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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영섭이 원망스러웠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자기를 현영에게 밀어내려고 하지 않는가.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강조했건만.
멀어져가며 ‘야속한 사람’ 하고 중얼거린다.
영섭은 멀어져가는 희수를 붙잡지도 못하고 바라보며 가슴 한끝이 저려왔다.
오랜만에 만남이 즐겁고 기쁜 것이 못되고 이렇게 말다툼만 하고 헤어지다니
희수가 가련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기와 현영이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너무도 심하게 희수를 울리고 있는 것 같고 그 결과가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 희수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자기도 희수를 잊고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자기의 첫사랑을 준 여자
자기에게 첫사랑을 준 여자
그래서인지 희수를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떨림이 생긴다.
현영의 여자라고 생각할 때는 잊고 있었지만, 자기에게로 돌아오겠다고 떼 아닌, 떼를 쓰는 희수를 생각하면 아련해진다.
많은 생각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생각은 항상 원점에서 맨 돈다.
희수를 생각하면 보영이 보영을 생각하면 희수가 마음에 걸려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희수를 생각하면 가련함 애틋함이 일고 보영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인다.
토요일 오후
영섭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신산리로 희수를 만나러 갔다.
지난번 희수를 그렇게 보내고 아무래도 희수를 만나 다시 무슨 이야기라도 하여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산리에 도착하자 자기가 회수를 만나러 다니는 것을 보영이 알면 무척 섭섭할 것이라는 생각에 신산리를 자나 쳐 집으로 갔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소식이 없는 회수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생각도 들고 자기들의 관계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신산리로 향했다.
생각은 그렇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있는 희수에 대한 가볍지 않은 그리운 감정이 그를 신산리로 향하게 했는지 모른다
도착하여 희수에게 전화했다.
마침 집에 있다가 전화를 받은 희수는 영섭이 이렇게 자기를 찾아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아니 영섭은 자기를 현영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현영에게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현영과의 관계가 정리되면 자기가 다시 영섭을 찾아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 현영은 부대 일로 이 주째 외출을 못했다.
전화를 받은 희수가 영섭이 기다리는 찻집으로 나왔다.
희수는 그동안 많이 수척해진 것 같다.
영섭은 희수를 만나기 전에는 할 말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고 마주 앉으니 할 말이 없다.
다시 현영에게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것이 희수의 말과 태도로 그리고 지금의 희수의 모습으로 보아 이미 늦어진 것 같고 솔직히 자기의 마음도 속이는 것 같아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그렇다고 달리 할 말도 없어 희수를 바라만 보고 있다.
희수도, 영섭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그것이 입 밖으로 말 되어 나오지를 않아 침묵하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엉키었다가는 풀리고 풀리었다 엉킨다.
눈싸움하듯 서로를 쳐다보던 이들은 멋쩍은 생각에 서로 보고 미소를 짓는다.
찻집에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다방 안이 답답하다는 희수의 제의로 찻집을 나온 이들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영섭이 군대 가기 전 올랐던 신산리 뒷산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늦가을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에도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다.
뒷산에 길가 초입에는 무리 진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높아지는 산길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꽃이 삶의 허적함을 춤으로 표현하고 여기저기에는 구절초와 부추 꽃, 바위솔 등이 피어 두 사람을 맞는다.
가을 들꽃들이 두 사람의 혼란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것 같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던 두 사람은 어느덧 전에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아니 어쩜 처음부터 이 자리를 생각하고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산을 오르는 중 험한 곳에서 한두 번 영섭이 희수의 손을 잡아 주었지만, 아직도 서먹한, 사이었던 두 사람은 그 자리의 정취가 옛날에 주고받던 사연을 생각게 한다.
자기 가슴 속 사랑의 맹세를 두 손에 담아 영섭의 가슴에 붓던 희수
그 두 손에 자기의 결심을 모아 희수의 가슴에 옮기던 영섭
참으로 순수하고 깊은 사랑을 나누던 순간이다.
둘은 그때의 생각을 하고 서로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먼 산 위에 감도는 구름을 보는 두 사람의 마음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다시 여름날의 칡 순 같이 엉키며 뻗어간다.
그동안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는가?
이렇게 함께하면 되는 것을, 이러면 되는 것을.
희수의 마음이 들뜨는 것 같다.
영섭과 같이 한다는 것, 그와 같은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현영과 같이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이 그리고 설레임이 가슴에 찬다.
영섭을 쳐다보는 눈이 열망으로 불탄다.
스산했던 마음에, 서먹했던 마음에 당겨진 불이라 더 뜨거운 것 같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희수의 사랑이 영섭에게로 쏟아진다.
그리고 영섭과 보영의 관계가 자기로 해서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은 모두 잊고 언제까지 영섭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제와 누구와 영섭을 나눈다고 생각하면 못 견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 말은 거짓말이었는지 모른다.
많은 말을 하고 있는 희수의 눈을 보며 영섭의 마음에도 불꽃이 당긴다.
5년간을 재워왔던 가슴속 저 밑에 타고 있던 사랑의 불꽃이
과거가 어떠하던 현재가 중요한 것 아닌가?
이렇게 회수가 나와 같이하고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지난 과거에 억 매어 그 사랑을 물리칠 필요가 있는가?
나도 희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뜨거운데
희수의 몸이 영섭에게 쓰러져 자연스럽게 영섭의 품에 안기며
“오빠 사랑해요.”
하고 속삭인다.
희수를 안은 영섭의 마음도 몸도 흥분으로 가볍게 떨린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진다. 길고도 달콤한 순간!
지금 이들에게는 이 순간만이 영원한 것이다.
영섭의 품에 있는 희수는 남자의 품이 이렇게 넓은 것을, 영섭의 품이 이렇게 따뜻한 것을 5년을 방황하고 돌아오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었나? 후회하는 마음이 가슴에 넘친다.
영섭도 이 순간만은 다른 생각을 버리고 희수만을 생각한다.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떨어지기 싫은 영섭의 품을 벗어나며
“오빠 나 많이 원망했죠?” 한다.
“그래! 많이 원망했다, 그렇지만 너만큼은 아닐 거야.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3년씩이나 아무 연락도 못 보냈으니”
“참! 그땐 왜 그랬어요? 현영씨랑 현수오빠랑 같이 부대로 찾아갔었는데 부대에서도 잘 알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그때의 답답함이 다시 생각되는지 희수는 가슴을 쓴다.
“그랬었구나!”
하고 영섭은 팔목의 팔찌와 발목의 족쇄를 보여주고 합격 술을 배우게 된 동기와 배우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특히 죽을 것 같은 고통을 희수를 생각하며 참았던 것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희수는 얼굴을 붉혔지만 흐뭇함이 가슴 가득 찬다.
“어떻게 아니 내가 연락 못 했는데. 늦었지만 내가 사과할께.”
“사과는요. 그 기간 오빠를 기다리지 못했던 내가 사과해야죠.”
착잡한 마음이 된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던 희수가 “ 저- ”하고 영섭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 둔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데?”
영섭의 물음에 고개를 떨군 희수가
“아니에요. 언젠가는 오빠에게 이야기해야겠지만 지금은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싱겁기는 무슨 말인데 그렇게 힘들어?”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이야기할 날이 오겠지요.”
희수는 현영이 흥분제를 먹여 겁탈하고 그것을 빌미로 협박하여 현영을 따르게 된 것을 영섭에게 이야기하려다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정을 나누며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영섭이 집으로 가기 위해 시내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가 현영을 만났다.
현영도 토요일 오후 외출을 나와 희수를 만나러 와서 집에서 나갔다는 희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찾지 못해 포기하고 집으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오다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먼저 발견하고 노려보던 현영은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고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지 당황하는 것 보니까.”
하고 저주스럽게 말을 뱉탔다.
잠시 당황했다가 평정을 찾은 영섭이
“현영이구나. 오랜만이다.”
하고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라고? 그 오랜만에 만남에 남의 애인을 달고 나타나냐?”
“남의 애인이라 요?”
그때까지 가벼운 몸 떨림을 하고 있던 희수가 뾰족하게 말한다.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여자야.”
현영의 말에는 비웃음과 완강함을 담겨 있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가까운 찻집이라도 들어가자.”
영섭의 제안에 세 사람은 근처에 찻집으로 들어갔다.
영섭의 곁에 앉으려는 희수를 현영이 손목을 잡아끌어 자기 옆자리에 앉힌다. 희수가 일어나서 다시 영섭의 곁으로 가려고 하자 현영이 다시 눌려 앉힌다.
“나는 현영씨의 이런 억지가 싫어요.”
희수의 한마디에 현영이 잠시 머쓱해진 틈을 타 희수는 영섭과 현영의 중간에 자리를 잡는다.
현영의 앞에서 너무 영섭과 가까이하는 것이 현영을 더 자극하는 것 같아
세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현영이다.
“영섭이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 네가 부대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그만큼 알아듣게 말했는데 다시 희수를 꾀어내니?”
시기와 질투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짓씹듯 하는 현영의 이 말에
“누가 누구를 꾀어내요? 내가 영섭이 오빠를 찾아갔어요.”
희수가 뽀족하게 맞받는다.
“너도 그래 나를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가 2년 만에 외국에서 돌아와 느닷없이 헤어지자더니 이제는 다른 남자를 달고 나타나, 그것도 영섭이를, 그게 말이 되니? 어디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볼까?”
“지난번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외국으로 출발하면서 아니 영섭이 오빠의 제대가 가까워 오면서 우리의 만남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래서 해외연수를 서둘렀고 그동안 많이 생각했지만 역시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해서 헤어지기로 결심했다고.”
“나는 네가 좋으면 만나고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는 그런 사람이냐?”
“강제적인 만남은 강제적인 헤어짐을 내포하고 있은 것이 아닐까요?”
희수가 이렇게 말하자 현영은 할 말이 없다 희수의 말대로 자기가 희수를 겁탈하여 강제적으로 애인으로 만든 것은 사실이니까.
희수와의 다툼이 여의치 않자 현영은 영섭에게 화살을 돌렸다.
“영섭이 너에게 묻자. 내가 알기로 너는 지금 보영과 잘 사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희수를 꼬시는 이유가 무어냐?”
“보영과 연인 사이가 된 것은 희수가 네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야.”
“그래 희수는 염연히 내 사람이야.”
“희수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무어가 그렇지 않아, 희수와 나는 서로 무척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래서 희수와 내가 몸까지 섞은, 그것도 여러 번 섞은 사이라는 것까지 내가 너에게 말했을 텐데.”
이 말이 나오자 희수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어 떨어진다.
“그래요. 나는 몸까지 더러워진 여자예요. 그래서 내가 영섭이 오빠를 사랑하는 것은 오빠를 소유하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오빠를 사랑할 수만 있으면 돼요.”
“소설 쓰고 있네. 네가 무슨 순애보에 여주인공이냐?”
현영의 이 말에는 비웃음이 가득히 고여 있다.
“현영아 네가 희수에게 너무하는 것 아니냐?”
희수가 가여운 생각이 든 영섭이 이렇게 말했다.
“남의 여자를 가로채는 너는 나에게 너무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자꾸 남의 여자 남의 여자 하는데 희수가 처음 사랑한 사람이 누구냐?”
영섭이 이렇게 나오자 현영은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네가 희수와 몸을 섞었다고 강조하는데 그래 그 상대가 너라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지만 내가 상관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너라면 사랑하는 여자가 실수로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하지 않겠니.”
“잘 못도 잘 못 나름이지.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느라 여러 번 의도적으로 몸을 섞었어.”
“남의 약점을 잡고 너무 그렇게 흔들지 마라, 너에 대한 희수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그리고 사랑한다면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니?”
“성인군자구나. 그래도 한때는 절친한 친구라고 하던 사람의 여인 그것도 몸까지 섞은 여인을 애인으로 삼겠다니.”
현영의 독설은 계속된다.
“성인군자는 아니라도 사랑하는 여자의 한때 잘못은 용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너 아까부터 잘못 잘못 그러는데 희수가 내 여자가 된 것이 무엇 때문에 잘못이란 말이냐?”
“희수가 네 여자가 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 중 한 사람이 그 관계를 부정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하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계속해봐야 자기가 두 사람을 상대하기가 어렵고 더 이야기해 보아야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현영은 일어나며
“그래 너희들 잘 났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관계를 인정할 수 없어. 아니 인정 안 해. 앞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너희는 나를 원망하지 마. 모든 것이 너희가 초래한 결과니까, 그리고 보영이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고 할까?” 한다
찻집을 나서며 현영이 던진 이 말이 비수가 되어 아프게 영섭의 가슴에 꽂히고 보영의 슬퍼하는 얼굴이 눈앞에 가득 떠오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다락방님!
지키미님!
무혈님!
구리 천리향님!
한결 같이 지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위해 여름에 더위가 있지요
풍부한 수확을 위해 이 계절을 왕성이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