하자고 말하자니 아무래도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계속되면 안 되고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과 의정부 사건 이후에도 줏대 없이 끌려다니다 현영과 연인 사이까지 되었었다는 생각에 다음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하려고. 괜찮아 앞으로는 우리 잘 해보자.”
현영이 먼저 이런 말을 한다.
그것이 오히려 희수가 다음 말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사과하라면 사과하지요.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겠어요. 그것보다 현영씨도 내가 아무 연락 없이 지내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생각해요. 나도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고 얻은 결론인데 아무래도 우리의 만남은 잘못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헤어지는 것이 좋겠어요.”
현영이 속으로 염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외국에 가서 무엇을 잘 못 먹었나? 편지 한 장 없이 지내다 2년 만에 돌아와서 밑도 끝도 없이 헤어지자니.”
현영이 흥분하여 소리친다.
그 소리에 찻집에서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이것은 희수의 말에 현영이 화도 났지만, 희수의 말을 막으려는 현영의 의도적인 행동이다.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흥분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나는 2년 전 서둘러 해외연수를 떠나 외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니까.”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눈총을 받으면서도 희수는 차분히 자기의 말을 했다.
예전의 희수라며는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도 현영이 큰소리를 치면 다른 사람이 본다고 창피하다며 현영에게 져주었는데 지금의 희수는 예전의 희수가 아니다.
“그래 이유가 무어야?”
희수보다 더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한 현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것 같아요.”
“우리의 만남이 잘 못 됐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그건 현영씨가 더 잘 알 텐데요.”
“솔직히 말하지 다시 영섭에게 돌아가고픈 거지?” 이 말을 하며 현영은 입을 앙다물었다.
희수는 말을 하지 못 한다.
“그렇군! 다시 영섭에게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 군. 그러나 꿈 깨시지. 영섭에게는 다른 애인이 생겼어, 희수도 알 걸 보영이라고 우리 초등학교 동창이지.”
이 말을 듣는 희수의 마음에는 슬프고 애절한 마음이 낙수같이 떨어진다. 자기가 현영의 애인이라고 생각한 영섭이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보영이와 연인 사이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섭섭하고 쓸쓸한 마음이 되는 것은 어쩌지 못한다.
“영섭 오빠에게 애인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요. 나는 현영씨와의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영섭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왜 나와 해어지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의 만남은 잘 못 됐어요. 그 잘 못 된 만남을 끝내려는 거예요.”
“앞으로 내가 전보다 더 잘할게.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서로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한때나마, 연인으로 사귀었던 현영씨를 좋은 사람으로 추억 속에 간직하고 싶어요.”
“추억 좋아하네. 너는 나에게 몸까지 받쳤어. 그리고도 다른 사람에게 가겠다고, 영섭이도 우리가 몸까지 섞은 것을 다 알아.”
이 말을 듣는 희수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참으로 잔인하시군요. 그래요. 나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예요?”
“나중에는 너도 나를 좋아했잖아?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로 갈 생각만 가지지 않으면 너는 비참해할 이유가 없어.”
“좋아했었죠. 우리 만남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러나 이제는 아니에요. 또한 현영씨와 헤어지기로 작정할 때 내가 비참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감수했던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현영씨가 안 그런다면 그게 더 이상하죠.”
이 말을 듣는 순간 현영은 자기의 비열함을 노출시킨 것 같아 상황이 자기에게 더욱 불리해진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희수야 그러지마. 나는 너뿐이야.”
하고 소리까지 애절하게 하며 비는 시늉을 했다.
“과연 그럴까요?”
“그래 정말이야.”
“지금 있는 숙영씨는 어쩌고요.”
“그것은 그냥 너한테서 연락도 없고 해서.”
“그러면 안 되죠. 숙영씨는 건강한 사람도 아니면서 정성으로 현영씨를 사모하는 것이 확실한데.”
“그래서 너 지금 숙영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숙영씨와 현영씨의 관계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내가 현영씨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요.”
“희수야 너 왜 그러니? 다시 생각해 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모두 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희수는 일어섰다.
“너는 다른 사람한테 못가, 내가 안 보내, 꿈도 꾸지 마.”
하고 소리치는 현영의 말을 들으며 찻집을 나온 희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우면서 한편으로는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 같다.
무거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걷는 옷소매를 잡는 손이 있어 돌아보니 현영이 거기까지 따라왔다.
“왜 이러세요? 내가 할 말은 다 했는데.”
“내가 할 말이 남았어.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더해.”
하며 희수의 소매를 끈다. 그 손을 뿌리치며
“나는 이제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해줘. 고칠게.”
“현영씨 잘못보다는 내 잘못이 컸지요. 가세요.”
“희수야 그러지 말고.”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다락방님1
안녕하셨어요? 오랜 만입니다.
무혈님!
구리천리향님!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이 무더위를 이기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