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의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평설 / 고봉준
아낭케anantkh,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김영찬
어떤 밤은 어떤 밤의 피크닉상자를 끼고 덜거덕 덜거덕 졸면서
산음승흥山陰乘興
산음에 흥겨워
스웨기swaggie 스웨거링swaggering
아흐렛날 흩어진 달빛 아래
흘러갈 뿐이다
이런 날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
흥진이반興盡而反이면 뭘 어떻고
뜬금없는
스웩swag
스웨기swaggie
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
밤을 모르는 부랑아들은 아무도 모르는 밤에 아무것도 모르지 단지
밤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묵살하고
아, 아낭케ANATKH
밤에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걷다가 허풍쟁이와 만나면 밤길에
최대한의 허장성세
가령 자투리 시간까지 빈 술병 비워내는 간다르바gandharva,
건달바乾達婆들의 핑계 좋은 일탈
살찐 엉덩이 흔든다
이런 때 나는 각촉부시刻燭賦詩,
모든 걸 차치하고 사타구니에 불길 솟는 기분
마이아스트라Maiastra에 황금빛 날개를 접은 '금의 새'처럼 웅크리고
포란抱卵하는 시를 쓴다
교령회交靈會의 스마우그Smaug the Golden들처럼 SF무대를 단박에
장악하는 시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대로 재구성해야 직성
이 풀리지
아마도, 아마 느그들 뜻대로 그렇게 되진 않겠지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아마도 아마
느그들 멋대로
홀대받는 외지인 포가니pogany는 루마니아 태생
그녀의 촌스럽게 쪽진 머리 시뇽chignon의 정결함, 절박한 상황에도
두 손 모은 숭고미
나는 왜 그토록 염결한 초절주의에
둔감할까
조타수 없는 방향타
그대 위해 언제든 랜덤엑세스random access가 가능토록 도와다오
그대 울타리로 들장미가 월담하듯이
그대 밤의 영역에 쌓이는 사사로운 고독감의 피로에
나도 물들고 싶다
노에시스 노에마?
농담이시겠지
노에시스noesiss(의식작용: 노에마가 일시 정주well하는 과정)
노에마noema(의식의 지향점: 결과)에
주사위를 던진
상제나비swallowtail butterfly에게는 공유개념이라는 게 없다
그렇잖고, 사랑의 대피소란 서로에게
무의미한 것
가령 귀소본능 없이도 마카로니웨스턴 영화필름 속에 올연兀然한
총성이 캉, 캉, 캉,
황야의 어둠을 뚫고 방점만 찍을 뿐
건방지게 휘어진 콧수염을 과시하며 존 업다이크는 오늘 밤에도
공복에 9시 반의 당구를 칠 것이다
나는 가끔 내 각촉부시의 습작 관행에
달의 서쪽
과
바람의 동쪽을 분명히 선 그은 다음 머릿속을 휑하게
빈터로 비워둔다
자유방임 무방비로 방종해도 될 때를 가정하면
동고비는 알을 낳고
두꺼비는 두껍두껍 논두렁을 뛰어넘어도 아무 상관없잖은가
그러므로 허리 아픈 체위란 무모한 짓
허드렛일 치고는 체력소모가 아깝더라도 하찮은
벌레 한 마리라도
허리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곧 천국이다
소심한 자이나 교도들은 밤길에 무거운 피크닉상자 대신
가벼운 빗자루만 들고
길바닥을 쓸며 조심조심 장도에 오른다
그래, 우린 자이나 교도가 아니지
칼을 찬 나는 피크닉상자를 들고 웃체다 와다uccheda vada, 단멸론자로서
아나크anarch
아나키anarchy
아나키스트anarchist만의 고집스런 행보
아낭케ANATKH의 신성을 위하여
물벼락이라도 맞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뚜르비아노는 평화를 위한 조건 없는 대안
(절대로 그는 시를 쓰지 않았다)
우주의 고요함에 값비싼 향수를 뿌리는 대신
질문 없이도 가능한
대답
프라나prana 호흡법을 전수시켰지
흰 개의 꼬리와 흰 개미의 더듬이 기능을 둘 다 갖춘
한 여인의 행적이
사라진 풍경 속에 되살아난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누군가는 이 시간
개목걸이를 들고 어둠의 골짜기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여인과 흰 개 중 어느 쪽이 행간에 잘 숨어
비유로 풀리는지
결과를 보기도 전에 산음山蔭에 승흥乘興
밤의 테라스에 외등을 켜둔다
빛나는 밤의 소격효과疏隔效果 시의 안녕을 위한 등업
패스워드password를 바꾸고
id를 변경한 피크닉상자 속에서 밤은 거대한
귓불 늘어뜨린다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말을 빌려 "좋은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앙리 미쇼의 비非서구, 질 들뢰즈의 외국어는 위대한 예술이 예술가가 속한 문화적 전통이나 계보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배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김영찬의 시 역시 매우 적극적으로, 분명한 방식으로 한국시의 전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와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하나는 김영찬의 언어가 깊이(심층)가 아니라 표면을 중심으로 기능한다는 것, 따라서 '의미'로 낙착되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작 방식이 무의식적 자동 작용, 즉 자동기술법Automatism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초현실주의적 자동기술이 온전히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앙리 미쇼는 "자동기술은 무절제다."라고 주장했으나 시작詩作이 쓰기와 선별/퇴고의 이중적 절차로 이루어지는 한 의식의 개입은 필연적이다. 이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간극間隙으로 인해 우리는 잠시나마 의식 저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김영찬의 시적 지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작품이 시인의 퇴고를 거쳐 발표되는 한 자동기술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무의식과 의식이 뒤섞인 상태라고 추론할 수는 있다. 먼저 이 시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밤’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낮의 건축물인 “최초의 밤”과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또 다른 밤”이 그것들이다. 블랑쇼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또 다른 밤”은 초현실주의가 주목했던 ‘무의식’의 영역과 유사하다. 그것이 의식과 이성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에서 ‘밤’은 낮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그리하여 낮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밤이 아니라 ‘낮’과 완전히 다른 질서로 작동하는 세계이다. 블랑쇼는 그러한 ‘밤’에 죽음의 이미지를 부여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그것에 ‘피크닉상자’라는 기호로 표상되듯이 유희/놀이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요컨대 시인에게 ‘밤-무의식’의 세계는 피크닉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시의 언표들은 피크닉상자에서 끄집어낸 것들인 셈이다.
‘피크닉’은 유희의 세계이다. 그것은 이성/논리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이성/논리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 또는 유희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이 시에서 언어/기호가 논리적 연관성, 나아가 의미의 층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구체적 증거가 바로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이라는 진술이다. 이것은 읽기에 따라 음악적 효과를 연출할 수는 있어도 의미의 층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그러니까 독자는 이 구절을 읽고 ‘이게 무슨 뜻이야?’라고 질문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배치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단어들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이것은 (언어)유희일 뿐이다. “스웩/스웨기/스웨거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이라는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은 ‘스웩swag’이 젊은 세대, 특히 래퍼들이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흔히 ‘허세’나 ‘자유분방함’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에 따르면 이 단어는 원래 ‘약탈품’이나 ‘전리품’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시에서 ‘스웩’은 이러한 ‘의미’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스웩swag’이 무엇을 지시/의미하는가를 따지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스웩/스웨기/스웨거”라는 표현을 잇달아 발음할 때 만들어지는 음악적 성질, 즉 리듬감이다.
한편 이 시에 등장한 진술들, 가령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간다르바/건달바들의 핑계 좋은 일탈”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대로 재구성해야 직성이 풀리지” 등은 모두 질서를 벗어나는 일탈의 해방감을 겨냥하고 있다. 이처럼 김영찬의 시는 “삐뚤삐뚤”과 “일탈”과 “제멋대로 내 맘대로”를 지향한다. “간다르바,/건달바”라는 구절 역시 건달乾達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보다는 그것들을 연속적으로 발음했을 때 느껴지는 음성적•음악적 느낌이 훨씬 본질적인 것이다. (시집 『오늘밤은 리스본』 해설, ‘김영찬의 시세계’ 부분)
고봉준(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