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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번 시간은 야고보서 5장 마무리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대환란시대의 믿음의 실행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적 시점은 대환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13~16절은 은혜시대에도 보편적 교훈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며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이 "치유"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성경적인 치유의 방식은 은사주의자들의 치유집회에서 행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은사주의를 성경적으로 분별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마지막 20절은 알미니안들에 의해서 가끔 인용되는데, 그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 때문에 실족하여 구원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근거 구절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야고보서 본문의 "형제"라는 대상이 교리적으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대환란 성도"(약 1:1)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해당된다는 것을 모르기에 이런 구절을 그리스도인에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시대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가 결코 불가능한데, 첫째, 그는 한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둘쨰, 그는 (첫째의 결론으로서)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알미니안들은 대환란 성도에 교리적 적용 가능한 구절들(주로 일반 서신서에서 발췌, 일부는 구약과 마태복음 등에서도 찾아냄)을 그리스도인에게 들이대서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는 것을 그들의 "사역"이라고 여깁니다. 믿음을 파괴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역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5:7-20>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나니
8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
9 형제들아, 정죄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 보라, 심판하시는 분이 문 앞에 서 계시니라.
10 나의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우리는 견디어 내는 자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
12 나의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며, 어떤 다른 맹세로도 말지니라. 다만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라’할 것은 ‘아니라’하여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13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시로 노래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삼 년 육 개월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18 다시 기도하였더니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19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진리를 떠나 과오를 범할 때 누군가가 그를 회심하게 한다면
20 그 죄인을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의 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며, 수많은 죄들을 덮게 되리라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 하라.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나니
8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
7절에서 형제가 누구인지는 이제까지 야고보서를 공부하신 분들은 자동적으로 "12지파 이스라엘인들", 혹은 "대환란 성도"로 자동으로 입력이 되셔야 합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끝까지(대환란의 끝) 인내해야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서 현대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혼돈의 허리케인을 불러 일으킨 "늦은 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저는 "은사주의"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은 아니지만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른 비", "늦은 비"에 대해 괴상한 추측과 망상을 품고 있는데 그들은 "이른 비"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요, "늦은 비"는 현재 자기들이 벌이는 "성령 서커스"를 말한다고 흔히 오해합니다. 성경은 그런 추측을 단호히 묵살합니다. 은사주의 교회 교인들은 성령 운동가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갔을 뿐 이 단어에 대해 성경을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관련해서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내리게 될 비를 말하는데, 저는 분명히 실제 비, 즉 H2O로 이루어진 비라고 말합니다. 성령 운동가들이 혀를 꼬부리며 쓰러져서 몸을 부르르 떠는 그 상상 속의 비가 아니란 말입니다. 늦은 비 관련 구절 중 일부만 인용하겠습니다. 더 많이 있는데 여러분이 찾아 보셔도 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 그의 나오심은 아침처럼 마련되어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시리니,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 오시리라(호세야 6:3).
너희 시온의 자녀들아, 그때에 즐거워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는 그가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절히 주셨으며, 또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려 주시되 이른 비 와 늦은 비를 첫달에 내리게 하실 것임이라(요엘 2:23).
관주들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재림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두 비는 동시에 내리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2천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은사주의의 추측은 허튼 소리입니다. "첫째 달"이라고 불리는 어떤 시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동시에 내릴 것인데 이 비는 굉장한 비가 될 것입니다. 이 때는 9-10월 무렵이고. 팔레스타인 절기로는 장막절입니다. 이 때가 주님의 지상재림(아마겟돈)의 시기라는 말입니다. 장막절은 천년왕국에서도 계속해서 기념되는 절기입니다(슼 16:13,16,19).
두 증인(모세와 엘리야) 중 엘리야의 사역으로 인해 후3년 반인 1260일 동안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땅에만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물을 피로 변하게 만드는 사역은 그 땅의 물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 역사할 것입니다. 계 16:3을 비롯한 호리병 심판들도 자세히 보면 이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들을 닮았습니다. 모세의 손길을 통해서 그 재앙들이 일어납니다. 어쨋든 엘리야는 이미 한 번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았던 적이 있습니다(17절). 왜 3년 6개월, 후3년 반에 해당하는 그 기간과 일치하는 역사를 보였다고 나옵니까? 자명하지 않습니까? 계시록의 영적 해석에 심취한 목사와 교인들이 두 증인에 대해 터무니없는 상상들(영적 해석들)을 남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쉬운 구절들도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7절에서 농부(husbandman)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 분이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오래 참으신다고 합니다. 땅의 열매들의 언급은 계시록에도 나오는데, 환란통과론자들은 그 구절을 발견하자 마자 그리스도인으로 단정해 버립니다.(계 14:14-16) 그리고 나서 교회의 환란후 휴거를 주장합니다. 이 구절은 대환란을 통과한 환란시대 성도들이 7년 대환란 끝 무렵에 휴거되는 장면이지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8절에서는 다시 "인내"를 강조하고 환란성도가 주께서 오실 때까지 "끝까지 견딜 것"을 주문합니다(마 24:13).
9 형제들아, 정죄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 보라, 심판하시는 분이 문 앞에 서 계시니라.
여기서 쓰인 grudge(원망)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주절주절하는 불평 정도가 아니라 지독한 한이 서린 원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루지"라는 공포 영화(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을 품은 악령)도 있지요. 비슷한 케이스가 무엇이냐 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대해서 품었던 그 원망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사건만 터지면 모세를 먼저 원망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정도로 그 성품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그러합니다. 육신적 인간들은 주변 환경이 풍족하면 서로 잘 어울리지만 조금만 궁핍해지면 악한 본성을 드러내서 사나운 개처럼 서로 으르렁댑니다.
대환란 때의 성도들도 형제들 서로간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었던 그런 쓴 원망의 마음을 품으면 곧 오시는 주님께 정죄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카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1세대가 광야에서 거의 전멸했다시피 된 것이 대환란 성도들에게는 선명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 대환란 성도들은 광야와 은신처에서 피난생활을 할 것입니다. 대환란 성도와 출애굽의 비교는 히브리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어쨋든 이들은 항상 원망하지 않도록 입술과 생각을 주의해야 합니다.
10 나의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우리는 견디어 내는 자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
대환란 성도들은 특별히 "구약 선지자들", 그리고 메시야이시면서 "선지자"이기도 하셨던,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의 고난의 행보를 따라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활동했던 환경은 대부분 대환란과 유사한 "인내가 극도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하고 순종하며 구약 성도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선지자들은 대부분 순교당했고 이는 짐승의 표를 거부하면 순교를 각오해야만 하는 대환란 성도들에게 실제적 행동의 모범이 됩니다. 히브리서에도 선지자들의 고난에 대해 매우 강조하는 것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가 대환란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욥"은 대환란 성도들의 인내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라 할수 있는데 그래서 욥기도 대환란 후3년 반을 의미하는 4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욥에 대해 보여진 "주의 결말"이 무엇입니까? 욥은 전에 소유했던 것들의 "두 배"를 얻었고(물질적 보상), 자식들을 죽음으로부터 돌려받았습니다(아들 일곱과 딸 셋). 욥의 아내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욥을 저주하고 가 버린 아내는 아마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비슷한 결말을 맞았으리라 짐작될 뿐 더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욥은 욥 42:13에서 열 명의 자식들을 "두었다"고만 했지 "다시 또 낳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몸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와 같은 불멸의 육신으로 바뀌게 된 후(고전 15:23) 천년왕국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자식 낳고 사는 이 땅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시록에서 청년 동정들(virgins)(마 25:1, 계 14:4)의 유형으로도 제시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동정 혹은 처녀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것입니다(그리스도와 그 신부 교회). 그러나 대환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도 혼인하지 않으며(마태복음 열 처녀는 단지 신랑을 맞이할 뿐 혼인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변화된 몸을 입기에 땅의 인간의 방식으로 결혼하지도 않고(막 12:25) 영원히 살게 됩니다.
12 나의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며, 어떤 다른 맹세로도 말지니라. 다만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라’할 것은 ‘아니라’하여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을 거의 유사하게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5장이 천년왕국의 법도를 설명하는 것과 관련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예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말지니, 이는 그곳이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지니, 이는 그곳이 그분의 발판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지니, 이는 그곳이 위대한 왕의 도성임이라.(마 5:34,35)
구약은 "거짓 맹세"(레 19:12)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주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실제로 적용되는 시점은 "천년왕국"이 수립되어 땅이 주님의 통치를 받는 시기인데, 이 때는 35절 말씀같이 "위대한 왕(예수님)의 도성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 하지 않으면 경을 치게 됩니다. 맹세도 죄가 되는 세상이 옵니다. 사람들은 맹세할 때 자기 맹세를 담보할 더 권위있는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 지상에 주님께서 왕으로 계시면 주님보다 더 확실하게 능력있고 권위있는 분이 안 계시므로 그때는 땅이나 하늘이나 걸고 맹세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이제 곧 지상재림하실 예수님의 오심을 앞둔 대환란 성도들도 먼저 "왕국 헌법"대로 몸소 살면서 실천하며 그분의 길을 예비하라는 가르침이 본문입니다. 본문을 신약 시대에 적용해서 "맹세는 정죄받을 죄"라고 말하는 실수는 하지 말기 바랍니다.
13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시로 노래할지니라.
이것은 짤막한 구절 안에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은 고난받는 가난한 자들의 "기도들"로 가득차 있는 책입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는 죄수들처럼 침묵 속에 견디지 않습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계시록에 밝혀져 있습니다(계 5:9; 14:3; 15:3).
계 5:9, 14:3에서는 "새 노래"라 했고 15:3에서는 더 자세히 풀어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노래"는 부르지만 우리는 율법 하의 백성이 아니므로 "모세의 노래"는 부를 일이 없습니다. 대환란 성도들은 실제로 두 증인 중 모세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모세의 노래라 한 이유는 이들이 모세 율법을 온전히 마음판에 새기고 노래를 부르듯이 항상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의 "모세의 노래"라는 분명한 계시를 보고서도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교회 성도라고 말합니다. 박쥐들이 동굴에만 살지는 않습니다. 헬라어와 신학을 공부한 박쥐들도 많이 있습니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4 - 16절은 교회시대에 적용되는 교리적 사항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은사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잘 숙지해 놓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교회 안의 병든 자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줍니다. 여기에 "교회"라는 말이 나오기에 이 구절을 교회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만 대환란 때도 계시록의 일곱 교회 유형의 교리적 적용 대상인 "대환란 성도의 교회"라는 모임은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은 대환란에도 교리적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14절에서 병든 자가 있을 때 장로들(목사를 말함, 장로교회 장로 아님)에 심방을 청해서 기도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이 시대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구약 성경을 위조한 로마 카톨릭은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를 그대로 훔쳐내서 사용합니다. 그들은 "성수"도 있고 "성유"도 있습니다. "성자와 관련된 미신들"은 카톨릭의 항상 잘 나가는 상품들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기름을 부으면 사람이나 물건이 "성결해지는 것의 예들"을 많이 찾아봅니다(레 8:10,12 등). 그래서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을 임명할 때 항상 기름을 부었습니다. 물론 중세시대의 왕들도 이를 많이 흉내내었습니다. 어쨋든 성유가 존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기 전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름을 바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들을 정결케 합니다. 기름은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환란 때는 전체적으로 구약 경륜이 부활하기 때문에 "성유"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시대에 문자적 적용해서 "기름을 바르며" 치유 기도를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5절에서 "병이 낫는 것"과 "죄들이 용서받는 것"이 한 문맥으로 통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구절을 보고 눈이 커집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경륜은 병의 치유와 죄들의 용서가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지병을 갖고 있었고(고후 12:7), 디모데는 위장병이(딤전 5:23) 있었습니다. 물론 신약 성도들도 일부 병과 쇠약함의 원인은 육신의 죄 때문일 수 있습니다(고전 11:30).
16절에서 이 시대에 적용할 만한 교훈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병의 치유를 정말 원한다면 먼저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며 기도하면 효과가 크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세심하게 여기서 "죄들을 자백하고"라고 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잘못들"은 형제가 서로간에 잘못한 실수나 오해, 미움 같은 것에 대해 자백하고 사과하는 것을 말하지, 자신이 은밀히 지은 모든 죄를 공공연히 토설해서 "자아 비판"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잘못들을 자백하는"게 아니라 "죄들을 서로 자백하는 것"은 일종의 공산주의에서 하는 "자아 비판"이 됩니다. 그들이 자아 비판을 제도화한 이유는 이것을 시키게 되면 모든 사람의 약점, 꼬투리를 남김없이 잡아내서 통제에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집단은 신도들에게 끊임없이 사제에게 나와서 "잘못"뿐만 아니라 "죄들"을 자백하라고 합니다. 역시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통제하고 다스리려는 의도입니다.
본문 14~16절 어디에도 은사주의 서커스장에 나가서 치유를 위해 부르짖으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조용히 심방해서 합심해서 잘못을 자백하고 기도하는 것만 나옵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구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들은 더 스펙타클한 기적들이 나오는 사복음서나 사도행전으로 달려가고 이런 구절은 잘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이렇게 할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삼 년 육 개월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18 다시 기도하였더니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에 대해서는 설명할 것이 참으로 많지만 여기서는 엘리야가 대환란 때 실제로 올 것이라는 것과 그의 3년 반 동안의 사역의 핵심은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사역의 마무리는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엘리야가 목베임 당한 후(계 11장) 얼마 되지 않아 이른 비 늦은 비가 내려서 땅이 열매(대환란 성도의 부활 및 휴거)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두 증인(모세, 엘리야)의 사역 시기는 대환란의 후3년반 기간일 것으로 보입니다.
19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진리를 떠나 과오를 범할 때 누군가가 그를 회심하게 한다면
20 그 죄인을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의 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며, 수많은 죄들을 덮게 되리라는 것을 그로 하여금 알게 하라.
19, 20절은 알미니안들이 오용하기에 좋은 구절인데, 이 구절은 흡사 어떤 (그리스도인) 형제가 타락하여 구원을 잃었다가 그 혼이 사망에서 다시 건져져 구원받는다는 "끝까지 견디라(알미니안)"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처럼 보입니다.
사실 본문의 "형제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읽지 않고 정확하게 "환란 성도들"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구원 교리에 대해 아무 혼동을 겪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대환란 성도의 처지에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대환란 때의 성도들은 "구원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것이 어불성설이요 난센스이지만 대환란 때는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때와 아닐 때 구분하라는 말씀이 일반서신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간구할지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 는 죄가 있거니와, 나는 그에게 그 죄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요한일서 5:16)
요한일서 또한 일반서신으로서 대환란 교리와 이 시대 교리를 같이 담은 서신서입니다. 인용한 구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추정하기 위해서 은사주의자들은 엄청난 설명들을 해 댑니다. 성령 모독죄, 자살죄, 간음죄, 비방죄, 가지각색을 들이대면서 그것이 "구원을 잃어버리는 죄"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은 분주한데 한가지 그들이 망각한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피를 신뢰했을 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요 5:24).
"사망에 이르는 죄"는 교리적으로 대환란에 맞춰 봐야 답이 나올텐데, 어떤 분은 "아 그럼, 짐승의 표를 받는 게 곧 사망에 이르는 죄로군요"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짐작합니다만 다른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20절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대환란 성도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때 그를 회개하게 한 또다른 대환란 성도는 큰 일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형제를 잘못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의 기쁨의 면류관과(살전 2:19) 관련됩니다. 기쁨의 면류관은 구령자의 상으로만 알려졌지만 형제를 죄악에서 돌이키는 자도 동일한 상을 받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대환란 때에도 형제 사랑이 중요하단 사실은 같습니다.
<결론>
이렇게 해서 일주일이 넘게 걸렸던 야고보서 공부가 끝났습니다. 힘든 여정이 아니라 산책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고, 오늘은 어떤 말씀에서 좋은 것들을 발견할런지 어떤 것을 주실지 기대하면서 짚어왔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묵상하고 읽고 공부할 수 있는 평이한 말씀들이 매우 많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독서하기 위해 소위 제자 훈련 같은 인위적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올바로 나누는 분별력"입니다.
제가 야고보서를 신학 서적들을 뒤져가며 학자들 말을 인용하지 않고도 평이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신학적 지식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오늘날 마지막 때의 많은 교인들과 목사들은 "헬라어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을 찬양하고 공부하기에 힘쓰면서 정작 그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평이한 우리말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나누고 분별해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말씀은 교훈으로, 어떤 것은 교리로 취할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 해석해 버립니다. 진리의 말씀은 누구든 먹을 수 있는 자에게는 풍성한 식탁이지만 소화시킬 위장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갓난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히 5:12,13)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제가 이제 권면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여 실족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거짓 교사들과 거짓 목사들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은 정통 교단 울타리나 직분이 아니라 말씀을 바로 분별하는 성령의 인도함밖에 없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디모데후서 2:15).
첫댓글 놀라워요~맞습니다. 성경을 읽을때 환난성도와 휴거성도 개념원리만 이해하면 성경은 결코 어려운게 아닌것 같습니다.
칼빈도 경륜에 따른 이해를 못하여 요한계시록을 풀지 못했고 칼빈주의자들은 읽고보고깨달으면 복되다한 계시록성경을 아예 접근도 못하도록 해버렸죠~특별히 해석할려고 접근하니 문제됐지 경륜적으로 풀어주니 문자대로 될것이 믿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야고보서 처음부터 쓴글을 읽어봐야 겠어요~~
오묘한 성경말씀 깊히 배우고 묵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성경을 경륜적으로 모르면 구약과 환란성도의 구원을 신약에 적용해서 혼란에 빠지는데 주로 빠지는 오류는 "행위구원"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절대로 행위구원론자가 아니라 하면서 환란성도의 구원교리를 그리스도의 몸에다 적용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의 가장 비참한 점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헬라어를 많이 배우고 어려운 신학서적을 독파했어도 왜 영적 안목은 교인이나 같은 수준인지 아십니까? 신학교에서 성경을 시대와 세대를 나누어 공부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으면 진리의 극히 일부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글은 시리즈가 될지 토픽별로 나가게 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사오나 가능하면 종말론을 중심으로 주제별 글과 성경강해 시리즈를 병행하여 올린다던지 하는 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이런 류와 관련된 글을 저또한 하도 많이 읽어서 머리가 복잡하고 지긋지긋하답니다.
사람이라면 다들 그러겠지요. 지식을 추구하고 싶은 욕구.....해석하고 싶은 욕구.....
그 끊임없는 욕구때문에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해석하고
그런 지식 지혜를 사모하며 살펴보는 것이겠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전 개인적으로 세대주의에 대한 이런 결론을 지어봤네요.
답은 있는데 답은 없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의미의 뜻이지요?
어찌보면 그런것 같네요.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나 사도바울의 말씀이나 야고보서나 기타 성서에 수록된 그 모든 말씀들......
다 "종말"과
관련된 성서성구구절이지요. 다음달이면 아이손이라는 헬리혜성도 온다는데
엘리야도 어찌보면 야고보와 같은 혜성같은 존재이지요. 어느 누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데요.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든 땅의 상서로운 징조든 음변의 흉조가 있다라구요.
풀이하면 이런 말이겠지요.
소리의 음역인 공명의 소리(音)가 뒤틀리고 음이 바뀌면 나라가 망해간다라는 징조라네요.
전 개인적으로 야고보 모세 엘리야 요한보다 더 괴롭게 인생을 산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여겨지네요.
세상사람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산헤드린공회인들이나 아그립바왕이나 유대인들이나
다들 미쳤다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인물로 평가했지요.
사도 바울................
구약의 성경 인물이나 신약의 12제자들,그 어떤 사도들보다도 지식에 있어서는 으뜸이라면 으뜸이겠지요.
그러니 하늘의 계시를 받아 다수의 신약성서를 집필했겠지요.
고후12:1-6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10:23-24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수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유익하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신약성경 다수를 집필한 사도 바울도 오직 자랑할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라고 남겼는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유익이란 무엇인지.......덕이란 무엇인지.........각각 신중하게 검토하고 생각해 봐야겠지요.
어느 글에서 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더군요.
“지구 종말이 오든 7년대환란이 오든 휴거가 일어나든 어서 속히 우리 주님 오셔서
데려가시든지 죽이시든지 처분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내용을 보고 참으로 아멘이 되어지더군요.
마라나타~!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늘이 필요해님 매우 높은 수준의 행함이라는것이 바로 예수님께 받은 그사랑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율법지키기같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바로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고 우리가 죄없이 이땅에서 사는것이 아니고 죄없이 이땅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않는 영혼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기때문에 믿음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그 믿음 그 예수님을 놓지 않는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오해하실까봐 한자 더 적습니다 율법을 행한다 율법을 지킨다는것은 율법자체의 의미가 하나님이 다하셨다라는것을 알리느것이 율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율법은 사실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계명만 보더라도 하라가 8개 하지말라가 2개인데 하라 하지말라는 인간들이 너무나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율법에 담긴 창조와 구원을 두고 하나님이 다하셨다라는것을 깨닫는 순간 율법은 즐거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해야 할 의무를 예수님이 다해버리신 것이기때문입니다 이것을 간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백성이 나를 하나님을 아는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것을 원하노라 이런 구약의 말씀들과 신약의 율법을 강화하신 예수님의 말씀들을 잘 묵상해보셔요
바니7님의 글 아멘합니다. 첫째아담이 하지 못한거 두번째이자 마지막아담이 끝을 맺어버렸으니 얼마나 기쁜지요~우리가 모두 너무쉽게 얻은 구원으로 그아담과 한몸되서 같이가니 그얼마나 기쁘겠나요 하나님께서 그걸 이루시니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겠나요 오늘도 죄악많은 세상안이지만 그감격 그기쁨으로 살게됨이 은혜입니다. 구원하신 자녀삼으신 그사랑에 감사뿐입니다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은 바로 중간에있는 긍휼없는 자에게 긍휼없는 심판이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입니다 이것으로 야고보서의 행함을 이해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야고보서가 대환란 성도들만을 위해 쓰였다는 해석은 참 특이하네요 그럼 문자 그대로 흩어져있는 열두지파에만 해당된다는 말씀인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고 사도요한도 성경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도 히브리서에 기록하였고 계시록에도 나오죠 짐승의표와 우상말이죠 7교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도록합시다 그리고 방언을 포함한 모든 성령의 은사와 기적 그리고 환상체험은 현재의 성도들이 복음 전할 때도 세계 곳곳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환란 성도만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저는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궁금하시면 야고보서 시리즈의 처음부터 확인 바랍니다
네 야 5장이 대환란에 촛점이 맞춰졌다는 해석으로 정정합니다
아는 것이 병이여.....예수님보다 더 많이 알아서 병이 낫구만
오늘을 주님과 함께 즐겁게 사ㅔ요.
사랑안에서
이곳엔 두려워떠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안타깝네
안타까워
ㅉㅉ